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귀로2

귀로 1부 31-38장

by 이윤수

31장 결심


명수의 비보를 들은 세영은 장례식장에 들러 명자를 위로한 다음 바로 원주로 향했다.

"하자!"

상혁을 만난 세영은 다짜고짜 상혁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세요?"

놀란 상혁이 세영을 진정시키면서 물었다.

"우리 그 돈 제대로 쓰자. 뭐부터 하면 되니?"

"무슨 일인지 좀 차근차근 말해봐요!"

"응, 또 한 동지가 분신을 했다.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안 되겠다. 네 말대로 무슨 짓이든 해야겠다. 내가 저 놈들 살을 질근질근 씹어 먹어도 분이 안 풀릴 것 같다!"

평소 온화하던 세영의 눈에 살기가 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혁은 자신이 옳았다는 듯 잠시 승리감을 느꼈다.

"거 봐요! 제 말이 맞았지요? 제가 다 계획이 있으니까 형은 진정하고 올라가서 조직 일을 열심히 하세요. 제가 알아서 돈을 불려서 뒤를 봐줄게요. 운동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투옥된 동지들 가족도 돌보아야 하지요, 해고자 생활비도 필요하지요, 도피나 집회에도 돈이 필요하구요..."

"알았어. 알고 있어. 알았으니까 어떻게 할 건지 대충 한 번 말해봐."

보통 때와 달리 오늘은 세영이 무척 과격하고 성급하다.

"예, 그 자금을 밑천으로 해서 우선 합법적인 사업을 벌여서 돈을 세탁도 하고 불리기도 할 거예요. 다행히 저희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니까 아버지 명의로 자연스럽게 사업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넌 이미 계획이 있었구나!"

"예, 걱정 마시고 올라가세요. 그리고 돈이 필요할 때 연락하세요."

"알았다. 고맙다. 그럼 난 너만 믿고 간다."

무엇이 급한지 세영은 다시 서둘러 서울로 돌아갔다.

다음 날 상혁은 밥을 먹으며 아버지에게 용건을 말했다.

"아버지, 제가 사업을 좀 시작해 볼까 하는데요.."

"사업? 공부는?"

"제가 수배 중이라 복학도 어렵고 설령 공부를 한다고 해도 취직도 안 될 거예요..."

"..."

학업을 중단한다는 아들의 말이 내키지 않는지 상혁의 아버지는 대답 없이 밥과 국만 수저로 떠서 자꾸 입으로 넣는다. 옆에서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상혁의 어머니가

"돈은? 돈은 있냐?"

어떨 때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현실감각이 빠르다. 상혁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이 현실적으로 더 승산이 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돈은 제가 알아서 융통을 해 볼게요. 아버지는 그냥 명의만 빌려주세요."

"그거야 그래도 되지만,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상혁의 아버지가 마지못해 동의를 한다.

"우선 일본에 가서 돈을 좀 빌려올 거예요. 거긴 이자가 거의 없어서 가져와서 돈놀이만 해도 그냥 남아요!"

예상치 못한 아들의 사업 구상에 부부는 깜짝 놀라서 멍하니 서로 얼굴을 쳐다본다. 아직 어린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하는 본새가 벌써 자신들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 같아서 대견하기도 하고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그게 쉽게 될까? 그게 쉬우면 누구나 하지.."

아직도 아버지는 미심쩍다.

"제가 다 알아봤어요. 다 방법이 있어요. 다만 제가 수배 중이라 밀항을 한 번 해야 할 것 같아요."

"밀항?"

"예. 다음 주쯤 울산에 가서 배로 일본에 한 번 다녀올게요."

"그렇게 빨리? 근데 그건 위험하진 않니?"

"예. 하려면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미적거리지 말고 당장에 해치우는 게 나아요. 마침 내 친구 중에 대학 안 가고 이천에서 건달 하는 놈이 있는 데 거기서 가끔 일본 밀항을 한다니까 걔한테 부탁하면 돼요."

상혁의 거침없는 대답에 부모님은 더 이상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상혁은 배낭 하나를 매고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서 승용차로 울산까지 갔다.

"죄송해요. 먼 길을... 제가 버스 타기가 좀 부담스러워서..."

"짜식, 부모 자식 간에 이까짓 거 가지고 미안하기는.. 그런 소리 하면 내가 서운하다."

상혁의 아버지는 대 장정을 떠나는 아들을 보내는 뿌듯한 부모의 심정으로 흔쾌히 대답을 한다.

미리 약속을 한 울산 인근 장생포구의 한 횟집에서 건달 친구를 만났다.

"아버님 오신 김에 회 한 사라 하고 가시지요!"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건장한 체격의 친구는 건달답게 호기를 부리며 상혁의 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아니다. 난 또 갈 길이 바빠서 그만 갈 테니까, 잘 부탁하네!"

상혁의 아버지는 처음 본 아들 친구라 조금은 어색하게 말을 하고 서둘러 차에 올라서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오랜만이다. 친구!"

상혁의 친구는 술잔을 기울이며 상혁을 반겼다.

"그래. 고맙다. 이렇게 도와주어서.."

술잔을 받으며 상혁이 웃는다.

"자, 건배!"

두 사람은 술잔을 마주치고 난 후 단 숨에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카아-' 인상을 찌푸리며 젓가락으로 접시에 가지런하게 썰어 놓은 방어 회 살을 한 점 집어서 초장에 찍은 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그래, 일본은 무슨 일이고? 좋은 일 있나? 가서 안 올 거냐?"

"뭐 별 일은... 사업차... 일 보고 금방 올 거야."

"그래? 내가 자세히 물어보면 실례가 되겠지? 짜식 난 네가 대학 가서 공부로 출세를 할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 갑자기 웬 사업을 한다는 건지 뚱딴지 같이.. 좋은 건 있으면 나도 좀 끼워주라! 우리 오야붕이 너 엄청 신경 쓰더라! 일본 야쿠자 하고도 연락을 해 놓은 거 같고..."

"물론이지. 좀 윤곽이 나오면 같이 할 일이 좀 있을 거야."

"그래. 좋았어. 자 원샷!"

친구가 다시 술잔을 든다.

"그런데 언제 가냐? 술을 이렇게 먹어도 되냐?"

"응, 밤에 갈 줄 알았지? 아니거든... 밤에는 해경이 더 의심을 해. 좀 있다가 새벽에 낚싯배를 타고 나갈 거니까 아직 시간 많아. 자 마셔!"

"그래? 그래! 먹자."

두 사람은 거의 새벽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하지만 상혁은 곧 그 선택을 후회했다. 다음날 동해 수평선에서 막 해가 떠오를 즈음에 작은 어선 겸 낚싯배에 오른 상혁은 낙엽처럼 흔들리는 배 위에서 어젯밤 먹은 것을 괴롭게 몽땅 토해내야 했다.

