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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이용성 Jul 23. 2017

선입견

사람들은 어떤 결과물이 나오면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들과 비교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것이 선입견이라는 것인데 대게는 그런 선입견들이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겐 굉장한 마이너스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코드 하나 제대로 모르던 사람이 기타 치는 것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면 겉으로는 아닐지언정 속으로는 대부분 “그거 해서 뭐할 건데?”라는 식의 반응이다. 


그것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히자면 ‘상관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고,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이걸 좋게 받아들여주면 좋은 거고 싫으면 보고,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할 거다.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기로 몇 년 전부터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인에 시선에 가혹할 정도로 제약을 많이 받는다.

나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물론 사회적인 규범, 윤리, 도덕, 기본 법과 질서는 준수하되 그 이외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게 허용되는 자유가 있다면 나는 그 최대치를 누리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너무 많이 다르다 보니 가끔 사람들은 되지도 않는 오해들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본인들의 희망사항이거나 혹은 질투 혹은 타인 부정 아니면 자아분열 정도쯤 되는 것 같다.



최근에 누군가 나한테 물었다. 

네가 언제까지 사람들 신경 안 쓰고 살 수 있겠냐고. 이제 물리적인 나이도 있고, 사회적인 요구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언제까지 침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냐 이제 수면 위로, 뭍으로 나와야 할 시기가 곧 온다고. 그 녀석이 사뭇 진지하게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나의 고민에 작은 돌을 던졌다.


“얼마 버냐?” “만나는 사람은 있냐?” “결혼은 할 수 있겠냐?” “앞으로 뭐해먹고살래?”등 직접적으로 저속하게 혹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게끔 하지 않고, 아주 고급스럽게 간접적으로 적절히 비유를 섞어가며 비판 아닌 비판 혹은 비난 아닌 비난을 돌려 말한 것이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엷은 미소만 띠고 초점 없는 눈동자로 창문 너머를 응시하며 애꿎은 빈 커피잔만 홀짝이고 있었다.



물론 사는 것이 녹록지는 않다.

그러나 ‘모순투성이’라는 짧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세상엔 아름답고 신비로운 일들이 너무나 많고 소중한 만남도 많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너무 많이 다르다 보니 가끔 나에게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밥 먹고 숨 쉬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그것을 삶이라 말할 수는 없다.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선언 한다한들 그렇게 될 리 만무하고, 그냥 그저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건, 찬양해 마지않건 내 알바 아니다.

주위 사람의 선입견에 나의 본질이 흔들리고 싶진 않다. 그냥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녀석인 것이다. 
당장 오늘내일도 무엇이라 명확히 기약할 수는 없겠지만, 다만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지 하는 정도의 생각은 하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 날 언젠가, 장소는 대략 하와이의 한적한 해변가 정도면 적당할 것 같다.

두 무릎을 감싸 안은채 앉아서 지평선 너머로 지는 붉은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수없이 밀려들어왔다 떠내려가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그저 멍하니 말없이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을 지나 파란 달이 뜰 때까지 파도소리와 함께 있다가 작은 강아지와 함께 해변을 좀 더 거닐고 연인들, 신혼부부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의 한구석쯤 자리를 잡아 건반을 좀 쳐주고 받은 동전과 지폐들을 모아 그날의 끼니를 해결해고, 다시 해변가로 돌아와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다. 아마 그때는 지금보다 이마에, 눈가에 주름살이 조금 더 늘어있을 것이고 지금보다는 조금 더 지혜로울 테니  살아가는 게 조금은 더 수월 할 것이다.


생의 시간은 한정적이고 내가 가진재화라고는 비루한 몸뚱이가 전부이니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을 거다. 게다가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몸부림쳐봤자 내 몸 뉘일 공간 하나 정도 마련할 수 있을까? 설령 그렇다한들 그것이 마냥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고 삶의 궁극적인 목표도 아니다. 현대사회가 유교적인 신념이 지배하는 사회도 아니니 입신양명(立身揚名)할 필요도 없고, 냉전시대의 맑스니 케인즈 니 하는 낡은 사상 싸움을 할 필요도 없다. 


이런 솔직한 이야기를 한다면 정신 나갔다고들 할 것이다. 솔직한 것하고 노골적인 것의 경계는 사람의 기준마다 다른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각이지만 아무도 다루지 않는데, 차원이 다른 내적인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과 표현은 다르다. 내가 지금 당장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들 그걸 표현하진 않으니까.


지난 몇 년간, 혼자 멍하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이런 복잡한 세상일수록 ‘무관심’이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기 위해서 이다.

세간을 들썩이게 하는 뉴스도 결국은 한 개인의 내밀한 사건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사실, 오랫동안 이런 생활을 했고,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지낼 것 같지만 언젠가는 또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무언가 내가 혼자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세상 사람 누구나 각자의 고민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사유의 시간은 각자들 보내게 되니까.

하지만 혹자는 너만 잘난 거냐 잘난 체하는 것은 그만둬라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재수 없다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런 것도 아니고 상관없다.

다만 젊은 날의 삶의 여정이 순탄치 않았으며 배운 것이 많이 없고 능력이 일천하여 염세주의적이거나 혹은 회의적인 인간으로 변모했으리라. 그 정도 경계 즈음에 내가 위치하고 있지 않나 싶다. 하루에도 수많은 망상들과 보내는 ‘나’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세상에 획일화된 정답은 없다. 그저 자아에 깊이에 충실하여 만족하는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 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게 살아야 되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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