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귀로2

귀로 2부

by 이윤수

2 부 갈림길


신뢰는 모래성과 같아서 쌓기는 지난하고 허물어지기는 순간이다.

소망은 물에 비친 그림자 같아서 붙잡으면 사라진다

사랑은 마음에 새긴 비석 같아서 지워도 닦아도 영원히 남는다

명예는 흰 옷을 입고 진흙 길을 가는 것 같아서 오점 없이 지키기가 어렵다.


1장 승천


"이 저수지 이름이 용지라고?"

"예, 저 위에 절 이름이 금용사인데 절을 지을 때 금빛 용이 자기 집을 절에 내어주고 여기서 승천을 했다나 봐요."

"용은 무슨... 그 다 구라야. 괜히 절 지을 돈을 모으려고 신기한 이야기를 꾸며낸 거겠지 뭐! 이 조그마한 못에 무슨 용이 살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말. 암튼 그나마 가뭄이 들어서 연못에 물이 한 방울도 없어요!”

“그러게, 요즘엔 장마철에도 비 구경을 못 하겠어…”

“이게 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는데요? 이러다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닌 지 몰라요?”

“참, 걱정도 팔자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현장 보존이나 마무리해.”

“예. 거의 다 됐습니다. 엠뷸런스 오면 시신 옮기면 됩니다. 그나저나 이거 가뭄이 아니었으면 이 시체는 영영 발견도 안 되었을 거 같아요.”

“꼭 그렇지 만도 않지! 제대로 안 해서 그렇지 원래는 저수지들을 정기적으로 준설을 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땐 물을 빼내고 바닥을 파내게 되니까 그때 발견 될 수도 있지.”

“그럼, 이 시체는 최근 준설 이후에 유기된 거겠네요?”

“좋은 생각인데 별 도움이 안돼. 안 그래도 농어촌 공사에 알아봤는데 마을에서 관리하는 소규모 저수지라 군에서 2년 전에 안전점검만 한 번 했고 정식으로 준설을 한 건 기록에도 없어.”

“그래도 시신이 뼈밖에 없고 복장도 보면 상당히 오래전에 사망한 거 같아요.”

“그렇지? 저 교련복과 훈련화는 요즘엔 입는 사람이 없지?”

"그래도 교련복에 이름표가 있으니 신원파악은 비교적 쉬울 거 같습니다."

"그래? 식별이 되나?"

"예, 퇴색은 되어있지만 재봉실로 새긴 거라 보존이 잘 되어있습니다. 강 윤주라고..."

"알았어. 내가 바로 서에 들어가서 신원조회 돌려봐야겠네."

“근데, 김 형사님, 이거 좀 조심스럽긴 한데요…. 척 봐도 광주사태 때…”

“이 사람이…. 말 조심 해! 잘못하면 골치 아플 수 있으니까 마을 사람 모이기 전에 빨리빨리 현장 보존하고 시신이나 옮겨.”

“벌써 볼 사람은 다 봤는데요 뭐. 최초 발견 신고자도 그렇고 저기 마을 사람들도 다 알아요.”

이 형사는 저만치 둑방 끝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 참, 말이 많네. 어쨌든 기자들이라도 오기 전에 얼른얼른 처리하자고… 엠뷸런스 현 위치 파악해 봐”

“네.”

이 기백 형사가 무전을 하는 동안 김 대진 형사는 담배를 한 대 빼 물었다.

사건 현장, 아무리 자주 나와도 익숙해지지 않는 곳, 이번엔 어떤 사연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풀어야 할 억울한 사연의 주검이 또 하나 바짝 마른 진흙에 반쯤 묻혀 있었다.

“20분 내에 도착한답니다.”

“알았어. 그럼 난 먼저 서로 들어갈 테니까 이 형사는 엠뷸런스 동승하고 검시 의뢰까지 하고 서에서 만나. 둘 다 갈 필요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이 형사는 땡볕에 혼자서 한 참 더 있어야 한다는 게 불만이었지만 선임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김 형사는 이 형사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경찰차에 올랐다. 차가 들어왔던 둑방길이 저수지 끝에서는 좁은 농로로 바뀌어서 절로 통하는 산길로 이어지고 있어서 나가려면 후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후진을 해서 마을 사람들이 서 있는 곳에서야 차를 돌릴 공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차를 돌려놓고 김 형사는 차에서 내렸다.

“안녕들 하세요? 영동서 강력계 김 형삽니다. 혹시 아는 사람은 아니시지요?”

“몰라유. 가차이 보지도 못했지만 본다 한들 누군지 알겠어유?”

그중 가장 연장인듯한 노인이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혹시 이장님 계신가요?”

“네, 제가 이장인데유..”

녹색 새마을 모자를 쓰고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었지만 팔뚝이고 장딴지고 노출된 맨 살은 모두 햇빛에 까맣게 그을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한 걸음 나섰다.

“수고 많으십니다. 현장 주변엔 접근을 삼가하도록 하시고 혹시 최근에 저수지 부근에서 수상한 사람이나 차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거든 이 번호로 전화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형사는 이장에게 명함을 건넸다.

“예, 알겠어유. 근데 무슨…..”

“아직 초동이라 뭐라 드릴 말씀은 없고 뭔가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김 형사는 말을 자르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저수지 아래로 마을을 돌아 비포장 도로가 구불구불 간선도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김 형사는 먼지가 날리지 않게 천천히 차를 몰아서 큰길에 들어섰다. 쭉 뻗은 포장도로에 들어서자 그는 괜히 경광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경찰서로 내달렸다. 서에 도착하자 그는 곧바로 수사과장실로 올라갔다.

“현장 다녀왔습니다.”

최 과장은 마침 혼자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응, 수고했어”

최 과장은 주식시세라도 보는지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고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저 과장님 문제가 좀 있는데요…”

“응? 뭔데? 뭐 벌써 단서라도 나왔어?”

“아무래도 정치적 판단이 좀 필요한 것 같아서요…”

최 과장이 컴퓨터 화면을 닫고 책상에서 일어나 회의용 의자로 옮겨갔다.

“문 닫고 앉아.”

김 형사는 최 과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검시 결과도 봐야 하겠지만 사망자의 복장이… 아무래도 광주사태 때 희생자일 가능성이 있어서 섣불리 접근하기가…”

“그래? 보도통제가 가능하겠나? 신고자도 민간이라면서?”

“네 그래서 어렵긴 하겠는데 그래도 미리 윗선에 보고를 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알았어. 그건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요즘 어떤 세상인데 그러면 그런 거지 뭐 오히려 밝히면 더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어. 이 형사한테도 너무 앞서 가지만 말게 하고 원칙대로 수사해.”

“알겠습니다. 상황 나오면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수고.”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김 형사는 좀 머쓱해하면서 최 과장의 방을 나섰다.

‘하긴 요즘은 경찰들도 정치를 한다더니... 제길, 과장 나부랭이까지... 그냥 수사나 하면 될 것이지... 무슨 줄을 대보려고...

김 형사는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머릿속이 한결 더 복잡했다.


2 장 검시


“사인이 나왔습니까?”

김대진 형사는 과학수사 연구소의 검시관 사무실 문을 열면서 다짜고짜 물었다.

“이 사람이 왜 이리 급해? 차 한 잔 마시며 보고서부터 읽어봐.”

매일같이 변사체를 다루는 의사라기보다는 동네 슈퍼 아저씨처럼 수더분한 인상의 주성진 검시관은 안경을 책상 위에 벗어놓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후 검시 보고서를 김 형사에게 내밀었다. 김 형사는 검시 보고서를 보며 중얼거리듯 읽어나갔다.

“결정적 사인은 총상, 사망시기는 약 10년 전, 성별 남자, 나이 25세 전후…. 예상 대로구만요.”

“무슨 예상?”

커피를 건네면서 주 검시관이 물었다.

“뻔한 거 아닙니까?”

“세상에 뻔한 게 어디 있어?

자네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이 사실이 아닌 걸로 나중에 밝혀지는 것은 없을까? 뻔하다는 그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억울함이 어둠 속에 묻혀버렸을 거 같나?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선입견을 버려야 진실을 제대로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해.”

주 검시관이 정색을 하고 김 형사를 쳐다보았다

“….”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문 검시관의 눈빛에 김 형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자네가 생각하던 거는 뭔가?”

“광주사태 때….”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그럼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광주사태까지는 맞아. 그런데 보고서에 안 나와 있는 좀 이상한 게 있어.”

“이상한 거요?”

“응, 나도 처음엔 그냥 넘어갈 뻔했는데 총상이 좀 달라.”

“어떻게요?”

“이리 와 봐.”

문 검시관이 김 형사를 검시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문 검시관이 검시대를 덮고 있는 하얀 천의 한쪽 부분을 들치니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두개골이 보였다. 문 검시관은 두개골 위에 선명하게 보이는 파열된 구멍을 가리켰다.

“어때?”

“이게 총상입니까?”

“그렇네.”

“근데 입사구는 어디입니까?”

“이게 입사구네.”

“예? 그렇다면 뒤통수를 맞았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네.”

“그럼 도망가다가?…”

“그럴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

문 검시관은 되묻듯이 김 형사를 바라보았다.

“…”

김 형사도 놀라움과 혼란스러움에 입을 약간 벌리고 말없이 문 검시관을 쳐다보았다.

“자네의 그 뻔한 상식으로는 이게 어떻게 해석되나?”

화가 난 듯 퉁명스러운 문 검시관의 말투에 김 형사도 기분이 언짢았지만 평소에 사람 좋았던 그의 미소를 생가하며 애써 내색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처형!”

