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 신세계
이별이 아프고 힘겨운 이유는
그것이 만남의 끝이 아니라 만나지 못함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1장 희망
‘윤주 명예회복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윤주의 명예회복과 복수를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사이에 대선이 치러지고 예상대로 조동근 변호사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야권과 범 민주 진영에서는 승리에 축제 분위기이고 국민들도 드디어 자신의 힘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와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는 기쁨에 취했다.
전재무와 노진우는 돈을 싸들고 미리 유학을 보내놓은 자녀 방문을 핑계로 미국으로 도망을 가고 벼락 출세를 한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기존 관료들을 믿을 수 없었던 새 정부는 정계뿐만 아니라 행정부 언론 문화계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대폭 물갈이를 하고 전교조를 포함한 노동계도 득세를 했다. 그러나 그동안 행정 경험이 없던 야권에서는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부족했다. 그래서 시민단체 등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는 가을 서리 후 홍시 떨어지듯이 횡재가 뚝뚝 떨어졌다.
신기태는 국무총리가 되고 정세영은 대통령 비서실장, 이영혜는 성고문을 받은 경력 덕분에 국가 인권위원장이 되었으며 임연경은 통일부 장관이 되었다. 도연명 교수는 새 대통령의 공약인 복지와 기본소득 보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학자가 되어 인수위원회를 거쳐 사회복지 수석 비서관에 임명이 되었다.
한편 아버지 오병진의 이름으로 대부업을 해서 큰돈을 번 오상혁은 그동안의 재정적 지원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제 음지에서 나와서 개국공신처럼 날개를 달고 개선장군이 되어 마냥 자기 이름으로 마음껏 사업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어졌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었다.
청와대 회의실, 제1차 국가정책 자문회의가 열리고 있다.
"원자력 발전을 즉시 중단해야 합니다."
정세영 비서실장이 첫 번째 안건을 상정했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 사고의 사례에서 알 수 있겠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한 번 사고가 나면 그 피해가 크고 오래가며 치명적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동해안 특정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가 집중되어 있어서 만일에 사고가 나면 그 피해 규모가 거의 전국적으로 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대부분의 시설들이 이북의 포격 사정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국가 안보 측면에서 봐서도 이건 거의 도박입니다.
이전 정권의 잘못된 정책을 시정하고 홍보하는 효과 면에서도 즉시 시행에 옮겨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대만 독일 등 선진 외국의 탈 원전 추세와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조동근 대통령이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임 재정기획부 장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한다.
"그러면 전력 수요에 부족할 텐데요..."
그러자 재계 대표로 참석한 오상혁이 받아친다.
"그건 태양광 발전으로 대치하면 됩니다. 이미 그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정부에서 지원만 해 주신다면 빠른 시일 내에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 친환경 에너지로 원자력을 대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지원이라고 하면..."
재정기획부 장관이 다시 묻고 오상혁이 답한다.
"예, 신재생 에너지 전력조달 단가를 현재 KWh 당 18원 에서 20원 정도로 올리고 신규 친환경 발전 사업자에게 30% 무상 50% 융자를 해 주시면 1년 내에 전력수요를 충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비용이 엄청 날텐 데요..."
"지금 국가 안보와 국민의 생명 앞에 돈이 문제입니까? 사람이 먼저이지 돈 때문에 국민의 생명을 경시해서야 어디 민주정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신기태 국무총리가 나서서 핀잔을 준다. 그러자 재경부 장관을 포함해서 참석자 모두가 이견이 없다.
"그럼 통과된 걸로 하고 아울러 석탄 발전을 확대하는 안도 같이 추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석탄발전이요? 그건 친환경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요?"
"예. 그렇긴 하지만 우선 원자력 발전 중단의 공백도 메우고 이북에서 나는 석탄을 사주면 남북 경협과 평화공존의 시그널이 될 수 있어서 꼭 필요한 사업입니다."
조 대통령이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은 대통령 공약 사항인 무상 복지 확대와 기본 소득 보장에 대한 건입니다."
"예, 공약사항이라 지켜야 하긴 하지만 역시 재정부담 때문에 즉시 시행하기에는.."
이번에는 보사부 장관이 문제 제기를 한다.
그러자 도연명 사회복지 수석이 열변을 토한다.
"아닙니다. 문제없습니다. 국민연금 재원을 활용하면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23조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금기금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 부채도 GDP 대비 38% 수준으로 OECD 평균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역대 정부가 재벌들에게는 관대하고 국민들에게는 너무 인색했다는 이야기이지요. 적극적인 확대재정과 연금재원을 적극 활용해서 복지와 기본소득을 확대하면 사회적 약자도 보호하고 국내 소비 증진으로 경제 발전도 하고 국민들의 여론도 좋아지고 그야말로 일석삼조입니다."
"그러다가 연금이 바닥이 나면..."
보사부 장관이 마지막 저항을 해 본다. 연명이 자신 있게 다시 답한다.
"아니 지금 연금을 쌓아놓고 지급하는 선진국이 세계 어디에 있습니까? 한 번 말씀해 보세요. 모두 다 연금 기금이 없어도 당해연도 납부 분으로 지급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연명의 주장에 조 대통령이 미소를 지으며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나도 공약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이었는데 듣고 보니 안심이 되네요!"
이제는 더 이상 이론이 없다.
"다음은 노동법 개정의 건입니다. 노동시간 단축과 비정규직..."
세영의 말을 조 대통령이 자른다.
"어허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군요. 자,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합시다."
조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참석자 모두가 따라 일어나서 회의실 옆에 있는 다과회장으로 이동한다. 달콤한 케이크와 과일 그리고 와인과 샴페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사는 살기 좋고 정의로운 나라가 앞에 펼쳐져 있는 환상에 젖어 모두가 축배를 들었다.
2장 색계
"그럼 선옥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떡하지요? 태양광을 진행시키려면 이북에 연줄이 닿은 선옥의 도움이 꼭 필요한데요!"
"그래도 세영이 자기 남편인데 남편을 몰락시킬 일에 협조를 하겠어?..."
"곤란 하네요. 혹시 잘못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둘 사이를 좀 갈라놓으면 어떨까요?"
윤미의 자취방에서 모인 '윤주 명예 회복 모임'에서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벌써 여러 차례 모였고 진실 규명을 위한 계획도 착착 세워지고 있었다.
"어떻게요?"
"선옥이 세영을 의심하게 만들어서..."
"무얼로요?"
의견을 낸 박 기자가 부연을 쳐다본다.
"부연 씨가 세영을 좀 유혹을 해 가지고..."
박만술도 민망한지 말을 맺지는 못한다.
"에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해요? 그건 옳지 못한 거잖아요!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쓰면 우리도 저 사람들과 다를게 뭐가 있어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순 없어요. 저 사람들도 처음에 동기는 좋았잖아요! 세영 오빠도 예전엔 얼마나 순수했다고요!"
윤미가 반대 의견을 낸다.
"아니, 길게 보면 어쩌면 그게 선옥 씨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지 몰라요."
김 형사가 새로운 의견을 낸다.
"왜요?"
"만일 우리 계획이 성공을 하면 세영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 날 거잖아요! 그때 선옥 씨가 실망을 하거나 같이 파멸을 하는 것보다는 미리 알고 피할 기회를 주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것이 모르고 당하게 하는 것을 피하고 한 사람이라도 건지는 길이 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선옥 언니의 도움이 필요하다니까 어떻게 해서든 합류를 시켜야 할 거고..."
"그럼요. 모두에게 좋은 결말은 내기가 힘들어요. 어차피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맞아요. 공산군이 쳐들어 왔을 때 살인을 안 하겠다고 모두가 도망만 갔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됐겠어요? 북한 사람들처럼 독재에 시달리고 굶어 죽고 있지 않겠어요! 작은 피를 흘리는 것이 때로는 더 큰 피 흘릴 것을 막을 수도 있어요."
"저도 물론 정당한 수단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한 항상 선하게만 살 수는 없어요. 굴복하지 않으려면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저는 선하고 착하게만 사는 것은 이제 포기했어요. 그건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어린 시절 꿈에 불과해요! 다만 우리의 피와 죄로 다음 세대는 좀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부연의 결연한 발언에 사람들의 의견이 찬성 쪽으로 기운다.
며칠 후 부연은 짧은 원피스를 입고 세영의 집에 갔다. 선옥은 없고 세영이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는 중이다.
"안녕하세요? 선옥 언니가 부탁을 해서 왔어요."
"왜, 또 많이 늦는데요?"
"예, 윤미네 은행 환경보호 캠페인 프로젝트 기안을 하는데 선옥 언니랑 공동으로 준비를 한데요. 잘되면 기금도 좀 받을 수 있어서 엄청 열심인가 봐요! 대신에 저보고 도련이 공부도 좀 봐주고 하라고..."
"괜히 부연 씨가 고생이네요!"
"괜찮아요. 저도 지금 방학이라서 심심한 데 잘 됐지요 뭐! 아휴, 우리 도련이 잘 있었어? 밥은 많이 먹었어?"
