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잠행
“이제부터 각자 잠수를 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상혁의 말에 세영과 영혜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 상황에서 침묵은 동의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건 어떡하고요?”
영혜가 턱으로 옆에 있는 배낭을 가리켰다.
“모두 도피 자금이 필요 할텐께 나누어 가져가는 게 좋지 않겠니?”
“난 필요 없어요.”
영혜가 대뜸 받아쳤다.
“그럼 난 욕심이 나서 가져온 거고 넌 고고하게 살겠다고? 내가 첨부터 말했다시피 이건 앞으로 활동을 위한 자금이지 개인이 사사로이 쓰려던 게 아니니께 오해는 하지 말더라고… 계속 같이 움직이면 위험하니 각자 나누어서 가지고 있다가 도피자금으로 우선 쓰고 난중에 한테 모아서 활동자금으로 쓰잔 말이야…”
상혁도 지지 않고 영혜를 노려보았다. 세영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리듯이 말했다.
“그래 네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지금 다른 수가 없지 않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더 있을 수가 없으니까 각자 안전한 곳으로 피하자. 일단 같이 여기를 벗어난 다음에 각자 흩어지기로 하자."
세영의 말에 달리 대안이 없어 모두 다시 배낭을 메고 서둘러 시가지를 벗어나 무등산 쪽으로 올라갔다. 산 중턱쯤 올라가니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묏등에 도달하자 세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배낭을 풀어헤치고 내용물을 대충 세 등분으로 나누어서 자기 앞에 한 덩이 그리고 두 사람에게 한 덩이씩 밀어주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잠바 주머니에 현금과 금괴를 쑤셔 넣었다. 주머니란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도 아직 남아 있는 덩어리가 많았다.
“안 되겠다. 어디다가 감춰두고 일부만 가져가야겠다.”
세영의 말에 두 사람은 또 침묵으로 동의했다.
세 사람은 현금 한 다발 씩만 각자 주머니에 남기고 나머지는 모아서 들고 일어섰다. 사방을 둘러보던 상혁이 계곡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바위 아래 소나무 밑이 좋겠다. 나중에 찾기가 수월하겠네! 난 선배랑 구덩이를 팔테니 넌 이걸 뭘로 좀 싸봐라. 비 들어가면 안댕께... ”
상혁은 돌과 나뭇가지를 챙겨서 어느 나무 아래로 가면서 영혜에게 말했다. 영혜는 마지못해 배낭 속에 나머지 현금과 금괴를 집어넣고 옷가지로 배낭을 단단하게 싸서 묶었다.
"자. 이제 개별 행동이다. 수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집으로는 가지 말고 시골도 눈에 잘 뜨이니 조심하고 가능한 한 서울이나 대 도시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다.”
구덩이에 배낭을 묻은 후 세영이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은 한 사람 씩 시차를 두고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며 산을 내려와서 각자 흩어졌다. 세영이 제일 앞 서고 그다음에 영혜, 마지막으로 상혁이 산을 내려왔다. 검문을 피하자면 광주 외곽을 벗어날 때까지 낮에는 산속에서 자고 밤에 큰길을 피해 산 길로 먼 길을 걸어가야 했다.
몰래 밤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달빛만이 유일한 친구일 뿐 산도 나무도 사람도 모든 것이 무서웠다. 시커먼 산 그림자 속에는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가지도 멀리서 보면 귀신이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없어도 무섭고 사람이 있어도 두려웠다. 심지어 ‘빠지직’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도 영혜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한 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숨죽여 사방을 살피곤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개들이었다. 마을이 나타나면 조심스럽게 멀리 우회를 했지만 개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면 온 마을 개들이 ‘컹 컹’ 짖어대곤 했다. 그러면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덮치거나 신고를 할 것 같아서 또 한 동안 숨을 죽이고 잠잠해질 때까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이슬에 젖어 축축한 수풀 속에 엎드려서 바라보는 멀리 마을의 불빛은 정말 따스하고 포근해 보였다. 불이 켜져 있는 창문 안에서는 다정한 가족들이 모여 앉아 야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만 같아서 영혜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 집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하지만 감상에 잠길 틈도 없이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금방 ‘왜앵’ 하며 모기들이 덤벼들기 시작한다. 손을 저어 쫓아도 쫓아도 끊임없이 악다구니로 덤벼드는 모기들에게 얼마나 많이 물렸는지 영혜의 몸은 울퉁불퉁 성한 곳이 없는 듯했다. 심지어 옷 위로도 모기들은 물어댔고 영혜는 가려움에 긁고 또 긁어서 피부 곳곳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더 이상 모기와 씨름하며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영혜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 어귀 길로 발걸음을 재게 옮겼다. 잠시 잦아들던 개들이 다시 미친 듯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싸리 꽃이 달빛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달리다시피 빠르게 걷던 영혜가 어느 정도 마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한 숨을 돌리려던 순간 갑자기 길 가에서 시커먼 물체가 불쑥 솟아올랐다.
“꼼짝 마.”
영혜는 본능적으로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멈추어 섰다.
“누구냐?”
영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손전등 불 빛이 탈칵 켜지더니 영혜의 얼굴을 비추었다.
잠시 영혜의 몸을 이곳저곳 더듬듯이 비추던 불빛이 다시 얼굴을 비추었다.
“뒤로 돌아.”
영혜가 뒤로 돌아서자
“천천히 엎드려.”
영혜가 길 위에 엎드리려고 두 손을 바닥에 짚는 순간 갑자기 둔탁한 군화 발이 영혜의 두 발을 걷어찼다. 영혜는 비명을 지르며 길바닥에 배를 깔고 나뒹굴어졌다. 영혜가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거친 손길이 영혜의 두 팔을 뒤로 꺾고 밧줄로 묶었다. 영혜가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냈지만 검은 물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혜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뒤에서 밀치며 어디론가 영혜를 끌고 갔다.
잠시 길을 따라 걸어가자 길을 가로막고 트럭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영혜를 끌고 오던 군인은 포장이 쳐져 있는 트럭 뒤로 향했다.
“올라 가.”
손이 뒤로 묶어 있어서 영혜가 어쩌지를 못하고 머뭇머뭇하고 있으니까 군인은 소총 개머리 판으로 영혜의 등짝을 호되게 찍었다.
“올라가란 말이야. 이 년아.”
영혜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충격에 트럭 짐 칸으로 밀려간 후 가슴 높이 보다 더 높은 짐 칸 바닥에 어떻게든 올라가 보려고 버둥거리자 군인이 영혜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서 그녀의 상체를 짐칸 바닥으로 끌어올렸다. 영혜가 허리까지 반쯤 바닥에 걸치자 이번엔 양 발을 들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철판 바닥에 배를 깔고 미끄러져 들어간 후 그녀는 무릎을 웅크리고 몸을 돌이켜 간신히 주저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트럭 안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두 명 양 옆에 앉아있고 가운데에는 그녀처럼 양손이 뒤로 묶인 사람들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무릎을 가슴팍에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고개 숙이고 눈 감아.”
짐칸 양 옆 접이 식 의자에 앉아 있던 군인 중의 한 명이 일어서더니 낮지만 위압적인 목소리로 명령을 하며 소총으로 영혜의 어깨를 쿡 쑤셨다.
영혜가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거친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트럭 밖에서는 이따금씩 군화 발소리와 함께 소곤소곤 군인들끼리 짧게 주고받는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깜깜하던 하늘에 파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군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더니 트럭에 시동이 걸리고 덜컹덜컹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은 작은 폭력과 두려움에는 저항을 하지만 가늠할 수 없는 폭력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앞에서는 한 없이 무기력하고 약해진다.
이윽고 한참을 달린 후 트럭이 멈추자 군인들이 트럭에 올라와서 한 사람 씩 끌어내려 무작정 때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잡아끌면서 한편으론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발로 차고 소총으로 후려치면서 어디론가 건물 안으로 한 사람 씩 데리고 갔다. 사람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삼키며 속절없이 끌려들어 가 한 사람 씩 독방에 가두어졌다. 잠시 후 겉 옷을 모두 벗기우고 속 옷 만을 입은 채 조사를 받기 시작했을 때에는 더 이상 고문을 하거나 위협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극심한 공포로 무기력 해진 사람들은 조사관이 묻는 말에 순순히 모든 것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한편 영혜를 멀찌감치 쫓아 오면서 이 소동을 멀리서 모두 지켜보던 상혁은 오던 길을 되돌아서 배낭이 묻혀 있던 곳으로 갔다. 그리고 배낭을 파 낸 다음 자기 만이 알 수 있는 다른 곳에 파 묻었다. 그리고 다시 군인들이 교대하는 틈을 노려 검문을 피해 구례행 버스를 탔고 아침나절엔 구례구 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22장 음모
“원래 힘이 없는 것들이 하이에나처럼 패로 몰려다니는 거야. 호랑이나 표범을 봐봐. 혼자 사냥하잖아?”
문동일 연대장이 전재무 사단장 실에 들어서자 마침 전재무가 노진우 여단장과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보고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오, 그래. 앉아 앉아.”
전재무는 오늘따라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주도로 광주를 포함한 전국의 소요가 다 진압되었고 이제 군권을 틀어진 그가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이었고 평생을 추구했던 권력의 정점에 드디어 올라선 것이었다. 그는 개선장군이었고 그에게는 지금 공포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정치가, 언론인, 노동자, 농민, 학생 그 모두가 싸움에 진 패배자이고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직접 왔어?”
“네, 광주은행 탈취범의 공범을 잡았습니다.”
“그래? 그게 누군데?”
“정세영과 이영혜라고 죽은 강윤주와 같은 학교 운동권입니다. 오상혁이라고 한 명이 더 있는데 그놈은 도주했습니다.”
“돈은?”
“아무래도 오상혁이 들고 튄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잡힌 놈들이 거짓말 한 걸 수도 있잖아?”
“아닙니다. 정세영과 이영혜가 숨겼다는 곳에 가 보았더니 이미 누군가가 파 가지고 갔습니다. 고문도 할 만큼 했는데 거짓말 같지는 않았습니다. 자신들도 거기에 있는 줄만 알았다고 합니다. 좀 더 족쳐 볼까요?”
“그래, 빨갱이 놈들이 워낙 독종이라 웬만해선 안 불 수도 있어. 좀 더 캐봐.”
그러나 노진우의 말을 전재무가 한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하던 전재무가 입을 열었다.
“풀어 줘.”
“네?”
노진우와 문동일이 놀라서 전재무를 바라보았다.
“풀어 줘. 두 놈 다 슬쩍 도망가게 해 주고 체포나 심문 기록도 없애고 그냥 수배만 때려.”
“그럼 돈은?”
“아, 이 사람들아 무슨 욕심이 그리 많나? 그 놈들도 좀 쓰게 놔둬. 그래야 우리도 좀 쓸게 생기지 않겠나?”
그제야 노진우와 문동일은 전재무의 의중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문동일이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액을 도난당한 걸로…”
“아니지 아니지 그럼 작전에 참가했던 병사들도 의심할 수 있고 너무 눈에 띄니까 일부 회수한 걸로 하고 나머진 모두 그 놈들이 가지고 튄 걸로 해. 그 죽은 놈 배낭 속에 있던 거, 그거 회수한 걸로 하면 되겠네..”
“알겠습니다. 근데 정세영과 이영혜를 풀어주라고 하는 이유는?”
“그래야 그 놈들 입을 막을 것 아닌가? 그리 머리가 안 돌아가나?”
“그러려면 잡아서 가두는 게…”
“참, 답답하네.. 그 놈들을 언제까지 잡아 둘 건가? 재판과정에서 나불대면 어떡하고? 또 사형이 아닌 다음에야 나중에 그 놈들이 가만있겠어? 지들도 구린 곳이 있어야 나서지 못하고 잠자코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도 풀어주면 혹시 바로 언론에 알리지 않을까요?”
“못해. 지들이 은행을 털고 지들끼리 총질하다가 살인을 한 것은 사실이잖아? 자기들 얼굴에 똥칠하고 신세 망치려고 그걸 지들이 언론에 알려? 절대 못 하니까 걱정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
“예.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일어서서 경례를 하고 돌아서는 문동일에게 전재무가 말했다.