“그래.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야. 파열구를 자세히 봐. 이건 M16 총상이 아니야. M16이었다면 입사구 지름이 1 센티 미만이고 파열이 이렇게 많으면 안 돼. 탄환이 워낙 작고 회전수가 빨라서 깔끔하게 들어가야 되는데 이건 너무 크고 많이 부서져 있어. 마치 망치로 맞은 것처럼…”

“그럼? M1? 설마?”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

“만일 그렇다면 이건 정부군 희생자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지.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심각하지. 역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몰라.”

김 형사는 이제야 문 검시관이 오늘 왜 이렇게 심각한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여기까지네. 이걸 어떻게 풀어갈 건지는 자네들 몫이지만 그냥 수많은 희생자들 중의 하나라고 쉽게 넘어가지는 않길 바라네. 검시보고서에는 이런 추측까지 쓸 수는 없네. 그냥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뿐이네만 난 그래도 자네가 이 사건을 맡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문 검시관은 시체를 천으로 다시 덮고 돌아서서 사무실로 걸어갔다. 김 형사는 문 검시관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말에 서운했던 감정이 금방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좋아졌던 기분은 잠시, 이 사건이 가져올 수 있는 파장을 생각하면서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김 형사는 커피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문 검시관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연구소를 나섰다.

김 형사가 수사과장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오늘도 컴퓨터 모니터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과수연에 다녀왔습니다.”

“응, 사인은 나왔나?”

“네, 여기 검시 보고서입니다.”

과장은 그제야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고 보고서를 펼쳐보았다. 말없이 건성건성 보고서를 읽던 과장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이게 뭐야? 두개골 정수리 후부 총상?”

‘역시 짬밥을 헛 먹은 게 아니로구나..’

김 형사는 마음속으로 혀를 내 둘렀다.

평소에 대충대충 넘어가는 듯 하지만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귀신같이 지적하는 최 과장이었다.

“예. 맞습니다.”

“검시관은 뭐래?”

“특별한 말을 없었습니다. 보고서에 있는 그대로라고…”

최 과장이 감을 잡은 이상 김 형사는 좀 더 확실해질 때까지는 문 검시관과 나눈 이야기는 덮어두기로 했다.

“이거 이상하잖아? 김 형사 생각은 어때?”

“최소한 평범한 광주사태 희생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평범하다니? 광주사태 희생자가 묻혀 있다가 이제야 발견된 것만 해도 정치적으로 얼마나 큰 사건인데 게다가 교전의 희생자가 아니라 살인이나 처형의 정황이 있다면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니야. 일단 좀 더 알아보기로 하고 내가 지시할 때까지는 그냥 변사체 발견 정도로 보도자료를 내보내.”

“알겠습니다.”

김 형사는 대답은 하고 수사과장의 방문을 나섰지만 그 정도로 기자들을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형사가 수사과로 들어서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박 만술 기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저 인간 뭐 또 냄새를 맡았구먼..’

김 형사는 건성으로 목례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앉으며 검시 보고서를 서랍 속에 넣었다.

“용지 저수지 변사체, 사인 나왔어요?”

박 기자는 능글능글 웃으며 김 형사의 책상에 기대어 섰다.

“예, 곧 보도자료 나갈 거예요.”

“광주사태 희생자란 소문이 있던데?”

‘귀신같은 놈.’

원래 형사들에게 기자들이란 성가신 존재이지만 오늘은 죄지은 것도 없이 기자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숨기고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특히 더 짜증스러웠다.

“누가 그래요? 아직 수사 시작도 안 했는데 큰 일 날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가? 그래도 동네 사람들이 수군수군 하던데?”

“아, 그럼 거기 가서 취재하세요. 여기 와서 귀찮게 하지 말고!”

김 형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 어 어, 이거 수상한데? 뭐 있는 거 아닌가? 왜 이리 화를 내고 그러실까?”

박 기자는 김 형사의 호통에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아이, 맘대로 하세요. 소설을 쓰시든지 말든지 그건 박 기자 맘이고 난 털어봐야 한 마디도 할 말이 없으니까 이따가 보도자료나 가져가세요.”

“아이 왜 이러실까? 피곤하신가 본데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내가 쏠게.”

“됐네요.”

“아니야, 요 앞에 냉면 집이 새로 개업을 했는데 아주 맛있더라고. 속초식이라나 함흥식이라나 가자미식해로 고명을 얹었는데 매콤 달콤한 게 더운 데 입맛이 확 돌아오더라고…”

“암튼 저는 됐으니까 박 기자님이나 다녀오세요. 바빠요.”

“알았어. 그럼 일 끝내고 봐!”

박 기자가 아쉬운 듯 어슬렁어슬렁 수사과를 나가고 있을 때 최 과장은 서장실에서 서장의 전화보고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남성 서장은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 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오려는지 파란 하늘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장은 구름에 시선을 둔 채로 혼자 말처럼 최 과장에게 말했다.

“최 과장 고향이 어딘가?”

“제주돕니다.”

“음… 나이는?”

“마흔 다 되어갑니다.”

“경찰대?”

“아닙니다. 간부후보 12기입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요…”

“나는 그때 경찰대학생이었어.”

서 서장은 이 말로 모든 것을 설명이라도 한 듯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우선 신원 파악부터 해봐. 위에서는 덮을 수 있는 데까지 덮으라는데 난 좀 더 알아보고 판단해야겠어. 실종자 명단이 있을 테니까 대조해 보고 아직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되 기밀로 해서 수사하고 뭔가 나오면 바로 내게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서장실 문을 닫고 나서는 최 과장은 서장과 달리 어쩌면 이 사건이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3 장 정치


“틀림없는 광주사태 희생자입니다.”

최갑진 수사과장은 누가 들으면 안 된다는 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깨와 고개를 잔뜩 숙이고 신기태 국회의원에게 속삭였다.

“그럼, 신원은 밝혀졌나요?”

“아직이요, 실종자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서 유전자 대조를 하고 있는데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정황으로 봐서 광주사태 희생자가 맞습니다.”

“근데 왜 아직 발표를 안 하지?”

“치안본부 쪽에서 자꾸만 덮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나 서장 의지는 아닌 것 같고 더 윗 선이 개입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덮긴 뭘 덮어? 이 사람들이 정신이 없구먼!”

신기태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건 그냥 희생자가 아니라 고의적 사살인 것 같습니다.”

“사살?”

“네, 처형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처형?”

“예, 희생자가 총을 여기를 맞았거던요..”

최 과장이 자기 검지 손가락을 권총 모양으로 해서 자신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꿇어 앉혀놓고 뒤에서 사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요?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내 절대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암튼 고맙습니다. 이렇게 최 과장처럼 정의와 양심을 지키는 경찰이 있으니 이 나라가 아직도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처리할 테니 걱정 말고 계십시오.

혹시 앞으로도 애로사항이나 서로 협조할 사항이 있으면 주저 말고 연락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지휘계통을 밟으려 했는데 자꾸만 미적거리는 것이 걸려서..”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제가 다른 경로로 정보를 입수한 걸로 할 테니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최 과장이 의원실을 나서자마자 신기태가 인터폰을 눌렀다.

“안 보좌관 있나? 있으면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안 보좌관입니다.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보좌관이 수첩을 들고 의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광주사태 실종자 명단 좀 파악해 보고 조만간 기자회견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근데 기자회견은 무엇에 관한 건지?”

“아, 그건 좀 더 있다가 말해줄 테니 우선 실종자 자료만 빨리 알아봐 주세요.”

“예.”

보좌관은 짧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그 시간 나남성 서장은 서장실에서 경찰청장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도자료 내보내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서장은 최갑진 수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선전화를 안 받자 휴대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딘가?”

“네, 지금 서로 가는 중입니다. 곧 도착합니다.”

“들어오는 즉시 김 형사랑 내 방으로 오게.”

“네 알겠습니다.”

최갑진을 기다리며 서장은 수사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갑진이 김대진 형사와 함께 서장실로 들어섰다.

“보도 자료는 준비됐나?”

“네, 여기 가져왔습니다.”

최 과장이 나 서장에게 결재판을 내밀었다.

결재판에서 보도자료 초안을 꺼내서 말없이 읽던 서장이 손으로 회의탁자를 가리켰다.

“잠시 좀 앉아봐.

다 좋은 데 여기 사살이라는 표현은 좀 빼는 건 어떤가? 그냥 사망이라고 하는 게 더 객관적이지 않은가? 사살이 오히려 좀 추측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래도 그냥 일반적인 총상이 아니라서..”

김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받았다.

“나도 경찰청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어. 처음엔 경찰청에서도 광주사태 희생자로 단정 짓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는데 내가 숨김없이 발표하자고 주장해서 허가를 받은 거야. 하지만 이것 만으로도 정치적 파장이 클 텐데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네.”

“김 형사, 그렇게 하지… 서장님 말씀이 옳아요.

우리가 그때 상황을 다 알 수는 없잖은가? 혹시라도 사실과 다르면 상상으로 소설을 쓴 꼴이 되어서 우스워질 수도 있어. 아니 우스운 정도가 아니라 책임지지 못할 일이 생기면 어떡할 텐가?

그냥 있는 그대로 객관적 사실만 발표하세.”

“예, 알겠습니다.”

김 형사도 수긍했다.

“그럼, 수고하게.”

두 사람을 내 보내는 서장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보도 자료가 나가면 분명히 기자들이 몰려오고 정치권에서도 호출이 있을 텐데 나 서장으로서는 그 모든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한편, 서장실을 나서는 최 과장은 일이 뜻대로 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보도 자료가 초안대로 나갔으면 오히려 자신이 신 의원을 찾아가서 준 정보의 가치가 희석될 수도 있는데 이렇게 수정이 되면 자신의 정보가 핵폭탄이 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형사, 좋은 게 다 좋은 거야. 우리 공직자는 말이야 복잡하게 정치에는 말려들지 않는 것이 최상이야.”