이미 경험이 있는지 통통배의 선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낚시 손님을 태우는 척하면서 해경에는 단독 어로 작업으로 무전 신고를 했다. 이윽고 해안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바다 쪽으로 항해를 하던 배는 지나가던 좀 큰 화물선 옆에 정박을 하고 상혁을 그 배에 오르게 했다. 통통배의 선장도 그 화물선의 선원들도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못 본 척 손짓으로 상혁이 할 행동을 지시할 뿐이었다.

통통배는 전 날 자신이 쳐놓았던 그물을 걷어 고기를 좀 수확한 다음에 장생포 항으로 돌아가고, 화물선의 짐 칸에 들어가 있던 상혁은 다시 일본의 근해에서 다른 작은 통통배를 갈아타고 도쿄 부근의 항구에 상륙했다.

처음 일본에 와 본 상혁은 지리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아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천 건달 두목과 연계가 있는 일본 조폭 사람이 서투른 한국말로 상혁을 안내를 했다.

검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일본 조폭은 커다란 검정 승용차에 상혁을 태워서 도쿄 시대 한 건물의 사무실에 데려다주었다.

도쿄의 거리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 들었고 상혁이 들어간 고층 빌딩은 통유리 창이 많은 신축 건물로 엘리베이터와 사무실 내부가 금장식이 된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한자로 무슨 法律事務所라고 입구에 적혀있었으나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사무직원 같지 않고 민머리에 건장한 체구가 하나같이 조폭들 같아 보였다. 잠시 후 상혁이 앉아 있는 회의실로 젊은 여자 통역을 대동하고 조폭 중간 간부쯤 되는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상혁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배낭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안에는 금괴가 그득 차 있었다. 야쿠자 생활을 꽤 오래 했지만 이런 거액의 금덩이는 처음 본 조폭은 흠칫 놀란다.

"이걸 처분해서 그걸 한국으로 송금해 주시오. 서류상으로는 대출을 받은 걸로 하고..."

통역을 통해 상혁의 요구사항을 전해 들은 조폭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들고나가려고 한다.

"잠깐만! 금을 먼저 가져가면 안 되지! 내가 어디 도망갈 거 아니니까 먼저 송금을 하고 금은 가져가도록 합시다!"

상혁이 손으로 배낭 끈을 잡고 제지를 하자 조폭이 야릇하게 비웃는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죽이고 금을 그냥 빼앗을 수도 있어. 다만 한국의 동업자가 앞으로도 거래가 있을 사업 파트너라고 해서 믿고 일을 하는 거야. 그 정도 신뢰가 없으면 이 바닥에서 같이 일 못해!"

통역이 전달을 하자 상혁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 싶어 얼른 손을 거두었다.

일본 조폭은

"아무려나!" 하고 금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문을 열고 대수롭지 않게 나가려고 한다. 그러자 상혁이 미리 준비했던 메모지를 건네준다.

"여기 송금할 한국의 은행 계좌 번호와 예금주!"

그러자 야쿠자는 상혁을 힐끗 쳐다보고 메모지를 받아 들고

"수수료는 우리가 알아서 뗄 테니 그리 알고 일이 끝날 때까지 숙소는 이 아가씨가 안내할 거요."

라고 말하고 나간다.

상혁은 통역이 안내한 시내 어느 호텔의 조그만 방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있다가 이틀 후 다시 통통배와 화물선을 번갈아 갈아타고 울산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배를 타기 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항구에는 예의 그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뱃놀이 재미있었냐?"

친구가 짓궂게 웃으며 반겼다.

"이 새끼! 너 일부러 나 술 잔뜩 먹었지? 그날 밤!"

상혁이 친구에게 주먹질을 하는 시늉을 한다.

"아쭈.. 해보자고? 그래 한 번 붙어보자."

건달친구가 맞상대를 할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쥔다.

"아이구 이걸 그냥 친구만 아니면.."

그 서슬에 상혁이 꼬리를 내리고 팔을 내린다.

"흐흐흐.."

건달 친구가 다가와 상혁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얹어 어깨동무를 하며 자신의 차로 상혁을 안내한다. 친구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상혁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캐시 론' 사채 급전 전문 대부업체를 설립했다. 물론 대출금 회수와 운영은 건달친구와 그 두목의 도움을 받았다.

연 20%가 넘는 한국과 0%에 가까운 일본의 이자율 차이는 상당했고 겉으로는 일본으로 이자와 수익을 송금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돈은 고스란히 상혁의 주머니로 들어갔기에 조폭과 수입금을 반반으로 나누어도 상혁의 돈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더욱이 조금 이자가 낮다고 일본 엔화 표시로 대출을 해 간 사람들은 환율변동에 따른 손실을 그대로 떠안았다. 물론 그들의 손실은 또 상혁의 수익이 되었고 심지어 강남의 어떤 개업의는 개업 때 빌린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와 환차손을 견디다 못하여 자살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혁이 보내주는 돈으로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수시로 조달하는 세영은 운동권 조직 내에서의 위상과 발언권이 급속도로 높아져갔다.


32장 역모


대통령 임기 5년을 거의 마친 전재무는 연임을 하고 싶었지만 국민들이 그동안 독재에 대한 경계심과 저항이 심해져서 정상적으로 연임을 시도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달콤한 절대 권력의 맛을 한껏 본 그는 어떻게 해서든 그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다.

"임자, 무슨 좋은 묘안이 없을까?"

전재무가 청와대 집무실에서 국무총리 노진우를 앞에 앉혀놓고 오만상을 다 찌푸린다.

"..."

노진우는 입맛만 쩝쩝 다시며 대답이 없다. 전재무의 성격 상 분명히 복안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고 설령 묘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음 대권에 욕심이 있는 노진우가 전재무의 연임에 도움이 되는 계책을 쉽게 알려줄 리가 없다. 그런 속셈을 뻔히 아는 전재무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바로 자기 계획을 말한다.

"전방에 말이야. 한 일개 사단 빼낸다면 말이야, 어디가 가장 좋을까?"

"글쎄요. 지난번 광주 때 우리가 무단으로 전방 사단을 빼내서 여론도 안 좋고 미군도 마지못해 그 빈틈을 메우기는 했지만 연합사와 자신들의 평소작전지휘권을 무시했다고 엄청 열받아했는데 또 전방 사단을 빼면 곤란할 거 같은데요... 갑자기 이동 배치라도 하려는 건가요? 그거라면 참모총장과 의논을..."

전재무가 화를 벌컥 내며 노진우의 말을 자른다.