“그 강 뭐시기 현장에서 죽은 놈 있지? 잘 처리했겠지?”
“네 영동 근처 저수지에...”
“알았어 알았어 그런 거 까지 내가 알 필요는 없고 절대 나타나지 않게 처리했으면 됐어. 나가 봐.”
문동일이 나가자 노진우가 전재무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아니, 돈은 그것 말고도 많은데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이 사람아? 자넨 아직도 정치를 모르나? 우리가 이제 정치를 해야 하지 않겠나?”
“정치자금은 기업인들에게서 걷으면…”
“공식적인 정치자금이야 그렇지만 그래도 또 비공식적인 통치자금이란 것도 필요하고 우리도 비상시를 대비해서 극비로 쓸 자금도 필요한 법이야. 그걸 어떻게 조달할까 고민했는데 마침 잘 되었어. 자, 자, 오늘 같이 좋은 날, 한 잔 해야지? 나가자고…”
전재무는 이래저래 만족스러운 듯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23장 행운
그 시각 세영과 영혜는 보안사 전주 분소 사무실에서 다음 취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분리 심문을 받아 오다가 오늘 처음으로 대질 심문을 할 모양인지 한 방에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말이 사무실이지 방 한가운데 수사관이 앉는 책상과 의자가 하나 있고 문을 등지고 두 사람이 앉은 나무 의자 두 개, 작은 창문 아래 은색 철제 캐비닛 하나, 출입문 옆에 작은 세면대가 방 안 가구의 전부였다. 사무실 이라기보다는 감방이나 취조실, 아니 고문실이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두 사람은 이 방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다른 방에 갇혀 있다가 시도 때도 없이 끌려와서 얻어맞고 고문을 당했다. 취조를 하고 말을 안 하면 때리는 것이 아니라 끌려오면 일단 때리고 나서 취조를 시작했다. 차라리 먼저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좋았다. 그러면 사실대로 말하면 무지막지한 그 폭력을 피할 기회도 있을 텐데, 들어오면 다짜고짜 때리기부터 하니 그보다 사람을 절망과 무기력에 빠지게 하는 것이 없었다. 본인이 판단을 하거나 선택을 할 기회조차 박탈하고 보는 것이었다.
눈을 감게 하고 명치를 주먹으로 치면 숨이 턱 막히고 무릎에 힘이 빠져서 꿇어앉으면 등을 군화 발로 내리찍고 앞으로 엎어지면 다시 군화 발로 허벅지를 걷어차고 일어나 앉으면 정강이를 찍어대는 식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고 생각할 틈도 없이 한 차례 폭력을 휘두르고 나서 그다음에 심문이 시작되었다.
둘은 폭력을 피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행적과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행적 그리고 자신들이 한 일들, 그리고 자신의 생각까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토설했지만 조사관들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중간 중간 심문을 멈추고 손가락 꺾기, 물 양동이에 머리 쳐 박기, 손톱 밑 쑤시기 등 고문을 해댔다.
이건 피의자가 혐의를 밝히기 위한 심문이 아니었다.
처음에 두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말하고 어떤 것을 숨겨야 할지를 고민했지만 심문 하루 만에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동지들을 위해서 무엇을 숨기느냐가 아니라 심문 과정 중에 조사관들의 말에서 도대체 이 사람들이 원하는 답이 무엇인가를 캐치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머리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었다. 무슨 말이든 만들어 내서 조사관을 만족시키고 심문을 끝낼 수만 있으면 좋았다.
하루는 너무너무 길었고 심문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 예측할 수 없는 폭력, 그것은 폭력 그 자체보다도 더 두려웠다.
게다가 영혜는 속옷만 입은 채 남자 조사관으로부터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때로는 음탕하고 모욕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가슴이나 불두덩을 쿡쿡 찌르고 의도적으로 건드리는 등 여자로서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성고문까지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은 웬일인지 조사관이 두 사람을 의자에 앉혀 놓고 눈만 감고 가만히 기다리게 했다. 조사관이 뒤적거리는 서류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영은 곧 시작될 폭력이 두려워서 차라리 얼른 시작하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어쩌면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기만 하다면 자신의 과거와 미래, 꿈과 수치, 명예와 자존심 그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눈 떠!”
귀에 익은 조사관의 짧고 굵직한 명령에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오늘 이송 가니까 이송 준비해."
"어디로요?"
"그건 알 필요 없고..가 보면 알아!"
이송준비라고는 할 것도 없었다. 샤워를 한 후 심문으로 피가 묻고 꾀죄죄해진 옷을 버리고 수사관이 내주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전부였다. 어디로 가는지 또 어떤 고초가 기다리는지는 알 수가 없어 불안했지만 일단 지옥 같은 취조실을 나와 죄수 이송용 작은 승합차를 탈 때는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탄 이송 승합차는 어느 한적한 길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어 서고 호송관들은 그리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기절을 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엎어져 있었다.
"야. 튀자!"
세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저 사람들 정말 기절한 거 맞아요?"
"알 게 뭐야. 우리가 살고 봐야지. 머뭇거리다가 끌려가서 또 그 끔찍한 고문을 받을 거야? 싫으면 나 혼자라도 간다."
"알았어요. 같이 가요!"
세영과 영혜는 살금살금 차 문을 열고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어디가 어딘지는 상관이 없었다. 그냥 멀리 도망만 갈 수 있으면 좋았다.
24장 야망
노획품을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길 대위는 서울 보안사로 혼자 직접 운전을 해서 올라갔다. 사전에 통보가 되어있는지 군복을 입지 않았는데도 정문을 지키던 병사는 신분증만 보고 다른 확인 없이 바로 길 대위를 통과시켜 주었다. 보안사에는 군부대 답지 않게 사복을 입고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행정이나 경비를 서는 사병들만 군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길 대위는 바로 전재무 보안 사령관실로 올라갔다. 문 앞의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비서도 짙은 초록색 스커트에 여군 정장을 한 호리호리하고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군복을 입은 여자가 화려하게 치장을 한 사복보다 오히려 더 색다르게 섹시한 매력이 있었다.
방 안에는 전재무 사령관과 노진우 여단장이 소파에 앉아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길 대위가 '충성'하고 거수경례를 하자 전재무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충성'이라고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로 인사를 받는다. 그러고서는 손을 빠르게 내리며 바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킨다.
"앉아 앉아. 더운 데 장거리 운전 하느라 수고했어."
전재무가 치하를 하며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 인터콤 버튼을 누르며
"여기 시원한 냉커피 하나!"라고 주문을 하고
"커피 괜찮지?"라고 길 대위에게 묻는다.
"네, 좋습니다."
길 대위가 대답한다.
정답이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게 전재무의 성격이다. 사소한 것도 절대 남의 의견을 묻지 않는다. 자신이 판단해서 그대로 실행하고 상대방에게 묻는 것은 그냥 형식일 뿐이다. 당연히 그의 선택에 반대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날이 전재무를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된다.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예의 그 비서가 유리잔에 얼음을 띄운 냉커피를 들고 들어온다. 살색 스타킹을 신은 여군의 늘씬한 종아리를 곁 눈으로 훔쳐보면서 길 대위가 커피잔을 받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켠다.
"오, 목이 말랐나 보네! 그래, 오는 길에 별 일은 없었고? 소란 피우는 놈들은 없었지?"
"네, 조용했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야지. 이게 다 자네들 덕분이야. 폭도들도 진압했고 골치 아픈 놈들도 다 싹 잡아가두니까 이제야 나라가 안정이 되네! 모름지기 빨갱이들은 모지게 족쳐야지 시원찮게 누르면 더 튀어 오른단 말이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놈의 지금 정치하는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 모두가 반 빨갱이 아니면 물러터져 가지고 말이야, 이러다가 간신히 추슬러 놓은 나라를 말아먹겠어! 그래서 말이야. 내가 직접 정치를 좀 할까 하는데..."
"..."
이 때는 대답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다. 찬성을 하는 것도 의견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건방지다고 싫어한다.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한다.
"내가 곧 전역을 하고 창당을 할 예정이니까 임자들도 군복을 벗고 날 좀 도와주어야겠어!"
전재무는 박정희 말투를 흉내를 내는 것이 이미 대통령이 다 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했다.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래, 고맙구먼, 역시 믿음직스러운 동지들이야. 우리 조국을 위해 한 번 더 봉사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게 준비하고, 길 대위는 그 짐을 말이야. 내 사저에 배달 좀 해줘. 내 집사람에게 미리 이야기해 놓았으니까 다른 사람 맡기지 말고 바로 금고에 넣고 복귀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길 대위가 경례를 하고 일어서자 전재무는 다시 노진우와 밀담을 나누기 시작한다.
보안사에서 전재무의 사저가 있는 연희동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고 소규모 시위 때문에 신촌 입구가 좀 막히기는 했지만 별 어려움 없이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전재무의 집은 안산공원 초입의 약간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저택이었다. 황톳빛 돌담이 성처럼 높게 솟아 있어서 길에서는 소나무 정원수 꼭대기만 조금 보일 뿐 커다란 철대문과 차고 출입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사복 경찰이 짝을 지어 간간히 순찰을 돌고 있어서 경비가 삼엄했다. 길 대위가 입구에 차를 세우고 초인종을 누르자, 대문 대신에 옆의 차고문이 스르르 열렸다. 차고는 승용차를 두 대를 댈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한 자리가 비어 있어서 길 대위는 그곳에 차를 주차했다. 그러자 입구 반대쪽에 있는 출입문이 열리고 한 중년 여인이 긴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그녀는 별말 없이 길 대위를 집 안 금고로 안내를 했다. 두어 번 행보로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서 금고에 넣고 나자. 그녀는 금고문을 잠그고 짧게
"수고했어요."
라며 거실에서 길 대위를 배웅한 후 바로 이층 계단으로 사라졌다. 길 대위가 차고로 들어가서 차에 오르자 차고 문이 또 스르르 열렸다. 길 대위는 후진을 해서 차를 뺀 다음 부대가 주둔해 있는 전주로 내려갔다.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인생 길이 펼쳐지려고 하는 중이었다. 사관학교에 입학을 할 때만 해도 그의 꿈은 멋진 군인,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정치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운 여운도 없지는 않았다. 이왕에 정치를 해야 한다면 자신도 같은 값이면 전 장군처럼 별을 한 번 달고나서 명예롭게 전역을 하고 그렇게 정치를 하고 싶지만 세상 일이 어디 마음대로만 될 일인가? 어쩌면 이게 더 지름길일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길 대위는 부대로 들어섰다. 그 지름길이 어디로 가는 지름길인지는 그도 까맣게 몰랐다.
25장 혼돈
그 시간 세영과 영혜는 전주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검문검색이 두렵기는 했지만 한 번만 모험을 해서 서울에 진입만 한다면 전주 근처에서 서성이는 것보다는 사람이 많은 서울이 앞으로 지내기에는 더 안전할 것 같았다. 대합실 게시판에 붙어있는 수배전단에는 두 사람의 사진과 상혁의 사진이 다른 수배자들과 함께 나란히 음산하게 나열되어 있다. 죄목은 '특수절도'였고 세영과 영혜의 사진에는 '검거'라는 붉은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두 사람은 혹시라도 사람들이 알아볼세라 챙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일행이 아닌 척 차표를 끊어서 시차를 두고 버스에 올랐다. 멀리 대합실 입구에 정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문 양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심장이 콩당콩당 거렸다. 다행히 버스는 두 사람이 승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출발을 했다.
차창 밖은 무덥고 답답한 여름이었지만 냉방장치가 잘 된 고속버스 안은 시원했다. 버스 안에 승객은 그리 많지 않았고 약간 떨어진 좌석에 각각 앉은 두 사람은 서로 모른 척 창 밖만 내다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서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지만 집으로 가면 날 잡아 잡수시오 하고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이나 진배가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따로 딱히 갈 곳도 없고 정황을 좀 살필 필요도 있어서 비교적 개방된 공간과 도움을 받을 연고가 있는 학교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학교 앞에 도착하니 정문 옆에 닭장 차가 한 대 노골적으로 나 보란 듯 서 있고 정 사복 경찰이 수시로 지나가는 학생들의 가방을 열고 불심검문을 하고 있었다. 너무 위험했다.