김 형사는 최 과장의 달래는 듯한 말에 오히려 빈정이 상했다.

“누가 뭐라던가요? 누가 할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최 과장은 속으로 뜨끔하기도 하고 기분도 상했지만 모른 척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9시 뉴스와 다음 날 조간신문의 머리기사는 모두 ‘광주민주화 운동 희생자 추가 발견’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광주사태 재조명 특집 방송들이 나오고 정치권에서도 운동권 출신들이 자신의 행적과 그 때문에 겪은 고난을 자랑스럽게 증언을 했고 그에 가담하지 않은 여권 인사들은 갑자기 언론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모든 소동들도 며칠 후 나온 신기태 의원의 기자회견에 비하면 태풍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신기태 의원은 운동권 출신 야당 국회의원을 10명 정도 대동하고 발표문을 읽어나갔다.

“경찰과 여당은 열사를 두 번 죽이고 있다.

희생자는 경찰의 발표대로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교전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계엄군에 의해서 처형되고 시신이 유기된 것이다.”

신기태가 잠시 말을 멈추고 옆으로 물러나자, 뒤에 배석하고 있던 의원 한 명이 확대된 사진 한 장을 쳐들었다.

신기태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며 말을 이어갔다.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희생자는 두부 후상부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이는 교전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체포 후 고의적으로 처형당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정부와 여당 그리고 경찰이 아직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이를 감추고 덮으려고 한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현 정권의 뿌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들이 누구를 비호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의원과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밝히고 관련자들을 추가로 처벌할 수 있도록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이번 일을 계기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을 재 발굴하고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함은 물론 충분한 보상이 있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임을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시길 바라며 책임자의 처벌이 없이는 이 땅의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민주 시민 여러분, 다시 한번 뜻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4 장 역공


한편 청와대에서는 노진우 대통령과 전재무 전 대통령 그리고 길희섭 국회의원이 Tv로 신기태 국회의원의 기자회견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입장문 발표가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자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전재무가 리모컨으로 tv를 꺼버리고 ‘탁’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부서져라 내려놓는다. 전재무는 오랜만에 청와대에 들어온 것이 신이 나는지 마치 자기 집 안방에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하고 노진우가 오히려 식객이라도 된 듯 좌불안석이다.

“이제 어떡할 거야? 내가 잘 치우라고 하지 않았어? “ 노진우가 짐짓 길희섭에게 호통을 치면서 위엄을 부린다.

“죄송합니다.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그냥 던지지도 않고 공을 들여서 바닥에 완전히 묻었는데… 이렇게 저수지 바닥이 드러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홍성이야? 광주에서 죽었는데 굳이 그 먼 곳에?.. “

“예 그건 그놈 고향이 그 근처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실족사 정도로 처리하려고…”

“잘한다. 그 정도까지 생각한 놈이 명찰까지 달린 교련복은 그냥 두었어? 아예 광고를 하지 그랬어! 여기 광주 시체 있다고! “

“…”

“머리에 총상은 또 어떡하고? 응? “

“…”

“나도 이제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저 놈들이 이 일을 빌미로 공격을 해댈게 뻔한데 그러다가 정권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건가? 응? 우리 모두 작살 나! 감빵을 갈 수도 있다구!”

노진우는 계속 다그치고 길희섭은 할 말이 없다.

그때 전재무가 조용히 입을 연다.

“임자들 호들갑 떨지 말고 좀 조용히 해봐!”

화를 잔뜩 낼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전재무를 두 사람이 놀라서 쳐다본다.

노진우는 속으로

‘씨발 놈! 지 일이 아니라고 아주 태평이구만! 근데 이게 어떻게 지 일이 아니야? 지가 우리보다 더 크게 엮여있으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속을 감추고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라고 묻는다.

“물론 있지!”

전재무가 느긋하게 뜸을 들인다. 안달이 난 길희섭이 조른다.

“그게 뭔데요? 빨리 말해주세요. 답답해 죽겠네!”

전재무가 탁자에 놓인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연다.

“청와대 커피 맛이 왜 이래? 주방장 바꾸었나?” 고 딴청을 부린다. 다른 두 사람은 속이 터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은근히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기에 임자들은 나보다 한 수 아래란 말이야! 자 잘 들어봐! 이건 잘만 풀어내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어떻게요?”

“이 건에는 저쪽에도 뒤가 구린 놈들이 있지?”

“예, 정세영이 하고 또 여자애 하나요! “

그놈들을 몰래 접촉해 봐. 그래서 그냥 강도사건으로 무마하고 대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걸로 말이야! 안 그러면 우리도 폭로할 거라고 응 우린 이왕 이판사판 같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그래 봐! 그러면 지들이 알아서 덮을 거야. 우린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지! “

“아하! 그런 수가 있었군요! 역시!…”

두 사람이 탄복을 하며 전재무를 치켜세운다.

“ 안 그래도 혹시 이번 대선에서 지면 어떡하나 고민이었는데 오히려 잘 되었어. 내친김에 나 망명도 보장해 달라고 해봐!”

“우리는요?”

“어허! 이렇게 질 생각부터 하면 어떡하나? 기를 쓰고 이길 생각을 해야지!”

전재무가 핀잔을 주자 길희섭이 꾸중들은 강아지마냥 풀이 죽는다.

“이런 일에 대통령이 나서면 격이 안 맞으니까 길 의원이 수고 좀 해줘!”

“옙 알겠습니다.”

궁지에 몰렸던 쥐가 활로를 찾은 것 마냥 환하게 웃으며 길희섭이 대답한다.

노진우도 안심이 되는지 일어서서 장식장에서 양주와 얼음통과 유리잔 3개를 꺼낸다.

“자 건배! 정권 재 창출을 위하여!”

노진우의 제의에 모두

“위하여!”를 외치며 술잔을 입에 대고 기울인다.


5장 후회


“뉴스 봤나요?”

주성진 검시관이 김대진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우리 만나서 이야기 좀 합시다. 저녁이나 함께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퇴근 후 대전시내 중화요리 집에서 만났다.

“일식은 좀 그렇고 그나마 조용한 룸이 있는 곳이라 이리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먼저 와 있던 김 형사가 주 검시관을 맞이했다.

“예, 저도 좋습니다. 오랜만에 자장면이랑 탕수육 한 번 먹어보지요.”

“알겠습니다. 저는 짬뽕을 먹지요.”

요리를 주문하고 두 사람은 방문을 닫고 가까이 앉았다.

“이건 아니야. 신기태 의원도 예전의 그 진정성이 없어졌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이렇게 쉽게 광주사태 희생자라고 단정 지으면 안 돼. 난 처음에 현 정권 쪽에서 일을 대충 덮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야당 쪽이 더 난리네. 근데 신 의원은 어디서 정보를 입수한 겁니까?”

“글쎄요? 요즘엔 야당 쪽에 끈을 대고 있는 경찰들도 많고 신 의원이 워낙 발이 넓어서 아무래도 경찰 쪽에서 누군가 흘렸겠지요?”

김 형사는 최 과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굳이 증거도 없는 짐작으로 최 과장의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흘렸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사실이 왜곡되니까 문제가 아닙니까?”

“그럼 검시관님은 이 일이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수사야 경찰에서 하셔서 밝힐 일이지만 변사체가 단순한 교전의 희생자는 아니고 신 의원이 주장하듯이 처형된 것도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히려 시민 군 쪽이 가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피해자가 정부군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순 없고요.”

“죄송하지만 너무 비약하시는 건 아닌가요? 사용된 총기만 가지고 그렇게 확대 해석하시면 좀…”

“아니, 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으니까 좀 더 확실히 밝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고 정치적 논쟁만 한다면 진실이 밝혀질 길이 요원하다는 겁니다. 경찰은 수사를 계속하고는 있는 겁니까?”

“예, 근데 이상한 것이 실종자 가족 누구 하고도 DNA 유사성이 없어서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신고가 안 된 실종자가 있는 건 아닐까요?”

“글쎄요.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엔 희생자들이 모두 복권되고 유가족들에게는 보상 등 각종 혜택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실종자를 신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요? 이건 좀 조심스러운데 혹시 다른 범죄의 희생자인데 광주사태 희생자로 위장되었을 가능성이나 시민군끼리 오인 사살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검시관님, 이거 너무 비약되는 거 아닙니까? 저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봤는데 너무 깊이 파기엔 저도 부담스럽습니다. 지금 경찰 내의 분위기는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되도록 조용히 끝내자는 쪽입니다.”

“아무튼 신원 파악이 관건입니다. 그래야 실타래가 풀려 나갑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신원 파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근데 검시관님이 이 사건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 형사의 조금은 당돌한 질문에 주성진은 즉답을 피하고 대신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 다 식겠습니다. 우선 드시면서 이야기합시다.”

한 동안 말없이 자장면을 먹던 주성진이 젓가락을 놓고 말을 이었다.

“김 형사님은 강 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강 기훈의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과수연의 필적 감정 결과가 증거로 채택되는 바람에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썼고 이제야 진실이 밝혀지면서 과수연도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근데 과수연에서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감정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인정을 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이 어느 쪽인지는 삼척동자도 다 짐작할 수 있는데 그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에 불과합니다. 그동안 과수연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절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역시 이번에도 가만히 있는 것이 제 개인에게는 더 좋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제2의 대필 사건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제가 나중에 담당 검시관이었다는 오명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판단으로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거나 진짜 책임 질 사람이 백주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며 웃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식탁 옆에 내려놓았던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김 형사를 바라보는 검시관의 눈 빛이 결연해 보였다.

