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강초 학생자치, 이렇게 해보았습니다 (2) - 공약 협의회와 토론회
2019년 2학기 처음으로 학생임원선거 토론회를 해보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우려가 어마어마했다. 포스터야 내가 혼자서 시간 내서 만들면 되는 일이었지만, 토론회는 우선 각 학년의 자치 시간을 빼야 하고 학년의 협조가 필요했다. 학년초에 먼저 고지하지 않았던 만큼 갑자기 임원선거 토론회를 하자고 했을 때 주위에서
"그걸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하니?"
"학년에선 싫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대단위 행사를 갑자기 추진했을 땐 욕먹을 수도 있다. 망하면 어떻게 할래?"
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나는 토론회를 꼭 해보고 싶었다. 학년에서는 시간을 1시간(40분) 이상 빼줄 수 없다고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2시간(80분) 동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이들 나이 특성상 무리라고 생각이 들었고 반드시 40분 안에 마무리 짓는다는 마음으로 계획을 짰다. 처음엔 회장, 부회장 후보 모두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주어진 시간이 40분인 이상 회장 선거 후보자들만 토론회를 진행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든 사람의 우려를
"망해도 해봐야 망할 수 있잖아요!"라고 주장하며 계획서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강당에서 모여서 진행하는 토론회를 추친해보였다. 관중만 300명! 후보자들이 과연 얼마나 나올지도 궁금했다. 회장 선거에 나오면 소견발표만 준비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5학년 후보자들도 매우 당황해했다. 토론회를 할 거면 안 나오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그래도 결론적으론 예상외로 7명의 후보가 나오기로 했다. 애들은 그런 생각을 안 했겠지만, 나는 같은 배에 탄 기분이었다.
토론회를 준비하게 되면서 추가로 하게 된 것이 있었다.
바로 공약 협의회였다. (이름 한번 거창하다.)
처음엔 공약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선거에 나갈 거면 후보등록서를 제출하게 했는데, 거기엔 당연히 공약을 적는 칸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공약들이 자주 얼토당토 안 한 것들이 나오곤 했다.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학교 운동장을 동물농장으로 만들겠습니다.
운동장을 잔디구장으로 만들겠습니다.
방과 후를 활성화시키겠습니다.
남은 교실에 놀이시설을 만들겠습니다.
체육 시간을 늘리겠습니다.
당연히 실천 가능하지 않았지만, 뭘 모르는 어린이들은 저 공약에 혹하곤 했다. 소견발표 때도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 동물원을 만들겠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동물을 좋아하니까요!"라는 묘하게 설득력 있는 (?) 소견발표를 들으며 아이들은 동물원!! 하면서 그 아이를 뽑고, 그 아이는 공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공약을 받아 들고 각 학년에서 자치 담당하는 선생님들을 모셨다. 어떤 기준으로 공약을 실행하면 좋을지 조언을 해주자고 이야기를 나눴다. 학생자치회 예산, 실천 가능성, 학생들의 삶에 꼭 필요한지에 대해서 지도를 해주자고 이야기를 하고 후보자들을 불러서 1:1로 같이 공약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주었다. 근데 다짜고짜 "너의 공약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라고 할 수 없으니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주었다.
"남은 교실에 놀이 시설을 만들겠다는 게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남은 교실에요~ 게임기랑 두는 거예요."
"근데 학교에 남은 교실이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 그럼 학생회실을 이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다음엔 게임이랑 구입은 어떻게 할 거지? 학생회 1년 예산은 **밖에 안되는데"
"그거밖에 안돼요? 어.. 그럼 보드게임 정도 구입하면 어때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그럼 보드게임의 종류는 어떻게 할 거야? 관리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공약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공약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실현 가능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공약을 고쳐나갔다. 그러고 나서 전보다는 정선되고 실천 가능성이 생긴 공약을 담아서 아이들의 사진을 직접 찍어 선거 포스터를 만들어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게 바로 메니페스토 (구체적 예산 및 추진 계획을 가진 선거 공약)였다. 자치회로서 공약 실천이 어려워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선거에선 무척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 과정을 공약 협의회라 이름 붙였다.