"그 정도는 나도 다 알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임자랑 의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노진우가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전방보다는 수방사가 어떨지... 문동일이 사단장으로 있으니까 말도 잘 들을 테고..."

"글쎄... 수방사가 쿠데타를 한다... 그것 참... 모양이 좀 그런데..."

"쿠데타요?"

노진우가 깜짝 놀라서 되묻는다.

"음.. 반란이 아니라 친위 쿠데타라고나 할까..."

능구렁이 노진우도 예상을 못했던 수다. 역시 전재무는 기발하고 과감한 꾀를 잘 낸다.

"그럼 대통령 각하를 연임하게 하려고?"

"바로 그렇지. 그렇게 수방사가 서울을 꽉 잡고 있으면 아무도 반항을 못할 거고 나도 계엄을 선포한 다음 못 이기는 척 수락을 하면 되긴 되겠는데... 아무래도 수방사 사령관은 당연히 통수권자가 가장 믿는 사람을 임명하는 게 상식이고 문동일이가 내 수하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거라.. 너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서 말이야... 그 정도는 나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임자 머리도 별로 쓸모가 없구먼!"

전재무의 모욕적인 표현에 노진우는 화가 났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고 속셈을 한다.

'씨발 놈! 그렇게 또 해 처먹겠다는 거구나! 한 번 해 먹었으면 나한테 넘겨주어야지, 난 맨날 후구야? 개새끼, 내가 나중에 이 모욕을 다 갚아주마! 그럼 어떻게 한다?... 하는 수 없지, 일단 좀 참고 한 발 물러서서 기회를 좀 더 보자.'

"그렇다면, 혹시.. 역으로 친위가 아니라 반란으로 해서 제압을 해버리면 어떨까요?"

"그럼 문동일을 희생시켜야 하고... 또 사상자가 생기면 너무 시끄럽지 않을까?"

"그래도 대의를 위해서 그 정도는..."

노진우의 제안에 전재무도 약간 놀란다.

'이 놈이 능구렁이 인 줄만 알았더니 잔인하고 의리도 없는 놈이네! 내 뒤통수도 능히 칠 놈이야!'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전재무는 잠시 생각을 한다.

"그래, 그것도 한 방법이겠네. 그럼 일단 임자가 문동일이에게 가서 친위 쿠데타를 하라고 그래. 명분은 안보

와 경제성장 지속을 위해 내가 한 번 더 하는 걸 원한다고 하고... 올림픽도 잘했고 지금 경제도 좋은 편이니까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야. 내가 이거 마무리를 해야지 지금 저 놈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거고 죽 쑤어서 개 주는 거야. 임자는 그다음에 또 이어서 봉사 좀 하라고!"

"예"

노진우는 마지못해 대답을 한다.

"문동일이에게는 거기 까지만 이야기하고, 만일 일이 잘못되면 그때 진압을 하든지 말든지 한 번 생각해 보자고!"

"그럼 거사일은?"

"곧 크리스마스지? 12월 12일이 어떨까? 끝내고 크리스마스, 연말연시 잔치 분위기로 대충 넘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네."

전재무는 거침이 없다. 이미 거사의 상세일정까지 짜 둔 낌새다.

"알겠습니다. 세부 사항은 제가 가서 상의를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노진우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청와대를 나와서 바로 남태령 수방사령부로 향했다.


33장 인연


그 시간 인철과 윤미, 부연, 명자, 영혜는 세영과 선옥의 집에 모여 있었다.

선옥이 임신을 하자 휴학을 하고 광명에 작은 주공 아파트를 전세로 구해서 우선 세영과 동거를 시작했고 곧 아들을 출산하여 윤주 찾기 정기 모임 겸 조촐한 돌잔치를 열기로 한 것이었다.

"축하해요. 언니!"

마지막으로 도착한 명자가 문을 열어주는 선옥에게 포장지에 곱게 싼 선물을 안기며 말한다.

"고마워! 춥지? 얼른 들어와!"

"명자 씨 오셨군요! 시장할 텐데 이리 와서 앉아요!"

주방 싱크대에서 접시에 담긴 음식을 상에 옮기던 세영도 거든다.

"안녕하세요? 어머! 인철이 아니야? 군복을 입고 있으니 몰라보겠다."

선물을 건네고 거실로 가려고 고개를 돌리던 명자가 중위 계급장을 달고 엉거주춤 일어서는 인철을 보고 반색을 한다.

"예. 안녕하세요. 퇴근 후 급하게 오느라 옷도 못 갈아입었어요."

"뭐 어때! 멋있기만 하구만! 부대가 이 근처야?"

"예, 한강 다리에서 근무해요!"

인철의 대답에 세영이 농을 건다.

"야, 이거 군대생활 폈네! 완전 니나노야. 출퇴근도 하고!"

"예, 운이 좋았어요. 학군장교는 대개 전방에 배치를 받는데.. 병과도 헌병이라 훈련도 별로 없고 괜찮아요."

인철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변명을 한다.

"그럼 그럼 고생 안 하고 얼마나 좋냐!"

명자가 엄마나 누나처럼 인철을 감싼다.

"언니, 수다만 떨지 말고 아기 좀 봐요!"

선옥을 대신해서 포대기에 싼 아기를 안고 있던 윤미가 명자에게 말을 건넨다.

"응, 그래... 아휴 이쁘다. 언니 닮아서 쌍꺼풀도 있고.. 그래 윤미 너도 졸업했지?"

"예, 은행에 취직도 했어요."

옆에서 서 있던 부연이 대신 대답했다.

"그래, 잘 됐다. 부모님이 엄청 좋아하시겠다. 그동안 시름만 많으셨는데..."

"그러게요."

순간 모두가 표정이 좀 어두워졌다.

"자자, 앉자. 음식 식겠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세영이 사람들에게 자리를 권한다. 잡채와 불고기, 미역국에 새우튀김까지 있고 하얀 백설기 떡 위에 초도 하나 꽂혀있는 것이 식탁이 제법 풍성하다.

세영이 초에 불을 붙이고 일행이 손뼉을 치면서 '축하노래'를 합창하자 선옥이 아기를 안고 입으로 불어서 촛불은 끈다.

"케이크 대신에 떡으로 했는데 괜찮지?"

"그럼요!" 모두가 화답하자

선옥이 활짝 웃는다.

수저를 들면서 세영이 환담을 시작한다.

"자, 먹자. 차린 것도 많지만 맛도 좋으니까 엄청나게 많이 드세요!"

모두들 깔깔 웃는다.

"이 많은 걸 혼자 다 했어요?"

부연이 묻자

"아니야, 친정어머니가 와서 도와주시고 가셨어. 불편할까 봐 너희들 오기 전에 가셨어."

