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달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전장터 위, 구름 사이로 만월에 가까운 둥근달이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달이 어찌나 밝은지 별 빛은 거의 보이지 않고 하늘빛이 약간 푸른빛을 띨 정도였다. 수습본부에 갔던 윤주가 조심스럽게 광주은행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중간에 길 가에서 상혁이 그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왜 여기 있어요?”
“응. 공수들이 은행에 들어왔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여기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아까 수습본부에서는 최대한 외곽에서 선을 지키라고 하긴 했는데…”
윤주의 걱정스러운 말을 상혁이 뚝 잘라 들어왔다.
“위험하기사 어딘들 안 위험하간? 오늘 밤은 일단 여기를 지키고 낼 아침에 다시 움직이기로 했응께 이리 들어와. 좀 있다가 보초 교대나 나와.”
말을 마치고 상혁은 총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래, 공수들이 대규모는 아닌 것 같고 정찰대 정도 같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틈 나는 대로 눈 좀 붙여. 나도 좀 잘 테니까 새벽에 깨워. 보초 나누어서 서게..”
건물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영은 말을 마치자 피곤한 듯 금방 누워서 코를 골았다.
그런 세영을 지켜보던 영혜가 나지막하게 윤주에게 말했다.
“윤주아, 근데 오늘 형이랑 상혁이가 좀 이상하지 않아?”
“응, 뭐가?”
“아까 너가 수습본부에 갔을 때 광주은행 지하실에서 뭐가 터졌거든!”
“지하?”
“응, 금고 있는 데!”
“금고?”
“응, 내가 내려가 보려니까 위험하다고 두 사람이 굳이 못 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저 배낭도 좀 이상해. 엄청 무거워 보이는 데 아까는 그렇지 않았거든? 또 갑자기 은행에서 철수를 한 것도 그렇고…”
“그래? 그럴 만한 일이 있었겠지!”
“아니야, 정말 이상해. 배낭에 뭐가 있는지 좀 봐야겠어.”
영혜가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내가 가 볼게. 가만있어 봐.”
윤주는 영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린 후 일어나서 조심조심 상혁이가 놓아둔 배낭 쪽으로 다가갔다. 윤주가 배낭의 끈을 푸느라고 더듬대고 있을 때 세영이 ‘으음..’ 소리를 내면서 돌아 누었다. 윤주와 영혜가 얼어붙은 듯 숨을 죽이고 있자 세영이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깊은 숨소리를 내며 다시 잠이 들었다.
희미한 달 빛으로 배낭 속을 들여다보며 손으로 더듬더듬 감촉을 느끼던 윤주는 깜짝 놀라 영혜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금괴랑 돈다발이야.”
윤주의 말에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이라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상대방이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금고에서 훔친 거야.”
영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상혁이는 또 몰라도 세영 선배까지 이럴 줄은 몰랐네.”
윤주는 계엄군이나 전경과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두려움에 심장이 뛰었다.
“아까 수습본부에서는 뭐라고 했는데?”
“금고는 손대지 말라고 했어.”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우리 투쟁의 도덕성에 치명적이야.”
“맞아. 설마 개인적 욕심에서 그런 건 아닐 거라고는 믿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순 없어.”
“상혁선배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혁명을 위해선 때로는 희생도 필요하고 폭력이든 속임수든 무슨 수단이든 써야 한다고 주장해 왔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야. 강도나 도둑놈 하고 뭐가 달라?”
“알았어. 내가 도로 가져 다 두고 와야겠어.”
“선배에게 말도 안 하고?”
“선배도 마찬가지야. 말해서 들을 사람이 상혁이랑 같이 짜고 우리를 속였겠어? 소용없으니까 내가 조용히 갖다 두고 오는 게 최선이야.”
“광주은행에 벌써 공수가 들어왔다는데?”
“괜찮아. 근처에 두고 오면 돼.”
“조심해..”
그때 광주은행 1층에서는 길 희섭 대위가 성동일 연대장에게 무전보고를 하고 있었다.
“독수리 여기 까마귀 셋.”
“독수리 오버.”
“까마귀 둥지에 앉았다. 알도 확보했다 오버.”
“깨진 알은 없는가 오버?”
“잘 모르겠다 오버.”
“개들은 없었는가? 오버.”
“없었다 오버.”
“알 회수해서 즉시 철수하라 오버.”
“알았다. 까마귀 아웃.”
무전을 마친 길 대위는 하 상사를 손짓으로 불렀다.
“나는 수송준비를 할 테니 선임하사는 경계책임을 맡도록 하세요. 적재 완료 후 즉시 철수합니다.”
하 상사가 돌아서자 길 대위는 무전병에게 지시했다.
“운전병에게 차를 현관 앞에 대라고 하고 너는 지하실로 내려와라.”
잠시 후 길 대위는 지하 금고의 금괴와 현금 유가증권을 직접 마포에 넣어 묶은 후 하나하나 일련번호를 매긴 후 무전병과 운전병에게 지프차에 옮겨 싣도록 했다.
