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아침 9시 20분 버스를타고 뉘른베르크로 향했다.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 주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와 전범 재판이 이뤄진 곳이라는 사실만 안 채로.
예상도착 시각 30분 전인데 버스가 꽤 오래 정차해 있다. 그러더니 플릭스 버스 직원이 올라와 승객들의 티켓을 확인한다. 플릭스 버스를 이용해오며 중간에 티켓을 확인한 적은 처음이다.
귀찮다는 듯 직원의 눈도 쳐다보지 않은 채 핸드폰 액정의 바코드를 들이밀었는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여기가 뉘른베르크니 내리란다. 이럴 수가. 제 시간에 도착하거나, 늦으면 1시간 이상도 늦는 이 플릭스버스가 예상 시각보다 30분이나 먼저 도착하다니.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로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빼는데 느닷없이 안경이 흘러내렸다. 튼튼한 안경으로 살걸. 테가 약한데 네덜란드에서 자는 중 한 번 눌려 안경이 살짝 휘었다. 고개를 숙이면 미끄러 내려올 정도로 헐렁한 상태였다.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 지더니 바닥에 가벼운 금속의 소리가 났다. 안경을 집어 다시 써보니 세상이 울렁거린다. 큰일이다. 안경이 너무 휘었다. 호스텔에 짐을 놓자마자 안경점을 가야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더운 걸까 오늘. 분명 하이델베르크에서는 긴 팔을 입어야 할 날씨였는데.
호스텔에 도착하니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두 명 정도 보인다. 독일 여행 중 호스텔에서 보는 첫 한국인이다. 반갑기도 해서 말을 걸었는데 역시나 한국인이었다. 아쉽게도 그들은 오늘 떠난다.
구글맵을 보며 성벽을 따라 안경점을 찾아가는데 오른 편에서 “Hi~”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사적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Hi~”를 대답한 뒤 고개를 돌리니 홍등가 여성분이었다. 낮 12시. 태양보다 뜨거운 미소로 그녀들은 웃고 있었다.
뉘른베르크 성벽 안쪽 길로 수십 미터를 걸어가는데 붉은 방의 행렬은 계속 됐다. 그렇다. 이 곳은 성매매 합법화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 국가, 독일이다. 그래도 뉘른베르크 중앙역과 관광지 바로 옆에 대낮부터 영업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국에도 역 근처에 홍등가가 많다고 들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안경점은 무사히 도착했다. 휘어진 안경 테를 바로 잡을 수 있냐고 물으니, 상태가 안 좋단다. 힘을 주다가 부러질 수도 있다고 한다. 부러져도 어쩔 수 없다. 일단 지금 당장도 쓸 수 없는 상태다.
그녀는 보스에게 안경을 보여주러 올라 갔다. 그러더니 하하호호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올라간 지 1분도 되지 않아 안경을 들고 내려왔다. 안경 다리는 편하게 쓸 수 있는 정도로 바로 잡혔다. 다행이다. “당큐슌”을 외치고 안경점을 나왔다.
안경점 앞 도로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그런데 땅 속에 몸을 반쯤 가린 채 작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는 여성이었다. 한국에서 공사 현장을 많이 가 본 건 아니지만, 도로 공사를 포함한 그 어떤 작업에서도 여성 노동자는 본 적이 없었다. 긍정적이었다. 이런 광경을 당연히 여겨야 한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호스텔 근처에 있는 게르마니아 국립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을 이렇게 빨리 보고 나온 적이있던가. 크기가 상당함에도 뭔가 끌리는 작품들이 없었다. 시대별 상황도 자세히 설명돼 있었음에도 말이다. 솔직히 요상한 허영심이 작동했다. 이탈리아의 중세미술, 네덜란드의 풍경화 그리고 프랑스 인상주의 그림들을 보다보니 독일의 미술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아마 몸이 피곤해 박물관을 나오기로 결정하고 머릿속에서 저런 식으로 합리화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니까.
독일 소시지들을 사서 호스텔로 돌아갔는데 이런. 주방에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아시아인 10명 이상이 보인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전부 한국인. 순간 이 곳이 한인 민박인가 싶었다. 한인 민박에서도 한 번에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고 떠드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독일여행 중 처음 만난 한국인이기에 반가웠다. 그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다수가 나처럼 이곳에 한국인이 너무 많아 당황했다더라.
여행을 하다 보면 20대 초반보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연령대의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난다. 제주도에서 5주 간 게스트하우스 스탭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20대 초반보다 20대 후반의 사람들이 더 여행을 많이 다니는 듯 보였다.
그리고 유럽 여행과 제주도 여행 사이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을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난다는 점이다. ‘일에 너무 치여서.’, ‘휴식 시간을 갖고 싶어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해서.’ 등 자리를 함께 한 형은 아무리 돈을 벌어도 쓸 시간이 없어서 직장을 그만두셨단다. 오직 한 누나 만이 휴가를 내고 왔는데 직업이 대학교 교직원이다. 대학교 캠퍼스 내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 말이다. 고단한 직장인들의 삶이 그들의 여행 목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왜 직장을 그만둬야만 여행을 할 수 있는가.
아직 취업하지는 않았지만, 제주도와 유럽에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한민국에서 직장과 일상 생활, 여가를 병행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느껴왔다.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조차 ‘파이팅’이라는 착취적 언어를 뱉을 수가 없었다. 즐거우면서도 씁쓸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