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47

산시로를 다녀오며

by 래리

2007년 즈음부터 AC밀란을 좋아하게 된 이래로 밀라노는 꿈의 도시였다. 10년, ‘언제쯤 AC밀란 경기를 실제로 볼 수 있을까.’ 라는 문장으로부터 헛된 망상을 펼쳐왔던 세월은 강산도 바뀔 수 있는 아득한 시간이었다. 실제로 현재 AC밀란의 위상을 생각해보니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하긴 했다.



그래도 고무적인 건 언제나 망상의 시작이었던, 밀라노의 땅을 밟는 순간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많은 여행객들은 두오모를 제외하면 볼 게 하나도 없어 실망 가득하다던 밀라노지만 터무니없던 상상이 현실에서 시작됐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 유럽축구연맹


벅찬 가슴을 안고 AC밀란의 경기장 산시로로 향했지만, 사실 지금껏 꿈꿔왔던 노고에 비해서는 덜 설레었다. 이유는 팀이 너무 못해서. 발롱도르 이후 카카의 부상과 부진, 그리고 그를 팔고 시작된 ‘레오나르두 체제.’가 분기점이었다. 보리엘로-훈텔라르라는 공격진은 당시 내가 볼 밀란의 공격수들 중 가장 최악의 조합이라고 생각했었기에 그 땐 몰랐다. 당시를 그리워하게 될 줄은. 사실 레오나르두 체제가 아른거리는 이유는 ‘소년 가장’ 파투의 활약과 기량 떨어진 호나우딩요의 발재간 때문이지만.


ⓒ 연합뉴스


최악의 시절인줄 알았던 '레오나르두 체제' 때도 챔피언스리그는 항상 진출했다. 즉 리그 4위안에는 당연한 듯 위치했다는 말이다. 2010년, 최고의 폼은 아니었지만 즐라탄, 호빙요, 카사노 등을 영입해 조직됐던 ‘알레그리 체제’가 리그 우승을 한 번 거머쥐긴 했으나, 그 이후의 행보는 처절하다.


무엇보다 산시로에 가는 와중에도 설렘이 덜한 이유는 좋아했던 스타플레이어들이 더 이상 밀라노에서 뛰지 않기 때문. ‘카카-피를로-인자기’ 순서대로 AC밀란을 떠났다.(인자기는 유스팀 감독을 맡다 성인팀 감독으로 올라온 뒤 잘렸지만)


현재 밀란의 스쿼드를 살펴보자. 카를로스 바카가 잘한다고는 하지만 영입한 지 1년도 안됐고 곧 타팀으로 이적할 것 같다. 제2의 피를로로 기대받던 몬톨리보는 잘했지만,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특히나 국대에서의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제노아에서 2천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영입한 미드필더 베르톨라치는 2유로급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수비는 나아지고 있다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나마 17살의 나이임에도 디에고 로페즈를 밀어낸 뒤 골키퍼 주전 자리를 꿰 찬 돈나룸마가 있지만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



이런 총체적 난국에서 아직도 이 팀을 좋아하는 마음을 어찌하랴. 발은 이미 산시로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경기 전에 산시로 박물관을 관람할 겸 일찍 산시로에 도착했건만 매치데이에는 박물관이 점심 12까지만 개장한다.


갈 곳을 잃고 헤매다 산시로 전체를 한 바퀴 돌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스타디움과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꽤 먼 곳의 음식점으로.산시로 주변은 주거 단지라 정말 음식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어렵사리 구글맵을 찾아 식당에 도착했을 땐 이미 기진맥진에 허기진 상태라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을 준비가 돼 있었다.


꼴뚜기인지 오징어인지 모를 저 연체동물 구이는 정말 부드러운 식감을 가졌다.


이 곳은 노인들이 주 고객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네 맛집 느낌이 물씬 났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이태리 요리에 대한 엄청난 콩깍지가 씌었기에 또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가 기대됐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은 ‘1인 당 피자 한 판' 씩 하셨는데 우리는 모듬 Seafood 구이와 피자 한 판을 시켰다.