“날이 밝기 전에 철수해야 하니까 서둘러라.”
명령을 내리는 길 대위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있었다.
한편 무전병이 마지막 마포자루를 차에 올려놓고 있는 순간 어디 선가 총성이 울렸다.
길 대위는 선탑석에 내려놓았던 소총을 움켜쥐고 안으로 뛰어들어가면서 운전병에게 외쳤다.
“시동 걸고 차를 뒤쪽으로 빼.”
건물 안으로 들어간 길 대위는 몸을 숨긴 채 창 밖을 빼끔히 내다보았다.
더 이상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선임하사, 여기 야간투시경.”
옆 창문에서 투시경으로 밖을 살피고 있던 하 상사가 다가와서 투시경을 내밀었다. 투시경으로 바라보는 달 빛 아래 거리는 대낮처럼 환하게 빛났다. 맞은편 건물에서 2-3 미터 앞 인도와 차도 경계 부분에 어두운 물체가 하나 보였다. 엎드린 사람이었다. 길 대위는 투시경을 쓴 채 소총을 들어 물체를 조준했다. 움직임은 없는 듯했다.
“저격병.”
길 대위는 옥상에 있던 저격병을 호출했다.
저격병이 내려오자
“직접 조준하지 말고 앞 쪽 1 미터쯤에 한 방 쏘아봐.”
단 발의 총성과 함께 저격병의 긴 총구에서 붉은 화염이 피어올랐다.
총알이 정확하게 엎드린 사람의 바로 앞에 떨어지고 하얀 파편이 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엎드린 사람은 움직임이 없었다.
“저격병은 현 위치에서 엄호하고 하 상사는 가서 확인해 봐. 나머지 인원은 모두 사격 대기 한다.”
모두가 거총을 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하 상사가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갔다가 되돌아왔다.
“폭도인 것 같습니다. 이미 사망했습니다. 교련복에 총은 소지하지 않았고 배낭만 메고 있었습니다. ”
“배낭? 알았다. 일단 전원 철수한다. 사망자도 같이 데리고 간다.”
그 순간 맞은편 건물 옥 상 위에서는 영혜가 총을 겨눈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상혁의 등을 때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저건 윤주야 윤주.”
상혁은 말이 없고 세영이 영혜의 팔을 제지하면서 물었다.
“윤주가 왜 저기 있어?”
“그 배낭,,, 형이 훔쳐 온 배낭을 도로 가져다 놓는다고 갔어요.”
“뭐라고? 난 공수들이 기어 오는 줄 알았어. 정말이야.”
상혁이 입 속 말로 중얼중얼 말했다.
옥상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은 영혜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편 광주 외곽으로 급히 철수한 길 대위는 사전 지시받은 대로 대원들을 상무대 훈련소 인근 야산에 야영시키고 혼자 상무대에 설치된 임시 야전 사령부로 들어가서 성동일 연대장에게 작전 결과 보고를 했다.
연대장은 길 대위를 앞에 세워둔 채 바로 전재무 사단장에게 유선 보고를 했다.
“작전에 일부 차질이 생겼습니다. 국고 일부를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금괴는 잘 모르겠고 현금은 약 40억 정도 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네. 아군 피해는 없습니다.”
“폭도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아닙니다. 아군이 사살한 것이 아닙니다.”
“사망자가 배낭 속에 광주은행에서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국고 일부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네, 좀 부족합니다. 아마 다른 폭도가 현장에 가지고 달아난 듯합니다. 즉시 다시 출동하여 체포하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연대장은 약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길 대위, 지금부터 질문은 하지 말고 지시받은 대로만 해. 알겠나? 우선 회수된 국고는 자네가 직접 사단장님께 즉시 전달한다. 폭도 시체는 다른 대원들에게 알리지 말고 하 상사에게 각별히 지시해서 절대 외부로 발견되지 않도록 처리한다. 이상.”
“아직 작전 종료가 안 되지 않았습니까? 국고를 마저 회수해야 하려면 폭도들이 멀리 달아나기 전에 서둘러 현장에 재투입…”
“질문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연대장이 낮지만 단호하게 길 대위의 말을 잘랐다.
“사단장님이 수고했다고 치하하시고 작전 종료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리 알고 명령대로만 하게. 즉시 실시해.”
“네, 알겠습니다.”
경례를 하고 돌아서는 길 대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문동일은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광주 경찰서장이십니까?”
“네, 계엄사 2 연대장 문동일 대령입니다.”
“네, 수고가 많으십니다. 작전 협조 부탁 드립니다.”
“아닙니다. 강도 사건입니다. 오늘 저희가 광주은행 국고 회수 작전을 전개했는데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누군가가 금고를 털어갔습니다.”
“아닙니다. 일부는 회수했습니다. 도난된 정확한 금액은 은행 측과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네, 수사 및 수배를 부탁드립니다.”
“금액은 나오는 대로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지금 폭도 점령 지역이라 현장 보존이나 방문은 아직 어렵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문동일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뭔가 깨달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역시, 전재무 장군님은 한 수 위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