토론회를 들어가기 앞서서 유권자들에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공약과 소견발표가 공개되고 나서 유권자들에게 질문지를 돌렸다. 그 후보자에게 공약과 관련되어하고 싶은 질문이 무엇인지, 그냥 그 후보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는지 등등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고 많이 나온 질문들을 후보자 별로 3개씩 골랐다. 질문지로 받은 종이가 너무 많아서 받은 질문지 중 선정된 것들을 골라서 선거관리위원회 친구들과 커다란 전지에 그 질문들을 붙였다. 전지 3장에 가득 붙은 질문지를 학교 로비에 공개함으로써 많은 친구들이 토론회에 대한 궁금함이 커져만 갔다.
토론회 전날 후보자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질문 3개를 공개했다. 다들 공약과 관련된 질문이었고, 그거 말고도 랜덤 질문이라고 하여 학생자치회와 관련된 질문이 나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랜덤 질문은 학생들이 던진 질문 중에 공약과 상관없지만,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는데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 회장으로 출마한 이유가 무엇인지
- 회장이 되어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 학생들이 복도에서 많이 뛰는데, 어떻게 하면 그걸 줄일 수 있는지
- 학교폭력 예방 캠페인을 할 때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 다른 후보의 공약 중 마음에 드는 공약이 무엇인지
등등을 뽑기로 만들어서 통 안에 넣어놨다.
강당에 3개의 학년이 앉을 수 있게 구역을 나누고 혹시 질문이 잘 들리지 않는 경우를 대비해서 빔프로젝트를 설치하여 후보자들에게 할 질문을 적었다. 다들 40분이 절대 넘으면 안 된다고 하셔서, 질문을 후보자별로 3개씩 준비했지만, 시간 상 2개만 할 수 있다고 하였고 후보자들에게 답변 시간은 1분만 주었다. 상호 질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줬다가는 시간이 오버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부분은 막았다. (사실 이 부분이 제일 아쉬운 부분이라 다음에 개선했다.) 후보자들은 나름 답변을 잘 준비해왔고, 몹시 긴장하여서 땀이 흐르는 게 눈에 보였지만 랜덤 질문까지 훌륭하게 해결했다. 그런데 시간이 10분 남았다! 사회자는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눈빛을 보냈고 나는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의 질문을 즉석에서 받겠습니다."
유권자의 참여가 없어서인지 조금은 지루하게 시간이 지났는데, 질문을 받기 시작하자 학생들이 매우 열정적으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기호 1번 000에게 질문 주세요!"
라고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었고, 선생님들은 부지런히 무선 마이크를 돌렸다. 정말 제대로 된 질문도 있고 저학년에서는 "축구대회 트로피는 얼마입니까?", "얼마짜리 상품을 줄 것입니까?" 이런 질문도 나왔다. 친구들이 하는 질문을 들으면서 깔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흥겨운 토론회가 되었다. 어찌나 질문이 많던지 시간이 조금 넘고 말았지만, 나가는 아이들의 표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후련해 보였다. 후보자들도 잘 마무리한 것 같다며 땀을 닦으며 뿌듯해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나서 각 학급으로 후기를 묻는 설문지를 보냈다. 만족도가 생각보다 굉장히 높았다. 좋았다는 의견이 80% 이상이었고, 토론회로 인해서 후보자를 바꿨다는 의견도 20% 정도 되었다. 토론회가 후보자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순 없었겠지만 아이들이 선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던 거 같다.
더 이상 반장 선거도 없는 학교에서 아이들은 학교의 운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시간이 바로 이 선거 토론회 시간이었다. 학생자치가 바로 이렇게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거였구나. 그렇다면 다음엔 무엇을 해볼까? 말도 안 되지만 왠지 학교 업무가 점점 재미있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