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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못하는 개발자의 민망한 순간들
미국 생존기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by
안녕하세연
May 7. 2020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그냥저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왜 미국에 갈 생각을 했어요?"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그에 대한 답도 비슷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사람들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
교생 선생님이 왔을 때 첫사랑을 물어본다던가,
연인을 소개하는 자리에선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외부 강사의 강연 레퍼토리에는 늘 시작에 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시작점에 대한 호기심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처음을 알게 되면 그다음은 상상이 가능해서 일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출발점은 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참 중요한 요소다.
아주 흔한 문장으로, 내 근황을 시작한다면 이렇게 풀어나갈 것이다.
"미국에 온 지 어느덧 10년이나 됐네요."
시작을 돌이켜 보는 것은 초심을 잃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참 중요한데,
위의 질문에 대답해보니 나는 그 뿌리가 영 시원찮았던 것 같다.
시원찮은 게 맞다.
사실 완벽한 시작이란 건 집행검처럼 희귀하니 나의 얄팍한 시작에 대한 손가락질은 부끄럽지 않다.
재시작도 시작이니 다시 시작해 보겠다.
"어쩌다 보니 10년이 지났네요"
영어는 인생에 늘 부담이었다. 입시 시절 전부터 단어야 외우겠지만 문법은 공부도 싫었다.
그 옛날 내 수험생 시절, 수능에 문법은 두 문제에 불과했다.
두 문제 정도는 쿨하게 그냥 찍자는 생각이었으니 영어 문장 구조 5 형식은 이해도 못했다.
이후엔 공대생이었으니 언어적 능력은 영 딸리고, 토익은 이력서에 안 넣는 게 나을뻔한 점수에 불과했다.
이런 영어도 못하는 게 본고장 미국에 가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은 건 용기뿐이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고, 가야겠다는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영어 점수를 갈구했고, 준비를 차근히 시작했다. 새삼 많은 유학 지망생 중 하나였으니 요란 떨 필요도 없었다.
확실히 토 나오게 어려웠다.
토익이 그냥 커피라면 토플과 GRE는 루왁커피 급이었다.
난이도도 극상이고, 성장도 더디어서 유학 첫 준비인 영어에서 좌절할 뻔했다.
그렇게 못 갈 것 같았는데, 됐다.
모은 돈을 들여 학원이라는 현질을 통해 점수를 맞추고, 시간을 아낌없이 들여서 필요한 부분들을 준비했다.
게임에서도 현질이 요긴하지만, 현실에서의 현질은 더 비싸고, 더 막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능력으로 혼자 자습했다면 백 프로 포기했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고 나서도 물론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부족한 영어로 손해를 봤고, 모든 게 새로운 삶은 버겁기 그지없었다.
지하철로 서울 곳곳을 누비며 모든 걸 해낼 것 같았던 자신감은
오지 않는 엘에이의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바닥을 쳤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모래주머니처럼 온몸에 지고,
하루하루 스스로의 부족함을 질타하며 버티고 버텼다.
빈약한 시작이었지만 나름의 노력, 그리고 한국인 DNA에 새겨진 적응이라는 능력은
베어 그릴스급 생존왕의 면모를 보이며 겨우겨우 졸업에 성공,
그리고 공대 효과로 취업도 하며 가정을 이루는 이벤트 빼곤 나머지 경험치들은 착실히 쌓을 수 있었다.
지금도 열심히 레벨업을 수행 중이다.
10년 동안 이사만 7번을 하며 이주민의 삶을 체험 중인 나는,
그럴듯하거나 인생 역전의 드라마틱한 시작점은 없었다.
수많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처럼
나도 그런 일상들 속에 나라는 캐릭터를 키워 왔다.
능력치를 잘못 찍었다고, 시작이 잘못됐다고 뭐라고 해도 캐릭터 삭제를 할 순 없지 않은가.
힘겹게 키워온 시간이 추억이고 자산인데.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나름 즐거움들이 있었으니
힘들고 괴로웠다고 버리기엔 아까움이 많은, 그런 시간들이었다.
시작은 한 점이 아니고, 쌓아온 인생과 만남 속에
계속 이어지는 선이 아닌가 싶다.
어디에서 보면 시작이고, 어디에서 보면 끝인 것처럼.
미국에서의 시작은 한국 쪽에선 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연결되었기에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었다.
인생의 연속성을 되뇌며, 다시금 아까 시작에 대해 말한 것을 되짚어 본다.
어쩌다 보니,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게 된 시작도 나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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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석사하러 왔다가 어라 벌써 13년차, 미국 생존 분투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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