"그랬구나! 어쩐지 음식이 맛이 좋구나 했어!"

영혜가 선옥을 놀린다.

"요것이! 너도 나중에 시집가면 다 해야 한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선옥이 짐짓 타박을 하자

"흥, 나는 시집 안 가요!"

"야야,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이 삼대 거짓말 중에 하나라더라. 노인네 죽고 싶다는 말하고 장사꾼 밑지고 판다는 말하고 같이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세영이 영혜를 놀리고 다들 흥겹다.

"참, 부연이 너는 임용고시 합격했다며! 축하해!"

명자가 조신하게 밥을 먹고 있던 부연에게 말을 건다.

"예, 곧 발령받을 거예요!"

부연이 겸손하게 대답하자

"근데 교대도 임용고시 보나?"

명자가 예전에 명수로 들은 말이 있어서 물어본다.

"아니에요. 얘 교대 아니고 사범대에 갔어요. 교대랑 사범대 복수 합격했는데 사범대를 선택한 거예요."

"아, 그랬구나. 아무래도 중 고등학교 선생님이 더 좋겠지?"

명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얘는 천재예요. 시험만 봤다 하면 척척 붙어요."

윤미가 친구를 치켜세운다.

"얘는, 너도 금방 취직했잖아! 돈도 나보다 많이 벌겠구만!"

부연이 겸양을 하고

"야야, 이거 친구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인철이 슬쩍 끼어든다.

"야, 인철아! 너 애인 없지? 윤미랑 어떻게 좀 해 봐라. 서울서 근무하니까 연애하기도 좋고 윤미도 객지에서 혼자 있기 외로운데 네가 오빠처럼 좀 챙겨주면 서로 얼마나 좋겠니!"

명자의 말에 윤미와 인철은 낯을 붉히고 다른 사람들은

"사궈라! 사궈라!" 하고 구호를 외친다.

"그럼 오늘부터 1일이다. 기념으로 건배!"

세영이 상에 놓인 술잔을 들며 외친다.

모두들 깔깔대고 일행은 모처럼 시름을 잊고 밤이 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아닌 게 아니라 거의 전철이 끊어질 때가 되어서 선옥과 세영의 집을 나온 일행은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행선지가 비슷한 인철과 윤미는 택시를 합승을 하게 되었다.

"너 방 얻은 데가 강서구청 근처라고 했지? 그럼 난 행주대교 근처니까 너 내려주고 내가 부대로 가면 되겠다."

"예. 가깝네요. 몰랐어요."

"그러게. 출퇴근은 어렵지 않아?"

"예, 60번 타면 한 번에 가요. 직장이 시청 근처라..."

"그래. 잘 됐다. 어디 외국계 은행이라며?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그냥 뭐..."

"그래, 하는 일은?"

"딜링 룸이에요."

"딜링 룸? 그게 뭔데?"

"외환 거래 하는 곳이에요."

"와, 대단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으니 그 모습이 보기가 좋은지 택시기사도 룸미러로 두 사람을 힐끗 보면서 빙그레 웃는다. 잠시 후 윤미가 택시에서 내리자 다시 차를 출발시키면서 기사가 묻는다.

"애인인가 봐요! 군인 아저씨!"

"아니요, 고향 동생..."

인철이 말을 얼버무리자

기사가 놀린다.

"에이, 애인 같던데 눈 빛이 촉촉한 것이... 도로 데려다줄까? 이럴 땐 그냥 자빠뜨리고 봐야 하는 거야!"

"아니라니깐요, 아저씨! 그냥 얼른 가세요!"

인철이 짐짓 항의를 하고 택시 기사는 좀 더 야한 농담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전방을 보고 말없이 운전을 한다.


34장 영웅


며칠 후 12월 12일 새벽 1시경, 제1 한강대교!

교각과 교각을 물결처럼 이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의 은색 아치가 하얀 조명을 받아서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그 멋진 외양 뒤에는 6.25 전쟁 때 피난민을 잔뜩 안고 폭파가 된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는 수도 서울 최초의 한강 다리다. 남쪽 아치형 대교가 끝나고 북 쪽의 밋밋한 형교(桁橋)와 맞닿는 곳에 작은 섬이 있고 그곳에 헌병대와 경찰의 합동 검문소와 근무자들의 숙소가 있다.

한강의 모든 다리의 경비를 맡고 있는 인철의 헌병 중대는 각 다리마다 1개 분대씩 파견을 보내서 경계를 서게 했고 그중 인철의 소대는 서쪽의 다리 3개(원효, 성산, 한강 1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비록 소대장이지만 매일같이 순찰을 돌아야 하는 인철은 지프차와 운전병을 배당받아서 운용을 하고 있었다. 전방 같으면 거의 대대장급 대우다. 총도 M16이 아니라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머리에 은빛 계급장, 어깨에 푸른 견장과 가슴의 지휘자 휘장, 그리고 금빛 허리띠 버클, 이름표 위의 알록달록한 훈장 약장,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다림질한 팽팽한 바지와 티끌 하나 없이 광이 번쩍거리는 군화를 차려입은 인철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고 위엄이 넘친다.

인철이 순시를 마치고 지프차에 오르자 운전병이 시동을 걸어 출발을 한다. 분대장의 경례를 받으며 차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리 위는 한산했다. 그런데 갑자기 운전병이 차를 급정거한다.

"소대장님!"

운전병은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인철을 바라본다.

멀리 검은 전차 한 대가 상도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이 보인다. 뒤 쪽에서 어두운 두 줄기 불빛이 쿨렁쿨렁 상하로 움직이는 것이 아마도 뒤 이어 따라오는 탱크가 또 있는 것 같았다.

"차 돌려!"

인철이 다급하게 외치자 운전병이 핸들을 돌려 끼이익 바퀴 소리를 내며 도로를 역 주행해서 검문 초소를 지나 헌병대 속소 앞 작은 공터로 간 후 다시 바퀴 타는 냄새가 나도록 급정거를 한다. 이 소리와 모습에 놀란 초소장 하사와 근무를 서던 병사와 경찰까지 달려온다.

"오늘 부대 이동 보고 있었나?"

인철이 초소장에게 묻자

"아니요. 없었습니다."

숙소에서 상의를 대충 걸치며 나오던 초소장이 옷 단추를 여미며 대답했다.

그러자 인철은

"비상! 전 대원 무장 배치하고 초소장은 중대에 유선으로 상황 보고해!"

허둥지둥 근무초소로 들어가는 초소장을 보며 인철은 다시 운전병을 다그쳐 차를 다리 한가운데 세우게 하고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병사와 경찰에게 명령을 한다.

