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테 섬 생트 샤펠에서
“끔찍한 화염 속에서도 가시면류관만큼은 지켜냈습니다!”
2019년 4월, 프랑스를 뒤흔들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당시 흥분한 목소리로 뉴스를 알린 앵커의 목소리가 여전히 선하다. 검은 재와 땀 범벅에 뒤섞인 소방관들의 모습도 드라마틱 하긴 했지만 나는 무엇보다 가시면류관을 노트르담에서 보관하고 있단 사실을 그제야 알아 더 놀랐던 것 같다. 인류의 연대기까지 좌우한 예수 고난을 대표하는 성물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 낯선데 뜬금없이 프랑스 파리에 있다니 너무 이상했다. 아무렴 역사적인 성자들도 존재하는 국가고 순례길의 일부 코스도 있다지만 파리는 기독교 발원지도, 예수가 죽은 곳도 아니지 않는가. 골고다 언덕에서 4000km 이상 떨어진 파리에서 어떤 연유로 가시면류관을 보관하고 있는 걸까? 이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약탈품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모든 의문은 생트 샤펠을 방문하며 풀리게 된다.
생경한 가시면류관의 파리행 이야기는 13세기 루이 9세(Louis IX, 훗날 Saint Louis)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틴제국 황제 보두앙 2세(Baudouin II de Courtenay)는 여러 전투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국보로 보존하고 있던 비잔틴 유물마저 베니스 상인에게 담보로 넘기면서까지 위태로운 제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빚을 갚아야 할 시점은 점점 다가왔지만 당시 보두앵 2세에게 어떠한 금전적 해결 방안이 없었다. 4개월 동안 어떤 빚도 환급하지 못해 곧 가시 면류관, 고난의 십자가 조각 등을 포함한 성유물이 베니스 상인의 소유가 될 상황이었다. 보두앙은 고심 끝에 그의 사촌 루이 9세를 떠올리게 된다. 신앙이 남달랐던 그라면 이 성물들을 그냥 두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보두앙은 서둘러 파리로 향했고 마침내 사촌 형 루이와 그의 어머니 (블랑슈 드 카스티유Blanche de Castille)에게 요청한다.
"성스러운 예수의 가시면류관만큼은 베니스 상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제발 도와주십시오."
루이 9세는 보두앙의 애원을 흘려듣지 않았다. 그의 신앙심은 개인적인 믿음을 넘어 말년에 성인품까지 받을 정도였고, 파리를 예루살렘에 견줄 종교적 성지로 만들 거라는 야망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런 루이에게 보두앙의 부탁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위대한 예수의 주요 성물을 지니고 있다면 그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보두앙과 만남 이후 루이 9세는 즉시 특사를 소집하여 베네치아로 보냈다. 그들이 단 하루만 늦게 도착했었다면 면류관은 베니스 상인들의 소유로 공인되려던 찰나였다. 도미니코회 성직자로 구성된 특사들은 유물들의 진위 여부를 감별하였고 프랑스 왕실과 베네치아 상인 간의 성물 인수를 위한 가격 협상이 시작되었다. 2년여 시간 동안 치열한 협상 끝에 면류관을 포함한 주요 성물들의 가격은 135 000 리브르로 책정되었다. 이는 왕실 연간 수익의 절반에 이르는 엄청난 비용이었다. 그렇게 소유주가 바뀐 1239년 8월, 예수 고난의 유물들은 프랑스로 향한다. 며칠 후 그의 영토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루이 9세는 어머니, 형제, 지인들과 함께 샹파뉴 주의 작은 도시(빌뇌브 락슈베끄, Villeneuve-l'Archevêque)까지 버선발로 달려가 성물을 맞이하였다. 빈말이 아니라 거룩한 성유물을 맞이하기 위해 그곳까지 순례길 떠나듯 왕의 지위마저 내려놓은 채 맨발로 향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이다.
파리에 도착한 유물들은 시테 왕궁의 왕실 예배당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후 여러 번에 걸쳐 루이는 비잔틴 제국이 보유한 다른 예수 고난의 성물들을 사들였고, 선대에 획득한 기독교 유물과 함께 그의 컬렉션을 더욱 존엄한 공간에 보관하고자 했다. 이렇게 기존에 사용하던 왕실 예배당 자리를 허물고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건립이 시작되었다. 성스러운 예배당이라는 이름처럼 왕가 제실의 목적도 있었지만 루이 9세는 그의 믿음을 실체적으로 표현할 만한 화려한 성궤를 만들고자 했다. 실제 생트 샤펠을 만든 건축가들도 ‘유리로 된 보석함’을 주제로 고안했다.
6년의 시간 동안 축성된 예배당의 건축적 화려함은 말할 것도 없고 보석과 다름없는 당대 최고의 수공품인 스테인드글라스를 1113장을 제작, 15개의 거대한 창에 이어 붙여 그 당시에 볼 수 없는 화려한 성궤를 만들어냈다. 15미터에 달하는 장엄한 창 하나하나에는 성경의 주요 내용들이 담겨있다. 좌측 창부터 연대순으로 구약성서로 시작하여 예배당 정면에 이르러서는 예수 수난의 장면들을 묘사했고, 우측 창 구역은 신약성서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15번째 창은 가시면류관이 파리까지 오게 된 과정을 소개한다. 루이 9세가 거대한 보석함을 통해 과시하고 싶었던 진심을 이 열다섯 번째 스테인드글라스에 담은 것이다.
과거 생트 샤펠 중앙 연단에는 3미터에 달하는 화려한 금고 형태의 성궤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순은으로 주물 된 이 오픈형 금고는 가시면류관이 포함된 루이 9세의 성물 컬렉션을 보관하고 전시할 보석함 안의 또 다른 보석함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혁명 시절 시민 군에 의해 녹혀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지금은 기록으로만 남았다.
연단 맞은편에는 장미꽃 모양의 원형 장식이라 하여 로사스(Rosace)라 불리는 교회의 원화창은 유물의 위치보다 높이 구성하여 꽃잎마다 요한계시록의 장면을 묘사했다. 세상에 대한 예언은 마치 모놀로그 배우에게 비추어지는 핀 라이트처럼 오직 연단의 유물을 서광에 비치도록 계산한 것이다. 과거의 고난을 신이 그린 미래에 기대한다는 의미였을까?
한 프랑스 왕의 신앙심, 어쩌면 그 이상의 과시욕으로 지어진 생트 샤펠에 간직해 온 예수 고난의 성물들은 5백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다 대혁명의 기간에 상당수 분실되었고, 가시면류관만큼은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잠시 피신할 수 있었다. 이후 성유물은 종교단체에서 보관해야 한다는 1804년 파리 대주교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가시면류관은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이관되었지만 지금은 노트르담 화재로 인해 또다시 루브르에 피신 중이다. 예수 고난의 서사만큼 현대에서도 기구한 인간사를 어루어 보듯 살아남아있다.
반기독교 운동과 시민사회를 마주한 동안 종교적 믿음은 일부 신자들에게만 남았고, 생트 샤펠은 성물함의 기능도 잃었다. 십자가나 미사를 위한 연단도 마련되지 않아 성당의 역할조차 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루이 9세, 즉 생 루이의 확고한 열정과 믿음이 그대로 담긴 생트 샤펠은 쉽게 만날 수 없는 고유한 스타일을 지키며 여전히 꼿꼿한 첨탑을 세우고 있다. 그의 신실한 믿음을 고스란히 내뿜고 변함없이 성경의 빛들을 투영하며 방문객들을 비춰준다. 그 안에 서있자니 종교적 믿음이 없는 나조차 괜스레 옷깃을 여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