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라는 시장에서 내가 팔리는 금액
190만 원 남짓. 이게 사회에 막 나온 나의 몸값이었다. 개발자 초봉치고는 매우 낮은 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차피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고, 중소기업에 이제 막 만들어진 개발팀에서 날 굴리면 얼마나 굴릴 것인가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 예상을 비웃듯이 당장 내 앞에 들어온 일들은 가히 이제 막 개발자가 된 신입이 하기에는 벅차기만 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시니어는 없고, 주요 실무진이라고는 나를 포함한 신입 3명. 그리고 팀을 이끄는 것은 고작 개발 경력이 1~2년 밖에 없는 타 부서 상급자들. 맡은 일에 비해 너무 조촐한 인원들이었다. 처음 생긴 내 자리도 팀 형색만큼이나 조촐했다. 어떻게든 연구보조금을 받겠다고 만들어진 작은 연구실에서 상무님과 함께 신입 3명이 구겨져 들어가 있는 꼴이 마치 닭장에 갇혀 자유를 잃은 닭들 같았다. 그곳에서 8시간의 긴 근무시간 동안 데이터를 뜯어보며 눈을 혹사시키고도 남들이 집에 간 후 3시간을 족히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입사 당시 3개월 동안 내가 한 일이었다. 회사의 전통 같은 것이라고 했다. 부서에 신입이 들어오면 수습기간 동안은 반드시 근무 후 3시간 동안 야근을 하며 추가적인 공부를 시키는 것이 말이다. 신입사원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한 교육 커리큘럼이라 잘 포장했지만 단순히 생각해도 악습일 뿐이었다. 요즘 시대에 강제 야근이라니. 시대에 뒤처져도 한참은 뒤쳐진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별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런 걸로 목소리를 높일 만큼 나는 강단 있는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개발자가 될 생각은 추후에도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개발을 배웠고, 대학 전공도 개발이었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나와 참 안 맞는 자리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교수님이 추천해 들어온 면접장에서도 대놓고 개발은 하기 싫다고 말했다. 솔직하다 못해 그냥 떨어지러 왔다 광고한 셈이었다. 실제로 거절하지 못해 들어온 면접이라 후다닥 떨어지고 원하는 회사에 지원할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돌아간 적 없는 내 인생은 이번에도 예상한 적 없는 결과를 물어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교수님의 강한 추천과 당장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 맞물려 덜컥 합격한 것이었다. 도망치면 그만인 것을 그 당시의 나는 유독 낙관적이라 이마저도 경험이라 여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한 달만 더 버텨보자. 그러고도 안 맞으면 부서 이동 해줄게"
입사 후 딱 1개월이 되던 어느 날, 나는 결국 부서 이동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리더의 덕목 중 하나에는 회유 스킬이 있나보다. 단단히 결심하고 어렵게 꺼낸 이야기도 '다음에'라는 단어만으로 날 다시금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히 적힌 컴퓨터 앞에 앉게 했다. 그렇게 나는 삐걱거리며 개발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산처럼 쌓인 데이터 분석을 첫 과제로 받은 시점부터 예감한 거지만 우리 부서가 맡은 업무는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다. SI개발 중에서도 어렵다고 하는 시스템 통합과 DB 마이그레이션. 어려운 말은 솔직히 나도 잘 모르지만 건너 건너 들었던 소문만큼 해야 할 업무도 난이도도 도저히 신입이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처음부터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더 쉬었을 것이다. 7개월을 온전히 기존 DB와 시스템을 분석하는데 할애하고, 페이지 하나 재구축하는데 2개월을 사용했다. 그러고 나서 남은 시간 동안을 얼마나 대책 없이 이 프로젝트를 구성했으며, 얼마나 나를 쥐어 짜내어 이 프로젝트를 마칠지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다. 이게 고작 그 회사의 머문 1년 반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성장도 커리어도 아닌 '병'만을 얻었다.
정말 ‘병을 얻었다’라는 문장 그대로 나는 이 회사에 입사해 난생처음으로 방광 질환을 얻었다. 나는 사람의 방광이 부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 회사에 다니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원래도 건강한 인간은 아니다보니 이유 모를 배앓이를 했을 때는 이것이 말로만 듣던 방광염이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병원을 가지 않은 것은 이 질환에 대해 무지했을 뿐더러 이곳저곳 많이 아파 본 경험을 통해 이 통증이 바쁜 하루를 내어 병원을 갈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병이든 방치해서 좋을 건 없다는 것을 나는 이때 알았다. 이상할 정도로 요의를 느끼고, 화장실 한 번을 다녀오면 식은땀이 날 정도로 배앓이를 하고 나서야 이거 제대로 뭐 됐음을 느낀 나는 점심시간에 급하게 병원을 찾았다.
"방광이 많이 부었네요. 원래 방광이 잘 붓는 장기가 아닌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요"
'아... 그럼 그렇지...'