그러자 아이가 "네에에-"하고 대답을 하면서 부연이에게 와서 안긴다. 부연이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 그 바람에 부연의 원피스 치마가 아이의 무릎에 걸려 올라가서 부연의 진한 핑크색 티 팬티가 다 드러나 보인다. 부연은 그것도 모르고 아이를 안은 채 볼을 비비고 세영은 민망하여 고개를 돌렸으나 곁눈을 뗄 수가 없다. 이제 부연이 아이를 안고 빙글빙글 돌자 탐스러운 뽀얀 엉덩이 두 개와 적당히 도톰한 핑크빛 삼각형의 향연이 세영의 숨을 막히게 했다.
잠시 후 세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부연은 아이와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가르쳤다. 부연은 일부러 세영과 맞은편에 앉아서 두 다리를 약간 벌렸다가 오므렸다 하면서 자신의 팬티를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해서 세영의 피를 마르게 했다. 얇은 티 팬티와 짧은 치마를 입고 의자 위에 앉아 있으니 얼핏 보면 아래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날 밤 부연이 돌아가고 아이를 재운 후 선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세영은 부연의 벗은 몸을 상상하면서 수음을 했다.
다음 날은 부연이 하얀 바지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왔다.
꽉 끼는 하얀 바지와 얇은 블라우스는 부연의 파란 삼각팬티와 같은 색깔 브래지어의 윤곽과 색깔을 거의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원래 약간 감추거나 가려진 것이 완전히 다 드러내는 것보다 더 애타고 안달이 나게 하는 법이다.
더욱이 부연이 상체를 숙일 때마다 목이 깊이 파이고 느슨하게 단추가 채워진 블라우스는 부연의 가슴을 거의 가리지 못했다.
부연은 아이와 공부를 좀 하더니
"아이, 힘들다. 도련아 좀 놀다가 할래?" 한다
"좋아요! 아이가 좋아서 팔짝팔짝 뛴다.
"뭐 하고 놀까? 우리 눈 가리고 술래잡기할까?"
"네, 좋아요!" 아이가 대답하자
"음, 둘이는 재미없는데... 세영 오빠도 같이 해요!"라고 세영에게 권한다. 세영은 속으로는 좋았지만 겉으로는 못 이기는 척 다가온다.
"자 그럼 누가 술래를 하지? 자, 가위 바위 보!"
처음에 부연이가 술래가 되었다. 부연은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세영을 껴안는다. 세영이 술래가 되었다. 이번에는 부연이 피하는 척하면서 또 세영에게 잡힌다. 아이는 자기만 날쌔게 잘 피해서 술래가 되지 않았다고 좋아하고 세영도 은근히 부연을 안고 안기는 놀이에 신이 났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선옥은 남편의 몸과 옷에서 나는 낯선 향수 냄새에 바짝 신경이 곤두섰다.
다음 날 선옥은 예정보다 일찍 집으로 와서 세 사람이 거실에 앉아서 과일을 먹으며 깔깔대고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멋진 정장을 입은 부연에게서 어제 남편에게서 나던 그 향기를 맡았다.
부연이 돌아간 후 선옥은 침실에서 세영에게 시비를 건다.
"그래 예쁜 아가씨랑 노니까 좋았어?"
"왜 이래? 무슨 소리야? 생 사람 잡지 마. 자기가 늦게 오고 또 자기가 부탁했다면서 왜 애먼 사람 잡아?"
"흥! 나랑도 그렇게 재미있게 한 번 놀아보지!"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우리 서로 사랑하잖아! 믿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믿는 거야!"
"그래? 믿기지 않는 걸 보니까 사랑도 하지 않는가 보지 뭐!"
선옥이 쏘아붙이자
세영은 "아휴! 말을 말자!" 하며 입을 닫는다.
선옥이 돌아눕고 세영도 '끙' 소리를 내며 반대로 돌아 눕는다.
다음 날 선옥은 환경보호 프로젝트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점검하면서 윤미에게 물었다.
"부연이는 시집 안 가? 애인 없어?"
라고 물었다.
"몰라요. 아직 없는 것 같던데요..."
대수롭지 않은 척 무심히 대답을 하면서 윤미는 마음속으로
'성공이다'라고 쾌재를 불렀다.
한편 선옥은 얼마 전 기자가 찾아왔던 일로 세영이 괜히 화를 내던 일을 마음속으로 떠올렸다.
그날 밤, 선옥은 세영이 잠을 자는 동안에 몰래 세영의 컴퓨터와 전화기를 열어 보았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다음 날 선옥은 또 세영과 다툼을 했다.
"뭐야? 뭔 비밀이 있길래 비번을 걸어놨어?"
"응? 내 컴퓨터 열어봤어? 왜? 말도 안 하고?"
"응 뭐 좀 검색 좀 해 보려고 했는데 잠겨있어서..."
"자기 거는 어떡하고?"
"사무실에 깜박 두고 왔지. 근데 무슨 비밀이야? 나도 보면 안 돼?"
"비밀은 무슨! 그런 거 없어. 나도 이제 나랏 일 하니까 보안이 필요해서..."
"그럼 나한테도 비밀이야? 비번 알려주면 안 돼?'
"비밀 같은 거 없다니까, 봐봐 이게 비번이야. 열리지? 보려면 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잔뜩 화가 나서 격앙이 되어 있다.
"아니야. 괜찮아. 이제 필요 없어!"
선옥은 마지막 말을 툭 뱉어내고 돌아서서 욕실로 향하고 세영은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다음 날 밤 선옥은 다시 세영의 컴퓨터를 몰래 열어보았다. 어제 기억한 비번을 넣으니 화면잠금이 풀렸다.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보니까 금전출납 파일이 있었다. 엑셀로 정리된 파일에는 상혁에게서 받은 돈과 그것이 전달되고 사용된 내역이 들어있었다. 상상도 못 했던 억 단위 거금이었다.
'도대체 이 돈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래서 기자도 찾아온 것일까? 혹시 윤주가 훔쳤다는...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럼 이게 다 뭐지?'
혼잣말을 하면서 컴퓨터를 닫고 제 자리에 두고 침실로 돌아온 선옥은 갑자기 잠을 자고 있는 남편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살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세영의 옆자리에 누워 선옥은 더 이상 세영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박기자가 선옥을 사무실로 다시 찾아왔다. 박 기자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 선옥에게 세영과 희섭의 밀담이 담긴 녹음 파일을 들려주었다.
하얗게 질린 선옥은 충격에 놀라서 한참을 치를 떨다가 박 기자에게
"이걸 어떻게 해서 박 기자님이 입수하시게 되었어요?"라고 물어보았다.
박만술은 그간의 사연을 알려주고 '윤주명예회복 모임'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선옥은 즉시 자신도 적극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박만술은 당분간 세영이 아무런 눈치도 채지 않도록 절대 내색을 하지 말라고 선옥에게 당부를 하고 돌아갔다.
3장 공작
얼마 후 중국 연길, 북조선 당국이 직영으로 운영하는 냉면집 내실에 상혁과 선옥, 그리고 북한의 인민복을 입은 한 남자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다.
세 사람이 재떨이를 가운데 두고 연신 담배를 피워대기에 실내는 담배 연기로 자욱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개의치 않고 식사 전에 그리고 식사 후에 냉면과 보쌈 고기보다도 더 맛있게 흡족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웠다. 고량주 술병과 작은 사기 술잔도 놓여 있었으나 아직 마개를 따기 전이다.
"진작에 선옥 선생이 오셨으면 얼마나 사업이 빨리 진행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보고 사업을 하지 절대 기관을 믿고 일을 하진 않습네다!"
인민복장이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을 꺼낸다.
"그래도 제가 남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데..."
상혁이 항변을 한다.
양복이 핀잔을 준다.
"아, 글쎄 우리랑 사업을 하고 싶으면 우리 식대로 따라야 하지 않겠소? 상혁선생!"
"아 물론 그렇지요!"
말은 이렇게 겸손하게 하면서도 상혁은 속으로
'씨발! 돈은 내가 다 내는 데 거지 같은 것들이 도도하게 굴기는! 그래도 칼자루는 이 놈들이 쥐고 있으니 우선은 납작 엎드려야지 어떡하겠나. 일은 성사를 시키고 봐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럼, 남방무역 사장동지 말이 타당하오. 특히나 걸핏하면 정권이 바뀌는 자본주의 국가랑 사업을 할 때는 기관은 믿을 수가 없소. 사람이 바뀌면 딴 소리 하고 정책이 또 언제나 죽 끓듯 바뀌지 않냐 말이오! 그러니 우리 식대로 따라야 일을 할 수가 있소!"
인민복은 대남 공작을 담당하는 노동당 산하 225국 국장이다. 그나마 이만한 거물을 직접 만나서 사업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 상혁으로서는 안심이 되고 자존심도 선다.
"예, 그래서 지난번 평양 세계 청년 대회 때 임연경을 수행했던 유선옥선생을 각별히 보증인 삼아 배석하게 했습니다. 그래야 우리 사업의 타당성과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지요."
양복이 아부와 공치사를 한다.
"아, 그때 통일 열기가 대단했지요! 전 인민이 감격과 감동을 받았지요! 그래 임연경 선생은 잘 계시지요?" 인민복은 임연경 방북 당시의 회상에 감격에 겨운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면서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임연경의 근황을 묻는다.