“그야 그 점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게 현실적으로 참 쉽지 만은 않습니다. 때론 타협도 해야 하고… 법이란 이름으로 진짜 나쁜 놈들 보다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김 형사님과 의논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다 비슷하겠지만 저도 그때 서울에서 데모 좀 가담한 거 외에는 아무것도 못한 게 항상 죄지은 마음이었는데 최소한 이번 사건의 진실마저 덮여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 검시관과 헤어진 후 서로 돌아온 김 형사는 곧바로 이기백 형사를 찾아갔다.

“용지 저수지 변사체 신원 파악 진전이 있나?”

“실종자 대조는 끝났는데 아직 나온 게 없습니다.”

“그럼 80년 전 후로 일반 범죄 수배자나 실종자와 한 번 대조해 봐.”

“뭐 집히는 거라도 있습니까?”

“응, 이제는 사태 희생자가 아닐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를 해봐야 할 거 같아서..”

“그건 이미 결론 난 거 아닙니까?”

“사망 시기와 복장, 총상 만으로 낸 결론이야. 모두 개연성과 짐작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어. 세상에, 사망자 신원도 아직 안 나왔는데 모두들 너무 앞서가고 있어.”

화가 난 듯 단호한 김 형사의 말에 이 형사는 대꾸도 못하고 회전의자에 앉은 채로 컴퓨터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려 범죄 사건 데이터 검색 작업에 들어갔다.


6장 야합


한편 그 시간 서울의 한 고급 한식집 내실에서는 길희섭 의원이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시는 동안에 차라도 한 잔 올릴까요?”

명자 아니 예린이 방 문을 열고 물어본다. 그녀도 이제는 음식이나 술을 직접 들고 다닐 정도의 군번은 아니다.

“아니, 금방 올 거야. 오면 먹지 뭐!”

길희섭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앞에 놓인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서 불을 붙인다. 명자는 그 모습을 보고 재떨이를 가까이 가져다준 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다. 마루를 지나 주방으로 돌아서는 데 입구에서 누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기다리던 손님인가 싶어서 명자가 돌아서서 마중을 하려다가 흠칫 도로 몸을 돌려 황급하게 주방으로 몸을 숨긴다.

‘아니, 세영이가 어떻게? 설마 길희섭을 만나러?’

들어서는 사람이 정세영이라 우선 자신이 요릿집에서 일하는 것이 창피한 생각에 몸을 피했다. 그런데 세영이 다른 종업원에게 몇 마디 묻더니 정말 희섭이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이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명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시 주저하다가 접대 들어가는 아가씨에 부탁을 한다.

“송양아! 내 개인적인 부탁인데 내실에 있는 사람들 무슨 말하는지 좀 들어보고 녹음을 할 수 있으면 좀 해줄래? “

“어머! 그러다가 들키면 어떡해요?”

아가씨는 펄쩍 뛴다.

”그러기에 내가 각별히 부탁하는 거 아니야! 위험하면 안 해도 되고 자연스럽게 가능한 정도까지만 부탁해! “

“알았어요. 한 번 해 볼게요.”

평소에 명자가 인간적으로 잘해주고 친하게 지내던 아가씨라 그나마 흔쾌히 승낙을 한다.

“안녕하십니까? 신의원님 국회 밖에서 사적으로 만나기는 처음이네요!”

세영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인사를 건넨다.

“그러게요. 우리가 국정을 원만하게 하자면 국회에서는 치열하게 논쟁을 해도 밖에서는 또 서로 대화를 자주 나눠야 하는 건데 너무 늦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희섭이 일어서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세영이 손을 뻗어 악수를 하며

“아이구 여기 비싼 집 같은데 여당 의원들은 이런 데 자주 오시나 봐요?”

라고 빈정거리자

“어허 또 왜 이러실까? 좋은 자리에서 가시 돋친 말씀을 하시고… 저도 오늘 처음입니다. 허허. 자자 그러지 말고 여기 앉으세요.”

거짓말로 얼버무리며 앉기를 권한다.

송양과 또 다른 아가씨 한 명이 도자기 술병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와서 세영과 희섭의 옆에 각각 바짝 다가앉는다.

“아아, 우리가 지금 긴히 할 말이 좀 있으니까 잠시 나갔다가 들어와! “

희섭이 아가씨들을 내 보낸다.

“네!” 이런 상황은 가끔 있는지라 두 사람은 가볍게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송양은 다른 아가씨를 대기실로 보내고 자신은 시중을 기다리는 척문 옆에 서서 방 안의 동정을 살핀다. 물론 몸 그림자는 방 안에 비치지 않도록 벽에 바짝 붙어서 있다. 방 안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말소리는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송양은 전화기를 꺼내서 녹음 버튼을 누른 후 조심스럽게 창호지 문 아래로 살그머니 밀어놓았다. 녹음이 되고 있다는 음파 물결무늬가 보이고 송양의 맥박도 그만큼 크게 뛰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영동 변사체 사건 아시지요?”

라고 희섭이 말을 꺼낸다.

“예. 그런데요?”

세영이 시치미를 뗀다.

“야당 쪽에서 신의원 등이 그걸 정치적으로 확대시키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

“그래서요?”

“우리 선수들끼리 그러지 맙시다. 그렇게 막가면 우리도 패가 없는 게 아니에요. 다 까발리면 그쪽도 크게 다치는 사람이 있어요! “

“누가요? 야당 쪽이요?”

세영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다시 한번 모른 척한다.

“ 어허 자꾸 왜 이러시나? 이런 자리에서는 서로 솔직해야지요! 그 자가 금괴를 훔친 걸 다 알고 있어요. 공범이 누군지도 다 알고요! “

희섭이 정색을 하고 세영의 눈을 노려보고 말을 하자 세영이 눈을 내리깐다.

“…”

“노대통령께서 저보고 서로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라고 하셔서 제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

“어떻게요?”

“간단합니다. 그 사건은 단독절도로 하고 도난품은 못 찾는 걸로 종결할 테니 그쪽에서는 입만 다물어주시면 됩니다. “

세영이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공짜는 없을 테고.. 대가는요?”

“다음 대선 후 서로 보복 금지, 그리고 필요시 망명 보장이요. “

“그건 너무 센데요! 그쪽도 연관이 있는데…”

“우린 이판사판 잃을 게 없어요. 그러니 알아서 하세요. 그 쪽은 앞날이 창창하지 않나요? “

저울 추가 이미 현 야당 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서로가 알고 있다.

세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희섭이 손뼉을 ‘짝’ 치면서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역시 정치를 아셔! 자 이제 한 잔 합시다.”라고 한 후

“여기 상 올려라!”라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친다.

송양은 황급히 전화기를 치우고 일부러 주방 쪽으로 좀 간 다음에 “네에-”라고 외친 후 방으로 걸어가서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세영과 희섭이 식사를 간단히 하고 나가자 송양은 명자를 은밀히 만났다.

“야휴 심장이 쫄려서 죽는 줄 알았네! “

송양이 자기 치사를 한다.

“그래 수고했어. 뭐 좀 들어봤어? 뭐라 하데?”

“직접 듣지는 못했고요. 녹음을 했는데 제대로 됐을는지 모르겠네. 한 번 들어보세요!”

전화기를 꺼내서 재생버튼을 누르자 말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역시 응얼응얼 거리기만 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애구 어떡하나? 잘 안 들리네요!”

송양이 사과를 하자 명자가

“아니야. 괜찮아. 수고했어. 나중에 꼭 보답할게!”

“뭐야? 언니! 남 이리 심장 쪼리게 해놓고 뭔 나중에야 당장 오늘 일 끝나고 한 잔 쏴!”

“알았어. 그러자!”

두 사람은 웃으며 다음 접대 준비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일이 끝나고 자신들이 놀 때는 또 다른 술집이나 호스트 바에 가는 경우가 많다. 술자리에서 시달린 스트레스에 대한 보복심리이기도 하고 익숙하고 아는 유흥이 그런 것 밖에 없는 탓이기도 하다.


7장 박쥐


희섭과 헤어진 세영은 부리나케 기태를 만나러 갔다.

“선배님! 영동 변사 건이요, 그냥 덮어야겠어요!”

“왜? 대선 앞두고 얼마나 좋은 호재인데 그걸 덮어?”

“그게 아니라 사망자 신원이 나왔는데 광주 희생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

“제 후배예요!”

“후배?”

“예 강윤주라는 가까운 후배인데 광주 밖에서 행불 된 거고 진압군에 당한 게 아니라 절도사건에 연루되어서 사망한 걸로 확인했어요.”

“그래? 그거 의외인데? 확실해. “

“확실해요 제 직속 후배라니깐요!”

“그럼 어떡한다? 기자회견도 하고 잔뜩 벌려놓았는데 어떻게 수습을 한다?”

“그건 걱정 마세요. 곧 대선이잖아요. 조용히 처리하면 금방 묻힐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내일요 우리 쪽 대선 후보 발표할 수 있지요?"

"응, 그걸로 묻어버리게?"

"예. 우리 쪽 언론에도 협조요청하고 보수 언론은 돈 봉투로 막으면 돼요. 요즘엔 슬슬 우리 쪽에 줄을 대고 눈치를 보는 인사들이 많아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학계 재계 문화계 심지어 장성들도 몇몇은 우리 쪽에 명운을 걸고 있어요. 다들 정보와 눈치가 백 단이거든요! 아무래도 이번엔 우리가 승산이 있나 봐요! 암튼 언론 쪽은 제가 준비할 테니 선배님은 기자회견 준비 좀 해 주세요!"

"알았어."

"우리 쪽 후보는 지난번에 말씀하신 조동근 변호사로 낙찰 본 거 맞지요?"