"뭐 하고 있어? 바리케이드 치고 다리 봉쇄해!"

그러자 병사와 경찰이 다리 한편에 젖혀져 있던 삼각대 모양의 철재 바리케이드와 차량 바퀴 제어용으로 철침이 박힌 철판을 끌어다가 도로 위에 가로로 설치하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경찰 초소장도 나오고 병사들도 총을 들고 바리케이드 뒤 쪽과 인도 쪽 방호 참호 뒤에 자리를 잡는다.

어느새 첫 번째 탱크가 바리케이드 앞에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그 뒤로 큼직한 탱크들이 연이어 우르릉거리며 움직이고 있다.

사실 바리케이드는 차량용 제어장비로 탱크는 단숨에 밟고 넘어갈 수 있어서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모든 병사와 부대는 허가 없이 헌병의 제지선을 넘을 수 없기에 상징적인 뜻은 크다. 이 선을 넘는 순간 그 병사와 부대는 명령 불복종, 무단 행동 즉 항명의 무거운 벌을 받기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잘 아는 인철은 바리케이드 앞으로 나가서 탱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인철을 깔아뭉갤 듯 다가오던 탱크는 바로 인철의 코 앞 몇 센티미터를 남겨두고 멈추어 섰다. 육중한 몸체가 오던 관성으로 출렁출렁 거린다. 인철은 등골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두발을 적당히 벌리고 팔을 약간 들어 주먹 쥔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후 오른손 검지를 살짝 펴서 언제라도 권총의 가죽 덮개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하들이 보는 앞이라 더욱더 겁먹은 표정을 보이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깔려 죽어도 추하고 비굴하게 도망을 치지는 않고 명예롭게 대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캄캄한 밤 검은 아스팔트 위에서 육중한 탱크의 대열 앞에 홀로 서서 조명을 받고 있는 인철의 모습은 숭고하고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정지!"

인철이 오른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앞으로 내민 후 하얀 장갑을 낀 손바닥을 밖으로 내 보이며 짧고 굵게 소리를 쳤다.

아무 반응이 없다.

"지휘관이 누구인가?"

인철이 다시 소리를 치자 첫 번째 탱크의 포탑 뚜껑이 열리며 무전기 마이크가 달린 탱크병 민 헬멧을 쓴 한 군인이 고개를 내민다.

"부대 이동 명령서!"

인철이 그에게 다시 소리를 친다.

그러자

"비켜! 당장 비켜!"라고 그 군인이 위압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인철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다시

"없으면 당장 부대로 복귀하라. 불복종시 위수지역 이탈로 체포하겠다!"

말도 안 되는 줄 알지만 인철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그 군인을 째려본다.

그 군인은 기가 막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머뭇거린다.

잠시 대치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에 탱크 대열 뒤 쪽에서 지프차 한 대가 인도와 탱크의 틈을 비집고 나와서 인철의 앞에 선다.

철모를 쓰고 지휘봉을 든 군인이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고개를 내밀며

"이 새끼! 너 뭐야? 당장 안 비켜?"

라고 소리를 지른다.

철모 앞과 차 앞에 하얀 별 두 개가 보인다. 사단장이다.

"안됩니다. 부대 이동 명령서 보여주십시오. 저희는 사전 통보받은 것이 없습니다."

인철이 지지 않고 대답한다.

"뭐? 명령서? 너 계급이 뭐야? 상관이 까라면 까는 것이지...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모르겠습니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아군을 위장한 적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인철은 여전히 당당하다.

"뭐? 적? 야! 안 되겠다. 밀어버려!"

문동일 사단장은 지휘봉으로 인철을 가리키며 고개를 돌려 탱크 위의 군인에게 명령을 한다.

그러나 탱크는 잠시 부릉부릉 공회전 속도를 높여 비키라고 위협을 하는 듯했지만 더 이상 앞으로 전진을 하지는 않았다.

바리케이드를 통과하려면 인철을 깔아버리고 가야 하는 위치인데 아무리 사단장의 명령이라도 탱크병은 위풍당당한 대한민국 헌병 장교를 차마 무참히 밟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야! 이 새끼들 명령 불복종이야? 명령 불복종은 즉결총살인 거 몰라?"

문동일은 자기 부하들과 인철을 번갈아 바라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낸다. 그가 권총을 인철에게 겨누고 서서히 다가오는데도 인철은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주변의 병사들과 경찰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려있다.

"정말 쏜다! 비켜!"

거의 인철의 이마에 닿을 정도로 총구를 가까이 대고 문동일은 소리를 지른다.

"탕-"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인철의 부하들은 어쩔 줄을 몰라서 겨누고 있던 소총의 방아쇠에 검지를 밀어 넣고 사격 준비를 했다.

그러나 쓰러진 사람은 인철이 아니라 문동일 사단장이었다.

언제 왔는지 또 한 대의 지프차가 사단장의 차 뒤에 서 있고 누군가가 그 차의 후드 위에 몸을 기댄 채 두 사람 쪽으로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소총의 총구에서는 흰 포연이 뭉게뭉게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지프차에서 한 사내가 내려와 인철 쪽으로 다가왔다.

"나, 국무총리인데 귀관은 누구인가?"

"예, 헌병대 중위 최인철입니다."

어두움 속이지만 TV에서 가끔 본 노진우를 알아본 인철이 거수경례를 하면서 대답했다.

"잘했네! 쿠데타가 났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왔는데 자네 덕분에 막을 수가 있었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여기서 용산 육본, 합참 그리고 광화문 청와대까지 그대로 뚫릴 뻔했어! 큰 일 했네!"

자신의 차기 집권을 위해서 전재무의 친위 쿠데타가 실패하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던 노진우는 부대 뒤를 따라오면서 세를 살피다가 기회를 잡아 문동일을 제거한 것이었다.

인철의 어깨를 한 번 툭툭 치며 격려를 한 노진우는 탱크 위에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휘관에게 말했다.

"자네는 상관인 사단장의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니 별 문제가 없을 거야. 귀관이 지휘해서 부대원 전부와 장비 차량을 본대로 즉시 복귀시키게."

그러자 탱크 위의 군인은 무전기로 뭐라고 명령을 내리더니 서서히 탱크를 후진하여 한강교를 빠져나가 상도터널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군용 엠블런스가 와서 성동일의 시체를 인수해서 가고 노진우는 그 길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갔다.

"실패했습니다!"

노진우는 숙소로 들어서며 전재무에게 보고했다.

전재무는 쿠데타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집무실이 아니라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잠을 자고 있지는 않았다.

"뭐? 실패? 어떡하다가?"

전재무가 실망한 어조로 말한다.

"예. 한강 다리에서 막혔습니다. 헌병이 완강하게 저항을 하고 병사들이 따르지 않는 바람에..."