"예. 잘 계십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번 새 내각에도 하마평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선옥이 대답하자,
"좋소 좋소 그 잘 된 일이오. 이번에 아주 좋은 정부가 남조선에 들어서서 공화국에서도 기대가 크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업도 같이 잘해 봅시다!"
"그럼요. 저희도 그래서 이렇게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고 남쪽 정부에서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번에 하자는 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떤 거요?"
"예, 태양광 패널을 지금은 중국에서 생산하는데 인건비가 자꾸 올라서 이걸 이북에서 생산을 할까 합니다. 그러면 이남은 원가가 절약이 되어서 좋고 이북은 외화벌이가 되어서 좋고... 경협사업으로 아주 모범사례입니다."
"어허, 패널이 뭐요 패널이 우리말로 널판이라고 합시다."
인민복이 핀잔을 주자 양복이 끼어든다.
"예, 게다가 이번에 이남의 새 정부가 태양광을 대대적으로 설치를 한다고 하니까 그 규모와 금액이 상당하리라고 합니다!"
"그 구체적으로 얼마나 할 건데?"
"지금 일차로 공장 착공에 4백만 불 들어가고 생산 물량은 올해 2천만 불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상혁이 대답을 한다. 인민복은 만족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그게 다 달라로 들어온다는 거요?"
"아닙니다. 일부 물품 자재로 들어가기도 하고 달라 현금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송금에는 문제가 없소? 그놈의 유엔 제재 때문에.."
인민복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건 방법을 좀 찾아주시면 저희가 따르도록..."
"알겠소. 그건 걱정 말고 일이나 차질 없도록 준비하시오. 선옥선생이 또 잘 지도해 주시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하자 인민복이
" 자, 좋소! 일이 잘 되면 상혁선생도 공화국 혁명의 수도 평양에 한 번 초대하겠소.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합시다!"
고 하면서 고량주 마개를 따고 술을 따른다.
상혁은 공손하게 술잔을 받으며
"감사합니다. 그럼 영광이겠습니다."라고 하고 술을 마신다. 상혁은 이어서 술을 따르고 마시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 사업으로 생길 이윤을 계산 중이다. 어림잡아 정부 지원금을 빼고도 수십 억이 남은 장사다. 물량이 확대되면 당연히 이윤도 커지고 다른 분야로도 남북 경협이 이루어지면 또 자신의 입지도 강화될 것이었다. 자신의 앞으로 열려있는 탄탄대로가 보이는 듯했다.
그 만남 이후 선옥은 잠시 귀국을 했다가 환경운동 사무실에 정식으로 휴가를 낸 후 아이는 친정 집에 맡기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태양광 사업에 집중을 했다. 그녀가 하는 역할은 주로 자금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상혁은 현재 중국에 있는 패널 생산 시설을 개성공단으로 옮겨서 설치하고 개성의 공장 건물을 증축하는 한편 증축이 되는대로 또 추가 시설을 발주하여 증설하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아버지의 공장이 있는 원주에는 태양광 설치 사업장을 만들고 전국 각지에 지점과 직영점을 세워서 태양광 설치 신청을 받았다. 세영의 지시와 협조 아래 각 지자체에서는 앞 다투어 경쟁적으로 지원금을 책정해 주었다.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니고 부족하면 중앙에서 교부금으로 지원을 해 줄 것이고 지역에 돈을 뿌려서 주민의 인기와 표를 얻을 수 있는 일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또 농어민과 지역 상공인들도 지원과 융자를 받으면 자기 돈을 한 푼도 안 들이고 태양광 발전소나 자가 시설을 지을 수 있으니 몇 십 년 동안 안정적인 수입을 낼 수 있다는 말에 혹하여 땅이 있는 사람들은 너도 나도 신청을 하고 나중에는 저수지 물 위, 축사 지붕 위, 산비탈 어디나 할 것 없이 나무도 밀어버리고 밭도 갈아엎어서 태양광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다니는 공 돈을 안 잡으면 바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전국적으로 태양광 광풍이 불었다.
그에 따라 상혁의 사업도 일로 번창하고 그렇게 갈퀴로 긁어모은 돈은 달러 현찰로 바꾸어서 자신의 직원과 사채업소 지원 조직원을 중국 출장을 보내면서 중국으로 조금씩 빼돌렸다.
그리고 그 돈은 다시 선옥의 손을 거쳐 이북으로 전달이 되었다. 때로는 북한의 남방무역 중국 사무소에 전달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선옥이 직접 이북에 전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느라고 선옥은 압록강을 수시로 건너 넘나들었고 덕분에 잘 꾸며진 선전도시 같은 평양 이외에서 더욱 참혹한 주민들 삶의 민낯을 목격할 수 있었고 소위 경협자금이 특권층의 사치와 군비확장으로 빼돌려지고 주민들에게는 거의 혜택이 되지 못하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평등사회를 주창하는 이북은 여느 자본주의 사회보다 빈부격차가 더 극단적으로 컸고 특권과 비리와 계급차별과 출신성분 연좌제와 인권 탄압이 절대적 빈곤과 겹쳐서 그 참상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근본 원인에는 비 효율적인 통제 계획 경제와 오랜 독재가 있다는 것을 선옥은 알고 있었다.
그나마 자신이 전달하는 돈의 극히 일부가 개성 공단에 전달이 되어서 그들은 굶지는 않고 초코파이 간식의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웃픈 사실이었다.
가끔은 그 초코파이도 먹지 않고 집의 자녀에게 주려고 몰래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가는 아줌마 여공들을 보면서 선옥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감자 이삭을 캐러 갔다가 오면서 간식으로 나오는 단팥빵을 어린 선옥에게 쥐어주던 일이 생각나서 혼자 눈물을 지었다.
그래서 선옥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비록 힘들고 위험할지라도 꼭 성사를 시키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그것은 단순히 상혁의 돈을 이북에 전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더 큰 위험은 선옥이 그 돈을 다 전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선옥은 아무도 몰래 상혁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압록강 접경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고용하여 달러 현찰을 비축하면서 거사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4장 미끼
길희섭 의원이 이제 야당 의원이 되어서 명자 아니 예린이 일하는 요릿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명자는 희섭의 옆 자리에 앉아서 나긋나긋하게 시중을 들고 있다.
이제 한창 미모가 무르익은 명자의 얼굴과 몸매는 희섭같은 중년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싱그럽지만 조금은 설익고 그래서 부담스러운 젊은 아가씨보다는 농익은 과일같이 포근하고 편안한 명자가 좋아서 요즘 희섭은 우울할 때마다 예린을 찾아와서 술잔을 나누고 말동무도 하기를 즐겼다. 예전처럼 짓궂은 손장난이나 말장난은 줄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예린의 치마폭에 안기기도 하고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서 예린의 젖가슴을 조몰락조몰락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오늘도 예린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위를 바라보고 있는 희섭의 볼과 입술을 쓰다듬고 있었다. 희섭은 눈을 지긋히 감았다가 떴다가 하면서 예린의 한복 치마 속으로 한 손을 넣어 예린의 부드러운 허벅지와 불두덩을 탐색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팬티 안으로 살짝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면서 숨바꼭질을 했다. 그럴 때마다 예린도 손가락으로 희섭의 이마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희섭은 그 장난이 좋아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 좋은 시절 다 갔네! 싸나이 길희섭 야망이 이렇게 주저앉다니..."
라며 한숨을 푹 쉰다.
"아이 왜그려셔용? 대장부 가는 길에 굴곡이 없으면 어디 재미가 있나요? 난 지금 의원님이 더 멋있기만 한데... 이렇게 다정한 면이 있는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지 뭐예요... 호호홍!'
하고 희섭을 위로한다.
"그런가? 그래 좀 쉬었다가 가기도 해야지 뭐!"
"그럼요 난 지금이 넘 좋아요! 의원님이 자주 오시니까요 호호"
"어허 이 사람이! 내가 이렇게 주저앉으라는 악담이야 뭐야!"
희섭이 짐짓 화를 내는 척한다. 하지만 입술은 여전히 헤벌쭉 웃고 있다.
"아이 그럴 리가요. 얼른 재기하시고 대신 바빠도 꼭 가끔씩 찾아오는 거 잊지나 마세요."
"아 그럼 여부가 있겠나! 난 요즘 예린이 보는 낙으로 사는데..."
라며 고개를 들어 예린의 도톰한 입술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댄다.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한 후 다시 머리를 내려 예린의 폭신한 아랫배에 코를 박는다.
"아. 그나저나 어쩌지 이 돈을..."
말소리가 예린의 뱃살에 묻혀 웅웅거린다.
"무슨 소리예요. 하나도 안 들리네"
예린이 칭얼거리자 희섭이 고개를 살짝 들고
"자넨 알 필요가 없어."
라고 한다. 그러자 예린이 입을 삐쭉 내밀고 말없이 토라진 척을 한다.
