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날씨를 대하는 자세
두 번째 암스테르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밤 9시.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일기예보상으로 오늘 비가 온다고 했었고, 어제부터 하루 종일 흐릿한 하늘은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암시했었다.라고 관조적으로 말하기엔 좀 심하다. 하늘은 무척이나 화난 듯 빗줄기를 지상에 내리꽂는다.
센트럴 역이 눈앞인데 잠시 비를 피해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굵은 빗방울이 무겁게 떨어지는 듯 보였으나, 이내 빗방울은 서로 뒤섞여 물줄기를 이루었고 끝내는 폭포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바람은 또 얼마나 거세던지, 물줄기들은 채찍이 되어 무섭게 춤을 춘다.
당연히 소나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4개월의 네덜란드 생활을 통해 생긴 통찰력에는 확신이 있었다. 언제나 하늘이 이렇게 미친듯이 온 힘을 다해 비를 쏟아낼 때, 지구력은 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짧은 소나기일지라도 이 사나운 하늘은 최소 30분 동안은 분노를 표출할 기세다. 오늘은 고함까지 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나보다.
기차 출발 시각은 15분 밖에 안 남았다. 양자택일의 순간이 아니었다. 선택권은 없다. 다이소에서 사온 5000원짜리 3단 초록 우산을 펼쳤다. 가격에 비해 색이 상당히 예쁜 우산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두 손으로 우산을 단단히 잡았다. 이제 빗속으로 입장.
임시 피난처인 버스 정류장을 벗어난 지 다섯 걸음도 되지 않았는데 우산이 뒤집혔다. 한 쪽 다리는 바로 부러졌고, 빗줄기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우산도 함께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녀석의 실제 생산비에서도 8할은 아름다운 색이 차지했나 보다.
미친듯이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측면에서 신나게 빗줄기로 채찍질을 당했다. 사실 비에 젖는 다기보다는 그냥 물 속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 즉 우산의 존재는 무의미였지만, 오히려 두 손에 힘을 더 꽉 주어 우산을 단단히 잡았다. 이걸 놓아버리면 눈 앞의 센트럴 역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우산을 계속 들고 있다는 사실은 빗속을 헤쳐나갈 의지를 대변했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바지와 물에 잠겨 질퍽거리는 신발과 함께 드디어 역 안으로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딱히 성취감은 없었다. 힘겨운 전투는 끝났지만, 너무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생기는 물자취는 마치 내가 흘리는 피와 같았다.
차갑게 무거워진 바지는 다리의 열기를 빼앗아갔고 물에 찬 신발은 그 자체로 불쾌함을 선사했다. 그나마 우산을 끝까지 놓지 않은 덕에 상체는 심각하게 상처 입지 않았다. 뾰로통했던 하늘의 심기를 건드려 폭발시킨 자는 누구인가. 그에게 내가 느끼는 이 모든 짜증을 바친다.
기차 시간표를 보니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은 짜증을 부릴 때가 아니다. 일단 무조건 기차 안에 들어가야 한다. 기차에 있는 화장실에서 어떻게든 이 젖은 옷들을 처리하고 싶었다.
짧았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사투를 벌여서 그런지 배가 출출하다. 유럽에서 허기를 달래는 가장 쉽고도 만족스러운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케밥을 사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모든 소스와 모든 야채를 넣은 케밥을 하나 구입해 역 플랫폼으로 향했다.
다행히 브레다행 기차가 바로 왔고 얼른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 축축한 바지를 입고 좌석에 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가지고 있는 여분의 옷은 어젯밤 잘 때 입었던 레깅스와 팬티 한 장 그리고 양말 한 켤레 뿐이다. 신던 양말은 역에 들어오자마자 벗어버렸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새 양말을 신을 마음은 단 한점도 없다.
선택지의 폭이 적다. 바지를 벗고 레깅스를 입었는데 팬티도 다 젖어있었다. 새 팬티로 갈아입고 다시 레깅스를 입었다. 다행히 상의가 중요한 급소 부위는 가려 준다. 레깅스는 반바지처럼 입는 게 보는 이들에게 덜 부담스러울 것 같기에 무릎까지 올렸다. 일단 임시방편으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보니 머리도 비에 젖어 헝클어져 있다. 새 옷에 맞게 머리도 깔끔하게 묶고 자리로 향했다. 좌석에 앉으니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 여유롭게 케밥이나 먹으며 집에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오늘 따라 할라피뇨가 너무 맵다.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원래 매운 음식을 잘 못 먹기에 평소 같았으면 전부 빼 버렸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음 할라피뇨를 씹는 순간 혓바닥에서 온몸으로 뜨거운 열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비에 젖어 차가워진 몸이 따뜻해졌다.
무사히 기차에 탑승하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하늘은 끊임없이 내 마음을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다. 케밥의 야채를 씹는 소리보다 기차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훨씬 크다. 아직까지 하늘의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틸버그 역 자전거 주차장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떠났었기에 만약 틸버그도 이렇게 비가 온다면 강제 샤워를 각오하고 집에 가야한다.
핸드폰 메모에 기록을 남기는 중, 아직도 울려 퍼지는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에 초조하다. 다행히 틸버그에 가까워질수록 빗줄기가 약해지는 듯 하나, 끝까지 안심할 순 없다. 네덜란드의 날씨란 건 언제나 믿을 게 못 된다.
다행히 집에는 비를 안 맞고 무사히 도착했다. 핸드폰 메모의 글을 옮겨 적는 지금은 당시보다 1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분명, 3일 전까지 봄 외투를 입고 다녀도 쌀쌀했는데 지금 필자는 상의를 전부 탈의한 채 타자를 두드리고 있다. 물을 떠다 놓아야 할 정도로 건조했던 방이 가만히 있어도 몸을 끈적끈적하게 만드는 정글로 변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집에 날파리도 많아졌다.
지금까지 뜬금없이 추워진 적은 많았으나,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더워진 적은 처음이다. 허나 이제는 그 어떤 급격한 날씨 변화에도 관조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게 네덜란드 날씨를 대하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