"야! 그게 말이 돼? 한강 다리에 헌병이 몇 명이나 된다고!"

"예,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헌병 소대장이 워낙 당당하게 맞서는 바람에..."

"참나! 기가 막혀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문동일은 사망하고 수방사는 원대 복귀했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는 그냥 반역으로 하고 진압을 한 걸로..."

"어휴! 미치겠네! 이러면 계획이 삐끌어지는데.. 도대체 헌병 그 새끼가 누구야? 내 이놈을!"

전재무가 재떨이를 벽에다가 던지면서 화를 낸다.

"최인철인가 하는 중위인데.. 화를 내실 일은 아니고 진정을 하시고 이제는 쿠데타를 막은 공로자로 하시는 게 현명..."

"알았어. 가 봐! 내일 아침 일찍 비상 국무회의나 소집해!"

"예"

전재무는 자신의 장기 집권 계획이 어긋나서 화가 나서 펄펄 뛰고 노진우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풀려서 마음속으로 신이 나서 펄펄 뛰었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조간신문에는 1면에는

'쿠데타 불발'

이라는 타이틀 아래, 탱크를 막아서고 있는 인철의 사진이 대문짝 만하게 실렸다.

반대쪽 차선으로 지나가던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 신문사에 보냈고 지난밤의 사연이 자세하게 신문과 TV 라디오 특보로 전국으로 알려졌다.

인철은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일반 시민과 야당 쪽 그리고 운동권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전재무와 노진우 그리고 이제 여당 국회의원이 되어있는 길희섭 전 대위 일당도 인철을 공로자로 공식 포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동일은 억울하게(?) 역적이 되어 사후 일등병으로 강등되고 연금도 박탈되었으며 국립묘지에도 묻히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이 뿌린 광주에서의 피를 보면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 사필귀정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아직 수많은 원혼들을 달래기에는 전재무와 노진우 일당이 너무나 뻔뻔하게 호의호식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35장 훈장


인철의 훈장 수여식은 용산 육군 회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인철과 더불어서 분대장과 중대장까지 무공 훈장을 수여받게 되었고 헌병감이 직접 훈장을 세 사람의 목에 걸어주었고 인철은 다시 한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육군회관을 나온 인철은 축하하러 식에 참여한 윤미와 세영, 부연과 함께 택시에 올랐다. 인철의 무릎 위에는 꽃다발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축하해!""축하해요!"

세 사람이 몇 번이고 인철에게 치하를 한다.

인철은 말없이 수줍게 정모를 벗어서 꽃다발 위에 놓고 손가락으로 짧은 머리를 북북 긁는다. 그 모습을 보던 윤미는 이럴 때는 인철이 꼭 아이 같아서 그 당당하던 신문의 사진을 대비해서 떠올리며 빙긋 웃는다.

"오빠 축하의 의미로 내가 거하게 한 턱 쏠게! 뭐 먹고 싶어? 중식? 양식? 한식?"

"응, 아무거나!"

"안돼!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그게 제일 어려운 대답이야. 응, 말해봐 뭐든지!"

윤미는 이제 거의 반 말에 교태를 부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부연이

"아이고, 이제 돈 좀 번다 이거지? 그래 낭군님이랑 맛난 거 먹어라. 난 빠질란다!"

라며 뾰루뚱한 채 한다.

"아니야. 너도 같이 가야지. 세영 오빠도 같이 가요. 예?"

"응, 나도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조수석에 타고 있던 세영도 사양을 한다. 잠시 후에 세영과 부연은 남영 전철역에서 내리고 인철과 윤미는 한강 고수부지 유람선 식당 앞에 당도했다.

두 사람은 행복한 연인이 되어 한강을 바라보며 저녁 식사를 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도 한강만큼 풍부한 수량을 가지고 시원하고 넓은 풍경을 선사하는 강은 잘 없다. 특히 그날 밤 한강의 야경은 황홀하고 멋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의 중심에는 인철이 주인공이었다. 윤미는 인철에게 매혹된 듯 연신 인철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고 유람선을 나올 때는 팔짱을 끼고 몸을 바짝 붙여서 젖가슴이 인철의 팔뚝을 뭉클뭉클 눌렀다.

두 사람은 다시 택시를 타고 강변 88 대로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택시가 윤미의 다세대 주택 2층 셋집 앞에 당도하자 윤미는

"오빠! 우리 집 구경 안 해볼래요? 커피 마시고 가요!"

라며 인철을 잡아끌었다. 인철도 기다렸다는 듯이 차에서 내려서 함께 팔짱을 끼고 계단을 올라갔다.

윤미가 문을 따고 인철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윤미는 까치발을 하여 인철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고 두 팔로 인철을 와락 껴안았다.

인철도 두 팔을 벌려 윤미의 허리께를 안고 자신의 혀를 윤미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윤미가 "음-" 소리를 내며 인철의 혀를 빨았다가 이번에는 자신의 혀를 인철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매끄럽고 달콤한 액체가 두 사람의 입과 입술과 혀를 적셨다.

인철이 손을 내려 윤미의 스커트 아래로 집어넣었다. 스타킹 아래로 윤미의 삼각팬티 선이 느껴졌다. 인철이 스타킹을 끌어내렸다. 약간 하얀 광채가 나는 살색 스타킹이 또르르 말리며 벗겨졌다. 스타킹을 발목 아래로 더 내리기 위해서 인철은 무릎을 굽혀야 했고 그 바람에 인철의 코와 입술이 윤미의 아래 배에 닿았다. 인철은 코와 입술로 치마와 블라우스 틈을 열어 윤미의 배꼽을 찾았다. 인철은 두 손으로 윤미의 엉덩이를 한 짝씩 감싸 안고 주무르면서 입으로는 윤미의 봉곳한 아랫배를 여기저기 햩고 빨았다. 보물을 찾아 헤매던 인철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윤미가 손을 내려 자신의 스커트 단추를 풀자 치마가 '툭' 바닥에 떨어지고 인철의 입술이 윤미의 팬티 안 음모를 간지럽혔다. 윤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인철의 까실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 인철의 코가 눌리면서 숨이 막혔다. 인철이 '쿡쿡'거리자 윤미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인철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인철은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더 세게 윤미의 엉덩이를 손으로 끌어당기며 윤미의 계곡에 자신의 코를 박아 넣었다. 그러자 윤미가 두 손으로 스스로 팬티를 벗어버렸다. 그러자 인철이 윤미를 번쩍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급하게 자신의 옷을 훌러덩 벗어버린 인철이 입술로 윤미의 몸을 이마에서 입술로 목젖으로 가볍게 애무를 하다가 윤미의 블라우스와 블레지어를 벗기고 가슴을 강하게 빨았다. 윤미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아파"라고 하자 얼른 입을 떼고 손으로 가슴과 배 허리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목 그리고 발과 발가락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윤미가 가볍게 신음을 하자 인철은 손가락을 윤미의 음부에 밀어 넣으면서 윤미의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혀로 쓸듯이 빤다. 윤미의 음부에서는 액이 인철의 손가락을 흥건히 적신다. 인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윤미의 무릎을 벌리고 올라가 자신의 성기를 윤미에게 밀어 넣었다. 인철은 삽입을 하자마자 금방 사정을 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밤이 새도록 불끈 솟은 성기로 윤미를 탐했고 윤미도 횟수를 거듭할수록 더 길고 짜릿한 황홀경을 맛보았다.