그러자 희섭이 예린을 달랠 겸 사나이 위세를 세울 겸 자랑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음. 내가 돈이 엄청 많은데 그걸 쓸 데가 없단 말이야 지금, "
"아휴, 의원님 뻥이 심하세요. 돈이 많아서 다 쓰지 못해서 고민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럴 거면 저라도 주세요. 제가 원 없이 쓰다가 죽게!"
'이 사람이 안 믿네! 정말이야. 전 대통령 알지? 그분이 미국으로 가셨잖아, 근데 다 못 가지고 가셔서 남은 돈을 내게 맡겼단 말이야."
"오오.. 그럼 그 사람들이 말하는 전장군 비자금이 정말 있는 거예요? 아휴 그럼 맘껏 쓰시면 되지 뭐가 문제예요?"
"그걸 내가 다 쓸 수야 있나? 좀 보내드려야 나도 쓸 게 좀 생기는데 방법이 없네 방법이!"
무슨 해결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고 그냥 허세로 한 말인데 예린이 의외의 대답을 한다.
"그런 거라면 제가 방법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미국으로 돈을 보내면 되는 거잖아요."
"이 사람이 말이라고 쉽게 하네. 장난치지 마."
"아니에요. 진짜로 방법을 알고 있다니깐요!"
"어허 잘 모르고 하는 말인데 우리나라에는 엄연히 외환 관리법이란 게 있어서 함부로 돈을 외국으로 보내지 못해요. 그리고 이건 그리 드러낼 수 있는 돈도 아니라서 생각만큼 쉽지가 않아! 잔 말 말고 술이나 한잔 쳐 봐!"
희섭이 벌떡 허리를 펴고 앉는다. 예린은 공손히 자기 주전자를 들어 희섭의 잔에 술을 따른 다음
"자, 쭉 들이키시고 여기 안주!"
하면서 젓가락으로 소고기 산적 안주를 집어서 희섭의 입 가에 가져다가 댄다. 희섭이 술을 마시고 안주를 입으로 받아 물고 질겅질겅 씹는다.
그사이에 예린이 말을 이어간다.
"저.. 제 고향 동생이 외국은행에서 근무하는데,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한 번 물어볼까요?"
"어? 그래? 정말이야? 이거 의외인데... 우리 예린이가 얌전한 줄만 알았더니 발도 넓네!"
"아니에요. 그냥 고향 동생이라 아는 건데 의원님 말을 듣고 보니 혹시나 해서요.."
"그래! 한 번 넌지시 떠보기나 해 봐. 내 이름은 대지 말고 그냥 외국으로 돈 보내는 거 가능하냐고만 물어봐."
"예. 저도 요릿집 경력이 몇 년인데 눈치가 없겠어요! 걱정 마세요."
희섭이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술을 마시고 명자는 마음속으로 '휴,, 어렵게 성공했네!'라고 미소를 지었다.
5장 준비
그 시각 을지로!
윤미가 근무하고 있는 뉴욕은행 서울지점 딜링 룸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일반 직원들은 일찌감치 퇴근을 하고 지금은 딜링 룸에는 두 사람만 있다.
외환시장은 24시간 열려있기 때문에 딜링 룸 근무자들은 출퇴근 시간이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 잡고 있는 포지션이 있으면 근무고 털어버리면 비번이다. 하지만 비번일 때에도 시장 동향에는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129.90 130.00
130.20 130.30
윤미 앞에 놓인 자그마한 모니터의 새까만 배경 위에서 옅은 초록색 숫자들이 한 밤중에 고장 난 신호등처럼 빠르게 깜박이고 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윤미는 왼쪽 데스크에 앉아 있는 배용진 부장에게 말한다.
"130 쳤습니다."
딜링 룸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대형 칼러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배 부장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로 빠르게 혼잣말처럼 대답한다.
"오케이. 300만 불 잡아."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윤미는 앞에 놓인 홍콩 거래소 직통 전화 연결 버턴을 누른다.
윤미의 헤드셋에서 남부 중국어 캔토니즈 억양이 약간 섞인 영어가 흘러나왔다.
"Hi Seoul"
"Hi. Hongkong. Buy yen 3 Million dollars at market price."
"Got it. Seoul Newyok buy yen against Us dollars 3 Mill at market, right?"
"Confirm"
"Monent please."
잠시 침묵이 흐르고
"Done. 3 Mil at 130.05"
"Ok. Confirm by secure mail. Thanks."
"No problem. Bye."
출장 때 가끔 만나서 서로 안면이 있는 Margaret 목소리다. 평소에는 쾌활한 수다쟁이이지만 업무처리 때는 딴 사람처럼 건조하고 단호하다.
윤미가 전화 버턴을 눌러서 끄고 회전의자를 약간 돌려서 오른쪽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본다.
'띵동'하는 도착 알림음과 함께 아래쪽에 메일 도착 메시지가 뜬다.
윤미가 마우스를 클릭하여 메일 내용을 확인한다.
방금 주문한 거래 내역이다.
윤미가 금액과 가액을 확인하고 첨부 파일의 출력 버튼을 누른다.
뒤 쪽 창가에 놓인 프린터에서 '위이잉' 문서가 나온다.
윤미가 의자를 돌려 일어서서 출력된 문서를 결재판에 끼워서 선채로 서명을 한 후 배 부장에게 걸어가서 건넨다.
부장은 윤주가 주는 결재판을 열어서 내용을 확인한 후 서명을 하고 바로 윤미에게 돌려준다.
"이제는 이것도 성가시네. 곧 전자결재 시스템이 셋업 된다니까 그러면 더 편해지겠지. 하긴 내가 dealer 할 때만 해도 tele typewriter로 주문하고 fax로 confirm 하고 그랬는데 그에 비하면 세상 좋아졌지."
이미 여러 번 들은 내용이지만 윤미는 맞장구를 쳐준다.
"그러게요. 저는 fax는 써 본 적은 있어도 tele typewiter는 영화에서만 봤지 실물은 구경도 못했어요."
"흐흐, 그래도 그때는 다다다다 타이프 치고 수신 테이프 정신없이 흘러나오고 그걸 처리해 주는 여직원 따로 있었고.. 실시간 보고하고 결재받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dealing room이 살아있었지."
배 부장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회상에 잠긴 듯 천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벽면 모니터로 시선을 옮긴다.
"어라, 조금 빠지네."
모니터의 일본 엔화는 130.50 60이다. 50은 bid 사는 값, 60은 offer 즉 매도가 이고 시세표는 us dollar 기준이라 숫자가 오르면 엔화 가격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고 방금 엔화를 샀으므로 손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배 부장이 일어서서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걸쳐 입는다.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좀 두고 봐. 어차피 이거 S전자 position 이잖아. 걔들은 수출입 결제 자금 cover 니까 올라도 내려도 똔똔이야..."
"그래도 잘 잡아서 환차익도 나면 더 좋지요."
"그야 물론이지. 그래야 우리도 먹고살게 생기는 거고.. 암튼 난 나간다. 퇴근 안 할 거야?"
"예, 전 London 장 까지만 좀 더 볼게요."
"알았어. stop loss 없으니까 자르지 말고 그냥 두고..."
"알겠습니다. 큰 변동 있으면 전화드릴게요."
"됐어. 전화하지 마. 잘 거야."
"알겠습니다. 쉬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수고.."
유리문을 열고 나가는 박 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윤미도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한 잔 따라서 들고 다시 딜링룸으로 돌아온다. 모니터 숫자는 여전히 130 대에서 깜박이고 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사무실 통창으로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 보인다. 빌딩의 사무실 불은 거의 꺼져있고 간혹 불이 켜져 있는 층에도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멀리 아래로 보이는 무교동 술집 골목은 화려한 조명 아래 취객들의 오가고 있다. 윤미는 의자를 뒤로 돌려서 창 밖을 바라보며 앉아서 커피를 마신다. 주문을 마치고 마시는 커피 한 잔은 혀에서부터 목구멍을 지나 온몸으로 퍼지면서 긴장감을 녹인다. 커피의 그 마법 같은 효능을 음미하면서 슬슬 퇴근을 하려고 하던 찰나에 갑자기 모니터에서 '삐삐' 경고음이 뜬다. 갑작스러운 시세 변동이 있을 때 울리는 자동 알림 장치다.
'151.20 40
152.50 70'
"뭐지?"
윤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모니터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미국 달러와 일본 엔 환율이 깜박이며 숫자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원래 bid offer 차이는 0.10이 보통인데 지금은 0.20이나 0.30이다. 환율 변동이 너무 빨라서 거래 도중에 변동이 생길 위험성이 있을 때 이를 커버하기 위해서 매입 매도 간격을 벌리는 것이다.
'분명 비정상적이다.
뭔가 있다.'
독일 마르크나 영국 파운드 유로화도 조금씩 오르고 있지만 유독 일본 엔만 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숫자가 오른다는 것은 일본 돈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한다는 뜻이다. 윤미는 고개를 들어 TV 화면을 흘낏 쳐다본다. 전 세계의 뉴스를 알아야 하는 딜링룸에는 항상 24시간 CNN 뉴스가 켜져 있다. 아직 특보 breaking news는 없다. 원래 외환시장은 뉴스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뉴스를 보고 거래를 하면 이미 한 발 늦다.
