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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이용성 Jul 23. 2017

시계태엽 오렌지

이 영화는 죄악(罪惡)이다.

이 영화는 죄악(罪惡)이다.


개인적으로 무방비상태(일종의 자아형성이나 자기 철학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 영화를 함부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흔히 이야기하는 ‘멘탈붕괴’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71년 제작한 이 영화는 1962년 앤서니 버지스가 영국에서 출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과 영화 결말이 약간 다른 점은 있지만 두 작품이 ‘국가에 의한 폭력적 세뇌’와 ‘자유의지 없는 도덕’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같다.



주인공 알렉스는 '코로바'라는 밀크 바에서 마약을 섞은 우유를 마시고  길거리 부랑자와 다른 갱단과 싸우기도 하고 차를 몰고 폭주, 가택을 침입해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의 소위 양아치(혹은 그 이상). 심지어는 자신의 갱단 친구들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강요한다. 그러다 노파 혼자 있는 저택에 침입, 몸싸움을 벌이다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갱단 친구들은 알렉스를 배신, 도망치고 알렉스 혼자 경찰에 붙잡혀 살인죄로 14년 형을 선고받는다. 
 감옥에 들어간 알렉스는 철저한 통제 속에서 갱생 교육을 받는다. 알렉스는 주로 도서관에서 성경을 비롯한 책을 읽으면서 교화 과정을 받지만 교화되기는커녕 성경을 읽으면서도 폭력적인 상상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내무부 장관이 감옥을 방문해 루드비코라는 교화 방식을 죄수들에게 소개하자 알렉스는 감옥을 나가야겠다는 일념에 선뜻 실험대상자로 자원을 하게 된다. 루드비코 교화 방식은 조건반사를 극대화하는 교화 방식으로 강제로 폭력적인 영상을 보게 한 다음 구역질을 유발하는 약물을 투여해 폭력적인 상상을 하는 즉시 구토를 하도록 조건반사 학습을 시키는 것이다.
 루드비코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정부는 실험의 성공을 자축하면서 알렉스를 석방시킨다. 그러나, 석방된 알렉스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부모님은 그의 방에 양자를 들였고, 갈곳 없이 거리로 나온 알렉스는 예전에 폭행을 휘두른 사람들을 다시 만나서 보복을 당한다. 경찰이 나타나 알렉스를 구해주지만, 하필이면 그 경찰들은 예전에 자기 부하 노릇을 하던 친구들이었다. 알렉스에게 적개심을 느낀 친구(=똘마니)들은 알렉스를 한적한 시골에 끌어다가 놓고 신나게 물고문을 하며 구타한다. 결국 죽도록 얻어맞은 알렉스는 방황하던 중 어느 집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데 맙소사 그 집은 예전에 자신이 망쳐놓은 작가의 집이었다. 작가는 과거 알렉스의 폭행으로 인해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고, 작가의 아내는 충격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작가는 알렉스를 잘 대해 주지만, 알렉스가 목욕하면서 부르던 Singing in the Rain을 듣고 자신의 원수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알렉스가 9번 교향곡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알게 되어, 와인에 약을 타서 알렉스를 기절시킨 다음 2층 방에 가두고 아래층에서 9번 교향곡을 크게 틀어 놓는다. 결국 알렉스는 괴로워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시도를 하지만 죽지 않고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병원에서의 긴 회복을 거치는 동안 루도비코 요법에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알렉스는 역 루드비코 요법을 받게 된다. 요법이 풀린 알렉스에게 루드비코 요법을 선택하게 했던 내무부 장관이 찾아와 정중한 사과와 함께 9번 교향곡이 연주되는 오디오를 선물로 준다. 그러면서 정부 편에 서면 일자리(+충분한 급여)를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리고 알렉스는 요법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성행위하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완전히 치료되었어.”라며 영화는 끝난다.

(똘마니)배신자 처형


(파블로프의 개)루드비코요법




영화 전반의 테마는 ‘폭력’이다. 주인공 알렉스는 극 초반엔 폭력의 가해자였지만 그 또한 더 큰 세력인 정부에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로 나온다. 바로 이 모순점으로 인한 관객의 혼란을 감독(=스텐리 큐브릭)은 노린듯하다. 알렉스는 양아치 범법자이자 완전한 악인이다.
영화 중반부에서 교도소 소속 목사는 ‘강제된 선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가 이미 제거된 사람이 진정한 사람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선의가 아닌 외부로부터 강제된 선의는 진정한 선의가 아니라는 뜻일 게다. 더욱이 영화에서와 같이 재소자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는 방식의 교화 장치는 일종의 전체주의적인 국가에 의한 폭력을 제시하는 게 아닐까 한다.


이 영화 내에서 주인공 알렉스의 낮고 차분한 톤으로 내레이션을 하는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모든 사건을 알렉스의 시점에서 접하게 되는 효과를 얻게 되는데, 자꾸 그에게 설득되고 동조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의 각종 악행에 혐오감을 느끼다가도 루도비코 실험으로 고통을 받을 때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 과정이 감독이 의도한 바 인 것 같은데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너무 구역질 났다. 그렇다고 해서 화면 속의 알렉스의 악행에 동조해 그 폭력성을 즐기는 것도 어렵다. 왜냐하면 그건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그냥 인간 내면의 순수한(?) 폭력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고 구역질이 난다.


그리고 감독이 너무 무자비한 것이 1960년대 말 영화로서는 할 수 있는 최고의 테크닉이 아닐까 싶은데 카메라 워킹을 다양하게 하고 필름을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영상을 빠르게 감거나 느리게 재생하여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나타내려고 한다. 배경음악 또한 화면과 역설적으로 배치하여 관객이 화면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끔 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다. 또한 경찰이 취조하는 장면에서는 1인칭 시점 광각으로 찍어서 화면이 일부러 왜곡되어 보이는 효과도 있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았지만 계속되는 거부감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뭔가 마주하기 싫은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폭력성, 욕망 등을 끄집어내어 본듯하여 매우 기분이 불쾌해진다.

(GD가 따라한) intro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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