두 사람은 돌아서서 하숙과 자취방이 많이 있는 후문 주변 골목길로 향했다. 골목 입구에는 정복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복이나 정보과 형사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안심을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골목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큰 길 가 농협 옆 찐빵 집으로 들어갔다. 마주 보고 앉아서 찐빵과 만두를 시켜 먹으면서 눈은 유리문 밖 골목길을 정탐했다.
문 밖에 있는 찜통에서는 하얀 김이 무럭무럭 나오고 구수한 냄새가 입맛을 돋구었다. 전통이 오래된 찐빵 집주인 내외는 오랜 세월 거의 평생 한 자리에서 만두와 찐빵을 직접 빚고 삶아왔고 손님 접대도 종업원 없이 몸소 해서 주변 주민들과 학생들과 친밀했다. 어떤 학생들은 졸업을 한 후에도 학창시절의 향수를 맛보러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쪄 주시던 찐빵을 좋아하던 세영도 기회가 닿으면 이 집 찐빵을 먹으러 오기도 했다.
"여기 오니까 감개가 무량하다. 하이고 그동안 엄청난 일을 겪었는데 이 집과 저 골목길은 예전 그대로네. 하나도 변한 게 없네!'
"그러게요. 윤주도 같이 왔으면 좋으련만..."
잠시 감상에 젖었던 두 사람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진다.
"잠깐만! 저기 저 사람 연명이 아니야?'
창 밖을 내다보던 세영이 놀란 목소리로 속삭인다.
"어, 그런 것 같은데요! 연명이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지난번에 달려 간 후에 입대했다고 들었는데..."
"암튼, 잘 됐어요. 얼른 가 봐요."
"아니야. 난 여기 있을 테니까 네가 가서 연인인 것처럼 해서 데리고 와 봐!"
"알았어요. 잠시만요!"
영혜가 연명을 놓칠세라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간다.
밖으로 달려 나간 영혜는 바로 연명이에게 다가가서 뒤에서부터 연명을 와락 껴안는다. 깜짝 놀란 연명이 멈칫하고 있는데 영혜는
"연명오빠! 어디 가는 거야. 보고 싶었졍!" 하고 콧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다정한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 연명을 잡아 끈다. 연명도 무슨 사정이 있는가 보다 대략 눈치를 채고 발걸음을 나란히 해서 찐빵 집으로 들어선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세영은 가만히 검지 손가락을 입 술 앞에다 댄다. 연명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눈인사만 나눈 채 자연스럽게 세영의 앞자리에 앉는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광주로 내려간 줄 알았는데 절도 수배 전단이 떠서 다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쉿, 그건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남영동에 잡혀갔다가 강제징집되었던 거 아니야?"
"예. 그때 제가 바로 불어서 죄송해요. 나 땜에 다들 고생했지요?"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세영은 새삼 그동안 겪었던 고초가 생각이 나서 표정이 어둡다.
"미안해요. 강집되었다가 의병 제대하고 복학했어요?"
"의병? 그게 뭔데요?"
영혜가 묻는다.
"응, 몸이 좀 안 좋아서 군대에서 나온 거야."
"어디 아파요?"
"아니야. 괜찮아. 이제."
연명이 얼버무리자 세영이 약간 미심쩍은 듯 미간을 찌푸린다.
"그래, 학교는 별일 없고?"
"별일 없긴요! 분위기 살벌해요. 예전 하곤 쨉도 안돼요."
"어떻게?"
"정사복이 교내외에 쫘악 깔렸고요, 어떻게 정보가 새는지 집회도 제대로 못해요. 집회를 한다고 하면 형사들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언더(Under) 조직도 다 깨지고 공식 학생회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래도 학생회는 NL 이든 PD 계열이든 모두 강성이라 오히려 공개활동은 더 수월해졌어요."
"그렇구나. 잡혀간 사람들은?"
"저도 사실 조직 구성은 잘 모르니까 누가 잡혀갔는지 누가 광주로 내려갔는지 누가 군대 끌려갔는지 잘 파악은 안 돼요. 노동현장으로 간 사람도 있고... 암튼 지금은 막 각자 플레이 하는 분위기예요."
"그래, 워낙 감찰이 심하면 조직활동을 하는 거 자체가 더 위험할 수도 있겠지!"
"근데, 윤주랑 상혁이는요?"
세영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을 한다.
"응, 광주에서 헤어졌어. 도청 사수작전 직전에 탈출하다가 우리 둘만 잡혔었는데 우리도 어저께 어떻게 어떻게 도망친 거야."
"근데 윤주는 수배 명단에 없던데요?"
"응, 걔들이 다 파악을 못했나 보지 뭐!"
세영도 말을 얼버무리고 영혜는 그런 세영을 떨떠름하게 바라본다.
아, 불과 1년 전만 해도 마음을 함께 나누던 동지들이었는데 어느새 각자 마음속에 비밀을 숨기고 거짓말을 천연스럽게 내뱉는 사이가 되었다.
폭력은 사람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병들게 하나보다.
"그럼 형도 걔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응, 나도 아는 게 거의 없어. 그래서 지금 도망치자마자 정보를 좀 얻을까 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온 거야. 그래도 너를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다행이다."
"그러게요. 저도 궁금했는데 이제 좀 안심이에요. 참 절도는 또 뭐래요?"
"응, 그걸 나도 모르겠네. 보통 광주연관 수배자들은 긴급조치법 위반이나 보안법 위반, 폭행, 이런 걸로 뜨는 데... 취조받을 때도 뭘 어디에 숨겼느냐고 자꾸 묻더라고..."
세영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영혜도 선배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싶어 깜짝 놀라고 혐오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자신도 공범인 셈이니 침묵을 지키는 수 밖에는 어쩔 수는 없었다.
"그랬군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아직은 잘 모르겠다. 너 돈 좀 있으면 융통을 좀 해주고 선옥이 알지? 선옥이에게 선을 대서 나 좀 만나게 해 줘!"
"예, 알았어요. 지금 가진 게 이것뿐이라.."
연명이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서 내민다.
"그래 고맙다. 그럼 내일 저녁 6시에 여기서 보자. 가능하면 선옥이도 데리고..."
"예, 알겠어요. 몸 조심 하세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래, 고맙다. 내일 보자. 만일 낌새가 이상하거나 우리가 여기 없으면 모레 정오에 저기 농협 안에서 보자."
"예. 내일 봬요."
연명이 나가자, 영혜가 세영에게 말한다.
"형, 연명이 한테까지 숨길 필요 있어요?"
"응, 조심해야지. 지금 누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너도 그 일은 가족 들 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그나저나 오늘 어디 가서 자지? 이거 가지고는 여관에도 못 가겠는데... 그렇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도 없고.."
"우리 집에 가실래요?"
"안돼. 위험 해!"
"그럼 내 고등학교 동창네 집에 가봐요. 걔도 운동을 하긴 하지만 우리 같은 운동이 아니라 조깅을 하니까 안전할 거예요!"
"참, 너는 이 와중에 그런 농담이 나오냐?"
그래도 긴장이 풀리는지 둘은 마주 보며 피식 웃는다.
"그래 거기가 어딘데?"
"신월동인데요. 여기서 안 멀어요. 나랑 친해서 나도 몇 번 가서 잤구요. 부모님도 잘 알아요."
"그래, 가보자!"
두 사람은 찐빵 집을 나오면서 연명이 준 돈으로 찐빵과 만두를 좀 사서 비닐봉지에 싸서 들고 시내버스에 올랐다.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은 주택가 어느 평범한 가정집에 도착했다. 세영은 잠시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영혜가 집 안에 들어갔다가 친구와 같이 나와서 세영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친구의 부모님은 없고 동생만 있었다.
"저, 이거, 빈 손으로 오긴 뭣해서..."
세영이 비닐봉지에 든 찐빵을 내밀었다.
"아, 예. 고맙습니다. 저녁은? 밥 먹어야지?"
친구는 찐빵을 받아서 곁에 서 있던 동생에게 건네주면서 영혜에게 물었다.
"응, 먹고 왔어!"
영혜가 친구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거짓말을 한다.
"야야. 먹긴 뭘 먹어? 네 꼴을 보니 점심이라도 먹었으려나 모르겠다. 자, 들어가자. 얼른 밥 차려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갑자기 웬 남자를 동행한 것이 의외였지만 영혜의 사정을 좀 아는 친구는 별말 없이 자기 방을 세영에게 내주고 영혜는 동생 방으로 안내를 한 후 자신은 부엌으로 가서 밥상을 들고 나온다.
저녁 식사 후 세영의 제안으로 친구를 영혜의 집으로 보냈다.
얼마 후 돌아온 친구는
"니네 부모님이 엄청 반가워하더라. 시국이 어수선하니 혹시 죽기라도 했나 걱정했나 보더라!"
"수배된 줄도 모르셔?"
"응, 모르시는 것 같던데..."
"형사들이 왔다 가지 않았데?"
"응, 아무도 안 왔다던데... 오히려 실종 신고하러 파출소에 갔는데 접수만 받고 별 말이 없었다던데..."
"이상하다. 분명히 수배자 전단지에 내가 있었는데.. 검거가 돼서 그런가?"
"검거? 너 잡혔었냐?"
"응, 그러다가 탈출했지!"
"야, 너 대단하다. 근데 그러면 나중에 더 크게 벌 받는 거 아니야?"
"몰라, 나중은 나중이고 우선 살고 봐야지. 암튼 고맙다. 부모님께는 잘 말했지?"
"응, 와 보시려는 걸 억지로 말렸다. 그래도 이제는 안심하시겠지!"
"그래 고맙다. 정말! 오늘만 신세 지고 내일은 다른 데로 갈게! 피곤하니까 오늘은 그만 자자!"
"그래. 자라.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라도 오고!"
"응, 잘 자!"
영혜와 친구는 나란히 누웠고 친구 동생은 자기 방을 빼앗겼다고 입이 뾰로통하게 나와서 책상에 앉아서 책을 보는 체한다. 하지만 귀는 언니 친구의 모험담에 잔뜩 쏠려있었다.
영혜는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마음속 한 구석에는 여전히 어둡고 무거운 짐이 있었지만 그 짐도 이제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져서 문득문득 있는지 없는지 잊고 지내기도 했다.
26장 미혹
다음 날 저녁 6시, 약속한 찐빵 집 부근에 도착한 세영과 영혜는 일부러 들어가지 않고 농협 안에서 가게 입구를 살피고 있다가 연명과 선옥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농협을 나와서 가게로 들어갔다.
선옥이 세영과 영혜를 보고 반색을 한다.
"영혜야, 형!"
선옥은 양손으로 두 사람의 손을 하나씩 부여잡고 감격에 겨워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윤주는? 윤주는 어디 있어요? “
선옥이 조금 흥분이 가라앉자 바로 윤주의 안부를 묻는다.
"응, 광주에서 헤어졌는데 아직 소식을 모르겠네.."
세영이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자 선옥의 눈 가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그럼 혹시?..."
선옥이 불길한 마음에 운을 떼긴 했지만 방정맞은 생각인가 싶어 차마 말을 맺지 못한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세영이 위로를 한다.
"괜찮을 거야. 우리는 도청에는 안 들어가고 외곽에 있었으니까... 희생자가 아마 도청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지!" 세영도 계속 말을 이어가기가 거북하다. 네 사람 주변에 무거운 정적이 잠시 흐르자 연명이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다.
"참, 상혁이는? 상혁이는 어떻게 됐어요?"
"음, 상혁이는 광주 외곽까지는 우리랑 같이 나왔는데 우리가 그만 잡히는 바람에 연결이 끊어졌어."
"그럼 상혁이도 잡힌 건가요?"
"아니야, 우리를 심문할 때 상혁이 행방을 물어보는 것으로 봐서 잡히거나 무슨 일이 난 건 아닌 것 같아. 아마 봉쇄선을 뚫고 나간 것 같아. 그나저나 상혁이랑도 빨리 연락을 해야 하는데... 선옥아 너 내일이라도 너 선 닿는 조직 윗 선을 찾아가서 우리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랑 접선 좀 시켜줘!"