'뭔가 있다. 어떡하지? 부장? 아니야 그럴 시간이 없어.'
윤미는 S전자 김 과장에게 전화를 건다.
'뚜루루..'
"네, 강 과장님."
늦은 밤인데도 신호음 한 번에 바로 김 과장이 전화를 받는다. 외환시장은 New York 장이 닫히면 Tokyo 장이 열리고 이어서 Hong kong, London 다시 New York으로 24시간 거래가 되기 때문에 외환 딜러들은 항상 대기 상태를 유지한다. 특히 포지션이 있는 날에는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피가 마르는 것 같아서 차라리 상하로 일정 포인트에 반대거래 자동 주문을 넣어놓고 전화 대기만 하는 고객도 많다.
"오늘 저녁에 주문하신 대로 130에 3백만 불 잡았는데 지금 갑자기 152로 치고 올라갑니다. stop loss는 없다고 하셨지만 너무 변동이 커서 바로 연락드렸습니다."
"씨발 좆됐네. 갑자기 왜 그런데요?"
"아직 뉴스 나온 것은 없는 데 뭔가 큰 건이 터진 것 같습니다. 잠깐 만이요"
CNN에서 정규 방송 중단하고 붉은 글씨로 BREAKING NEWS 자막이 화면 가득 흐르면서
'N Korea launch missile to Japan'이란 자막이 아래쪽에 뜬다.
"북한이 일본에 미사일을 쏘았다네요. 어떡하지요? 지금이라도 자르실 건가요?"
"안 돼요. 손실이 너무 커요. 감당 못해요. 지금 얼마예요?"
"153.30 이요"
"지금 자르면 6억 5천 손실이에요. 우리 회사 전체 하루 순익을 내가 순식간에 다 까먹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어차피 실물 거래 커버니까 손익 분기점이지 않나요?"
"좃나 헛고생만 한 셈이지요. 더 떨어지지나 말아야 할 텐데.. 어떻게 보세요?"
"일단 팩트가 없는 건 아니니까 위기 때 달러가 오르는 건 당연하고 뉴스 뜨고 10분에 150 대면 이미 수치 반영은 끝난 듯합니다. 더 이상 큰 변동은 없을 것 같고 뉴스 초기에 심리적 요인과 추가 상황 대비 그리고 자동거래 시스템 작동으로 overshoot 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바로 조정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물타기 한 번 할까요?"
"예?"
"추가 매수요."
"그러다가 실제 피해가 발생한다거나 하면... 손실이 배로 늘 텐데요.."
"어차피 손실은 발생한 거.. 조금 더 간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만회의 기회라도 노려봅시다. 확률은 어느 정도로 보시나요?"
"글세요.. 8대 2 정도.. 북한이 미사일 쏜 게 처음도 아니고.. 조정 들어갈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만.."
"해 봅시다."
"문제는 사전 결재가 없어서... 한도 문제도 있고..."
"내일 아침에 사후 결재받을게요. 지금 급하잖아요.."
'항상 신중하고 체계적이어서 모험을 잘 하지 않는 S전자 답지 않다.
은행은 중개수수료만 챙기면 되니까 거래가 늘어날수록 좋으며 언제나 지금 지나친 충고는 금물이다. 걱정은 되지만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책임은 김 과장이 질 거다.' 라고 윤주가 잠시 생각하며 결심을 한다.
"알겠습니다. 우리 부장님께 승인 좀 받고요.."
"아이. 그럴 시간 없지 않나요? 사후 보고 하세요."
명령조에 짜증이 섞였다. 윤미도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큰 고객이고 다급하고 위기 상황이라 이해를 하기로 한다.
"휴.. 이거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잠시만이요.. 일단 quote 해 볼게요. 3백만 불 엔 추가 매수요"
"예"
윤미는 전화 패널 버턴을 대기로 누르고 이어서 Hongkong branch 버턴을 누른다.
"Hi Seoul."
다시 Margaret이다. 인사를 할 틈도 없다.
"Quote 3 Mil sell against yen."
"Sell? Not buy? Are you sure? You got the position of the same amount just before."
"I know. Just quote please."
"Ok. It's 150.90 now."
"Just a mom please."
그새 엔이 조금 올랐다. 버턴을 대기로 누르고 김 과장 라인에 연결한다.
"150.85"
"Yes."
조금 좋아진 수치에 흥분이 된 듯하다. 다시 Hongkong 버턴 누르고
"Okey, sell 3 Mil."
"Done. At 150.70 sell 3 Million US dollars against Japanese yen spot."
"Got it. Will confirm by mail. bye."
"Yoon. It's over your overnight limit. Need confirmation by Mr. Bae, your manager."
"No worries. Will be done immediately. Bye now."
종료 누르고 다시 김 과장
"150.65에 됐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조금 올랐네요. 수수료 포함이지요?"
"예. 0.05요"
"좋네요. 벌써 조정 들어간다는 추세 아닌가요?"
"글쎄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변동 폭은 줄고 있네요.".
모니터 숫자는 150.70 80으로 정상 bid offer폭을 보이고 있다.
"알겠습니다. 이거 심장 쫄려서 살겠나? 오늘 밤도 잠자기엔 틀린 것 같네요."
"제가 퇴근 안 하고 지켜볼 테니 과장님은 좀 쉬세요."
"휴.. 그나저나 잘 돼야 될 텐데.."
"그래요. 제가 절차상 부장님 결재를 받아야 해서.. 다시 전화드릴게요."
"지금 해야 하나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전 결과 좀 보고 내일 아침에 보고하려고요.."
"그래도 되나요? 우린 즉시 보고 안 하면 큰일 나요. 사실은 사전 승인받았어야 하는 건데.. "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종료 버턴 누르고 일반 전화 버턴을 누른 후 키패드에서 배 부장 개인전화번호를 누른다. 배 부장도
바로 전화를 받는다.
"응, 왜?"
"저.. 방금 전에 S전자 3백만 불 추가로 잡았어요"
"뭐? 너 미쳤어? 왜 미리 보고 안 했어?"
"김 과장이 너무 다급하게 독촉을 해서.."
"야. 딜러의 금물이 한도 초과 거래인 거 몰라? 너 잘리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죄송합니다. 제 포지션은 아니고 고객 포지션이라.."
"그게 변명이야 뭐야? 어쨌든 절차는 지켰어야지. 그럼 김 과장은 상부에 보고했어?"
"아니요. 내일 아침에.."
"화~ 정말 미치겠네. 니들 도대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래?"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난 승인 못해."
"부장님...."
"시끄러워. 네가 책임져. 전화 끊어."
뚝 전화가 끊긴다. 윤미가 다시 전화를 건다. 한참 신호가 울려도 배 부장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배 부장이 즉시 승인 confirm을 하지 않으면 정말 일이 커진다. Hongkong 지점에서 confirm을 못 받으면 Seoul 지점으로 정식 공문을 보내게 되고 그러면 윤미가 초과 거래한 것이 외부로 알려지고 그러면 딜러로서의 윤미의 생명은 끝이다. 손해를 본 딜러는 용서가 되지만 한도 초과를 한 딜러는 현 직장에서 해고되는 것은 물론 다른 어디에서도 절대 고용하지 않는다.
다시 배 부장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엔 받는다.
"부장님. confirm..."
"일단 내 id로 confirm 보내. 비번은 centralbae 야."
"감사합니다."
"감사고 지랄이고 너 이번이 마지막이야. 고객 포지션이라도 한 번만 더 그러면 바로 자를 거야. 오냐오냐 해줬더니 간덩이가 부어가지고... 김 과장한테도 상부에 바로 보고하라고 그래. 이거 잘못되면 불똥이 우리한테 튈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어진다. 윤미는 얼른 배 부장의 책상으로 가서 confirmation mail을 보낸다. 타이핑을 하면서 귀에 이어셋을 꽂고 김 과장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예. 지금 얼마인가요?"
모니터를 힐끗 보고
"오. 148이요."
"와.. 무슨 뉴스는요?"
"아직이요. 시장은 일단 진정세로 돌아선 것 같아요. 계속 지켜보실 건가요? 우리 부장님은 그쪽 상부 보고가 되었는지 물어보라시는데요..."
"아. 잠시만 더 봅시다."
"어느 선까지 가시려고요? 3백은 profit taking 하실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초과분은 부담이 되어서 윤주는 3백만 불은 얼른 털어버리고 싶다.
"아니요. 좀 더 봅시다. 140 정도... 가능하겠어요?"
"다른 뉴스 없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이요. 144까지 가네요. 뉴스 나오네요. 북한 미사일이 일본 영공을 지나서 태평양에 떨어지고 다른 피해는 없다고 하네요. 143 142 계속 내려가고 있어요."
"좋아 좋아. 얼마까지 갈 것 같아요? 무슨 소스 없어요?"
"우리 은행 network에서는 추가 도발 징후가 없다고 하니까 잘하면 오늘 밤 135에서 140 정도는 가능하고 차츰 더 내려갈 수도 있겠지요. 아무래도 불안심리가 다 없어지고 원위치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요."
"그럼 오늘 밤 안으로 3백은 털어버립시다. 목표는 135. 어때요?"