"응, 나이나 경력으로나 우리가 아직은 직접 나설 수는 없고 조동근 변호사가 인권변호사로서 명망도 있고 당선 가능성도 제일 높을 것 같아."

"알겠어요. 그럼 전..."

세영이 부지런히 밖으로 나가고 다음 날 신문과 방송 특보는 '야권 단일 후보 추대 - 인권 변호사 조동근 ; 평화적 정권교체 가능한가?'가 크게 나가고 '영동 변사체 단순 절도범으로 판명'이 조그마하게 나가거나 아예 언급도 안 한 언론도 많았다. 사람들은 대선에 벌써 관심이 쏠리고 여권 후보로 나온 길희섭은 조동근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벌써 난무하고 있었다.


한편 야권 대선 후보가 발표되자 야망과 연줄이 있는 사람들은 누가 당선에 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어느 쪽에 줄을 대면 유리할지 정보수집과 눈치 작전에 여념이 없다.

연명도 교수 연구실 책상에 앉아서 한참을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문을 열고 학과 사무실로 간다. 연명이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조교가 벌떡 일어선다.

"이번 복지와 연금 관련 논문 발표 준비 해!"

조교가 되묻는다.

"어느 쪽으로요? 지시대로 2개를 준비했는데요."

"응, 분배와 복지 강화 쪽으로!"

"그럼 연금개혁 건은 폐기하는 건가요?"

"응.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권이 바뀔 것 같아. 나중에 인수위나 내각에 들어가려면 야권 후보가 주장하는 복지 강화와 기본소득에 힘을 실어주는 논문을 발표해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논문 나오면 정세영 신기태 의원실에 잊지 말고 한 부씩 보내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8장 안개


양수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흐르다 만나는 곳, 호수 같이 넓은 물에 물안개가 피어올라 느린 곡조의 슬픈 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덮으며 낮게 깔린 먹구름 아래 멀리 산봉우리들이 섬처럼 솟아있어 물안개가 마치 자신이 강물이나 바다 물이라도 된 듯 굽이치고 흐르다가 때때로 잔잔한 바람을 타고 파도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은 강변 산책로 옆에는 옛 한강 팔경의 정취를 느끼게 하려는 듯 고풍스러운 나무 나룻배 하나가 매어져 있었다. 나룻배 주변에 사람들이 대여섯 명 옹기종기 서 있고 나룻배 위에는 윤주의 어머니가 쪼그리고 앉아서 하얀 보자기를 천천히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보자기 보다 흰 도자기 항아리가 나왔고 윤주 어머니는 항아리 안에서 하얀 가루를 손으로 떠내서 강물에 뿌렸다.

물 색깔은 언제나 하늘빛을 담는다고 했던가? 먹 빛 강물에 하얀 가루가 흘러 모든 풍경이 무채색의 수채화 같이 안개 속에서 윤곽도 색깔도 없이 뒤엉켜 흘러갈 것만 같았다.

장례의 절차 중에서 가장 힘들고 슬픈 것이 마지막 매장의 순간인 것은 그 때가 죽은 이의 최후의 모습이 마침내 사라지고 남은 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실감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늘도 물도 안개도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슬픔과 미련과 아쉬움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라왔다. 유골함 바닥에 남은 가루를 모두 비워 낸 윤주의 어머니는 쿡쿡 신음 소리와 함께 진한 눈물을 쏟아내며 나룻배 바닥에 두 손을 짚고 반쯤 엎드려 있었다. 조촐한 장례와 화장 절차 동안 끊임없던 그녀의 통곡 후에도 아직 눈물은 다 마르지 않았나 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대진 형사도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가슴속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혹시 잠깐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김 형사는 윤주의 아버지로 보이는 연배의 60대 정도로 보이는 사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뉘신지?”

“영동서 김대진 형사라고 합니다.”

침울하던 윤주의 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화가 난 사람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말 와 이라능교? 그만큼 했으면 됐지 뭐가 또 남아서 여기까지 와서 이래쌌는교?”

“죄송합니다. 그래도 사실관계를 좀 확인해야 하는데 서로 오시라 가시라 하는 것보다는 제가 찾아뵙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저 쪽 벤치로 잠깐 자리를 옮기실까요?”

윤주의 아버지는 말없이 앞서가는 김형사의 뒤를 따라왔다. 두 사람이 나란히 강물을 바라보며 벤치 위에 앉았다.

“아시다시피, 강윤주 씨가 사망했기 때문에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도난금품은 국고로 언제라도 회수해야 합니다.”

“아, 글쎄. 우리 아아가 그때 광주에 내려간 뒤로는 일절 연락도 안 오고 한 번 만나보지도 못했다고 했지 않았던 교? 그동안 수배가 되었다고 하고 조사도 받았지만 솔직히 우리는 윤주가 참말로 도둑질이라도 해서 몰래 숨어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맘도 없진 않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니 우리는 우리 얘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구먼요. 가가 얼매나 여리고 착한 얘였는데.. 여기도 가가 살아있을 때 자주 오던 데고 지가 좋아하던 곳이라 여기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 거 아닌가배?”

“알겠습니다. 만일 아버님 말씀대로 윤주가 누명을 쓴 거라면 더욱이 아버님이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형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모든 사람들의 말을 다 믿지는 않지만 김 형사는 왠지 윤주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 예, 뭐든지 물어보이소.”

윤주의 아버지는 김 형사가 윤주의 억울함을 풀어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색을 했다. 김 형사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정말 윤주가 집에다가 뭔가 보관하라고 했던 거는 없었나요?”

“암 것도 없어요. 발써 아까 형사들이 몇 번이고 집에 와서 뒤지고 갔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 혹시 윤주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나 실종 전 후로 아버님께 연락이 닿은 사람이 있나요?”

“글쎄요? 세영이라고 학교 선배와 동기라는 여학생이 한 번 찾아왔었는데 이름은 잘 몰라요.”

“정세영이요? “

김 형사는 흠칫 놀란다.

“혹시 연락처를 아시나요?”

“몰라요. 그전에는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와서도 특별히 이야기한 것도 없이 그냥 궁금해서 잠깐 들렀다고 했거든요.. 어쩌면 윤미가 알려나? “

“윤미요?”

“예 윤주 동생이요!”

제가 좀 더 알아볼 테니까 너무 심려 마시고 혹시 제가 내일 집에 들러서 윤주 유류품을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단서를 좀 찾아봐야 진짜 범인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요..”

“아, 그거 저기 차에 다 있어요. 전에 형사들이 가져가고 남은 거를 혹시나 해서 안 버리고 보관해 뒀었는데 이제 태워버리려고 다 싣고 왔거든요.”

김형사는 윤주의 아버지와 함께 강변 산책로를 따라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윤주 아버지가 차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에는 윤주의 옷가지와 사진, 책과 노트 등이 종이 박스에 담겨 있었다.

김형사는 상자를 뒤져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뒤적이며 찾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경찰서로 돌아가서 담당 형사가 챙겼을 수첩을 수소문해보기로 마음먹고 노트와 사진 몇 가지만 챙겨서 윤주의 아버지와 헤어졌다.

경찰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대진 형사는 라디오를 켰다. 역시 야당 대선 후보 추대 이야기가 주요 뉴스거리였다. 윤주 사건은 조용히 묻혀버린 듯했다.

“조동근 변호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와 사법고시를 거쳐 판사를 역임한 자수성가의 모범으로 특히 퇴임 후 전관예우를 거부하고 시국 사건을 포함한 억울하고 가난한 인권 변호를 도맡아 함으로써 야권뿐만 아니라 여권에서도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인물로 이번에 야권 대통령 후보로 그를 지목한 것은 탁월한 선택으로 드디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롭고 민주적인 정권교체의 희망이 보인다는 세평입니다. 그럼 전문가를 모시고 여론의 추이와 선거 예측을 해 보도록..."

경찰서로 돌아온 김형사는 라디오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과장실로 들어갔다.

“광주경찰서 협조를 좀 얻어야겠습니다.”

“왜? 뭘 캐려는데?”

최갑진 수사과장은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는 김형사가 못 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김 형사가 예상외로 일반 범죄사건의 용의자로 수사 방향을 돌리는 바람에 피살자의 신원이 밝혀지고 그 결과 자신과 신기태 의원의 입장이 난처해진 것이 불만이었을 것이지만 그걸 김 형사에게 탓할 수는 없었다. 김 형사는 자기 할 일을 한 것일 뿐이었으니까!

“강윤주 초동 수사 기록을 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왜? 아직 더 알아볼 게 있나? 지금까지 수사 결과로 부족해서? 지금 윗 선에서는 엄청 만족스러운가 보던데? 이제 가만있어도 김 형사에게 표창 하나는 내려올 것 같던데? 그걸로 성이 안 차서?”

최갑진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김 형사는 그냥 최갑진을 흘끗 한 번 쳐다보고는 감정을 눌러 참고 말했다. 그래도 조직은 조직이고 상관은 상관이었다.

“국고 미 회수 분을 마저 조사해 보려고 그럽니다.”

누르긴 했지만 김 형사의 퉁명스러운 말투와 째려보는 눈 빛에 조금 위축이 된 최갑진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닐 텐데?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내비두지 그래? 광주경찰서에서 알아서 하겠지 뭐.”

“그래도 좀 미심쩍은 게 있어서… 아무튼 협조 공문 올리겠습니다.”

“뭐가 미심쩍은 데?”

최갑진은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될 만한 게 있을까 싶어 눈이 반짝 빛났다.

“강윤주가 범행 직후 살해되었다면 단독 범행이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공범이 강윤주를 죽이고 금품을 빼앗아 갔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걸 좀 추적해 보려고요.”

