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의 변화
케밥 집의 유무는 로마와 지금껏 다녔던 유럽 도시들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였다. 유럽 여행을 하며 가볍게 끼니를 때우기에 딱 좋은, 아니 때론 엄청난 양에 든든하기 까지 한 케밥을 로마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반면 피자집은 눈에 차이도록 많아 역시 피자의 나라 이태리구나.라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나폴리가 친숙했던 건 가리발디 역 앞에 길게 깔린 케밥 집의 행렬 때문이었다. 포시타노로 떠나는 오늘, 케밥 집에서 늦은 아침과 가벼운 점심 포장을 동시에 해결했다. 가장 보편적인, 피데에 야채와 고기가 돌돌 말린 케밥이 4유로. 역시 유럽 여행에는 케밥이다.
포시타노에 도착해 먹을 케밥까지 손에 들고 소렌토로 가는 기차를 탔다. 포시타노에 가려면 소렌토 역에서 시타버스를 타야 한다.
지금까지의 여행은 부족한 머리를 채우는 데 주력했었다. 그랬기에 박물관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많았으며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애썼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과 박물관의 사료들을 연관시키려 노력했었다.
오늘은 다르다. 지금 향하는 포시타노는 아름다운 경치의 해수욕장을 가진 곳으로 그저 ‘눈 호강’을 위해 일정에 집어넣었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 괜스레 지난 날의 여행들에 부담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반복되는 여행 스타일에 변화를 줄 타이밍이다.
구불거리는 산등성이를 달리는 시타버스 안에서 푸른 바다가 펼쳐진 모습을 봤다. 도로가 너무나도 비틀어져 있기에 지긋이 바다를 감상할 수는 없었다. 이태리는 유럽 내 유일한 반도 국가다. 같은 반도 국민 출신으로 이 곳에 묘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지금 달리는 도로가 동해로 넘어가는 길과 비슷하다. 뱅글뱅글 돌아 산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너무나 많은 커브 탓에 갑자기 앞에서 차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을 떨칠 수 없는 그 길 말이다.
도착한 포시타노는 산기슭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고 눈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어 산과 바다의 멋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아름답다. 이 한 마디로는 그 산과 바다의 멋을 모두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저 단어였다.
남부 이태리의 강렬한 햇살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살짝 쌀쌀한 편. 바닷물에 풍덩 빠져들었지만 장시간 해수욕을 즐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자갈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햇빛을 만끽했다. 네덜란드에서 정말 귀한 이 따사로운 햇빛을.
해수욕을 마치고 포시타노 센트럼을 돌아보는데 거의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처럼 보인다. 남부 이태리는 레몬으로 유명하기에 노란 빛의 가게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리먼 첼로를 팔고 있었고, 포시타노를 상징하면서도 관광지에서나 입을 법한 옷들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그렇다면 이 곳 주민들을 위한 가게들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문득 이태리의 북/남 간 빈부격차가 심각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포시타노는 관광객이라는 고정적 수입원이 있기에 그나마 다른 남부지방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일지도 모른다.
바닷물에 얼마나 들어가 있었다고 금새 배가 고프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왔으니 당연히 해산물 요리를 먹기로 했다. 사실 봉골레 파스타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다. 자취를 하면서도 꽤 파스타를 많이 해먹고, 또 사먹기도 했는데 봉골레는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 인생 첫 봉골레를 이태리에서 먹다니. 처음부터 입맛만 높아지지 않을까 걱정 했는데, 불안한 직감은 적중할 것 같다.
무심하게 올려진 모시조개들과 파스타 면을 감싼 오일 빛은 시각적으로 평범한 느낌의 주었지만 그 맛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한정적인 재료로 낼 수 있는 최대의 맛이었다. 특히나 입안을 휘젓는 조개향이 인상적이었다. 동시에 한 번 시도해봤던 올리브 오일 파스타가 떠올랐다. 오일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 한 입 먹을 때마다 입에 기름칠을 했던 추억으로 남은. 그에 비하면 이 봉골레 파스타는 정말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돈 주고 사 먹었던 파스타 중에 처음으로 제 값을 한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새우도 기가 막혔다. 사실 새우를 엄청 좋아하는데, 이렇게 부드러운 새우살은 처음 먹어본다. 한 접시에 총 8마리의 새우가 있었는데, 질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양이라고 생각했다. 새우는 맛있지만 금새 질리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 포시타노의 밤 또한 낮 만큼이나 아름답다. 역시나 습하지 않은 날씨 탓에 햇빛만 사라지만 금새 쌀쌀해진다.
다음 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음식점과 시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는 길. 정류장과 포시타노 센트럴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차로 이동하면 얼마 안 걸리겠지만,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엔 상당히 부담스러운 거리다. 게다가 구글맵이 차로가 아닌 아주 좁은 계단길로 인도할 때가 있는데,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기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다. 다음 번에 이탈리아 남부 여행을 온다면, 소렌토에 숙소를 구해 이동하리라.
점심으로 먹은 해산물 리조또와 농어 구이. 저 농어 구이는 인생 최고의 생선구이였다. 처음 입에 넣는 순간 느껴지는 불맛과 부드러운 식감. 원래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점과 식사 전 힘든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배제하더라도 이 음식은 고기(닭, 돼지, 소 등) 요리와 비교를 불허한다. 한국은 물론 당장 네덜란드로 가져가고 싶었다.
문득 네덜란드, 그 중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틸버그에 이탈리아 만큼 합리적인 가격에 맛있는 음식점이 없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일단 그 덕에 요리를 전부 집에서 해 먹기 때문에 생활비를 줄여 여행에 보탤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점이다. 아마 근처에 이런 음식점이 있었다면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외식을 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네덜란드에 돌아가면 먹지 못한다는 사실. 인건비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암스테르담 Seafood 음식점을 찾아 본 결과 가격이 살벌하다. 허허.
확실한 건 이번 여행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원래는 중세 시대의 건물과 분위기, 고대 로마 등 역사와 건축물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지금은 이탈리아 해산물 요리다. 학문에서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건 완고한 기존의 이론을 뒤집을 만한, 기존의 이론이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를 풀 새로운 무언가가 출현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태리 해산물 요리는 그만큼 충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