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립소 Jan 31. 2023

마흔셋, 학업일지

인프제의 팀과제 버티기

연말이 지나니 발표과제가 물밀듯 밀려왔다. 학기 초 (지난해 10월), 주요 과제들이  던져졌을 당시에는 그저 멀게만 느껴져 발표 일정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는데 그날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나마 연말 방학이 있었으니 준비시간은 충분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분주한 축제와 다름없는 연말 분위기에 쉽사리 집중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할 놈은 하지만, 나는 할 놈이 되지 못하는 별 수없는 나약한 인간 아닌가. 


기한이 다가오는 만큼 부담감 또한 차곡차곡 쌓였다. 열흘 동안 개인발표 2개, 그룹 발표 1개. 무려 3개가 잡혀있다. 혼자 하는 건 홀로 망해도 어쩔 수 없지만, 팀 작업은 내가 못하면 팀원 모두가 망하는 거라 더욱 압박이 컸다. 몇 번의 팀원 회의에서도 어색함이 앞서 주도적인 의견을 내놓지도 못했고, 방학 직전에는 일주일에 2~3일씩 만나 함께 자료를 찾자는 에너지 넘치는 팀원을 따라가는 것도 벅찼다. 모국어로 읽는 그들의 속도와 이방인인 나의 읽는 속도는 현저히 다른데, 만날 때마다 열 권이상의 책자를 찾아와 책상 위로 얹고는 각자 읽어보고 괜찮은 지문을 찾으면 복사하여 서로 공유하자는 팀원들의 의욕에 오히려 나는 남아있던 기운마저 쭈욱 빨려버렸다. 그들의 열정이 솟구칠수록 나는 더욱더 쭈그러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발표해야 하는 15분 분량의 스크립트를 열심히 썼고 3일 동안 다른데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 암기했다. 입으로 크게 읽고 여러 번 반복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지만, 며칠을 집중하니 그런대로 외워졌다. 여하튼 그렇게 지난 목요일 팀 발표를 마쳤다.


"이야, 우리 해냈어! 끝났으니까 당분간 좀 쉬자. "


 첫 팀작업이 잘 마무리됐다며 팀원끼리는 얼싸안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난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내게 팀 작업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작업이 아니었으니까. 사실상 혼신의 힘을 다한 순간은 그들과 보낸 시간보다 내 머릿속에 대본을 집어넣은 벼락치기 기간이었다. 사흘 동안 자다가도 튀어나올 정도로 열심히 대본을 외었다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나만의 착각이었고. 멈칫하며 머뭇거린 부분이 빈번히 있었다. 의식 없이 내뱉던 익숙한 나만의 언어가 아닌 문법에 맞게 수차례 수정한 스크립트를 암기해 어색하게 내뱉는 문장들이라 더욱 그랬다. 


처음 프랑스어를 배우던 시절에는 되도록 빨리 단어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다. 먼저 머릿속에서 한 문장을 구성해 보고 말하는 건 번거롭고 더듬거리는 일. 틀려도 괜찮으니 일단 뭐든 뱉어보자며 떠들며 익혔다. 시간이 지나 막말하기(?)가 익숙해지고 내뱉는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들은 문법적으로 엉망인 경우가 태반이다. 고치려 해도 이미 습관이 돼버려 나아지지 않아 언제나 고민이다. 이 오랜 문제를 짧은 준비 기간 동안 외어 연기로 시도해 봤지만 결국 어색함만 얻었다.

어색한 연기를 부추긴 또 다른 요인은 눈앞에 마주한 청중들의 표정이었다. 사뭇 진지한 얼굴들에 부담감을 감당하지 못한 머릿속에서 15분 동안 여러 번 암전 상태를 만났다. 열세 명의 학급 동료들과 선생의 시선일 뿐인데 새삼 그들이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들을 가졌나 싶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며 살기 시작하면서 상대방의 표정에 예민해졌다. 신나게 떠들다가도 상대의 미간이 조금이라도 눈썹 사이로 오므라들면 ‘네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같아 금세 주눅 들어 버렸고 대화의 의욕이 싹 사라져 버린다. 같은 이유로 영상 통화도 싫어한다. 내겐  차라리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전화 통화가 낫다. 내게 발표는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그저 나는 미간 공포증을 안고 있을 뿐. 마주한 미간이 많아 조금 벅찼던 거다.


이 모든 건 내가 외국인이라 갖고 있는 취약점이고 모국어로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할 때 또 다른 약점 포인트가 분명 있을 거다.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해 모르는 것뿐. 현지인인 학급 친구들 모두 각자의 결함을 안고 준비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의 노력을 존중하고 응원해 주는 최고의 방법은 경청해 주고 미소를 지어주는 거다. 발표하는 동안 암전을 만나면 재빨리 시선을 돌려 친구 M을 바라보며 기운을 얻었다. 그녀는 내가 떠드는 내내 미소 지으며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이 큰 힘이 된다는 걸 이렇게 배운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는 ‘결혼생활’과 무슨 원수를 졌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