"어어.. 아서 아서. 설령 살인범을 찾는다고 해도 공소를 할 수가 없어. 이건 2007년 이전 사건이고 시효가 10년 밖에 안돼. 그리고 국고 회수는 강력계가 나설 일이 아니잖아?”

최갑진이 아는 체하며 김 형사를 만류했지만 김 형사는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윤주의 사인을 좀 더 파 보고 싶었다. 그건 주 검시관의 부탁이기도 했다.

“그건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초동 수사기록을 한 번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고요… 수사 보고서 잘 써 드릴게요. 과장님!”

이 말에 최갑진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이 사람이 농담도 할 줄 아네? 뭐 추가 보고 할 거나 있겠어? 암튼 알았어. 월권이란 소리 나오지 않게 조심하고… 다른 사건도 처리할 게 많으니까 얼른 끝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김 형사는 협조 공문을 기안해서 올려놓고 주 검시관을 만나러 나갔다. 약속 장소인 시내 커피 전문점에는 주성진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면서 미리 시켜 먹고 있었습니다. 뭘로 드실래요?”

“전 다방 커피 체질이라… 달달한 걸로…”

“그럼 여기 카페 라테가 맛있던데…”

“그러지요. 요즘엔 무식하면 커피도 못 마시겠어요. 종류는 뭐가 그리 많은지…”

툴툴거리며 주문을 하러 돌아서는 김 형사의 어깨가 듬직해 보였다. 주성진도 따라 일어나 머핀을 하나 주문하고 김 형사의 커피 값을 같이 치렀다.

두 사람은 커피와 빵이 담긴 쟁반을 받아 들고 비교적 한가한 자리를 찾아 옮겨 앉았다.

“일이 이상하게 풀리고 있습니다.”

“그러게요… 제 직감으로는 신기태 쪽 주장도 틀린 것 같고 반대로 정부 쪽 발표도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저도 동감입니다. 좀 더 조사를 해 보고 싶은데 쉽지가 않습니다. 제 소관을 벗어나고 있어서요.. 강윤주의 초동수사 기록 열람을 요청해 놓긴 했는데 더 깊이 팔 명분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고 이렇게 손을 놓으면…”

“좋아할 쪽이 어딘가는 분명하지요.”

“그럼 더 수사할 의지도 없겠네요?”

“물론이지요. 본청에서는 이미 끝난 분위기입니다. 근데 검시관님이 굳이 더 조사를 해 달라고 하시는 이유는?…”

“솔직히 저는 처음에 정부 쪽에서 이 사건을 덮어 버릴까 봐 걱정을 했었어요. 사실 저도 역사에 조금은 빚진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었는데 이 사건이라도 잘 밝혀보고 싶어 김 형사님께 각별히 조사를 부탁드렸던 거고요. 근데 오히려 김 형사님의 수사 결과가 광주 희생자들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쪽으로 나오니까 엄청 당황스럽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전 아직도 뭔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점이?…”

“저도 처음엔 교전의 희생자일 가능성이 많지만 후두부 M1 총상이 좀 이상하다고 만 생각했는데 막상 사망자가 은행 절도의 범인이라고 하니 분명히 다른 가해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도난된 금품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런데 수사를 종결해요?”

“종결은 아닙니다. 그 이상은 제 소관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지만 얼마나 성의 있게 더 수사를 할는지 의심스럽긴 합니다. 아마 지금의 결론이 바뀌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김 형사님께 좀 더 조사를 해 달라고…”

“솔직히 저도 궁금하긴 하지만 더 수사하기는 저도 부담스럽습니다. 초동 수사 기록만 한 번 검토해 보고 크게 새로운 것이 없으면 저도 손을 뗄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수사에 관여하면 안 되는 거고 위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게 뻔한데 저도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제 탓에 엉뚱한 결과가 나온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요. 덕분에 저도 좋은 단서를 얻었는걸요. 감사드립니다.”

“감사는요? 김 형사님이 수고가 많으셨지요. 무리한 부탁까지 드리고,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암튼 초동 수사기록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커피 맛있게 먹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저 커피를 마시고 심각한 세상 사에는 관심이 없는 듯 재잘재잘 수다와 함께 연신 웃으며 커피를 마시는 젊은이들을 사이로 걸어서 커피 집을 나섰다. 상점 가는 어느새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9장 바람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것뿐이라고 외치는 듯 누렇게 익어가는 만경평야 너른 들의 벼 이삭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쓰다듬으며 파도처럼 일렁이다가 개울 가 미루나무 가지에 걸려 윙윙 쉰 소리를 내고 또 하늘 높이 올라가 하얀 구름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고 있었다. 광주경찰서에서 영동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바람 부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김 형사는 자신이 바람을 쫓고 있는 건 아닌 가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히 실체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이 사건의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시인은 바람을 그릴 수 없어 깃발을 만들었다고 했던가? 김 형사는 깃발이라도 만들어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씨발, 어떻게 은행에서 그 많은 돈이 강탈당했는 데 용의자만 하나 달랑 있고 다른 수사 기록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김 형사는 혼자 마음속으로 자문자답을 계속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게 이상한 거야. 수백 억이 넘는 금액이라면 전담 팀이라도 꾸렸어야 당연한 건데 용의자 추적만 좀 하다가 몇 달 만에 미제사건으로 넘어간 건 분명히 뭔가 있다는 증거야.’

‘근데 그걸 어떻게 찾아내지? 이번 광주경찰서 출장도 겨우 결재를 받은 건데..’

‘어휴, 최 과장이 또 방방 뜨겠네.. 분명 자기가 손 떼라고 했는 데 내가 고집부려서 갔다가 헛걸음만 하고 왔다고 지랄할 게 뻔한데…’

‘그나저나 따지고 보면 이 일이 내 일도 아닌데 왜 내가 뭔 사서 고생이람?’

‘아니야, 지금 유일한 용의자가 시체로 발견되었고 돈은 사라졌다? 영화 같은 이야기지만 돈을 찾기만 한다면 이거 대박이 아닌가?’

‘대박이긴 하지만 십 년도 더 된 사건이고 내 사건도 아닌 데 이제 와서 무슨 수로 찾아? 주 검시관도 정의감이라고 하지만 수사에 관여하는 건 괜히 월권하는 거야. 그래, 미련 버리고 그만 손 떼자.’

스스로 마음속으로 이렇게 결론을 냈지만 김 형사의 손은 가슴팍 안 주머니 속에서 수첩을 꺼내고 있었다.

‘정세영 의원과 이영혜라... 이것도 이상해! 여기에 야당 의원은 왜 걸려있는 거지? 정말 분명히 뭐가 있는 게 분명한데...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한담? 그냥 모른 척 해? 아니면 윤주 동생 윤미 말에 따르면 강윤주와 당시 학교에서 친분이 있었던 인물 중에 유선옥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쪽을 한 번 파볼까? 그래 정세영이나 이영혜는 내가 다루기에는 어렵고 유선옥까지만 한 번 알아보자. 그래야 찜찜한 것도 없을 거고..."

그러다가 김 형사는 갑자기 차를 길 가에 세우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반대 차선에서 차가 오지 않는 틈을 타서 차를 돌려서 서울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몰고 갔다.

김 형사는 곧바로 조성일보로 가서 박만술 기자를 만났다.

"아이구, 이게 웬일이십니까?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형사님이 미천한 기자를 다 찾아오고..."

반색을 하며 편집실에서 김대진을 맞이한 박만술은 김 형사를 밖으로 안내했다.

"자, 여긴 시끄럽고 우중충하니 옥상에 가서 바람이나 쐽시다."

두 사람은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씩 뽑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서울 도심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녹지공간이 부족하고 지상은 차량이 모두 점령을 한 탓에 궁여지책으로 신문사에서 작년에 옥상에 야외 휴게실 겸 미니 정원을 꾸며놓았는데 신문사 직원들은 소중한 숨 쉴 공간이 생긴 것을 환영하고 오랜 가뭄에 단비로 해갈을 한 연못 속 개구리 마냥 틈 나는 대로 폴짝폴짝 올라왔다. 옥상 정원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적당히 심겨 있어서 사시사철 푸르고 벤치와 나무 데크 산책로까지 있어서 제법 운치가 있었다. 낮에는 멀리 한강과 북한산 뷰가 보여서 맑은 날에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과의 조화가 시원하고 밤에는 바닥의 은근한 부분 조명이 나무를 위로 비추고 그 빛줄기가 서울의 야경과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 여기 좋은데요! 삭막한 경찰서 건물 콘크리트 옥상과는 차원이 달라요!"

김 형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을 한다.

"예. 꽤 괜찮지요? 저도 답답할 때는 가끔 올라와요. 자, 마침 저기 빈자리가 있네요."

박만술이 근처의 벤치로 안내를 한다.

"근데, 정말 웬일이세요? 뭐 좋은 건수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뭐 하나 부탁드리려고..."

"김 형사님이 우리한테 부탁을 할 때가 다 있어요? 진짜 별 일이네!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좀 개인적인 부탁이긴 한데 어쩌면 박 기자에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래요?"

그 말에 박만술의 회가 동하여 눈이 반짝거린다. 김 형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저기 강윤주 사건이요, 종결이 되긴 했는데 무언가 좀 찜찜해서 하나만 더 파 봤으면 해서요.."

"맞아요. 저도 좀 미진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게 많았는데... 뭐 어디 소스가 있나요?"

"그게요, 사건의 성격 상 강윤주가 죽기 전에 친밀하게 접촉했던 인물을 탐문하는 게 상식인데 이상하게 제가 알아보려고 하니까 위에서 자꾸 막아요. 그래서 저는 더 들어갈 수는 없고 해서 박 기자님이 비공식적으로 좀 더 취재를 해보면 어떨까 해서..."