선옥은 눈물을 훔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연명이 너는 학과 사무실에 가서 윤주랑 상혁이 고향 집 주소를 좀 알아가지고 와. 아무래도 내가 한 번 가 봐야겠다. 걔들 집이 어딘 지 대충은 아는데 자세한 주소는 모르겠네..."
"위험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해야지. 그리고 이상하게 영혜네 집에도 감시망이 없는 것 같더라고.. 암튼, 그 일이 급선무니까 부탁한다."
"예, 근데 형이랑 영혜 당장 지낼 곳은 있어요?"
"글쎄다, 여관 같은 데는 불시에 검문이 있어서 위험하고, 집도 안 될 거고 학교 근처도 순찰과 검문이 심해서 말이야... 차라리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학교 안, 과 사무실에서 좀 지내면 어떨까 싶다. 암튼 그것도 조직과 의논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선옥이가 힘 좀 써줘야겠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고 제가 지금 바로 알아볼까요?"
"그래. 그럼 더 좋고... 자, 움직이자."
세영이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각자 목적지를 향해서 한 명씩 밖으로 나간다.
얼마 후 네 사람은 사회복지학과 과 사무실에서 하나씩 다시 모였다. 세영이 영혜랑 제일 먼저 사무실 문을 여니 늦은 시간이라 교수들은 아무도 없고 낯익은 조교 하나만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뭔가 노트에 메모를 하고 있다.
"어? 세영이 어쩐 일이야? 오랜 만이네! 별일 없었어?"
"예, 별일 없어요? 형도 잘 지내셨어요?"
"응, 나야 장 그렇지 뭐!"
별 일이 없을 리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눈치가 있는 조교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자기가 하던 공부를 계속한다. 세영과 영혜가 의자에 앉아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선옥이 어떤 남자와 함께 들어온다. 키가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체구에 긴 머리가 거의 목을 덮었고 턱수염도 까칠까칠하게 자라있고 볼이 조금 들어가고 광대뼈가 솟아있어서 대체로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다. 무테안경 너머로 쏘아보는 눈 빛도 사뭇 매섭다.
"신기태 선배님이세요. 여기는..."
선옥이 소개를 하려고 하자 기태가 말을 자르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으로 들어간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으니까 소개는 됐고... 아무튼 고생 많았어! 그래, 은신처가 필요하다고?"
"예, 지금 수배 중이라..."
"그럼 아주 잠수를 타야 하나? 아니면 활동도 할 생각인가?"
"우선 올라오다가 헤어진 후배들 수소문을 먼저 한 후에 잠시 잠수를 타고 정세를 봐서 활동을 개시할까 합니다."
"그래? 그럼 우선 학교 근처에 터를 하나 내줄 테니 거기서 좀 있다가 그 후엔 지방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와."
"알겠습니다."
"너희는 이제 개인이 아니고 공인이야. 광주의 생생한 증인이자 투사로서의 경력이 있으니 조직에서도 전격 지원을 할 거고 앞으로 활동력도 그만큼 커질 거니까 일거수일투족을 안전하고 신중하게 하도록 해!"
두 사람은 부담감이 너무 커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연명이 들어온다. 기태를 보고 잠시 멈칫하자 세영이 안심을 시킨다.
"응, 선배님이야. 걱정 말고, 내가 부탁한 건 됐어?"
"예, 여기..."
연명이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내민다.
"응, 수고했어. 우린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그리 알고 학교 생활 잘하고 나중에 또 연락할게!"
세영이 쪽지를 받아 들며 연명을 내 보내려고 하니까 기태가 제지를 한다.
"잠시만! 자네가 도연명인가?"
"예."
"안 그래도 한 번 만나보려고 했는데 잘 됐다. 나랑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까 나 좀 따라와. 그리고 선옥이는 내가 아까 알려줬던 그 뒷 문 밖 자취방에 이 두 사람 안내 좀 해줘."
"예."
선옥이 대답을 하며 일어서고 다른 사람들도 과 사무실 밖으로 나선다.
세영과 영혜는 선옥을 따라가고 연명은 기태를 따라 학생회관 건물로 들어선다. 입구 안 자그마한 실내 광장을 지나서 계단을 구불구불 올라 맨 꼭대기 층에서 서클룸들이 늘어서 있는 복도를 지나 거의 끝 방에 도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상과 소파와 접이 의자와 철제 캐비닛과 유리문이 있는 진열대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고 벽에는 각종 대자보나 구호가 붙어 있다. 벽 모퉁이에는 장대에 돌돌 말린 형형색색의 깃발이 어수선하게 기대어 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방 안에 있던 남녀 학생 몇 명이 눈인사를 한다.
"나 잠시 자리 좀 비켜주고.. 너는 저기 앉아."라고 기태가 들어서면서 말하자 다른 사람들은 책상 앞에 허리를 숙이고 무언가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간다.
"너 남영동에 갔었지?"
사람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마자 기태가 다짜고짜 묻는다.
"예."
"어떻게 풀려났어?"
"입영동의서 쓰고..."
"거기서 뭘 불었어?"
"우리 팀 이름이요."
"고문당했어?"
"예."
"얼마나?"
"..."
"하루도 못 버텼어?"
"네."
"근데 군대는 어떻게 안 갔어?"
"갔다가 의병제대..."
"사유는?"
"... 탈골,,,"
"어디를?"
"무릎과 어깨요."
"사고 났어?"
"아뇨, 그냥 훈련받다가.."
"너 프락치지?"
"예?"
"다 알아. 인마. 솔직하게 말해. 어디 소속이야? 정보과? 보안사?"
"아닙니다."
연명이 고개를 저으며 부인을 하지만 불안감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동안 보고한 게 뭐야?"
"저 아닙니다."
"안 되겠네! 너 이리 와!"
갑자기 연명을 일으키더니 두 팔의 손목을 밧줄로 묶고 밧줄 끝을 천장에 달린 고리에 통과시킨 다음에 잡아당긴다.
"욱!"
연명은 팔이 뒤로 꺾인 채로 밧줄에 매달려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몸이 대롱대롱 흔들린다. 뒤틀린 날갯죽지에 체중이 그대로 실리자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통증이 엄습해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픈 일이었다. 고문을 받은 학생들이 이제는 자기들이 몸으로 배운 야만과 폭력의 기술을 그대로 써먹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명은 굴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생들은 형사들만큼 무자비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고문 기술자들이 아니라서 오히려 실수로 병신을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여기서 굴복하면 나가서 또 뭘 불었냐고 더 심하게 당할 게 뻔한 일이었다. 어차피 당해야 한다면 정보과 취조실보다는 학생회관 서클 룸이 훨씬 쉽다. 그래서 연명은 이를 악 물고 참았다.
잠시 후에 기태가 밧줄 끝을 좀 느슨하게 풀어준다. 발이 땅에 닿고 어깨의 고통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어깨와 상박이 얼얼하고 팔목은 여전히 아프다.
"사실대로 말해도 네 신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도록 해 줄게. 학교도 그냥 다니게 해 주고 저쪽에 줄 정보도 줄게. 대신 너도 저 쪽 정보를 내게 좀 주면 돼."
이중 스파이가 되라는 달콤한 유혹이다. 그러나 위험하다.
'학생 조직 안에 있는 프락치는 나 말고도 분명히 또 있다. 내가 이중 스파이라는 것이 밝혀질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시간문제다. 그러면 내 인생은 확실히 쫑 난다.'
"무고한 사람한테 이래도 되는 거예요?"
연명이 눈을 부릅뜨고 기태에게 따진다. 그 서슬에 기태가 조금 움찔한다.
'역시 니들은 마음이 약해서 안돼. 여기까지야!'
연명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태는 말없이 천장 고리에서 밧줄을 풀고 대신 기둥에 한쪽 끝을 묶는다.
"조직 보안상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니까 그런 줄 알고 하루만 여기 더 있어. 내가 뭐 좀 확인할 게 있으니까! 너도 조직생활을 해봤으니 이해를 할 수 있을 거야. 이게 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거야. 알겠지?"
기태가 부드럽게 말하자 연명은 두 팔을 뒤로 묶인 채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태는 그런 연명을 힐끗 보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아까 방 안에 있던 남녀들이 들어와서 그전에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이런 일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듯 연명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연명은 마음속으로 이를 북북 갈았다.
'이 놈들 어디 두고 보자! 니들이 이따위로 하면서 무슨 민주니 인권이니를 떠들어?'
27장 배신
다음 날 감금에서 풀려난 연명은 바로 정보과로 들어갔다. 정기 보고 때도 아닌데 평소처럼 유선 보고를 하지 않고 직접 대면보고를 하러 들어오는 연명을 보고 정보과 담당 형사는 무슨 긴급 사항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쓰는 공용 사무실의 책상에서 일어나 바로 옆에 있는 취조실로 연명을 안내했다.
"무슨 일이야?"
"네, 세영이와 영혜가 나타났습니다. 수배 중인..."
"그래? 지금 어디 있는데?"
"학교 주변에 있습니다."
"가만... 걔들이 너랑 같은 셀이었지?"
"네."
"그럼, 조금 더 정보를 캐면 어떨까? 바로 체포를 하는 것보다.."
"아닙니다. 금방 다른 데로 튈 수도 있고 제가 의병제대했다는 것도 의심하는 눈초리라 그러면 제 활동에도 지장이 있습니다."
"그래? 알았어. 내가 바로 조치를 할 테니까 일단 학교로 가서 걔들 동선을 파악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연명은 바로 경찰서를 나와서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과 사무실을 들랑거리면서 탐문도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틀이 지나도록 세영과 영혜를 체포하겠다는 연락은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연명은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글쎄, 나도 이상하네. 상부에 보고를 했더니 뭉개기만 하고 체포를 하라는 명령이 없네! 좀 더 기다려 봐. 뭐 아직 문제는 없지?"
"네, 그렇긴 한데.."
"알았어.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다시 보고해!"
담당 형사는 딸카닥 전화를 끊어버린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연명은 세영과 영혜가 묵고 있는 후문 부근 자취방으로 갔다. 자취방에는 영혜만 있고 세영은 없었다.
방문을 열고 연명이 묻는다.
“형은?”
“예. 윤주네 집에 간다고 좀 전에 나갔어요. 나랑 다니면 위험하다고 선옥 선배랑…”
“그래? 알았어. 조심해. 밥 잘 챙겨 먹고!”
연명은 다소 실망한 듯 방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 시각 세영과 선옥 두 사람은 영동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조심스럽긴 했지만 세영을 잡으려는 그물이 그다지 촘촘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조금 용기를 내서 움직이기로 했다. 역 대합실에 있는 수배 전단에는 여전히 세영의 사진이 있었지만 '검거' 도장이 찍혀 있는 상태이고 새로운 수배 전단에는 사진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울에서 영동까지는 무궁화호로 4시간 정도 걸렸다. 두 사람은 모처럼 여행이라도 가는 듯 군 계란도 사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영동역에서 기차를 내려서 바로 옆 버스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윤주의 주소지로 향했다. 버스는 월류봉과 삼도봉의 수려한 산 봉우리와 금강과 옥천의 맑은 물을 끼고돌면서 간간이 제법 튼실하게 알이 차서 고개를 숙인 벼 이삭과 늘어진 잎이 물결처럼 넘실대는 다락논들을 지나 천천히 윤주네 동네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이 물어 물어 윤주의 집에 당도하자 윤주의 어머니가 반색을 하며 반긴다.
"아이고 윤주 학교 학생들이라고? 그래 우리 윤주 소식은 가지고 왔는가?"
"죄송합니다. 저희도 소식을 몰라 혹시 집에 있나 해서 와 본 건데... 어머니도 아무 연락을 못 받으셨나요?"
"하이고... 깜깜무소식이네. 이게 언제부터인지 몰라. 세상도 어수선한데 무슨 일이라도 없어야 할 텐데..."
"그러게요. 거, 이상하네요. 혹시 저희 말고 또 윤주를 찾으러 온 사람은 없었나요?'
"응. 없었어. 안 그래도 윤주 아버지가 산지사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있는 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네!"
"그래요? 사실 저희들이 광주에서 윤주랑 헤어졌는데요..."
"뭐? 광주? 윤주가 거길 왜 가?"
"어떻게 하다가 그리 됐어요. 그래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빠져나오긴 했는데 나오다가 윤주랑 그만 헤어졌어요."