36장 계략


한편 그날 밤 학교로 간 세영은 과 사무실에서 기태를 만났다. 연명이 학부를 졸업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서 조교일을 보고 있었다. 늦게 복학을 한 신기태는 현재 4학년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이 되었고 세영은 그 참모 겸 자금책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학적은 있었지만 학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운동에만 전념을 했다.

"인철이 그 친구 아주 영웅이 되었더구먼!"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세영을 보고 기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예. 어떻게 아셨어요?"

"야, 요즘 대한민국에서 인철이 모르면 간첩이야! TV에서 중계하고 난리인데 어떻게 몰라? 거기 지금 갔다 오는 거지?"

"예. 잠깐.."

"그 친구랑 네가 인연이 있다며?"

"예. 제 후배 윤주랑 고향 동창이에요."

"오, 그런 인연이 있나! 나중에 우리 편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네!"

"예, 뭐 운동권은 아닌 데 윤주 건도 있고 해서 기본적으로 호의적이고 강직해요!"

"좋아 좋아! 우리도 이제 좀 대중적인 스타가 필요해!"

"..."

"그래서 말인데 내가 이번에 한 번 큰 거 한 건 터트려 보려고..."

"어떤?"

"이북에 사람을 좀 보내야겠어."

"이북? 그건 보안법 위반..."

"그깐 보안법! 상관없어. 이번에 이북에서 세계 청년축제를 개최하는데 우리가 남쪽 청년을 대표해서 사절단을 보내려고 하는데 문제가 좀 있어."

"어떤 문제가?"

"자금이 좀 필요하고 비밀리에 움직일 수행인원이 필요해."

"예. 자금이야 늘 그랬듯이 제가 좀 구할 수 있고 수행인원도 조달할 수 있지요. 근데 목적이?"

"응, 지금 쿠데타 건으로 전재무는 끝났고 여론도 유리하니까 당장은 단임제 직접선거 쟁취 투쟁을 가열차게 하면서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대중적 관심을 끌고 인기를 얻을 이슈를 만드는 거야."

"축제 참여로 그게 가능할까요? 혹시 역풍이라도 불면?"

"아니야. 지금 분위기는 통일 열망도 강하기 때문에 북에서 호응만 잘해주면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이북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고 호감을 쌓은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더불어 우리도 인지도를 많이 높이고 파쇼독재 정권과의 차별성도 부각시키면서 말이야..."

"우리가 그 정도 역량이 될까요?"

"그래서 내가 인철이 저 친구 이야기도 하는 거야. 우리가 아직 대중적으로는 설익은 학생들 정도로 밖에 안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명망인사도 좀 영입을 하고 인철이 같은 친구도 받아들이고 우리가 이런 거창한 일도 기획하여 성사시키고 이북의 지원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런 대중 사업을 벌이려는 거지! 아무튼 위에서 이미 결정을 한 거니까 그리 알고 한번 해보자고!"

"위라면 전대협?"

"아니 그 위!"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기태를 보고 세영은 입을 다문다.

"제3국과 중국을 거쳐서 2명이 입북을 할 거니까 필요한 자금과 구체적인 계획을 좀 수립해 줘!"

"예. 알겠어요."

대답을 마친 세영은 다음 날 원주로 가서 상혁을 만났다.

쿠데타 실패 이후로 전재무의 퇴진과 직선 단임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거의 매일 개최되었다. 이번에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소위 '넥타이 부대'라고 하는 중산층 일반 시민도 광범위하게 시위에 참가했다. 중 고등학생 때는 전교조 교사들의 영향을 받고 광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겪었으며 대학에서는 운동권이 장악한 학생회 활동의 영향을 받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젊은 중산층들이 민주화 운동에 호감을 가지고 미약하게나마 참여하는 것은 이제 기본 상식과 양심에 속하는 것이었고 야당과 범 민주 활동가들에게는 엄청난 힘과 지지기반이 되었다.

결국 전재무 일당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전재무는 물러나고 개헌을 한 다음 대선과 총선을 직접선거로 치르게 되었다.

노진우는 표면적으로 이 변혁을 주도함으로써 전재무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자신의 인지도를 높여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쌓고 있었다. 그리고 야당 대권 후보의 분열도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37장 밀사


'휘휘휘 호호호 휘파람

휘파람 불었네

갑순이의 집 앞을 지날 때...'

확성기에서 경쾌한 이북 노래가 울려 나오다가 멈추자

사회자가

"전국의 애국 학생 동지 여러분! 가열찬 투쟁의 함성으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의장님이십니다!"라고 극적으로 외치자

야외 공연장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다.

약간의 간격을 둔 후 기대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때 맞추어 신기태가 단상에 뛰어 들어온다.

군중은 더 세게 박수를 치고 큰 함성을 지른다.

"일어섰다 우리 청년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전대협의 깃발아래..."

누가 시작한 것이라고 할 것도 없이 군중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라이터에 불을 붙여 머리 위로 올려 좌우로 흔들며 비장한 전대협 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공연장의 조명이 꺼지고 어둑어둑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수천 개 라이터 불빛이 일렁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합창이 원형극장을 울리자 그 감격과 감동에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많았다.

노래가 멈추자 감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신기태가 마이크를 들었다.

"애국 학생 동지 여러분!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각 평양에서는 세계 청년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곳에 참석은 하지 못하지만

자랑스러운 우리의 대표, 임연경 동지와 그 일행이 우리를 대신해서 축전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방금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문을 받았습니다.

자랑스럽지 않으십니까 학생 동지 여러분!"

그러자 "와아!"하고 군중들은 다시 일어나 손에 손에 깃발을 흔들었다.

학생들은 벅찬 감격을 안고 집회를 마친 후 서울 중심부까지 행진을 했고 이제는 전경들도 이들을 막지 못하고 길가에서 호위만 하면서 예정된 행진로를 벗어나는 것만 막을 뿐이었다. 학생들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고 민주화와 승리의 쾌감을 만끽했다.