"알겠습니다. 근처에 가면 전화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전화 개방해 놓으세요. 어차피 잠 자기는 글렀고.. 난 맥주나 한 잔 하면서 기다려야겠다.."
기분이 좋은지 김 과장의 목소리가 한결 들떠 있다. 다행이다.
"예. 그럼 저도 콜라 한 잔.."
윤미는 이어셋을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콜라 캔을 꺼낸다. 쌉스럼하면서도 달콤 시원한 청량감이 긴장감을 풀어준다.
다음 날 아침
배 부장이 딜링 룸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다. 의자에 앉아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윤미가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
"어떻게 됐어? 밤샜어?"
"예. 136.20에 3백은 털었어요."
"그래? 꽤 벌었네? 한 4억은 되겠는데.. 지금은 얼마야?"
"135.50 이요."
"거의 제 자리로 돌아왔네. 어젯밤에 북한 얘들이 미사일 쏘았다며? 이젠 새롭지도 않네!"
배 부장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서랍을 연다.
"예. 그런가 봐요. 암튼 죄송합니다."
"알았어. 이번엔 다행히 결과가 괜찮았지만 딜러가 그러면 안돼.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어. 그러다가 망한 딜러도 많고 작년에 H 통상도 물타기 하다가 회사가 아예 부도났잖아.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게 있어. 픽사리 난 골프 shot 하고 한 번 한 deal이야. 무를 수가 없어. 인정하고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야. 다시 하면 더 잘할 것 같지만 지난 샷에 집착할수록 다음 타구도 더 망쳐."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3백 포지션은 그냥 가는 거지? 내가 볼 테니까 사우나에라도 좀 갔다 와. 고생했어."
"알겠습니다. 김 과장이 보자고 해서 S 전자에 좀 들어갔다가 오겠습니다."
"꾀죄죄하게 가지 말고 좀 씻고 한 숨 붙이고 가. 요 뒤에 찜질방도 괜찮더라. 아니다. 법인카드 가지고 S 호텔 사우나에 가라. 뉴욕 딜러가 찜질방은 격이 좀 떨어지지."
배 부장이 내미는 법인카드를 받아 들고 윤미는 딜링룸을 나선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이 눈 부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출근하는 다른 직원들이 우르르 나오다가 윤미와 인사를 나눈다. 아침에 퇴근하는 그녀의 모습이 익숙하다.
6장 함정
윤미는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그냥 걸어서 S 호텔로 향했다. 출근길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L백화점을 지나 S호텔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아침에 호텔에 들랑거리는 젊은 여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싶어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개의치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 사우나에 내렸다. 전망대 바로 아래층이라 사우나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야경도 시원했다. 간단히 씻고 가운을 걸친 채 젖은 머리를 수건에 감싸고 부설 간이식당에서 설렁탕을 주문한 다음 식탁에 앉았다.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응 나 명잔데 걸려들었어!"
"응, 알았어. 언제 만나?"
"오늘 저녁 어때? 우리 업소로 올 수 있어?"
"응 언니 별일 없으면 8시에 갈게. 혹시 일이 있으면 못 갈 수도 있어, 그러면 연락할게."
두 살 차이가 나지만 친한 고향 언니라 이제 서로 반말이다.
"알았어. 이따 봐!"
윤미는 아침을 먹고 S 전자 김 과장을 만난 후 다시 은행으로 돌아왔다. 딜링 룸에는 배 부장이 회전의자를 한껏 뒤로 젖힌 채 구두를 신은 채로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룰룰루'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어제 윤미의 실적에 기분이 좋은가 보다. 송 차장과 다른 직원들도 책상에 앉아서 모니터를 보고 있거나 서류 작업을 하고 있지만 어젯밤의 사태는 진정이 되었는지 긴장감은 보이지 않는다.
윤미도 자리에 앉아서 어제 딜의 사후처리 서류정리를 좀 한 후에 주요 고객들과 한 차례 전화 통화를 한다. L 자동차 석 이사님부터... L 자동차는 못 미더운지 실무자를 젖혀두고 이사가 외환을 직접 한다.
"아휴, 이사님 어제 소동이 좀 있었는데..
아, 아침에 뉴스 보고 아셨어요?
네 네, S 전자요.
예 좀 벌었지요. 말씀드려도 되나?
예 한 4 -5 억 정도...
아니에요.
네 네, 그럼요. 다음부터는 제가 한 밤중에라도 전화 넣겠습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전화를 끊는다. 석 이사는 외환을 무슨 주식 거래로 잘 못 생각하고 있다. 외환은 기본적으로 수출입으로 생긴 외화 실물을 바탕으로 환손실을 막자는 차원으로 해야 하는 건데 석 이사처럼 무슨 돈벌이로 착각하고 덤비면 대형 손실이 발생해서 회사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수가 있다. 하지만 석 이사는 어제의 변동성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아무려나, 은행 딜러가 중계만 하고 수수료만 챙기면 되지. 무슨 가치 판단이야. 주제넘게!' 윤미는 스스로 마음속으로 자조를 한다.
다행히 그날은 오후에도 저녁에도 별 일이 없고 포지션도 생기지 않았다. 송 차장을 당번으로 남겨두고 윤미는 오랜만에 일반 직원과 비슷한 시간에 퇴근을 했다. 약간 이른 시간이라 자취방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명자의 업소로 향했다.
시간은 여유로웠지만 교보문고에 들러서 책도 좀 보고 찻 집에서 인철이랑 전화로 수다도 떨다가 조금 늦게 명자의 업소로 들어갔다.
희섭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휴. 늦어서 죄송합니다. 초면에 결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직업이 딜러라 비상상황이 좀 많아서요.."
윤미가 사과를 하자 희섭도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정자세를 하고 앉아서
"아니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앉으세요. 배 고플 텐데 식사하시면서 이야기를 하시지요!"
"예. 감사합니다."
윤미가 방석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자 곧 음식이 나오고 예린은 간단히 인사만 한 후 두 사람만 남겨두고 자리를 피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지요. 제가 은밀히 미국으로 송금을 할 일이 있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예. 명자언니에게 말씀은 들었습니다. 가능합니다."
"명자요? 아, 예린이! 하여튼, 가능하시다고요? 아무 흔적 없이 보안 유지 하면서요?"
"예, 공적으로는 안되고 사적으로요 그리고 위험수당도 좀 붙고요!"
"그야, 물론이지요! 어떻게 하시는 건데요?"
"말씀드려도 잘 이해가 안 되실지도 모르겠지만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원칙적으로 외환관리법상 거주자의의 1만 불 이상 외화의 해외송금은 한국은행에 신고를 해야 하고 5만 불 이상은 증빙이 필요하고 50만 불 이상은 법인이라도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하시는 송금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약간 변칙적으로 Swap이라는 거래를 통해서 환손실을 발생시키고 향후에 이자와 비용 그리고 목적으로 하는 송금 금액을 차감한 환 이익을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개를 묶지 않고 두 개의 별 개의 spot 거래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명목상으로 송금이 아니라 환거래 이므로 보고 의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법의 맹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문구상 해석의 모호성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변칙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요."
"예. 들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몰래 돈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이지요?"
"예. 하지만 이것은 상호 신뢰가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법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당사자 누구든 법적 보장은 받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우연한 인연으로 윤미 씨를 만나서 해결책이 나와서 다행입니다. 일이 잘 되면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을 겁니다. 또 정권이 바뀌면 윤미 씨처럼 이렇게 유능한 인재는 우리가 발탁을 해서 정계에 입문을 하시게도 하고.. 하하하하!"
희섭이 윤미의 비위를 맞추고 윤미는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 연락은 이 번호로 하시고 실물은 서로 믿을 수 있는 메신저를 활용하시도록 하십시오."라고 빠르게 말하며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고 일어선다.
희섭이 다시 엉거주춤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윤미는 방을 나선다. 태연한 척했지만 등골에서는 의도가 탄로가 날까 봐 식은땀이 흐른다. 명자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윤미는 인철의 숙소로 향했다.
윤미의 몸과 마음에 쌓인 긴장을 인철이 밤이 새도록 부드럽게 녹여주었다.
7장 일격
다음 날 출근을 한 윤미는 LA 지점에 출장 신청을 했다. 사유는 대충 둘러대고 1박 2일로 비행기 표를 끊은 다음 LA로 가서 미리 수배를 해 둔 교포 사업가의 명의로 뉴욕은행 통장을 하나 개설 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윤미는 희섭이 준 돈을 일부 전재무의 통장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가명 통장에 보낼 준비를 마치고 거사 일을 기다렸다.
한편 LA 할리우드 언덕배기 수영장이 딸린 호화 저택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전재무는 길희섭의 전화를 받았다.
"응, 그래 송금 준비가 다 되었다고?
수고했구먼 어떻게 길을 뚫었어?
응 응 그래 그래 자세한 거 까지 내가 알 필요가 있나?
그래 그래 안전한 건 확실하고? 이번엔 실수가 없어야 하네!
알았어. 그래 믿겠네.
그래"
전화를 끊고 환하게 웃어서 드러난 그의 이빨과 벗겨진 이마가 LA의 강렬한 태양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무슨 좋은 소식이 있나 봐요!"