"그래. 아무 일은 없었던 거 맞고?"
"네!"
세영이 말 끝을 조금 흐린다. 윤주의 어머니는 별 낌새를 차리지 못하고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한다.
"아무려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올라와서 저녁 먹고 쉬었다가 윤주 아버지 보고 올라가."
"아니요. 저희들이 또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 좀 바빠서..."
"그래 그럼 얼른 밥만 먹고 가. 금방 차려줄 테니까..."
윤미 어머니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부엌으로 향한다. 잠시 후 밥상을 차려 내 온 윤주 어머니는 두 사람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며 아들 생각이 나는지 눈물을 글썽인다. 그 모습을 보는 두 사람도 밥알이 눈물인 것 같아서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가 않는다. 그래도 눈물을 삼키듯 억지로 꿀떡꿀떡 삼키고 있자니 윤주 어머니가 종이에 전화번호를 두 개 써서 내민다.
"이거 하나는 우리 집 전화고 하나는 서울에 있는 윤주 동생 윤미 전화번호니까 무슨 소식 있거든 바로 연락 좀 부탁하네!"
"윤주 동생이 서울에 있나요?"
"응, 올해 대학에 갔지!"
"아, 몰랐네요. 잘 됐네요. 서울에 있으면 연락하기가 더 쉽겠네요. 올라가면 바로 한 번 만나볼게요. 밥 잘 먹었습니다."
"그래, 찬도 없어서 제대로 요기나 했는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아이고 우리 윤주도 이렇게 불쑥 왔으면 얼마나 좋을꼬..."
윤주 어머니는 또 눈물이 글썽인다.
세영과 선옥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마을 길로 걸어간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시려고요? “
착잡한 심경으로 나란히 걷던 선옥이 세영에게 물어본다.
"상혁이네 집에 가 보자. 강원도 원주지?"
"네."
"마침 버스가 있네. 타자!"
두 사람은 버스에 오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영혜네 집도 그렇고 윤주네 집도 그렇고 아무도 조사를 하러 오지를 않았네! 우리 집도 그러려나?"
"그러게요. 상혁이 집은 괜찮겠어요?"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괜찮을 거 같은데.. 일단 한 번 가서 낌새를 한 번 보자."
선옥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버스에 오른다. 어느새 땅거미가 어둑어둑 짙어 온다. 주변 산 봉우리가 제법 높아서 밤이 일찍 찾아오는 것 같았다. 버스 헤드라이트 불 빛이 금세 밝게 검은 아스팔트 길을 비추기 시작한다. 버스를 갈아타고 원주에 도착하니 밤이 이미 깊어 상혁의 집에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두 사람은 원주 터미널 인근 여관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상혁의 집에 가기로 했다.
“방을 두 개 잡아야겠지? “
여관 문을 들어서며 세영이 혼잣말처럼 묻는다.
“뭐 그럴 거 있어요? 돈도 많지 않은데.. 둘이 따로 방 잡는 거도 이상하잖아요! 우리 손만 잡고 자요!”
선옥이 호호 웃으며 농담을 한다. 그만큼 세영을 믿는다는 뜻이다. 세영은 뜻밖의 상황에 좀 어리둥절하면서도 굳이 방을 따로 잡자고 남자가 우기는 것도 이상하고 한 방을 쓰면 검문이 있을 때 연인행세를 하기도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방을 하나만 잡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여관 종업원은 당연한 듯이 무심히 열쇠 하나를 유리창 아래 작은 반원형 틈새로 내밀며
“자고 가실 거예요?”라고 묻는다.
여관에 온 사람이면 당연히 자러 온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세영이
“예”라고 하니까
“3만 원이요 “라며 칫솔과 콘돔을 준다.
세영이 어색하게 받아 들고 돈을 치르고 돌아선다. 두 사람은 촌닭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열쇠가 매달린 하얀 플라스틱 막대기에 적힌 306호를 찾아간다. 여관 복도는 희미한 붉은 조명에 약간 눅은 냄새가 나는 붉은 카펫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니 큰 침대가 있고 침대 머리맡에 붉고 푸른 부분 조명이 있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번갈아 욕실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선옥은 침대에 그리고 세영은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잠이 쉽사리 들지 않았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지 옆 방에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묘한 신음 소리가 울려 나온다.
"형? 자요?"
어색함을 풀려는지 선옥이 세영에게 말을 건다.
"아니? 왜?"
"불편하지 않아요? 바닥이 차고 딱딱할 텐데... 여기 올라와서 자요. 자리도 넓은데요 뭐!"
선옥이 몸을 침대 한 구석으로 옮기며 옆에 자리를 만든다. 킹 침대인지 공간은 넉넉하다.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얼른 좀 자!"
"윤주 생각이 자꾸 나서 잠이 안 와요. 아까 윤주 엄마를 뵙고 나니까 더 마음이 짠해요."
선옥이 목이 잠겨 말을 다 맺지 못한다. 그러다가 윤주의 맑은 눈을 떠올리며 마침내 흐느껴 운다.
"별일 없을 거야. 아마 피신해 있다가 사태가 진정이 되면 연락이 오겠지!"
울고 있는 선옥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세영은 선옥에게 다가와 안심을 시키려 한다.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흔적도 없이 까맣게 사라질 수가 있어요?"
선옥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세영이 가만히 선옥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토닥 어루만진다. 선옥이 세영 쪽으로 돌아누워서 세영을 쳐다본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뿔테 안경을 벗은 선옥의 모습은 평소와는 딴 사람 같았다. 쌍꺼풀이 진 둥근 눈에 눈물이 맺힌 검은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세영은 손을 뻗어 선옥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이마 위로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다. 옆 방에서는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는지 남자와 여자의 신음소리가 뒤섞여 이중창으로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다. 세영이 가만히 모로 누워서 선옥을 가볍게 끌어안는다. 선옥이 잠시 움찔하더니 그냥 몸을 맡긴다. 세영은 누운 채로 선옥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 손으로 선옥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인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말이 없다. 잠시 후 토닥거림은 쓰다듬으로 바뀌어가고 손의 위치는 한 번씩 쓰다듬을 때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드디어 세영의 손이 선옥의 엉덩이에 닿았다. 거친 청바지를 입은 채였지만 선옥이 엉덩이는 탱탱하고 풍만했다. 선옥이 눈을 감는다. 팔이 짧아 더 밑으로 내려가지를 않아 세영은 상체를 조금 구부려 손바닥으로 선옥의 엉덩이 아래 부분을 감싸 안았다. 그 바람에 세영의 입이 선옥의 입술에 닿았다. 선옥은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세영의 성기는 잔뜩 부풀어 올라 꽊끼는 청바지 안에서 요동을 쳤다. 세영이 자신의 아랫도리를 선옥의 사타구니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 손을 올려 선옥의 분홍색 스웨터 아래쪽으로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맨 살이 느껴졌다. 허리와 배의 매끄럽고 우아하게 휘어진 곡선을 따라 서서히 위로 올라가던 손이 드디어 선옥의 브래지어에 닿았다. 브래지어의 탄력의 저항이 느껴졌으나 세영은 거침없이 손가락으로 틈을 찾아 벌리고 선옥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아픈지 좋은 것인지 모를 신음을 가볍게 내면서 선옥은 자신의 팔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의 훅을 풀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듯 세영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선옥의 가슴을 쥐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선옥이 다시 가볍게 한숨을 쉰다. 용기를 얻은 세영은 선옥의 스웨터를 브래지어와 함께 머리 위로 벗겨 올렸다. 선옥은 어깨와 고개를 들어 옷이 쉽게 벗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완전히 드러난 뽀얀 선옥의 가슴과 짙은 선홍색 유두를 세영이 거칠게 입으로 물고 빤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의 옷을 급하게 벗고 선옥의 청바지를 벗긴다. 이제 하얀 얇은 면 팬티만 남았다. 심장이 요동치는 세영은 떨리는 손으로 팬티의 고무줄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볼록한 불두덩이 살의 말랑함과 약간 곱슬곱슬한 음모의 까칠함이 함께 느껴졌다. 세영이 좀 더 손가락을 내려 음부에 손을 넣고 팬티가 벗겨지려고 하자 선옥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세영의 손을 제지했다. 세영이 잠시 손을 멈추고 자신의 입술로 선옥의 입술을 덮었다. 그리고 혀를 가만히 밀어 넣었다. 선옥의 가쁜 숨소리가 느껴졌다. 옆 방에서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과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세영의 거친 숨소리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선옥의 새근거리는 가쁜 숨 속에는 숨을 내 쉴 때마다 달콤한 복숭아 향기 같은 것이 섞여 나와서 세영의 후각을 자극하고 머릿속이 온통 황홀감에 마비가 됐다. 세영이 다시 흥분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선옥의 팬티를 벗겨 내렸다. 이번에는 선옥이 엉덩이를 들어준다. 생각보다 팬티는 쉽게 벗겨지지 않고 엉덩이와 허벅지의 굴곡에 걸려 돌돌 말리기만 했다. 세영이 몸을 일으켜 선옥의 위로 올라가면서 발가락 끝으로 팬티를 무릎 아래까지 밀어내자 선옥이 스스로 다리를 움직여서 팬티를 발목 아래로 벗었다. 세영이 벌어진 선옥의 무릎 사이로 자신의 무릎을 밀어 넣었다. 다시 몸을 숙여서 선옥의 입술에 키스를 하면서 팔을 선옥의 등 뒤로 넣고 가만히 상체를 끌어안았다. 봉곳하게 솟은 선옥의 가슴이 세영의 가슴을 눌렀다. 부드럽고 몰랑몰랑했다. 세영이 딱딱하게 터질 것 같은 자신의 성기를 선옥의 아랫부분에 대고 밀었다. 어딘가 걸려서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다. 몇 번이고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가로막힌다. 그러자 선옥이 가만히 손을 뻗어서 세영의 성기를 붙잡고 자신의 구멍 속으로 집어넣는다. 쑥 들어간다. 걱정했던 것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선옥의 성기는 촉촉하게 벌어져 있었고 세영의 성기를 쉽게 받아들였다. 매끄러운 선옥의 성기 속은 뜨거웠다. 선옥의 맨 살을 파고들던 세영은 그 강렬한 자극에 자기도 모르게 '아악!"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선옥이 오히려 두 손으로 세영의 등을 감싸주었다. 너무나 짜릿한 쾌감이 성기에서 온몸으로 퍼지며 황홀경에 빠지자 세영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앞 뒤로 움직여 성기를 넣었다가 뺐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몇 번 왕복을 하기도 전에 세영은 다시 한번 "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격렬하게 사정을 했다. 선옥은 조금 놀란 눈으로 세영을 쳐다보고 세영은 부끄러움과 난처함에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그만 선옥의 상체 위에 자신의 상체를 덮고 엎어졌다. 세영의 얼굴은 선옥의 귓가에 엇갈려 베개에 코를 박고 선옥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그러고 잠시 있다가 선옥이 몸을 옆으로 빼내려고 한다.
"잠시만!"
아쉬운지 부끄러운지 세영이 움직이려는 선옥을 만류한다. 선옥은 잠시 기다려주었다가 다시 움직여서 결합을 풀고 욕실로 가서 몸을 씻고 나온다. 이어서 세영도 샤워를 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사실 선옥은 착한 동생 같은 윤주도 좋았지만 이성으로서는 듬직한 세영 선배를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동적이긴 했지만 이렇게 세영과 살을 섞고 가까워진 게 내심 기뻤다. 세영 역시 후배들 중에서는 선옥이 제일 참하고 운동권 학생들답지 않게 조신해서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고 있던 터이기도 했다. 비록 동지간 연애감정은 안 된다고 자제하고 윤주가 선옥을 좋아하는 줄 알기에 윤주에게 특히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왕 벌어진 일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즐거움과 희망이 남녀의 사랑을 이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슬픔과 절망이 묘약으로 두 남녀를 엮어주기도 한다.
28장 욕망
깜박 잠이 든 두 사람은 아침 햇살이 창문을 환하게 비출 때야 잠에서 깨어났다. 두 사람은 서둘러 모텔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어젯밤 두 사람의 비밀을 햇살이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겸연쩍었다.
