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전하지 못한
간만에 영화를 보고 왔어. 큰 소리가 울리는 영화관은 예민한 내 귀에는 영 불편해서 잘 안가지만 오늘은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가게 됐어. 영화는 꽤나 재밌었어. 좋아하는 유튜버가 추천해서 보러갔는데 내 취향에 꼭 맞더라고. 간만에 문화인이 된 것 같아서 유익한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어.
늦은 시간대에 상영하는 걸 봤더니 나오니까 해가 다 저물었더라고. 깜깜하게 어둠이 내려 앉았는데 돌아다니는 차의 헤드라이트, 가로등, 건물에서 터져나오는 불빛 덕분에 돌아오는 길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어. 나 어두운거 무서워하잖아. 알고 있었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 몰랐을려나? 아무튼, 어두운 길을 걸을 일 없이 아파트 단지에 잘 들어왔는데 하얀 몽우리가 진 목련을 발견했어. 이맘때만 피는 하얀 그 꽃이 왠일로 반갑더라고. 나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폈을 때 보다 피우기 위에 오므라져 있는 그 때가 좋아. 아이러니하게도 오므라져 있을 때가 폈을 때 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느끼거든. 그 찰나의 시간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그 모습이 갸륵하다고 할까... 그냥 마음 어딘가가 울리는 느낌이야. 너무 감성적인 말이라 나같지 않아 보이네. 봄이라서 그런가봐.
가끔 SNS에 뜨는 네 일상을 보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이렇게 불편함 없이 너의 SNS를 볼 수 있는 우리의 관계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너랑 헤어지고 얼마 안됐을 땐 내가 참 미련도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했거든? 쿨한 인간이라고, 사랑에 목매다는 짓따위 하는 인간이 아니라고. 근데 아름아름 눈치채곤 있었지만 난 꽤나 미련 넘치는 사람인 것 같아. 일상에 자각하지 못한 습관처럼 널 찾드라고. (적다보니 깨달은 건데 집착도 고집도 쎈 인간인데 미련이 없을 거란 생각은 어떻게 한걸까? 가끔가다가 나도 날 잘 모르겠다니까)
이 감정이 정리해야 할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리되지 못한 마음은 응어리진 것 같아. 사랑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 보다 그리움에 가까운 감정이랄까? 그 시절의 우리보다는 날 위해 넘치듯 줬던 너의 사랑이 참 그리운 것 같아.
네 기억 속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가끔 생각해. 제 멋대로인 인간이다보니 썩 좋은 기억은 아니려나. 마지막까지 너의 호의를 내 편의를 위해 거절했으니까. 그때 널 받아줬다면 어땠을까도 생각해 봤는데 아마 그 끝도 지난 우리의 헤어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 그때도 잔잔하고 이기적인 이별일거고 나 혼자서 또 이렇게 궁상맞은 그리움을 그려내고 있을 것 같아. 이 감정과 시간이 싫은 건 아니지만 해결되지 않을 그리움이 커지면 이 보다 담담히 받아낼 자신이 없거든.
왜 이별한 사람의 말은 다 똑같은 걸까? 드라마에 나오는 미련 넘치는 주인공마냥 읇기는 싫은데 그 흔한 말이 절로 나오는게 참 웃겨.
네가 떠나고 나서 새삼 네가 나한테 참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 내가 한 없이 무너져가던 그 때도 날 건져올리던 널 떠올리면 이렇게까지 날 사랑해줄 사람이 두 명이나 내 삶에 찾아올까 싶어서 이제서야 깨달은 이 소중함이 참 밉더라고.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너랑 떨어질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무너진 것을 바로 세우는 시간 동안 네 빈자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본 적이 없어. '네가 지금 옆에 있다면 그 품에 날 안아줬을 텐데'하면서 한참도 늦은 후회도 하고 그랬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미련 덩어리라 꼴불견이네.
너도 내 SNS를 봤다면 알겠지만 지금은 꽤나 좋아졌어. 내 가장 아름다운 시절만큼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모양을 흉내내어 잘 웃고, 잘 지내며 나름 행복한 매일을 보내고 있어. 불편했던 옷도 벗고 원하던 곳에 들어가서 조금은 다른 형태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어. 이런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를거고 알고 싶지도 않을테지만 그냥 내가 말해주고 싶었어. 네 마지막 기억 속 나는 너무도 불안정한 상태였으니까 괜히 신경쓰여서.
있잖아, 넌 너무 예쁜 사람이야. 이 말을 하면 넌 그 말 그대로 나한테 돌려줬을 테지만 이번 만큼은 나보단 네가 품고 있어줬음 좋겠어. 나한테는 아까울 정도로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래서 더 기억 속 널 잊을 수가 없나봐. 헤어지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 네 향수와 같은 향이나면 괜히 돌아보게 되고, 지나가다 네 뒷모습과 닮은 사람을 보면 괜히 넌가 싶어서 살며시 고개를 빼고 보게되고. 그러고 네가 아니면 널 찾고 있던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오늘은 그냥 편지를 쓰고 싶었어. 너한테 못했던 말, 어쩌면 전할 일도 없는 말이지만 괜히 감상에 젖으니까 벅차올라서 어딘가 털어내고 싶었거든. 이 편지를 쓰고도 난 끊임없이 널 그리워할거고, 언제나처럼 궁상맞게 네 흔적을 쫒아다닐 것 같아. 편지 한 통에 모든 마음이 정리되는 시원스러운 결말이면 좋겠는데 말이지...
적다보니 문득 우리의 이별이 물에 녹아가는 설탕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특별한 사건도 다툼도 없이 그저 서로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천천히 녹아 사라져가는 것 같았으니까. 이젠 완전히 녹아 물에 희석돼서 그 소중하다던 시간들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조금 떨어져서 그 때를 바라보면 여전히 달큰한 맛이 올라오는 추억이니까. 내가 떠난 그 옆자리를 넌 어떻게 기억할까? 나만큼 달큰한 기억이었음 좋겠는데 그 때의 내가 참 못나고 볼품 없는 사람이었어서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네. 잘 지내는 것 같은 널 보고 있으면 정말 온전한 마음으로 다행이라 느껴. 지금 네 옆에 있는 사람도 너무도 다정한 널 닮아 네가 건낸 마음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사랑 받길 바라.
날이 많이 따뜻해졌어. 곧 꽃도 필거야. 다가올 봄을 매일 온몸으로 느끼지만 여전히 쌀쌀하니까 감기 조심하고. 오늘 밤에도 좋은 꿈 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