그의 아내가 얼음 띄운 주스를 내오면서 묻는다.
"응, 좋은 일 있지! 돈이 오고 있다네... 드디어!"
"아휴 잘 됐네요. 안 그래도 가진 돈이 다 떨어져서 아쉬웠는데..."
두 사람이 같이 '깔깔깔 껄껄껄'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 소리에 그늘에서 자고 있던 셰퍼드 한 마리가 잠에서 깨어나 '컹컹컹'하고 허공을 보고 짖다가 꼬리를 치며 다가온다.
8장 거사
준비가 다 끝났다는 윤미와 선옥의 연락을 받고 드디어 거사일을 정했다.
약속한 날 서울에 있던 박기자는 탈북민 북한 인권 단체 사람들과 함께 파주로 향했다. 또 다른 팀도 포천과 연천 철원 고성으로 가고 있었다.
박기자 뒤를 따라오는 승합차에는 비닐 기구가 실려있었다. 일행은 통일로를 달려서 임진강 가 화석정에 도달했다. 고즈넉한 팔각정자 아래로 강물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비겁하고 무능한 선조가 백성이 있는 서울 방어의 시도도 안 해보고 거의 혼자 명나라에 목숨을 구걸하러 도망치던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 율곡 이이가 이 사건을 예견하고 한 밤 중에 왕이 도강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정자에 불을 지를 준비를 해 놓았다는 믿기지 않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비숍여사가 조선 최고의 절경이라고 칭찬을 했던 이곳에 바람과 강물은 흰 구름을 안고 고요히 흐르고 푸른 하늘에는 새들이 남과 북을 자유로이 날아가는 가운데 정자 앞마당에서는 이제 또 한 번 서글프지만 희망찬 역사의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몇 명 관광객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일행은 준비해 간 압축 기체통에서 호스로 연결하여 헬륨가스를 비닐 풍선에 채우고 아래 기구에는 1 달러와 2 달러 지폐를 가득 실었다. 이윽고 풍선은 파란 하늘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사람들의 소망을 싣고 풍선은 금세 북쪽 하늘로 사라져 갔다. 일행은 이어서 풍선 두 개를 더 날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비슷한 시각 포천과 연천 철원 고성에서도 달라 지폐를 실은 풍선이 날아올랐고 선옥이 있는 압록강 변에서도 북한 땅을 향해 무수한 풍선이 떠올랐다. 비록 내륙 깊은 곳까지 당도할 수는 없고 그 금액도 북한 사람들의 헐벗은 몸을 가리고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날 북한 하늘에는 돈 비가 내리고 주민들은 너도 나도 하늘에서 팔랑팔랑 떨어지는 푸른 달러를 주우며 기쁨과 희망을 맛보았다. 워낙 광범위하고 수량이 많아서 북한 당국의 하급 관리들도 통제는커녕 스스로 달려들어 횡재를 누리는 대열에 합류를 했다.
한편 그 시각 원주에 있던 상혁은 아직도 자신의 몰락을 모르고 있었다.
풍선을 모두 날린 선옥은 협조해 준 사람들에게 사례를 하고 서둘러 상하이를 거쳐 캐나다 Vancouver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Vancouver 공항에는 미리 약속한 현지 교민 민박집주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 시각 윤미는 딜링룸에서 LA 지점으로 전화를 걸러 미리 준비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배 부장은 이번에도 입이 한껏 찢어졌다.
"어이 강 과장! 대단해! 발이 엄청 넓은가 봐! 지난번에 LA 출장도 이것 때문에 갔다가 온 것이었어?"
"예. 현지 교민 중에 환거래를 원하는 분이 계셔서..."
"무얼 하는 분인지 손이 크시구먼!"
"예, 작은 사업으로 자수성가하신 분인데 재력은 대단하셔요!"
"그래? 그런 줄 알았으면 갔던 길에 좀 놀다가 오지 그랬어! 다음엔 출장비도 챙겨 줄 테니까 푹 쉬고 와! 이거 이렇게 실적이 좋으면 덕분에 우리가 연말 보너스 좀 두둑하게 받겠는걸! 강 과장도 차장으로 승진도 하고 말이야, 하하!"
"예. 고맙습니다. 그럼 전 볼 일이 있어서 좀 조퇴를..."
"그래 그래 나가봐 걱정 말고!"
배 부장이 손사래를 친다.
밖으로 나온 윤미는 바로 길희섭에게 전화를 넣었다.
"예, 윤미 씨! 어떻게 되었나요? 잘 되었나요?"
"예. 그게 좀 문제가 있어서 만나서 의논을 드려야겠어요."
"무슨 문제요? 뭔데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자세한 건 만나서..."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서?"
"예, 지난번 만난 곳에서 6시에... 괜찮으세요?"
"그럼요 나가야지요. 그때 뵙시다."
전화를 끊은 길희섭은 또 일이 그르쳤을까 봐 안절부절이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전재무에게 전화를 건다.
"예. 접니다. 혹시 돈 들어온 거 확인하셨나요?
네네 예? 만 불 밖에요?
아니요 아니요 좀 더 기다려 보세요 금방 다 들어갈 겁니다.
네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9장 타협
희섭은 약속한 6시까지 기다리기가 너무 초조했다. 시계를 보고 또 보아도 초침은 째깍째깍 흘러도 분침은 움직이지를 않는 것 같았다.
희섭은 5시 30분쯤 일찌감치 명자가 일하는 요릿집으로 갔다. 웬일인지 명자가 보이지 않았다. 주인에게 부탁해서 빈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윤미와 명자가 박만술 기자를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희섭이 웬일인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 입을 반쯤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데 세 사람은 맞은편에 털썩 앉는다. 박 기자가 입을 연다.
"우린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아니 누구신지요? 누구신데 이렇게 무례하게..."
희섭은 잘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른 척을 한다.
"제가 누군지 알고 있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긴 말 하지 말고 강윤주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인정을 하시면 돈의 절반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럼 윤미 씨랑 에린이 너도 사전에 짜고?..."
희섭이 윤미와 명자를 번갈아 쳐다본다.
두 사람이 말없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희섭은 체념을 한 듯 고개를 숙인다.
박 기자가 다시 다그친다.
"지금 당장 가부간 에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그 돈은 영원히 미국 땅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전화가 필요하면 하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예, 그럼 잠깐만..."
희섭은 전화기를 들고 옆 방으로 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재무에게 전화를 한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기가 죽어서 뭐라고 뭐라고 변명을 하고 지시를 받더니 다시 돌아온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무얼 해주면 되겠습니까?"
"지금 이 자인서에 서명을 하시고 육성으로 녹음을 하시면 돈의 4분의 1을 즉시 입금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실을 공표하면 나머지 4분의 1을 입금하겠습니다."
라며 무슨 내용이 적힌 A4 한 장과 작은 녹음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에도 약속을 안 지키면?"이라며 희섭이 윤미를 째려본다.
"믿지 못하면 할 수 없지요 뭐. 하지만 안 한다고 해도 그쪽에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 강도사건까지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요. 잘 협조해 주시면 피습 건은 너그럽게 빼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카드 하나가 남았다고 생각하셔도 좋고요!"
전재무가 방금 한 말과 완벽히 일치한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희섭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희섭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 기자는 녹음기의 버튼을 누르고 희섭은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는다.
"나 길희섭은 전재무 노진우와 공모하여 1980년 광주은행 지하금고에 보관 중이던 국고 2천억 원에 상당하는 금품과 현금을 강탈하여 은닉하였고
동 장소에서 유사한 금액을 강탈하고 강윤주를 살해한 정세영, 오상혁, 이영혜의 범행을 묵인 방조하였으며
이후 이를 감추기 위하여 동 삼인과 공모하여 거짓 사실을 유포하고 수사기관의 수사를 위력으로 방해 무마하였음을 자백합니다...."
읽기를 마친 길희섭은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고 윤미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윤미의 전화를 받은 박 기자는
"약속한 4분의 1이 입금되었으니 확인해 보시고 내일 9시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봅시다."
라고 뱉듯이 말을 하고 명자와 함께 밖으로 나간다.
10장 폭로
다음 날 아침 길희섭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으로 모든 사실을 밝힌 후 의원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동시에 선언하고 기자의 질문을 받지 않고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했다.
"의원직을 유지하면 불체포 특권을 누릴 수 있을 텐데 굳이 사퇴를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자금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희섭을 뒤따라 가며 질문공세를 퍼붓는 기자들에게도 희섭은 일언반구 응답을 하거나 시선도 주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입구에 대기 중인 차를 타고 황급하게 국회를 떠났다.
모든 TV와 라디오 신문은 그 날 뿐만 아니라 한동안 여와 야가 다 연루된 이 충격적인 음모와 범죄를 연일 특집으로 다루었고 국민들도 모이면 이 이야기로 분노하고 탄식을 했다. 물론 해외 언론에서도 취재와 보도를 했으며 검찰도 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오상혁과 이영혜는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며 길희섭과 정세영은 의원 신분을 고려하여 불구속 수사를 받았고 신기태는 사표를 내고 실각하였으며 전재무와 노진우에게는 범죄인 수배 조치를 내려서 국내에 발을 들이는 순간 체포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대금을 못 받은 북한 당국은 상혁의 공장과 설비를 모두 몰수했다.