"아침은 뭘 먹지?"
세영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며 선옥의 손을 잡아끈다.
두 사람은 황급히 모텔 입구를 벗어나 손을 잡고 나란히 인근 단계동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침이라 문을 연 식당이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멀리 골목 끝자락에 있는 한 가게의 유리문이 잠시 열렸다가 닫히는 것이 보였다. 해장국 집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물 잔을 가져다주었다. 둘 다 콩나물 해장국을 시켰다. 홀 안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잠시 후 주인아주머니는 질그릇에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해장국 두 그릇을 내려놓으며 별도로 날계란 두 개를 접시에 담아서 내놓는다.
"이게 몸에 좋아!"
라며 은근하고 친절한 미소를 띠며 두 청춘남녀를 부러운 듯 바라본다.
세영과 선옥은 비밀이라도 들킨 듯 얼굴이 화끈거려 당황스럽게
"감사합니다."라고 응대하고 황급하게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떠서 입에다 넣는다.
'앗, 뜨거워!'
세영이 입에 들어갔던 숟가락을 급히 다시 꺼내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돌아선다.
얼른 밥을 먹고 식당을 나온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상혁의 주소지를 찾아 나섰다. 상혁의 집은 원주 교외의 섬강 가 공단에 있는 자그마한 공장 옆에 붙어있는 사택이었다. 정문은 양 쪽에 기둥만 있고 쇠사슬만 하나 늘어뜨려져 있고 문도 없었으며 담도 초록색 성긴 철망으로 둘러져 있고 너른 흙 마당과 단순한 공장 건물 그리고 단층 양옥 사택이 전부였다. 기둥에는 'DH초자'라고 뜻 모를 간판이 붙어 있으며 마당에는 파란 봉고차 하나와 은색 소나타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사택 출입문을 두드리며 불투명 유리문 안을 기웃거리자니 공장 쪽 건물의 철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온다.
"누구신가요?"
목장갑을 벗으며 다가오던 사내가 물었다.
"예, 상혁이 친구인데요. 여기가 상혁이 집이 맞나요?"
"상혁이 친구?" 사내가 미심쩍은 듯 두 사람을 아래위로 훑어본다.
"예, 상혁이 같은 과 친구들인데요 상혁이가 연락이 안 돼서요..."
"그래.. 우리도 잘 모르는데.."
사내가 여전히 경계를 한다.
"혹시 상혁이 부모님이라도 뵐 수 있을까요?"
"내가 상혁이 아버지인데..."
"아, 그러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응, 그래 먼 길 왔네! 친한 사인가 보지?"
"예, 가깝게 지냈어요. 아, 저는 정세영이라고 하구요, 이 친구는 유 선옥입니다."
선옥이 꾸벅 인사를 한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상혁이가 언제 한 번 이야기를 한 것 같기도 하네."
인사를 받으며 사내가 경계를 좀 풀고 가까이 다가온다.
"혹시 상혁이 소식을 듣거나 누가 찾으러 온 사람은 없었나요."
"응, 없었어."
상혁이 아버지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한다.
"아, 그래요. 이상하네. 학교에고 친구들이고 아는 사람이 없네..."
세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혁 아버지는 두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이상하다. 아들의 소식을 오랫동안 모르고 있는 부모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세영과 선옥은 가볍게 눈빛을 교환하고
"알겠습니다. 혹시 연락 오면 학교에도 한 번 들러라고 말해주세요. 저희가 찾아왔었다고도 말해주시구요."
"그래 알았다. 그러지 뭐."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들도 상혁이 소식이 있으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전화번호 하나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여기!"
상혁의 아버지는 작업복 상의 가슴 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서 내민다.
'DH 초자
대표 오병진
전화번호 248-2976'이라고 적혀있었다.
명함을 받아 든 세영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선옥과 함께 돌아선다. 돌아서며 보니까 공장 문을 반쯤 열고 한 중년여인이 고개만 내민 채 두 사람 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아마 상혁의 어머니인 듯했다. 못 본 척하고 두 사람은 정문을 나와 버스 정류장 쪽이 아닌 반대쪽 남강 가 산책로로 향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맑은 강물이 또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 봉우리를 굽이쳐 흐르고 강 물에는 산 등성이의 푸른 소나무가 반사되어 실루엣을 이루고 있었다. 조금 걸어가니 강가 뚝방 길 산책로 주변에 매운탕 집이 하나 보였다. 넓은 마당에는 유원지처럼 족구장과 평상이 있고 검은 기와로 된 한옥 집에는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방들이 서너 개 늘어서 있었다. 한 방에는 손님들이 앉은뱅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었고 강 가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두 명 보였다. 그런데 낚싯대는 팽개치고 일어서서 그 인근에서 고무장화 바지를 입고 투망을 하고 있는 한 사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곁 눈으로 보면서 두 사람은 마당의 평상에 앉았다.
"좀 이상하지?"
"응."
어느새 선옥이 반 말을 한다. 이제 선후배라기보다는 연인의 느낌이다. 세영은 그 반말이 반가워서 미소를 지었다.
"좀 있다가 다시 한번 가보자. 상혁이 엄마를 만나 봐야겠어!"
"그래. 아무래도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아. 안 그러면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겠어?"
"그러게! 커피 한 잔 할까?"
세영이 한옥 집 마루 한편에 우두커니 어울리지 않게 자리를 잡고 있는 커피 자판기를 바라보며 말한다. 선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영은 벌떡 일어나 신나게 달려가서 커피를 두 잔 빼어 들고 돌아온다. 따스한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후루룩 후루룩 커피를 마시는 두 사람은 세상을 잠시 잊고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여기 참 좋다." 선옥이 웃으며 세영을 바라본다.
"응. 좋네 좋아." 세영도 웃으며 선옥을 마주 본다.
강 가에서는 실랑이가 마침내 주먹다짐으로 커지고 낚싯대와 투망을 서로 찢고 부러뜨리고 난리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름없이 햇살을 즐기고 있다.
잠시 후 민박 집주인이 낚시꾼과 투망꾼의 싸움을 뜯어말리고 좀 조용해질 무렵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운탕 집 주방 한 켠 기둥에 매달린 작은 공중전화로 다가갔다. 동전을 넣고 명함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상혁의 아버지가 곧 전화를 받았다.
"예, 저 좀 전에 찾아뵀던 세영인데요 아까 깜박 말씀을 못 드린 게 있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응, 안 그래도 나도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지금 어디야? 서울로 올라가는 중인가?"
"아닙니다. 아직 근처에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시 여기로 와 줄 수 있겠나?"
"예. 알겠습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전화를 끊고 부지런히 오던 길을 되짚어 상혁의 집으로 들어서자 상혁의 아버지가 정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영과 선옥이 들어서자 상혁의 아버지는 두 사람을 사택 안으로 안내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 소파에 상혁의 어머니와 상혁이 앉아 있었다.
"아니, 상혁아!"
세영이 반갑고 놀라워서 상혁의 어머니에게 인사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상혁을 바라보았다.
"들어와. 여기 앉아. 뭐 좀 먹을 것 좀 줄까?"
상혁의 어머니가 먼저 반기면서 부얶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예. 안녕하세요?"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상혁의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잠시 후 상혁의 어머니가 과일을 내 오고
"편히 이야기들 나눠요!"라며 상혁의 아버지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간다.
부부가 자리를 뜨자마자 세영이 상혁을 다그친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상혁이 선옥을 한 번 흘끗 보면서 대답을 바로 하지 않고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인다. 그러다가 결심을 한 듯
"예, 형하고 영혜가 잡히는 거를 먼발치에서 보고 저는 뒷 길로 빠져서 바로 이리로 왔어요."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학교에는 아무 연락도 안 했어?"
세영도 배낭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제가 수배 뜬 거는 알았고 형과 영혜가 잡혀간 것도 알고 있어서 학교는 근처에도 안 갔어요."
"그럼 계속 여기서 있었던 거야? 여긴 괜찮았어?"
"예, 조심은 했는데 별 일은 없었어요. 그냥 집 안에서만 조용히 지냈어요."
"그래 그래 그나마 다행이다. 부모님이 공장을 하시나 본데 직원들은 알아?"
"공장이래 봐야 크지도 않아요. 부모님이 다 같이 하시고 직공들도 얼마 안 돼요. 걱정 안 해도 돼요. 다 이 근처 마을 사람들이에요."
"그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저야 수배가 떠 있으니 꼼짝을 할 수가 있나요? 그냥 여기 짱 박혀서 아버지 일이나 도우고 있어야지요 뭐. 그나저나 형도 수배 떴던 것 같은데 어떻게 나왔어요? 영혜는요? 영혜도 나왔나요?"
"응, 어찌어찌 나왔어. 말하자면 사연이 길어."
그러자 선옥이 끼어든다.
"야, 말도 마라. 완전 영화야. 탈출 스토리가!"
"뭐? 탈출?"
"응, 이송 도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그 사이에 두 사람이 도망을 쳤대! 재미있지 않냐?"
선옥은 신이 났다. 하지만 세영과 상혁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억지로 감추고 간간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채고 선옥이 아차 하는 마음으로 말을 꺼낸다.
"참, 너도 윤주 소식은 못 들었어?"
"응, 나도 광주에서 헤어지고는 도통 소식을 듣지 못했네.."
상혁이 세영의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하게 대답을 한다.
세 사람이 잠시 침묵에 휩싸인다. 그러는 사이 상혁의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배고프지? 내가 공장 일이 바빠서 점심때가 되었는지도 몰랐네! 집안 살림도 말이 아니고... 그래 국수 좋아해? 강원도에 왔으니 막국수 하나 말아줄까?"
라며 거실과 맞닿은 주방으로 향한다.
"예. 저도 같이 도와드릴게요."
선옥이 일어서서 주방으로 간다. 그 사이에 상혁이 세영에게 나지막하게 말을 한다.
"선옥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디까지 알아요?"
세영은 주방 쪽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 대신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울까?"라고 한다.
현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담배를 한 대씩 피워 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도 몰라. 아직은 영혜랑 너 나 이렇게 세 사람만 알아!"
'휴..' 상혁이 담배연기와 함께 깊은 숨을 내 쉰다.
"배낭은 어디 있어? 네가 파가지고 갔다고 취조관이 그러던데.."
"예, 제가 가지고 있어요."
"어디에?"
"안전한 데 숨겨 두었어요.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하려고?"
"세탁을 해야지요."
"세탁?"
"그럼요 그대로 쓸 수는 없잖아요. 금괘도 있는데..."
"그걸 쓰자고?"
"예. 제가 다 계획이 있어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고 앞으로 필요할 때 자금으로 쓸 수 있게 드릴게요."
"보고도 안 하고?"
"안 돼요. 지금 누굴 믿고 보고를 해요? 그러려면 그동안 있었던 일도 다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휴... 그러다가 들키거나 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세영은 근심이 가득하다.
"에이, 이왕에 이판사판이에요. 형이야 크게 걸릴 게 없지만 난 자수를 해봐야 돈 다 뺏기고 평생 감방에서 썩을 게 뻔한데 그럴 바에야 난 여기에 인생 걸어야겠어요. 그러니 형은 모른 척하고 돈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영혜는?"
"영혜에게도 그냥 입 닫고 살라고 하세요. 설마 걔가 돈 욕심을 내기야 하겠어요? 제가 이따가 현금 좀 드릴 테니까 도피 자금으로 일단 쓰세요."
"그래.."
세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에 붙어있는 식탁에 막국수가 수북하게 쌓여있고 선옥이 빈 접시와 수저를 나르고 있다.
"다 됐다. 상혁아 아버지 오시라고 해라."
상혁의 어머니가 들어서는 상혁을 보고 말한다.
"예." 상혁은 간단히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이윽고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상혁은 잠시 자기 방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작은 손가방을 하나 세영에게 건넨다.
"아까 부탁하신 서류예요."
상혁이 대수롭지 않게 주고 세영도 식탁에 앉으면서 말없이 받는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세영이 식사 인사를 하자 상혁의 어머니가
"아휴 맛이 있을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강원도 막국수니까 온 기념으로 많이 먹어요."라고 응대한다.