음식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정도. 화장실을 갔는데 왠 중년의 이태리인이 AC밀란 져지를 입고 있다. 오늘은 AS로마와의 리그 마지막 경기 날, 이 곳은 산시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음식점. 그리고 AC밀란 져지. 이 3가지 사실을 연결시켜 이 사람은 분명 현지 AC밀란 팬일 것이라 추측했다.


추측은 검증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영어로 AC밀란 팬이냐고 물었다. 영어를 못하는 이태리인도 많지만 그는 곧잘 대답해주었다. 자신은 밀란 팬이라고. 그러면서 나에게 되물었다. 오늘 경기를 보러 가냐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이건 내 첫 번째 밀란 경기 직관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산시로에서 네가 상상한 그 이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드디어 산시로 입성. 로마와의 경기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저 멀리 유난히 붉은 옷을 많이 입고 다양한 깃발을 흔들고 있는 무리가 보인다. 밀란의 서포터들이다. 수년간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서포터들의 열기는 아직 꺼지지 않았나보다. 특히나 아비아티가 호명될 때의 함성과 박수는 밀란에 대한 내집단 의식을 한층 강화시켰다.



경기 시작. 초반부터 로마의 압박이 좋다. 특히나 플로렌지-살라의 오른쪽 라인 위주의 공격이 활발하다. 반면 밀란은 거의 뻥축. 공격 전개가 전혀 안된다. 끊임없이 밀란의 왼쪽을 파고 든 로마는 결국 전반 18분 살라가 첫 득점에 성공했다. 밀란의 수비진들은 구멍 그 자체였다. 심지어 자신의 진영에서 수비수들이 볼을 돌리는 모습이 가장 불안해 보일 정도로. 원정 팀의 일방적 공세와 관중들의 야유 속에 전반이 끝났다.



후반 시작. 설렁설렁 뛰던 발로텔리가 빠지고 루이스 아드리아누가 투입됐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루이스 아드리아누의 모습을 보니 전반보다는 공격에 활력이 생긴 것 같았지만 로마의 조직력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 밀란의 두 번째 교체카드 사용. 후반 11분 베르톨라치 대신 보나벤투라가 들어왔다. 전 제노아 선수는 엄청난 야유를 맞으며 벤치로 돌아갔다.


엄격하게 말하면 매너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산시로 서포터들은 원정 팀의 사기를 꺾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2월에 첼시 경기를 보러 갔을 때 첼시의 서포터들은 디에고 코스타가 반칙을 하면 그의 이름을 경기장 전체에 울려 펴지도록 소리질렀다. 신사적이지는 못하지만, 내가 만약 원정 선수였다면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밀라노의 팬들은 첼시의 팬들과 달랐다. 어쩌면 너무 오랜 부진 탓에 응집력이 약해졌나.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사실 조금 아쉽기도 했다. 첼시에서의 격한 응원을 ‘홈팀 응원의 묘미이자 특권’ 정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응원에서 한 가지 더 아쉬웠던 점은 소수의 로마 팬들에게 패기에서 밀렸다는 것이다. 여기는 산시로. 홈팀은 AC밀란이다. 밀란 서포터들도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긴 하지만 선수들 만큼이나 단합이 잘 안되는 모습이다. 반면 로마의 서포터들은 소수지만 경기장 전체를 흔들 정도로 힘찬 응원을 한다. 응원은 선수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양팀의 응원만 봐도, 오늘은 원정팀보다 오히려 홈팀의 선수들이 더 위축됐을 것이라 생각했다.


