유럽기행-43

역사가 주는 교훈들.

by 래리

이탈리아 여행 전부터 이 곳의 악평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고대 그리스, “중세 건물들 정말 예쁘고 날씨도 좋은데…소매치기하는 나쁜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 같아.”, “난 혼자 걷다 칼로 위협하는 흑인에게 100유로를 뜯긴 적도 있어.”, “난 어떤 양아치들이 관광객을 패고 물건을 훔쳐가는 걸 봤어.” 등 위의 말들은 전부 내가 지금껏 묵었던 두 곳의 한인민박에서 나왔다.


타지에서 인종적으로 정서적으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인들이 저런 식의 아쉬움 혹은 짜증을 토로했기에 사실 여행 전부터 바짝 긴장하기도 했다. 오늘은 그 악평의 끝판왕 ‘떼르미니 역’을 거쳐 콜로세움에 갔다.


떼르미니 역은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었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 및 주머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백팩 가장 깊숙한 곳에 넣고 긴장을 놓치 않은 채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열차 안에서 괜히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분들도 있었다.


DSC03256.JPG 사진은 지하철 역 출구 앞이 아닌 팔라티노 언덕에 가는 길에 찍었다. 출구 앞에서는 콜로세움이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다행히 아무 탈없이 콜로세움 역에 도착해 출구로 나섰는데, 바로 압도당했다. 지상에 다다라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엄청난 크기의 콜로세움. 이렇게 역 바로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 크기에 지하에서부터 품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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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바로 옆에 개선문, 로만 포럼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이 있다. 이 모든 게 세트로 모여 있다니. 짧게는 적어도 반나절 코스는 되리라 생각했다. ‘암스테르담’하면 ‘대마’, ‘성매매’가 가장 먼저 떠오르듯 ‘로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콜로세움’이 아닐까.


대충 콜로세움이 어떤 곳인지는 아실 게다. 그럼에도 디테일한 정보를 얻기 위해 언제나처럼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콜로세움 내부 판넬에 설명들도 꽤 많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콜로세움 내에서도 지금의 야구, 축구 경기장처럼 음식과 술을 팔았는데 하루당 주류 소비량이 제한돼 있었다. 이유는 만취객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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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동안 콜로세움은 대중의 인기를 얻다 말년엔 검투사 경기나 동물 사냥이 아닌, 단순한 서커스 위주의 볼거리를 제공했지만, 정치적으로 콜로세움이 가지는 의미는 지금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콜로세움은 대중의 도덕 관념을 붕괴시키며, 대중의 이목을 끌어 정치인들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게 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단순히 사람끼리 죽이는 모습을 보고 열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들은 그들 하나하나가 인간의 목숨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검투사는 관중들에게 목숨을 구걸했고 그들의 판단에 따라 생사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당시의 검투사 계급은 신분적으로 다양했다. 즉 누군가는 애초에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패배한 검투사의 생사가 대중의 말 한마디에 결정된다는 건 당시의 관념으로 봐도 몹쓸 짓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덕관념이 망가졌던 건 당연한 결과였을 게다.


당시 정치인들은 이를 교활하게 이용했다. 그렇다면 콜로세움이 기능을 다한 지 천년도 더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방식은 다르더라도 대중의 이목을 다른 곳에 돌린 채 암암리에 정치권력을 휘두르려는 국가의 모습을 21세기,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혹자들은 연예인 관련 빅이슈가 터질 때마다 구린내가 난다고들 한다. 인류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과거에 비해 눈부신 진보를 이뤄왔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체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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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물 자체로 돌아와, 개인적으로 콜로세움 외관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부은 마지막 층의 부서진 부분들. 내부에서 부서진 부분을 바라볼 때면 이 오랜 건축물의 웅장함과 세월의 흔적이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 이 거대한 경기장 한가운데서, 수많은 관중들 속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한 검투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목숨을 건 전투가 떨리기도 했겠지만 분명 이를 즐기는 무리도 있었을 게다. 몇 검투사들은 지금의 유명 연예인, 아이돌의 지위를 가졌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마음은 어땠을까. 당시에도 ‘사생팬’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계급적 벽이 그만큼의 애정이 생기는 일은 막아 버렸을까.


궁금증은 궁금증으로 남기고 콜로세움에서 나왔다. 프랑스가 따라한 개선문을 한 바퀴 돌아 간 곳은 로만 포럼과 팔리티노 언덕. 고대 로마 도시의 건물들의 일부와 터가 있다. 어떤 것들은 당시 상점, 고대 아파트 등의 부서지기 전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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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올라가니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다음 목적지가 있기에 시간 관계상 마을 전체를 둘러보지는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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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는 바로 로마 공동 묘지. 영국의 천재시인 존 키츠와 이태리의 학자이자 정치인, 그람시가 잠들어 있다. 지금까지 다녀왔던 유럽의 그 어떤 공동묘지보다 정돈된 느낌이었다.


묘지 입구 바로 왼편에 기념품 샵이 있다. 그 곳에 엽서도 팔길래 2장을 샀다. 표지판에도 그람시의 무덤으로 향하는 방향이 적혀 있기는 한데, 찾기가 힘들다. 묘지를 가꾸시는 분께 여쭤보니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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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묘지를 가면 묘지 주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뒤르켐, 보들레르, 사르트르, 보바리 모두 묘비 앞에 꽃이나 동전 등 그들을 추모하는 것들이 다양한 형태로 상당히 많이 놓여있었다. 그람시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묘지 옆에 누군가가 놔두고 간 꽃들이며, 책 그리고 엽서들까지 있었다.


내가 그람시의 묘지를 찾은 이유는 아직도 그의 문제 의식과 메시지가 유효하기 때문이다. 특히 100년이 다 되어가는 1920년 토리노 공장 파업의 과정이 현재 대한민국의 정규직 비정규직 갈등과 비슷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북부의 공업지대와 남부의 농촌으로 산업이 양분돼 있었다. 잘 사는 쪽은 북부 지방이었고 남부 농민은 단순히 못사는 게 아니라 북부 산업에 착취당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그람시는 북부 토리노에서 ‘공장 평의회’ 운동을 했다. 노동자들의 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운동으로, 그는 북부의 노동자와 남부의 농민이 힘을 합치길 원했다. 하지만 북부의 노동자들은 정부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농민은 소외돼 버렸다. 이 한 세기 전의 사건과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비교해 보자. 씁쓸하게도 닮은 점이 많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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