한편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공로는 인철과 박 기자에게 돌아갔고 인철은 다시 한번 정의의 사도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세영은 수소문 끝에 캐나다에 있는 선옥과 연락이 닿았으나 선옥은 결별과 이혼을 선언했고 아이를 자신에게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후견인으로 부연을 지목했다.
절망에 빠진 세영은 아이를 부연에게 맡긴 후 유서도 없이 거실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범행을 시인했고 변호사들은 감형과 선처를 호소할 뿐이었다.
11장 복구
며칠 후 최인철은 청와대로 들어가서 조동근 대통령을 단독 예방했다.
"최 의원님! 이번 일로 국민들의 충격과 우려가 많고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많은데 그래도 최 의원님 덕분에 이렇게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입니다. 이렇게 오시라고 한 것은 사태 수습에 대해서 의논도 하고 부탁도 드리려고 불렀습니다."
"별 공로도 없이 부끄러운데 이렇게 과찬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성심껏 수행하겠습니다."
"예, 우선 사건 관계자들은 법에 따라 처리를 하면 될 것이지만 국정에 대해 혼란이 생긴 것은 어떻게 수습을 하면 좋을지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예, 우선 탈원전과 태양광 사업을 재검토하고 거의 폐기 수준으로 축소를 해야 합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우선 태양광 사업의 부작용이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선 무분별한 태양광 설비의 남발로 국토의 균형적이고 효율적인 활용에 저해가 될 뿐만 아니라 경관을 해치고 산사태의 우려가 있으며 일조량과 관련하여 용량대비 50%에도 못 미치는 태양광 발전의 비효율성 때문에 전력 원가에 부담이 되고 그것은 전력요금 인상요인이 되며 연간 2조 원에 달하는 보조금은 국가와 지자체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 패널을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무역수지에도 적자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런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막았어야 했는데 그걸 몰랐네요. 그럼 탈원전은 왜 또?"
"탈원전도 마찬가지로 전력 요금에 부담이 되어서 서민들 뿐만 아니라 기업에게도 경쟁력 약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반도체 철강 등 에너지 수요가 많은 제조업 중심인 우리 기업의 입장에서는 전기료가 주는 원가부담을 무시할 수 없고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국가 간 전력요금 격차를 줄이거나 낮추어 주는 노력을 국가가 해야 합니다. 또한 탈원전으로 생기는 전력 공백을 화력발전으로 메우면 대기의 질과 미세먼지 때문에 국민 건강에도 악영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원자력은 위험하다면서요?"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데 우리나라 원전 기술은 세계에서 인정하는 수준이고 우리 지형도 비교적 안정적입니다."
"다른 나라도 탈 원전을 한다는데..."
"그건 나라마다 사정이 다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독일 같은 경우는 주변에 대규모로 원전을 운영하는 프랑스가 있고 북해 풍력 발전 등 필요시 대체가 가능한 전력원이 많기 때문에 탈원전이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것도 기상 조건이나 국가 간 역학관계에 의존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사실상 섬나라나 마찬가지여서 전력 공급을 의존할 곳이 없습니다. 발전 자립을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대만은 이미 탈원전을 철회했습니다.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은 검토해 볼 수 있지만 지금처럼 갑작스러운 중지는 문제를 더 많이 야기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다음은 뭔가요?"
"지나친 무상 현금 복지와 기본소득 보장을 줄이고 재정 건전성을 높여야 하며 연금개혁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건 지난번에 사회복지 수석이 괜찮다고 했는데..."
"아닙니다. 그것도 숫자의 놀음입니다. 그것의 부작용도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이미 연금기금이 고갈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보다 국민연금을 40년 가까이 먼저 도입한 나라의 이야기이고 그렇다고 해서 연금기금 고갈이 당연하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기금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당연히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처럼 출산율이 저조한 나라에서는 향후 피부양 인구 대비 부양 인구의 비율이 급격히 낮아지기 때문에 연금 지급이 불가능하거나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최소한의 양식만 가지고 인구 구조도를 보아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을 괜찮다고 하면 이건 사기입니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지금 젊은 층의 국정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지금의 공짜 정책이 곧 자기들의 미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국가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국가 총부채가 GDP 대비 40%를 넘어섰는데 이는 IMF가 권고하는 국제통화 비기축국의 국가 부채 수준을 상회하는 것이며 지금의 추세로 그대로 가면 10년 후에는 50%를 넘어설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조금 인기를 잃고 일부 저항과 고통이 따를지라도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허리띠를 졸라 매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 충심으로 설득을 하시면 국민들도 인정을 할 것이고 진정으로 여론도 좋아질 것입니다."
"하... 쉽지는 않겠지만 적극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도연명 수석은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물색해 봐야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최 의원이 이번에 입각을 해서 국정을 같이 꾸려가면 어떨까요?"
"예, 제가 필요하다면 미진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게요 처음부터 최 의원 말을 좀 들어볼 걸 그랬어요. 그리고요 또 있나요?"
" 그다음은 안보와 노동 경제 정책입니다."
"아이고 끝이 없군요. 최 의원의 식견이 이렇게 높은 줄 미처 몰랐네요. 그건 또 차차 논의하도록 하고 지금 국민들이 전 대통령들의 비자금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그건 어떻게 되었나요?"
"예, 전부는 못 찾고 일부 회수를 했습니다. 곧 혐의자 재판의 판결이 나면 국고로 환수하는 절차를 정식으로 밟겠습니다."
"아, 그러면 되겠네요. 제가 그렇게 발표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고 좀 쉬었다가 천천히 더 이야기를 나눕시다."
최인철은 그날 밤늦게까지 대통령과 수습방안을 논의하고 귀가했다.
12장 귀로
단비가 내려 용지에 맑은 물이 찰랑찰랑 그득하고 한쪽 배수로에는 넘치는 물이 '쏴아아-' 시원한 소리와 함께 하얀 물보라를 뿌리면서 둑 아래로 흘러내린다. 김용사로 올라가는 길 쪽으로 그늘 막이 있는 벤치가 있고 그 주변에 인철과 명자, 부연이 앉아서 용지의 물을 바라보고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부연이 도련이와 자그마한 돌멩이를 주워서 연못에 던지며 물수제비를 뜨며 놀고 있다. 인철의 무릎에는 보자기에 싼 둥근 자기 유골함이 놓여있다.
"여기가 윤주가 발견된 곳인가?"
"응, 윤주의 어린 시절 추억이 어린 곳이기도 하고.."
인철의 차분한 물음에 명자가 착잡한 어조로 대답을 한다.
"그럼 세영의 유골을 여기에 뿌려도 될까? 윤주가 좋아할까? 정작 윤주는 한강 세미원에 있는데..."
"둘이 만일 만나면 뭐라고 할까? 서로 용서할까?"
"윤주 오빠 같으면 분명 용서했을 거예요. 오빠가 평생 남을 미워하는 걸 저는 본 적이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윤미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사람은 억울하게 죽고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 있고..."
명자도 따라서 흐느낀다.
인철이 한 손을 뻗어 들썩이는 윤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그래, 어쩌면 우리 모두가 시대의 희생자인지도 몰라. 세영선배도 그렇고..."
"..."
모두가 한 동안 말이 없이 연못에 곱게 핀 연꽃과 푸른 연잎 그리고 그 위에서 무심하게 팔짝거리는 개구리, 철없이 까르르 웃으며 놀고 있는 도련이를 보면서 감정을 추스르고 눈물을 닦는다.
"그래, 윤주는 이제 없지만 우린 모두 윤주의 아바타인지도 몰라. 저 연꽃이 계절에 따라 피고 지고 열매를 맺고 하듯이 윤주의 뜻과 영혼이 우리를 모았다가 흩었다가 앞으로 가게하고 있는 걸 거야. 윤주는 없어진 게 아니야 윤주 덕분에 세상은 조금 더 나아졌고 그래서 윤주는 우리 가슴속에 또 저 아이들의 미래에 영원히 살아있을 거야.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형태는 달라졌어도 저 바람과 구름과 꽃과 물속에 함께 있는 거야!"
인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유골은 금용사에 안치하자. 아무래도 여기에 뿌리면 다음에 올 때마다 마음이 좀 슬플 것 같아!"
인철의 말에 모두가 무언으로 동의를 한다.
"그럼 이 벤치 옆에다가 나무 한 그루 심고 윤주 이름을 명패로 하나 새겨 놓으면 어떨까요?"
명자가 제안을 한다.
"그 좋은 생각이네. 우리 올라가기 전에 아예 마무리 하고 가자."
인철이 동의한다. 일행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인철이 유골함을 들고 일어서서 길을 따라 금용사로 걸어가자 윤미와 명자가 가볍게 손을 잡고 뒤 따른다.
이어서 부연이 도련이를 업고
"엄마 보러 가야지... 캐나다에 가야지"라고 자장가를 부르며 뒤를 따라간다.
아버지를 따라 금용사에 가던 소년 윤주도 누나의 등에 업혀서 새근새근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