ⓒ 게티이미지 코리아


경기보다 관중석에 집중하고 있을 찰나, 로마의 두 번째 골이 터졌다. 득점자는 엘샤라위. 전 밀란 선수로서 밀란은 부메랑을 맞은 셈이다. 12-13 시즌 발로텔리가 밀란에 오기 전까지 리그 전반기 동안만 10골 이상을 넣었던 ‘소년 가장’이었지만, 그 뒤의 행보는 안타까웠던 선수다. 모나코 이적 직전 팬들도 엘샤라위를 ‘팔아야한다 vs 말아야한다’로 의견이 갈렸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파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모나코를 거쳐 과거의 홈 구장에서 지금은 원정 팀의 유니폼을 입고 득점한 엘샤라위는 전 관중에게 박수를 받았다. 그도 매너있게 ‘Calm down’ 하라는 제스쳐로 밀란 팬들에게 화답했다. 항상 인터뷰를 잘하고 어리지만 프로 의식도 느껴지는 선수였다. 밀란에서 만개하지 못한 재능을 로마에서라도 꽃피웠으면 한다.



관점을 홈팀인 밀란으로 돌려 보자면, 처참하다. 혼다에게 좋은 찬스가 왔지만 패스 타이밍을 놓쳐 위협적인 공격으로 연결되지 않았고, 교체투입 된 보나벤투라는 축구를 혼자 하려고 한다.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건 돈나룸마. 비록 두 골을 내줬지만, 멋진 선방으로 고군분투하는 이 어린 골키퍼가 밀란의 현재와 미래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고 있었다.


ⓒ 게티이미지 코리아, 왜 토티 사진을 안찍었을까..


그러다 후반 16분 확실한 승기를 잡은 로마가 교체카드를 꺼내 들었다. 스트로트만 아웃 그리고 토티 인. 엘샤라위의 골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산시로의 전 관중들이 힘찬 박수로 토티를 맞이했다. 경기장에 들어온 토티. 그의 존재는 너무나도 눈에 띄었고, 어쩌면 토티의 육중함이 선수로서 그의 무게감을 대변한다고도 생각했다. 토티의 슛팅은 여전히 묵직했고 원터치 패스도 녹슬지 않았다. 그의 센스있는 원터치 패스를 두 눈으로 직접 봤을 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3개 이상의 바레시 깃발이 펄럭대고 있었지만 그 장면을 찍지 못했다.


일방적인 로마의 공세 속에 후반 36분 교체투입된 로마의 에메르송에게 한 골을 더 내줬다. 스코어 도합 0-3. 음식점에서 만난 밀란팬이 말한 '상상 그 이상'의 상황은 아무래도 지금을 의미한 듯하다. 인생 첫 산시로 직관에서 밀란이 0-3으로 두들겨 맞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10년 만에 직관하러 온 동양팬의 기분을 달래려 후반 41분 바카가 만회골을 넣었다. 산시로에서 밀란의 골을 본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현지 서포터들은 바레시의 망령이 스며든 깃발 만을 처량하게 흔들어댔다.


이렇게 경기가 끝났다. 현 밀란은 선수 개인 기량을 떠나 조직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반면 로마의 패스웍은 너무나 유기적이어서, 경기력은 거의 리그 상위권 팀과 강등권 팀의 대결 수준으로 엄청난 차이가 났다. 밀란의 홈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경기가 끝나고 바로 산시로를 떠나기는 아쉬워 경기장을 둘러보는데 아비아티의 은퇴식을 한다. 디다가 떠난 후 주전 골키퍼로 밀란의 골문을 단단히 지킨 ‘압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선수가 은퇴하다니. 밀란 팬으로서 아비아티에겐 그동안 정말 고마웠기에 손바닥이 화끈거릴 때까지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은퇴 순간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10년 만에 입성한 밀라노. 그 기대를 한결같이 유지한 건 아니지만, 새로운 희망이 떠올랐다. ‘드디어’ 베를루스코니가 밀란 지분의 50%이상을 매각할 것 같다는 소식. 몇 년 전부터 말만 오가고 이뤄지지 않았던 밀란의 지분 매각이 오늘 내가 산시로 땅을 밟은 것처럼 현실로 이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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