잠시 생각을 하던 박 기자가 손가락 엄지와 중지를 마찰했다가 튕겨서 '딱' 소리를 내며

"좋습니다.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어디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예, 세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정세영 의원이고 또 하나는 이영혜라고 신기태 의원 보좌관, 그리고 정 의원의 부인 유선옥입니다. 지금은 환경운동 쪽 일을 하고 있어요."

"의외네요. 저는 정권 쪽에서 누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이건 정말 대박일 수 있겠어요!"

"맞아요. 어쩌면 정의원 쪽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결말이 났는데 이상하게 그쪽도 너무 조용해요."

"그렇네요, 하지만 그쪽도 모두 접근이 쉽지는 않겠네요!"

"예, 저는 더 힘들고요 아마 유선옥은 박 기자님이 한 번 쑤셔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보지요 뭐! 자 그럼 저는 출동합니다. 뭐라도 있으면 전화드릴게요. 근데 김 형사님은 이 건에 왜 각별히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요.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에 약간의 정의감이랄까.. 제가 찜찜한 건 그냥 못 넘어가는 고약한 성격이 있거든요.."

"아휴, 형사님이 체질이시네! 이런 분이 많이 계셔야 대한민국에서 죄짓고도 발 뻗고 자는 놈이 싹 사라지지요!"

박만술이 정보를 준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김 형사를 치켜준다.

"그리고 국과수의 어떤 검시관님 부탁도 있었고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박만술이 웃음기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선다.

두 사람은 빈 커피잔을 수거함에 넣고 내려가서 현관로비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박 기자는 김 형사와 헤어진 후 편집실장에게 취재 나간다고 전화통보를 한 다음에 만사 제쳐놓고 그 길에 한 달음에 지하철을 타고 계동에 있는 환경운동 사무실을 찾아갔다.

마침 선옥은 사무실에 있었다.

선옥은 번쩍이는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곁에 서 있는 박만술 기자를 쳐다보았다.

요즘엔 모든 빌딩 겉면에 유리를 붙이는 게 유행인지 선옥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북향인데도 불구하고 건너편 빌딩에 반사된 햇살이 창문을 통해 선옥의 책상까지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다고요?”

“조성일보사에서 왔습니다. 좀 여쭤볼 게 있으니 불편하시면 자리를 옮겨서…”

“아니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부드럽지만 깔끔하게 맵고 끊는 듯한 선옥의 목소리가 그녀의 외모와 어울린다고 박 기자는 생각했다. 중년에 접어든 선옥은 이제 젊은 처녀의 고운 자태는 없었지만 아직 날이 선 콧날과 군살이 붙지 않은 턱 선, 하얀 피부가 여전히 고와 보였다. 안경도 굵은 뿔테가 아닌 금속제 은색 실 테를 하고 있어서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인다. 잠시 선옥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던 박 기자는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어갔다.

“강윤주 씨 사건을 취재 중입니다.”

선옥은 놀라움에 멈칫 온몸이 경직되었다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쪽 휴게실로 가시겠어요?”

박 기자는 선옥을 따라 사무실 한편의 유리 칸막이로 된 휴게실로 들어갔다. 박 기자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선옥이 물었다.

“근데, 절 어떻게 알고?”

“잘 모르시겠지만 사건 담당 형사님이 홍성 경찰서 수사과 김대진 형사님인데 그분이 제게 정보를 주셨습니다.”

“그렇담 왜 직접 안 오시고?”

“강윤주 씨 사건은 이미 종결 처리되어 더 이상 수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종결되었는데요?”

“뉴스에 나온 데로 광주은행 탈취 중 공범 간의 다툼으로 사망한 걸로..”

“근데 기자님은 뭐가 더 궁금하신데요?”

선옥의 목소리에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뉴스에 보도된 것과 달리 무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그건 제가 유선옥 씨에게 여쭤보고 싶은 말입니다.”

박 기자는 정공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선옥은 단호하게 박 기자의 예봉을 피했다.

“그럼 강윤주 씨가 이미 예전에 사망했다는 것은 알고 계셨습니까?”

선옥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유선옥씨께서 예전에 강윤주 씨와 가까운 사이였던 것은 사실이지요?

“제가 꼭 대답을 해야 하나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강윤주 씨가 누명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유선옥 씨께서 꼭 협조를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순간 선옥의 눈 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박 기자는 자신의 짐작에 근거가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선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며 박 기자의 어깨너머 창 밖으로 멀리 인왕산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불쑥 찾아와 당황스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여기 제 전화로 연락 주십시오.”

박 만술 기자가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선옥이 받으려고 하지 않자 박 기자는 탁자 위에 명함을 내려놓은 후 살짝 선옥 쪽으로 밀어 놓은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박 기자가 목례를 하고 휴게실을 나와 사무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선옥은 꼼짝하지 않고 휴게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10장 암살


며칠 후 전재무도 자신의 사저 거실 소파에 앉아서 햇살이 비치는 인왕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좌 우에 길희섭 의원과 노진우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앉아있고 전재무의 비서는 전재무를 바라보며 출입구를 등 지고 맞은편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 이목도 있어서 노진우는 직접 참석 못하고 안정수 비서실장이 대신 왔네.”

전재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재무는 갈수록 대머리가 더 드러나고 얼마 없는 머리카락도 거의 백발이 되었고 넓은 이마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목소리는 아직도 힘이 넘쳤다.

“근데 사안이 워낙 중대해서..”

길희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괜찮아. 여기 모두 우리 사람이니까 믿어도 돼. 걱정 말고 이야기해봐.”

“네, 강윤주 건은 뉴스에 보도된 정도에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더 확대되지 않도록 검찰 쪽에도 손을 좀 써 놓았습니다.”

“그래?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고… 근데 그럼 됐지 뭐가 문제인가?”

“박 만술이라고 강윤주 건을 캐고 다니는 기자가 있어서 좀 염려스럽습니다.”

“박 만술? 그게 누군데?”

“조성일보 기자입니다. 어제부터 유선옥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유선옥?”

“예, 지금은 정세영이 부인인데 예전에 죽은 강윤주랑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뭐야? 삼각관계야? 정세영이랑? 그 재미있구먼.. 그래 선옥이가 바람이라도 폈어?"

이 와중에 농담을 하는 전재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길희섭이 정색을 하자 전재무가 웃음기를 멈추고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나?”

“강윤주 시체가 발견되고 나서부터 혹시나 해서 담당 형사 곁에 귀를 좀 붙여 놓았습니다.”

“그래? 거 잘했구먼! 근데?”

“네,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강윤주 건은 잘 마무리가 되었는데 김대진이라고 담당 형사가 그 기자에게 유선옥에 대한 정보를 흘렸습니다.”

“아니 그놈이 미쳤나? 왜?”

“원래 기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특종 하나 터뜨려 보려고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고..”

“기자는 그렇다 치고 형사 놈은 또 왜?”

“아마 돈 냄새를 맡고 공을 좀 세워보려다가 여의치 않으니까 기자에게 정보를 흘린 것 같습니다.”

“아, 알았어. 이유야 어쨌든 대책은 뭔가?

“박만술의 입을 막아야겠습니다.”

“어떻게?”

“…”

길희섭이 대답을 못하고 전재무를 바라보며 눈을 껌뻑거리고 있다가

“신분이 기자라 건드리기가 쉽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좀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재무가 답답한 듯 벌컥 짜증을 낸다.

"아, 이 사람아! 대책을 가지고 와야지 무작정 뭐든지 나보고 해결해 달라고 하면 어떡해? 응? 애초에 강윤주 시체도 말이야 처음에 깔끔하게 처리했으면 지금 이런 사단도 없을 거 아닌가? 도대체가 일 하는 게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전재무가 탁자에 놓인 유리컵을 들어 양주를 한 입에 틀어 넣는다.

“맞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입을 막아야 합니다.”

안 비서실장이 맞장구를 쳤다.

“아 글쎄 어떻게 막냐고? 안 그래도 지금 통치자금을 불법이라고 추징한다며 이리저리 캐고 들어와서 골치 아파 죽겠는데 비자금까지 드러나면 어떡하냐고?”

전재무가 버럭 화를 냈다.

“제가 제거하겠습니다.”

이때 전재무의 비서 황장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거?”

“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모르는 것으로 할 테니까 구체적인 것은 길 의원과 의논해서 처리하게. 안 비서실장도 적극 협조하고 대신 자네도 직접 나서지는 않도록 조심해."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전재무의 비서가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자, 우린 술 한 잔 더 하세!"

전재무가 일어나서 뒤에 있던 장식장에서 양주를 또 한 병 꺼내 들었다. 박정희가 애용했다던 저렴한 시바스 리갈 위스키 은색 상표가 붙어있다.


11장 단서


박만술 기자가 사무실로 찾아왔던 날 밤, 선옥은 저녁을 먹자마자 아이를 아이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일찍 재웠다. 칭얼대는 아이를 간신히 재우고 나오니 세영도 마침 설거지를 마치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고 있는 중이었다. 가사 일도 공평하게 부담하는 자상한 남편이다. 베란다에 나란히 서서 건조대에 빨래를 털어 널면서 선옥이 세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 기자가 한 명 사무실로 찾아왔었어."

"응? 기자? 왜?"

오랜만에 뜨거운 밤을 은근히 기대하던 세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윤주에 대해서 캐묻던데..."

세영은 윤주와 기자라는 단어의 조합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망치에 맞은 듯 머리까지 띵했으나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나야 뭐 아는 게 있나? 그래서 그냥 나도 모른다고 했지! 근데 이상하잖아! 기자가 왜 윤주에 대해서 나에게 물어? 정 궁금하면 선배한테 묻던가... 나보다는 선배가 그래도 더 많이 알지 않나?"

세영은 또 심장이 철렁한다.

