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접시] 간편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미숫가루

탐미식레터

by 금모래

얼마 전 홍대 냉장고를 정리했다. 집에서 요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가끔씩 사먹는 배달마저도 귀찮아서 그만둔지 조금 된 시점이었다. 안먹으면 이렇게 편한 걸. 텅 빈 개수대와 몇 주가 지나도 채워질 생각이 없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차일피일 나를 먹이는 데 게을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냉장고는 자연스럽게 음식을 보관만 하는 장소가 되었다. 정체모를 냉장고 냄새가 나서 열기도 싫어지니 다시금 요리는 하지 않고 끼니를 거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맛에 흥미를 잃고 나니 인생도 조금 많이 재미없어졌던 그 시간.


집을 비워야하는 시간이 왔을 때야 나는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이사 초기 전곡에서 홍대까지. 평생 처음으로 이렇게 먼거리를 나가 사는 딸의 냉장고를 채워준 엄마의 반찬들. 아, 이게 있었지. 액체에 가까워질 때까지 방치한 음식은 어쩐지 비위보다 눈시울을 상하게했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하나하나 버리다가. 냉동실에 있는줄도 몰랐던 미숫가루를 발견했다. 직접 만든 미숫가루라 부르면 조금 그럴까? 하나하나 직접 고른 곡식을 양손 가득히 가져갔다가 가벼운 봉지로 돌아오면서 엄마는 몇 키로 콩을 사갔는데 겨우 이거밖에 나오지 않더라고 말하며 어쩐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선 아침에 씻는 소리 사이로 스뎅 용기에 우유에 탄 미숫가루 푸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단 걸 좋아하는 동생은 거기에 꿀을 넣어 먹고, 더운 여름 날에는 얼음을 넣어서 믹서기에 간 별미로 다같이 마시고 했던 미숫가루.


밥 먹기 싫으면 미숫가루라도 타 먹어. 건강이 최고야. 바스락거리면서 차가운 봉지에 어쩐지 엄마 목소리가 생생하다. 봉지를 꺼내서 물에 타는 순간, 그 간편하고도 짧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버려야만 했던 그 시간. 달디단 오곡라떼를 먹으면서 떠올리게 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3접시] 가지런하게, 가지 파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