강원도 전통 막국수는 조금 거칠고 푸석푸석해서 쫄깃한 냉면과는 식감이 달랐다. 하지만 달콤 매콤한 양념과 투박한 면 맛이 조화를 이루어서 맛이 좋았다.
"와, 맛있네요."
세영과 선옥이 국수를 한 입 가득 씹어 삼키고는 치사를 했다.
"그래? 다행이네. 많이 있으니까 먹고 더 떠먹어."
상혁의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식사를 마친 세영과 선옥은 후식으로 곶감이 둥둥 뜬 시원한 식혜까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혜에 가미된 계피 향이 한참 동안 은은하게 입 안에 감돈다. 상혁의 아버지가 승용차로 원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태워주는 바람에 두 사람은 편안하게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오는 버스 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또 한 번의 밀월여행(?)을 즐겼다.
서울로 돌아온 두 사람은 바로 영혜가 기다리는 자취방에 가서 상혁이 준 손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선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걔는 웬 돈이 이렇게 많데? 부잣집인가? 그래도 이건 엄청난데!"
선옥은 그 돈이 상혁이 그냥 선의로 준 것인 줄 알고 감동을 한다.
"응, 도피자금으로 쓰라는데 너무 많네!"
세영이 얼버무리자 영혜도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을 한 듯 캐묻지 않고
"어제 연명이가 와서 형이 어디 갔는지 묻던데요!"라고 그간의 사정을 보고한다.
"연명이가? 왜?"
"몰라요. 물어보고 그냥 금방 가버렸어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세영은
"안 되겠다. 아무래도 깊이 좀 잠수해야 할 것 같으니까 영혜는 짐 싸고 선옥이는 내일 기태 선배한테 우리가 완도로 갔다고만 말해줘. 내려가서 다시 너한테 연락할게."
"완도요?"
"응, 거기 내가 아는 사람이 하나 있으니까 거기가 좋을 거 같아. 자세한 주소는 나중에 전화로 알려줄 테니 너만 알고 있어."
"알겠어요."
선옥은 아쉬운 듯 대답을 하고 영혜는 대충 소지품을 꾸린다. 이리저리 방랑하는 생활이라 짐이라고 할 것도 없다. 입던 옷과 속옷 그리고 간단한 위생용품이 전부다. 멋도 부리고 싶은 젊은 아가씨인 영혜가 단벌 옷에 가방 하나를 들고 일어서는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이 엄중한 시국에는 그런 감상도 사치이다.
29장 바다
저녁 햇살에 반사된 파도가 수만 개 고기비늘처럼 넘실대며 반짝이고 있었다. 멀리 다도해의 자그마한 섬들과 그 사이를 헤쳐가는 작은 고깃배들이 햇살을 가르고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 같이 자유로와 보였다. 아는 선배의 소개와 상혁이 준 돈으로 세영과 영혜는 자그마하지만 전망 좋은 바닷가 집을 통째로 빌릴 수 있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마음껏 독서도 하고 산책과 경치 구경도 하면서 한 동안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오늘은 선옥이 내려오는 날이라 세영이 마중도 할 겸 읍내 장에 가서 싱싱한 생선과 반찬거리도 사고 과일도 잔뜩 샀다.
"어서 와."
선옥이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세영은 차창으로 보이는 선옥을 보고 손을 흔들며 반가워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옥도 세영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버스에서 내린다. 선옥은 세영에게 달려와서 반가움에 왈칵 안긴다. 시골에서는 흔치 않은 광경이라 주변 사람들이 쳐다본다. 동네 사람들이라도 알아볼까 봐 세영은 얼른 선옥의 팔을 잡아끌고 옆에 세워놓은 자전거를 탄다. 좀 전에 장을 본 물품들이 핸들 앞 바구니에 담겨있다. 선옥은
"어머? 자전거 타고 가는 거야? 어디? 여기 타면 돼?"
라며 자전거 뒤 짐받이에 두 발을 모으고 모로 걸터앉아 세영의 허리를 껴안는다.
처음에는 조금 비틀거리던 세영은 이내 균형을 잡고 시골길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고 씽씽 간다. 길 가에 코스모스가 피어있고 마을 입구에는 말리려고 짚으로 만든 틀 위에 늘어놓은 검은 김들이 '빠작빠작' 소리를 내면서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영혜가 있는 집에 도달하기 조금 전 한적한 곳에서 잠시 자전거에서 내린 두 사람은 깊은 포옹과 진한 키스로 그동안의 회포를 조금 풀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은 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차려먹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식지 않았다.
그날 밤 영혜와 같은 방을 쓰던 선옥은 한 밤중에 살금살금 일어나 세영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던 세영은 들어서는 선옥을 껴안고 바로 자리에 눕혔다. 숨을 죽인 두 사람의 환희의 몸짓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푸스스한 얼굴로 그러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선옥이 영혜의 방에서 나왔다.
"형은 뭔 늦잠을 그렇게 자?"
먼저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던 영혜가 선옥에게 가벼운 핀잔을 준다. 운동권에서는 여자들끼리도 언니가 아니라 형이라고 부른다. 그게 남녀평등이고 차별철폐라고 생각한다. 아마 누구에게나 동무라고 호칭을 통일하는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아무튼 선옥이 대답 대신
"아, 좋다. 여기가 지상낙원이네."라며 해를 보고 두 팔을 위로 벌려 기지개를 켠다.
"잘 잤어?" 작두처럼 손잡이가 달린 물 펌프 옆에서 세수를 하고 있던 세영이 짐짓 인사를 한다.
"네." 선옥도 인사를 하고 옆에 있는 세숫대야를 든다. 세영이 펌프질을 하니 투명한 물이 주둥이로 콸콸 쏟아진다.
"그림 조옿다! 신혼부부가 따로 없네!"
이 모습을 본 영혜가 놀리고 두 사람을 속으로 뜨끔한다.
"대충 씻고 상이나 좀 차리셔!'
영혜가 밝게 소리를 치고 두 사람은 수건을 얼굴을 닦고 아침 준비를 거들었다.
지옥 속에도 틈새에 천국은 있는 법인가 보다. 세 사람은 식사 후 아침산책으로 천국을 거닐었다.
"기태 선배가 두 사람 그만 서울로 올라오래요."
잠시 낭만을 즐기던 선옥이 산책에서 돌아오자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괜찮데?"
"예, 전재무가 대통령이 되더니만 유화책으로 정치인들도 풀어주고 수배령도 풀고 제적됐던 학생들도 복학을 허용하고 분위기가 겉으로는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아마 올림픽도 개최하려니까 인권 관련 국제여론도 신경이 쓰였겠지.."
세영이 말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사정이 좀 다르지 않나요? 우린 시국 관련이 아니라 이상하게 절도 어쩌고로 수배가 돼서..."
영혜가 묻는다.
"그것도 기태형이 다 알아봤는데 두 사람 다 수배가 풀렸데요."
"그럼 윤주랑 상혁이는?"
"그 두 사람은 아직 수배가 되어 있는데 별로 성의 있게 잡으러 다니는 것 같지도 않아요."
"윤주 소식은 없고?"
세영이 짐짓 묻자
"예. 아직 없어요."
선옥이 대답을 하고 세 사람은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잠시 침묵에 잠긴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세영이
"그래, 가자. 오늘 하루 정리하고 내일 올라가자. 너도 같이 가도 되지?"
라고 선옥에게 묻는다. 선옥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날 서울로 올라온 세 사람은 바로 윤주의 동생 윤미에게 전화를 해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영혜와 선옥은 집으로 가고 세영은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급하게 구했다.
그 다음날 윤미의 학교 근처로 찾아온 세영을 윤미는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오빠 선배님이라고 들었어요."
약속대로 커피숍 입구에서 기다리던 윤미는 문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세영을 금세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응, 그래. 들어가자."
친한 후배 동생이라 처음부터 반 말을 하는 것이 더 편하다.
"혹시 오빠 소식은?"
자리에 앉자마자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윤미가 세영을 다그친다.
"아니. 아직!"
세영의 대답에 그만 실망을 한 나머지 윤미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힌다. 세영은 민망하고 죄스러워 외면을 한다. 잠시 후 윤미가 좀 진정이 되자
"윤미라고 했지? 그래 학교 생활은 할 만 해?"
"예." 윤미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과야?"
"경영학과요."
"여학생이 어떻게 경영학과를 택했어? 용기가 좋네!"
"어떻게 점수에 맞추려다 보니까..."
윤미가 겸손하게 말을 하지만 사실 윤미는 회계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회계사가 되어서 큰 회사나 회계사무실에서 커리어 우먼이 되면 멋있을 거 같았다.
"그래 그래도 좋은 과니까 열심히 하고.. 사실 내가 지난번에 너네 집에 한 번 갔었거든... 그때 너네 부모님들이 너한테 연락을 해보라고 그래서..."
"예, 이야기 들었어요. 금방 오실 줄 알았는데 안 오셔서 저도 궁금했어요."
"응, 미안. 나도 사정이 좀 있어서 시골에 피신.. 아니 볼 일 좀 보느라고 이제야 왔네!"
"예, 괜찮아요. 그런데 부모님들이... 저 근데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오빠 친구 같은 선배니까 그냥 오빠라고 불러."
"네 세영오빠 오거든 우리 오빠 친구들 좀 만나보게 하라고 하셨어요."
"윤주 친구?"
"예. 명수 오빠랑 인철이 오빠랑 고향에서 단짝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서로 협조를 하면 우리 오빠 찾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네가 한 번 다리를 놓아봐라."
"예, 연락해 보고 약속을 잡아볼게요. 세영.. 오빠는 언제가 좋으세요?"
"난 아직 복학 전이라 좀 한가해. 언제라도 이 번호로 연락해."
세영은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커피숍 메모지에다 전화번호를 적어서 윤미에게 건넨다. 메모지를 받아서 핸드백에 넣은 윤미는 커피를 마시고 두 사람은 한담을 좀 나누다가 헤어졌다.
30장 파업
그 시간 명수는 파업현장에 있었다.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북소리에 맞춰서 강당에 모인 조합원들이 투쟁가를 합창하고 있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간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 쪽 나도 지킨다
구사대 폭력 물리친 우리
해방세상 위해 나간다...'
2층의 강당 겸 식당에서 농성 중인 조합원들이 머리에 '노동해방'이라는 붉은 띠를 두르고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쥔 채 '파업투쟁가'의 힘찬 리듬에 맞춰 팔을 어깨 위에서 머리 위로 리드미칼 하게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한다. 그 팔의 각도와 자연스러움의 정도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배테랑인지를 알 수가 있다. 처음 파업에 참가하는 사람들 특히 여공들은 팔 관절이 나무 막대기처럼 직각으로 굽혔다가 펴졌다가 하기만 한다. 그러나 조합 간부급들은 약간 반동을 주어서 팔을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유연하게 움직이면서도 마지막에 딱딱 끊는 강조점을 줌으로써 힘차고 몸에 밴듯한 멋진 동작을 연출한다.
노래가 끝나자 명수가 일어서서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조합원들을 향해 마주 보며 연설을 한다.
"동지 여러분!
지금 밖에는 구사대와 전경 그리고 백골단이 우리의 일터를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증스럽게도 우리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를 회유해 보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지 여러분
우리는 해고자 원직 복직, 야근 철폐, 고소 취하, 기본급 10% 라는 우리의 정당한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저들이 두렵습니까? 가족들 때문에 흔들리십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팔을 치켜들면서
"투쟁!"이라고 화답한다.
"그렇습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단결하면 결코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단결투쟁 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이제 저들이 언제 여기로 밀고 들어올지 모릅니다.
남성 동지들은 옥상으로 올라가서 저들의 침탈에 대비해서 화염병을 준비해 주시고 여성 동지들은 입구부터 2층 농성장으로 통하는 계단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집회를 마무리하고 각자 임무 받은 농성장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투쟁!"
조합원들이 "투쟁!"이라고 화답하며 이어서 다시 '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모두가 일어서서 비장한 표정으로 합창을 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광주 이전과 이후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 YH 사태 때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을 할 때까지만 해도 노동운동은 근로조건과 처우개선 등의 '순진한' 목표를 내세우고 농성 등의 '평화로운' 방법을 썼으나 이제는 모든 것이 '정치투쟁'이 되었다.