담담한 표정으로 초음파를 보던 의사의 말에 머릿속으로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읊었다. 그다음말은 뻔했다.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충분히 쉬시고, 약 잘 챙겨 먹으세요."
안 받을 수 있다면 안 받고 싶다. 이딴 스트레스 말이다. 원인 제공은 다른 사람이 하고 아픈 건 나라니 많이 억울하지 않은가. 정말 그날은 가뜩이나 힘든 하루가 더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김없이 야근을 했고, 그날도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간신히 2시간이나 걸리는 귀갓길에 올랐다. 몸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던 이 맘때 내 몸값은 어느 덧 260만 원이 되어 있었다.
190에서 260.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나 그 가치가 올라 나름 사회에서 쓸만한 상품이 되었지만 그들은 260만 원의 가치를 한 참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260만 원은 줘야 내가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책정된 최소한의 위로금일지도 모른다. 1인 가구가 먹고 살기에는 아쉽지 않은 거금이 매달 통장에 들어왔지만 그에 곱절이 되는 스트레스로 인해 온갖 쓸데없는 소비로 모이는 것 없이 어딘가로 사라질 뿐이었다.
이거 단단히 고장 났구나 싶었던 건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주말의 일이었다. 급박해진 마감 일정으로 평일에는 거래처에 상주해 일을 하고, 주말에는 집에서 기절해 잠드는 일과를 몇 달째 반복하던 때였다. '금융치료'라는 단어가 그 효력을 잃어버리고 회복되지 않는 피로에 그 날도 하루 반나절을 내리 자다가 어렵사리 일어나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가 조금씩 저물어가던 초저녁쯤. 그날따라 유독 서늘하고 퍼렇던 내 방에서 나는 밀려오는 피로감에 이제 그만 죽어볼까 싶어졌다. 마치 산책을 나가는 것처럼, 텅빈 위장에 밥을 한술 뜨려는 것처럼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온하게 문뜩 그러해 볼까 싶어졌다. 너무도 졸렸고, 몸은 무거웠고, 머리는 멍했다. 먹은 게 없는 위는 허했고, 그럼에도 가슴은 체한 듯 먹먹했다.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19층의 난간 너머에는 시야에 걸리는 나무 한그루도 건물 한 채도 없이 그거 뻥 뚫린 파란 하늘만이 가득했다. 유영하듯 이 한 몸 내던지기에 너무도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죽으려면 멍하니 앉아있는 이 침대를 벗어나 난간 위로 서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 몸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옴짝달싹하지 않는 몸에 그저 침대에 걸터앉아 새장 속 새가 파아란 하늘을 동경하듯 난간 너머의 넓은 세상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뭐 해? 나랑 같이 밥 먹을래?”
그렇게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길 30여 분 후. 그제야 내가 아주 단단히도 고장이 났구나, 이번에야 말로 진짜 죽겠구나 싶어 급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도망쳐 나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없던 약속을 억지로 만드는 행동을 했다. 그 길로 나는 미련도 없이 방 안을 뛰쳐나가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정말로 간만에 우울증의 무서움을 자각했다. 늘 우울이라는 바다에 잠겨 사는 나 조차도 갑자기 붙잡혀 가라앉을 땐 이도 저도 못하고 그저 죽어갈 뿐이니까. 우울증 증상을 알고 이겨내는 법? 당장 내 목을 향해 달려드는 칼날을 잡는 방법을 알아 오라는 것과 피차 다를 바가 없다. 그 정도로 깊어진 우울은 혼자 힘으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울은 무섭다. 그나마 그 당시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었다.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걸 자각할 정도의 정신이 남아 있었다는 점. 밤샘 야근에 휴일 근무로 야위어 갈 때 밥을 챙겨주고, 내 잠자리를 다듬어주는 가족들이 있었다는 점. 언제 돌아올지 모를 출장에 끌려가 하루 15시간 근무를 할 때도 돌아오는 주말마다 내 설움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었다는 점. 내가 이 지구에서 중력을 잃고 떠오를 때 내 옷깃을 붙잡고 땅에 발을 붙여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었다.
눈물도 나지 않고, 먹고 있는 음식의 맛도 잘 모르겠던 그 주말. 내가 죽을까 봐 찾아왔다고 말하자 별말 없이 바라보던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매달 손에 쥐어지던 거금이라 여긴 돈이 이리도 저렴한 품삯이었다는 걸 알게되었다. 쉬어갈 때인 것이다. 사회라는 시장에서 붙은 최고가는 260. 앞으로 이 시장에서 나에게 그 정도 값어치는 붙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당장 내일도 무사히 지구에 붙들려 친구와 2만 원 어치의 마라탕을 나눠 먹고 싶어졌다.
유독 꽃이 적었던 그 해 봄. 나는 첫 회사를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