"나라고 특별히 달리 아는 게 있어? 그때 광주에서 헤어지고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알잖아? 우리가 윤주를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그러게! 그런데 나도 왜 윤주가 절도사건에 연루가 되었는지 궁금해. 믿을 수가 없어. 절대 그럴 얘가 아닌데.. 분명 뭐가 잘못되었을 거야. 어쩌면 저 놈들이 조작을 했을 수도 있고... 근데 왜 가만히 있어? 윤주가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누명을 썼는데..."

"우리도 무슨 뒤집을 단서를 찾고는 있는데.. 증거가 있어야지.. 우리도 처음에 광주 희생자라고 섣불리 발표를 했다가 입장이 난처해져서 좀 조심스럽긴 해."

세영이 거짓말로 얼버무린다.

"암튼 어떻게 좀 해봐!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난 그 기자가 찾아와서 혹시 딴 진실이라도 밝혀줄까 봐 은근히 기대도 했었어."

"안돼! 기자들을 어떻게 믿고! 그 사람들 기사거리만 된다면 없는 일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야! 절대 함부로 말하지 마!"

세영이 갑자기 억양을 높이자 선옥은 움찔하면서

"왜 그래? 왜 과민반응이야?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건데..."

"아니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평소답지 않게 단호하고 위압적인 세영의 말투에 선옥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세영이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선옥을 뒤에서 껴안지만 선옥은 세영의 손을 가만히 뿌리치고 욕실로 들어간다. 뜨거운 밤은 물 건너갔다. 대신 근심으로 잠 못 드는 밤이 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둘 다 잠을 자는 척했지만 각자 딴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이런 걸 동상이몽이라고 했던가... 선옥은 윤주와의 아련하고 애틋한 추억에 잠겼고 세영은 의외의 복병이 나타나서 혹시라도 사실이 드러날까 봐 걱정과 대책 마련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12장 전환


다음 날 세영은 은밀히 길희섭에게 전화를 했다. 비서가 대신 받는다.

"후보님은 지금 바빠서 전화받기가 곤란합니다."

"아, 잠깐이면 됩니다. 정세영이 긴급한 일로 전화했다고 전해주세요."

약간의 모멸감을 느꼈지만 참고 기다렸더니 잠시 후 길희섭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예. 말씀하세요"

"어제 박모라는 기자가 제 아내를 찾아와서 강윤주에 대해서 캐물었다는데요.."

"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어떻게요?"

"그것까지 아실 필요는 없고요. 다 대책이 있으니까 아무 염려 마시고 앞으로는 가능하면 직접 연락을 안 하시는 걸로 하시지요! 대선을 앞두고 명색이 후보가 상대편 참모와 이렇게 밀담을 하는 것이 모양이 별로 좋진 않네요!"

길희섭의 목소리가 차갑다. 세영은 한편으로는 알아서 처리한다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대책이라는 것도 궁금해서 겸손하게 응대를 했다.

"예, 그러시겠지요. 알겠습니다. 한데 실례지만 어떤 대책인지..."

"아, 그것도 모르시는 게 더 좋으실 겁니다."

그러고는 세영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딸칵 끊는다. 모욕을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지만 마음속으로 '지금 판세가 그렇게 큰 소리 칠 입장이 아닐 텐데도 저러는 건 분명히 허세일 거야! 그래 곧 네가 나한테 아쉬운 소리를 할 때가 올 거다'라고 혼잣말을 하며 위안을 했다.

한편 전재무의 비서 황장무는 수하들에게 은밀한 지시를 하고 있다.

"이 자야. 박만술이라고 조성일보 기자인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가 박만술의 사진과 주소 등 신상명세를 건네주자 가죽 잠바를 입은 한 사내가 받아 들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그러자 다른 두 명의 사내들도 더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간다.

다음 날 밤 박만술 기자의 집에 무장 강도가 들었다. 그들은 현관문을 따고 들어와서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귀중품을 뒤지다가 잠에서 깬 박만술이 경찰에 신고를 하려고 하자 갑자기 칼로 박만술의 등과 허리를 찌른 후 도망을 갔다. 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박만술은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단서가 남은 것도 없었다.

응급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입원 중인 박 기자에게 김대진 형사가 병문안을 왔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보자마자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이 있었다.

"아휴, 나 때문에 박 기자님이 이 고생을 하시네요. 어떻게 좀 나아지셨나요?"

옆에서 간호를 하는 박 기자 아내의 눈치를 보며 김 형사가 말을 조심한다.

"무슨, 그런 말씀을! 많이 좋아졌다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다음 주면 퇴원도 할 수 있답니다."

"그래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네요. 이게 우연이 아닐 겁니다. 제가 반드시 범인을 잡겠습니다."

"관할이 다른 데 가능하시겠어요? 암튼 수고해 주시고 저도 퇴원하면 협조하겠습니다."

"예, 무리하지 마시고 몸조리 잘하세요. 저는 이만..."

두 사람이 하는 선문답 같은 알 수 없는 대화에 박 기자의 아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병실을 나서는 김 형사를 배웅한다.

그 길로 김대진 형사는 윤미를 다시 찾아갔다. 을지로에 있는 외국계 은행에서 외환 일을 보던 윤미는 김형사를 입구 휴게실에서 맞이했다. 김 형사는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아무래도 윤미 씨 오빠가 누명을 쓴 것 같아요!"라고 찾아온 용건을 말했고

그 말에 윤미는 반색을 한다.

"정말이요? 누명을 벗을 수 있어요?"

"아직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제 짐작은 그래요. 단서와 증거를 찾아야 하니까 저를 믿고 협조를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오빠가 억울함을 씻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조사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진행을 하는 것이라서 비밀을 좀 유지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좀 이상한 상황이지만 윤미의 입장에서는 윤주의 명예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무얼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우선 윤주 씨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분 중에서 믿을 만한 분을 좀 더 소개를 해 주십시오. 지난번에 말씀해 주신 학교 선후배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럼, 인철 오빠랑 명자 언니... 아, 부연이도 있다. 모두 고향에서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다 서울에서 살아요."

"아, 잘 됐네요. 모두 믿을 수 있는 분들인가요?"

"그럼요. 윤주오빠 찾기 모임도 했었는걸요! 언제 소개해 드릴까요?"

"그럼 시간이 되는대로 한 분씩 약속을 잡아서 저랑 만나게 해 주시고요, 우리가 만나고 조사를 하는 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하시겠지요? 연락은 이 번호로 하시고요..."

김 형사가 명함을 꺼내서 주자

"예, 알겠습니다." 라며 윤미가 명함을 받는다.

다음 날 저녁 윤미의 자취 집 근처 우장산 공원 입구 커피숍에서 김 형사는 윤미와 명자를 만났다. 세 사람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김 형사가 말문을 열었다.

"명자 씨 혹시 윤주 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예, 제가 제 동생이랑 서울에 올라온 후 윤주가 저희 자취방에 가끔 왔었고요..."

명자는 윤주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시시콜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윤주와 잠시 살을 맞대었던 일은 부끄러워서 하지 않았다.

명자가 말을 마치자 김 형사는 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별 도움이 되지 않았나요?"

명자가 근심스럽게 묻자

"아닙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김 형사가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러자 명자가

"잠깐만요, 이게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얼마 전에 제가 근무하는 음식점에 세영오빠랑 길희섭 후보님이 다녀가셨는데요 얼핏 윤주 이야기를 한 거 같아요."

배테랑 김 형사의 촉에 뭔가가 확 잡혔다.

"그래서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못 들으셨나요?"

"글쎄요 저도 좀 이상해서 녹음을 하긴 했었는데 녹음 상태가 안 좋아서..."

"녹음을요? 혹시 아직 그 파일 있나요?"

"예. 제 동료 전화기에 녹음을 했는데 지우지 않았으려나? 잘 안 들려서... 근데 세영오빠는 윤주랑 친한 선배고 믿을 수 있는 분인데 뭐가 잘못됐을까요?"

"아닙니다. 아직은... 그래도 아무리 사소한 단서라도 지금은 필요하니까요 그 전화기 잠시만 제게 빌려주시면 포렌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포렌식이요?"

"예, 음질이 나쁜 것도 해독을 하고요 지운 것도 살릴 수가 있어요."

"예.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모레 여기서 다시 여기서 만날까요? 제가 또 일을 빠지기가 어려워서 모레 오전에 만났으면 좋겠거든요. 제가 밤 일을 해서..."

명자가 창피함에 살짝 낯을 붉힌다.

"그럼요. 모레 정오에 괜찮으세요?"

"예. 좋아요."

"그럼 모레 뵙겠습니다. 그리고 윤미 씨는 다른 분과의 약속은 이 일 끝내고 천천히 잡아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김 형사의 활기 띈 모습에 윤미와 명자도 기대감에 부푼다.

약속한 날 명자는 송양의 전화기를 들고 김 형사를 만났다. 김 형사는 그 전화기를 들고 친분이 있는 전문가에게 가서 녹음 내용을 복원시켰다. 세영과 희섭의 대화 내용은 대부분 인식이 가능하게 복구할 수 있었다. 그 내용에 소스라치게 놀란 김 형사는 윤주와 명자에게 그 내용을 전달했고 이어서 박만술 기자, 인철, 부연도 포함한 모임을 가졌다. 이른바 윤주 명예회복 모임이다.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윤주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대한민국에서 힘깨나 쓰는 거물급들이라 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경찰에 신고를 한다고 해결이 될 문제도 아니고요!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계획적으로 현명하게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각자 의견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 주시고 비밀준수를 서약해 주십시오."

"서약합니다."

참석자 모두가 울분과 경악과 정의감 그리고 복수심에 불타서 진지하게 제창으로 서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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