노동이든, 교육이든, 문화이건, 무역협정이건, 인권과 경제 문제이건, 농촌과 빈민과 철거민 문제이건 그 무엇이건 간에 모든 이슈와 문제의 근본에는 군사 독재정권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이 있다고 규정하고,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부분적인 개선만으로는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강경파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힘을 얻어 운동권 내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 방식을 결정했다. 반면에 온건한 개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회주의자나 나약한 감상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운동 조직 내에서도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는 목숨 바쳐 무조건 적에 맞서 싸우자는 주장 그 이외에는 그 어떤 이성과 논리도 설 자리가 없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대부분의 주장은 구실과 명분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는 대중의 그 분노와 요구를 구심점으로 하여 사람들을 규합한 다음에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 정부, 나아가 통일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끊임없는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니 현장에서 잘 모르는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들의 투쟁 방식이 파업을 위한 파업, 투쟁을 위한 투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투쟁 방법에 있어서도 폭력에 맞서는 폭력은 당연한 것처럼 정당화되고, 정통성이 없는 정부가 만든 모든 법은 불의이기 때문에 비합법 투쟁도 장려가 되었다. 합법 투쟁은 어쩔 수 없이 세가 불리할 때 취하는 궁여지책이 불과했다. 또한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이북에 대한 찬양과 동경, 동지애도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통성도 부정하는 기류가 강해서 각종 집회 때 국민의례 대신에 산화한 동지에 대한 묵념을 하고 애국가 대신에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으며 노동조합기가 태극기를 대체했다.
하지만 워낙 충격적인 광주에서의 잔혹한 진압과정을 전해 듣고 폭력적인 독재정권의 통치를 체험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의 과격하고 극단적인 투쟁방식은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인 동조를 받고 있었다. 이것이 민주 진영과 운동권 활동의 배후 동력이 되고 이후에 전재무 정권이 몰락하는 근본 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합원들이 옥상으로 출입구로 나누어 흩어지는 것을 보며 명수는 창 가로 다가가서 밖의 동정을 살핀다. 정문에는 방석복을 입고 방패를 든 전경대가 빽빽하게 몇 겹으로 막아서서 아무도 나오거나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고 그 뒤에는 정복을 입은 경찰관 몇 명이 모여든 가족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정문 안 마당에는 반장과 조장 그리고 회사의 하급간부들로 구성된 소위 '구사대'가 사복 경찰인 '백골단'과 뒤섞여 무리를 지어 담벼락에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아마도 상황을 살피다가 틈이 나면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손에는 '불법파업 철회, 직장점거 중단'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가 명수가 모습을 드러내자
"조합원만 직원이냐? 우리는 일하고 싶다!"며 몇몇이 고함을 지른다.
어제의 직장 동료가 오늘은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며 맞서 싸우는 원수와 적이 되어버렸다.
명수가 대꾸를 하려다가 기가 막힌 듯
"휴, 말을 해 봐야 통하겠어?"라며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하며 몸을 창 안 깊숙한 음영 안으로 숨긴다. 그리고 그늘 속에서 멀리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곳을 살핀다. 그러다가 낯이 익은 사람들이 보여서 미간을 좁히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누나 명자와 윤미, 인철 그리고 낯선 한 남자... 그리고 부연이!
순간 명수의 심장이 꿍꽝거린다.
'쟤들이 어떻게 여길?'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멀리서도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연의 뽀얀 얼굴을 보며 설렘에 돌아서서 바닥에 엎드린 다음 대자보를 쓰던 전지를 끌어다가
'내일 아침 10시 면회'라고 쓴다. 그리고서는 그 종이를 접어들고 계단을 내려간다. 여성 조합원들이 책상과 의자 등 집기를 가져다가 쳐놓은 바리케이드 사이를 타고 넘어 1층 출입문을 지나 마당 입구에 내려선다.
마당 한편에 앉아 있던 구사대와 백골단이 벌떡 일어선다.
명수는 더 나가지 않고 두 팔로 종이를 머리 위로 치켜든다. 그러자 명자 일행이 그런 명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잠시 후 글자를 읽고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을 흔든다.
그 모습을 보고 명수는 황급히 뒤로 돌아 2층으로 다시 올라가고 명자 일행도 천천히 농성장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 10시, 명수는 몇몇 다른 조합원들과 함께 정문으로 다가갔다. 전경대의 봉쇄선이 빼꼼하게 열린다. 그러자 귀가를 하기로 한 일부 조합원이 나가고 명자 일행과 몇몇 가족이 면회를 하러 정문 안으로 들어선다.
"그래도 면회는 시켜주네!"
명자가 명수를 보고 조금은 걱정스럽게 그러나 반갑게 말을 건넨다.
"응, 인도적 물품 전달과 면회를 하루에 한 번 허용하는데 그걸 빌미로 가족들 만나게 해서 조합원들 회유하려고 그러는 저의도 있는 것 같은데... 그나마 이것도 언제까지 될지는 몰라. 내일은 농성장에 전기, 수도도 끊는다는데... 근데 누구셔?"
"응, 윤미랑 인철이는 알 거고, 부연이도 알지?"
"응!"
명수가 수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부연도 가볍게 목례를 한다.
"그리고 이 분들은 윤주 선배님이시고 또 윤주 학교 동기분이셔."
오늘은 인철과 영혜, 선옥도 동행을 했다.
"안녕하세요? 정세영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세영이 손을 내밀자 명수가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한다.
"예, 김명수입니다."
이어서 영혜와 선옥도 인사를 나눈다.
"모두가 윤주랑 인연이 있는 분이시라 윤주 소식을 공유하고 함께 찾아보자는 의미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기로 했어. 네가 밖으로 못 나온다기에 격려 겸 출동을 했지!"
명자가 설명을 하자 명수가 인사치레를 한다.
"아우,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사정이 이래서 힘든 걸음을 하시게 했네요."
"아닙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희도 같은 동지들이니 염려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세영이 답례를 한다. 그 말에 부연을 바라보며 명수는 살짝 놀란 기색이다. 명수 기억에 부연은 비교적 시를 좋아하고 정서적인 편이었던 걸로 알고 있어서 동지라는 말에 반갑기도 하고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운동권이 장악한 학생회를 통해서 그 시절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직 간접적으로 운동권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대학 문화가 되어 있어서 특별히 활동을 하지 않는 인철이, 윤미나 부연도 동지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존경과 찬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명수는 부연 앞에 머리띠를 매고 투사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고생은요! 다 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윤주 소식은 여기 아무도 아직 모르시는 건가요?"
"예. 아직요. 지난번에 광주에서 저랑 헤어졌는데 그 후로는 소식이 없네요."
세영이 대답을 했다.
"그럼 혹시 광주 실종자 명단을 찾아보셨어요?"
명수의 말에 인철이 대신 대답을 한다.
"응, 물론 알아보았는데 거기에는 없고 경찰에도 수배자로 떴다가 지금은 그냥 행불자로 처리되어 있대."
"뭐 신고 들어온 거도 없데?"
"응."
인철이 고개를 떨군다.
"그 참, 답답하네!" 명수도 말을 잇지 못한다.
"아무튼 이제 이렇게 매 달 첫 일요일에 한 번씩 모여서 윤주 찾기 모임을 하기로 했으니 무슨 성과가 있겠지요."
선옥이 다독거리듯이 일행을 둘러보며 말을 했다.
모두들 결의를 다지는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래야지요. 저는 그럼 이만 들어가 볼 테니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명수가 말을 하자 명자가 받는다
"다음 달에는 끝이 나겠어?"
"응, 빨리 끝을 봐야지! 이거 시간이 길어지니 우리 쪽에서도 이탈자들이 자꾸 생기고 저 놈들도 밀고 들어 올 기세이고... 어떻게든 결말이 나겠지 뭐! 우리는 다달이 벌어먹고사는 사람들이라 파업 농성을 장기적으로 할 수가 없어. 큰 일이야!"
명수가 한 숨을 쉰다.
"월급 안 줘?"
"무노동 무임금이라나 뭐라나.. 저 놈들이 월급을 주겠어? 지금 월급은 고사하고 피해보상 청구한다고 난리인데.."
명수가 어두운 표정을 짓자 세영이 잠시 의미심장한 숙고를 하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명수의 손에 쥐어준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파업기금으로..."
명수가 놀란 표정으로 돈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경찰이 볼세라 받아서 얼른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그럼.."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잠깐!" 하며 곁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사복 경찰 하나가 명수의 팔꿈치를 붙잡는다. 명수가 뿌리치려고 하자 그는 명수의 앞을 가로막고 더욱 거세게 명수를 밀면서 명수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서 조금 전에 세영이 준 것을 꺼내려고 한다.
"뭐야? 뭘 받은 거야? 허가 없는 물품 반입은 안된다고 했지? 순순히 내놔!"라고 윽박지른다.
명수가 그 경찰을 밀치면서 농성장 쪽으로 몸을 돌려 달리려고 하는 순간 다른 사복 한 명이 곤봉으로 명수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그 충격에 명수는 두 손으로 머리 뒤를 감싸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순식간에 명수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면서 명수의 머리를 적시고 목덜미로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놀라서 명수의 주변에 모여든다.
부연이 앞으로 나서면서 망설임 없이 속치마 자락을 '부욱' 찢더니 명수의 상처에 대고 손바닥으로 눌러서 지혈을 한다. 명수는 그 와중에도 깜짝 놀라고 한편 감격에 겨웠다. 누구에게나 평생 처음 하는 경험은 모두가 큰 사건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명수에게는 이것이 철이 든 이후로 평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정성스럽게 간호를 받아본 첫 경험이었다. 명수는 자신의 몸이 그리고 자신이라는 인간이 결코 함부로 막 다루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것도 자신이 추앙하는 부연에게 자신이 이렇게 귀한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부연은 명수의 몸의 상처가 아니라 명수의 영혼의 상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치유하고 있었다. 명수는 생애 최고로 행복한 환희의 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경찰은 명수 주머니에서 기어코 내용물을 확인하고서야 물러났고 명수는 어느 정도 피가 멈추자 부연의 속치마 붕대를 상처 부위에 댄 채 한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농성장으로 복귀했다.
다른 일행들도 돌아서서 도열한 전경대를 비집고 나와 각자 집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명수의 모습을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명수가 이끄는 파업 농성은 차츰 힘을 잃어갔다.
오랜 파업에 지친 조합원들이 파업 현장을 조금씩 빠져나가고 투쟁동력도 약해져서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자는 여론이 점점 우세해지고 있었고 회사 측에서는 수십억의 피해보상을 노조 위원장인 명수 개인과 노동조합에게 청구 소송을 해 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되면 파업이 끝나더라도 그 천문학적 금액을 조합원들 월급에서 공제당하거나 차압을 당할 것이고 그러면 조합원들의 생계에도 치명타를 입을 것이 뻔했다. 더욱이 남은 조합원들도 파업이 끝나고 나서 보복을 받거나 직장에서 잘릴까 봐 불안감이 커져갔다.
이제는 완전히 이기거나 무조건 굴복하거나 둘 중의 하나 밖에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절망감과 패색은 점점 짙어만 갔다.
그 정보를 알았는지 어느 날 밤 구사대와 백골단이 기습적으로 농성장을 쳐들어 왔다. 소방차 사다리까지 동원해서 옥상과 계단 바리케이드를 밀치고 들어오고 조합원들의 저항은 별로 심하지 않았다. 처음에 잠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바리케이드를 붙잡고 버티다가 구사대와 경찰의 거센 공격 앞에 힘없이 하나씩 체포되어 울부짖으며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 와중에 격분을 참지 못한 명수는 옥상으로 올라가 화염병을 만들려고 통에 넣어 둔 석유와 씨너를 몸에 뿌리고 불을 붙인 채 옥상 아래로 몸을 던졌다.
22살 청춘이 못다 한 꿈과 함께 그렇게 허무하게 불꽃으로 타들어 산화했다.
장례식장에서 피를 토하듯 몸부림치는 명수 어머니의 절규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친한 친구 둘을 거의 동시에 잃은 인철도 망연자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윤미도 자신의 오빠가 죽은 것처럼 슬피 울었고 부연도 하늘도 땅도 같이 울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지만 수를 다하지 못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은 슬픔보다는 아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