다음 날 이 소식은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신기태와 정세영 그리고 임연경 세 사람의 대중적 영웅이 탄생했다.

한편 임연경을 수행하고 평양에 간 선옥도 마찬가지로 이북 당국과 인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만난다는 상징성과 여려 보이지만 미모가 출중한 임연경은 남과 북 양 쪽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기색이었다.

하지만 대표로서 칙사대접을 받으며 인민들의 열광적인 환영과 군중대회의 열기에 취한 임연경은 그 인기에 취해있었지만,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마치 기계처럼 인형처럼 움직이는 군상들이 만드는 마스게임과 군무를 뒤에서 지켜보던 선옥은 그 열광마저도 조작되고 세뇌가 된 것 같아서 섬뜩함과 두려움을 느끼고 전율을 했다.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야당이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았지만 후보가 분열되어 있는 바람에 노진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좌절했지만 이번에는 내부의 파벌과 분열 때문이라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신기태 정세영 최인철 등 젊은 운동권 출신들이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고 일부 원로 시민운동권 인사들도 국회에 진출하여 전통 야당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는 성과에 만족을 해야 했다.


38장 회의


한편 강원도와 접경에 있는 경기도 포천의 어느 작은 시골학교에 발령을 받은 부연은 요즘 학교 가기가 영 부담스럽다.

처음에 부임했을 때에는 학생들과 어울리고 수업하는 것이 즐겁고 또 교사연구 모임에 나가면서 수업방법에 대한 고민과 경험과 지식도 나누고 실천하는 것이 행복했지만 막상 학교에 와서 현실에 부딪치면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다. 시골 아이들 중에는 순수하거나 순진한 아이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학업에 관심도 없고 거칠고 반항적인 아이들이 꽤 많아서 심약한 부연의 속을 종종 뒤집었고 선생님들도 부연이 학생시절에 생각했던 그런 다정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좋으신 선생님도 계셨지만 그냥 진급에만 관심이 있는 직장인 같은 분도 많고 회식이라도 가면 야한 농담도 서슴지 않고 술 취해서 드잡이를 하는 선생님도 있어서 교직을 큰 소명으로 알고 온 부연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참 교육을 주창하며 돈봉투를 안 받고 아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친근하여 존경해 마지않던 전교조 선생님들도 날이 갈수록 ‘교육’보다는 ‘투쟁’에 몰두하고 이념에 따라 네 편 내 편을 갈라 조합원 비조합원이 파벌을 이루어 서로 무조건 비난을 하는 통에 요즘엔 누구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로 부임해 온 남기주 선생님이 분회장이 된 이후로는 걸핏하면 교무실에서 교장 교감 선생님이나 주임선생님들과 말다툼이 벌어져서 학교 분위기가 썰렁 살벌해졌다.

오늘도 교무회의 시간에 분회장 선생님이 '벌떡' 일어섰다.

"아니, 실업계 학생들의 현장 실습비를 왜 행정실에서 받아갑니까? 그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 남선생님. 그건 회계처리상 그렇게 하는 거니까 이따가 행정실에서 행정실장이랑 이야기합시다."

교감이 옆에 앉아있는 교장의 눈치를 보며 분회장을 달래고 얼른 회의를 끝마치려 한다.

"아니, 왜 그걸 쉬쉬합니까?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학교에서 뭐 구린 거라도 있는 거 아닙니까?"

"어허, 그 말이 심하시네요. 구리다니요!"

교감이 역정을 낸다.

"왜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지난번 소풍날 회식비도 왜 학부모 회비를 썼습니까? 당당하게 우리 돈 내고 먹자 이 말입니다. 우리가 뭐 거지입니까?"

맞는 말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듣기가 거북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인상을 찌푸린다.

"자자, 그만하시고 이만 끝냅시다. 수업에 늦겠어요."

듣고 있던 교장이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분회장은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5월 1일 날 조퇴 결근 하신 선생님들 징계를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당합니다. 철회해 주십시오."

"그건 선생님들이 무단으로 수업에 차질을 빚게 하고 불법 집회에 참석을 해서.."

"연가와 조퇴는 법으로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입니다. 연가를 내고 본인이 무엇을 하건 그건 개인의 자유인데 그것을 무슨 근거로 처벌을 하십니까?"

"그건 학교 소관이 아니라 교육청의 통보에 의해..."

"아무튼 철회를 안 하시면 다음에 추가로 준법투쟁을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학외 사안이시라니 더는 말씀 안 드리고... 다음은 말씀대로 학내 사안입니다. 보통과 학생들 강제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을 실질적으로 희망을 받아서 실시해야 합니다."

"아니 그건 지금 희망원을 받아서 하고 있잖아요!"

교무주임이 대꾸를 한다.

"그게 형식적이지요. 희망원이 적으면 교무주임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불러다가 위협을 하니 어디 무서워서 희망원을 안 낼 수가 있나요?"

"아, 그건 여긴 시골이라 학교에서 보충과 야자를 안 하면 아이들 학력이 떨어져 진학률도 떨어지고 아니면 어차피 학원에 가서 사교육을 받으니까 공교육을 살리자는 차원에서 다 학생들의 장래를 위해서..."

"보충수업비나 자율학습 지도 수당 때문은 아니시구요?"

"남 선생!"

참다못한 교장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고 교무실 밖으로 나간다.

선생님들은 민망함에 말을 잃고 교감은

"자, 이만 교무회의 마치겠습니다. 1교시는 10분 늦게 단축수업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내뱉고 허둥지둥 교장실로 달려간다.

조합원 선생님들은 분회장에게 몰려가서

"잘했어. 수고했어요."라고 격려를 하고 비 조합원 선생님들은 그저 말없이 책과 수업준비물을 챙길 뿐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부연도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난감하다. 조합원 선생님들은 조합원 선생님 대로 또 주임 선생님들은 주임 선생님 대로 부연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설명을 하지만 다 자기편을 만들려고 하는 술수인 것 같아서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조합에 들면 교장 교감이나 주임들이 사소한 일로 괜히 혼내고 안 들면 조합원 선생님들이 왕따를 시키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참교사 신세다.

부연은 교과서를 들고 교실로 걸어가며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본다. 햇살은 운동장에 가득한데 그 환한 햇살도 오늘은 왠지 슬프고 무겁게만 느껴진다.

갑자기 명수 생각이 났다. 애절하고 안타까웠지만 과연 그렇게 까지 했어야만 했을까? 그 죽음을 모두 그 '적'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부드러운 풀밭 같은 부연의 가슴에 대낮인데도 또 한 밤이 무너져 내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귀로1부 21-3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