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막 - 자유

by 이윤수

그동안 나는 어리석게도

그리움이나 외로움이나 슬픔이나 사랑이라거나

꽃잎으로 문득 피었다가 별똥별로 뚝뚝 떨어지는

그따위 가늠할 수 없이 가슴을 저미는 것들을

말과 글로 감히 붙잡아 보듬으려 했다


7일 - 자유


“지금 너를 옥죄고 있는 게 무엇이냐? “

소리가 있다.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존재했다.

음파도 없었고 아무것도 고막을 울리지 않았다. 중이의 청소골에서 진동이 증폭되지도 않았고 내이의 달팽이관에도 자극이 없었으며 림프액이나 청세포도 흥분하지 않았다. 청세포에 연결된 어떤 뉴런에도 전하가 발생되지 않았고 어떤 시냅스에서도 수용체가 신호를 대뇌로 전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주는 그 '소리'를 '들었다'. 아니 느꼈다.

‘뭐지? 누구야?'

소리는 나지 않았다.

기도에서 공기가 흘러나오지 않았고 성대가 진동하지 않았고 혀나 입술이나 턱이나 그 어떤 것도 움직여 공명의 파장이나 파고를 변형시키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윤주의 '말'을 이해하고 대답을 했다.

"나는 너다."

'무슨 소리야? 장난하냐?"

"..."

윤주는 눈을 뜨고 소리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온 사방에 빛이 있었다.

빛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그림자도 명도의 차이도 없었다. 하나의 광자도 윤주의 각막을 통과하지 않았고 수정체에서 굴절되거나 망막에 상을 맺히게 하지 않았다. 당연히 시신경에는 어떠한 자극도 없었고 뇌에 전달되는 신호도 없었다.

그러나 윤주는 물체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았다. 투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몸이 거기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몸이 둥둥 떠 다니다가 순식간에 위치를 옮긴다.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위치를 옮기는데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아니다. 순간 이동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저 먼 곳에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자신이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다른 물체나 사람들도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여기에 있다가 저기에 있다가 겉모습이 변했다가 순간 엉뚱한 다른 물체로 변화하기도 한다. 친구가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없어졌다가 어머니가 되었다가 호랑이가 되었다가 침대가 되었다가 별이 되었다가 해가 되었다가 생전 처음 본 괴상한 형체로 바뀌기도 했다.

윤주는 어이가 없어서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이고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이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를 알 수도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너는 얽매어 있느냐?"

또 소리가 있었다.

'아니오. 자유로와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있었더냐? “

‘예’

“슬프고 행복한 적도 있었더냐?”

‘물론이지요 ‘

“꼭 되갚아주어야만 했더냐?”

‘그래야 한도 풀리고 정의가 서죠‘

“틀리진 않았다만 해결책은 아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질긴 악연일 뿐이다. “

‘왜 이리 뭐 하나 똑 부러지게 분명하지가 않지?‘

"그래서, 그것들은 누구 것이고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몰라요. 여기는 어디인가요?'

"네가 우주라고 부르는 곳이다."

'우주 어디요? 은하계 안이요? 밖이요?'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하다. 너와 나는 지금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곳에 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안이면 안이고 밖이면 밖이지!'

말장난을 하는 것 같아서 짜증이 좀 난다.

"그건 네 방식이다. 네 생각일 뿐이다."

'그럼 내가 내 마음대로 생각하지 뭐!'

"그래 바로 그거다 그게 자유다."

'자유고 나발이고 나 집에 갈 거야. 어디로 가야 해?'

"네 마음대로 가라"

'아 글쎄 거기가 어느 쪽이냐고?'

"꼭 방향과 길이 있어야 하나?"

'당연하지. 그래야 목적지로 가지!'

"그건 지구에서나 통하는 논리다."

'아, 몰라!, 난 지구인인데 지구에서 살아야지!'

"네가 지구인이란 건 어떻게 증명하지?"

'...'

"지구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 그냥 너의 상상이라면?"

'내가 지구에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지구에서 살고 있잖아!...'

"그러네. 맞네!"

'아싸!'

"잘 가라."

'잠깐, 어딘지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왜 꼭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

'당연하지. 네가 날 여기 데려 왔잖아!'

"바람이 분다."

'무슨 소리야?'

"배가 고프다."

'응?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배가 고프네..'

"말이 안 된다."

'어? 그건 내가 할 소리다.'

"그걸 내가 하면 안 되냐?"

'짜증 나네 씨발!'

"고맙다."

'더 짜증 난다.'

"알 필요 없다."

'뭘?'

"왜 그런지를!"

'뭐가?'

"네 뜻대로 된 게 얼마나 있느냐? 네 생애에 네 계획대로 된 것이 몇 번이나 되더냐?"

'음, 그건 맞는 말이네.'

"건방진 것! 네가 뭘 안다고 판단질이야! 네가 이해가 안 되면 잘못이고, 네 그 꼴꼴한 두뇌가 납득을 하면 그게 다 사실이고 진리란 말이더냐? 어떻게 네 생각만 옳고 상대방 생각은 무조건 잘못이라고 믿을 수 있단 말이냐? 상대방도 다 나름 이유가 있을 거고 오히려 네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느냐? 네가 뭘 그리 잘나서 네가 모든 걸 다 안다고 감히 생각하느냐? 언제나 상대방을 비난함으로써 네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그 못된 버릇이 언제부터 들었느냐?”

'아휴, 성질은... 아님 말고...'

"그래 그만두자."

'알았어. 미안해'

윤주가 이유도 모르고 사과를 한다.

"좋았어. 접수하지!"

'뭘?'

"네 겸손을!"

'무슨 소리야?'

"아무 소리도 아니다."

소리가 없어졌다.

침묵도 사라졌다.

빛도 사라졌다.

어둠도 없다.

시간이 멈추었다가 사라져 가늠할 수 없다.

강물이 나무가 새가 흙이 꽃이 서로 막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서로 피하거나 부딪치지 않는다. 그냥 통과한다. 물체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 그리고 핵과 전자 사이에도 더 큰 허공이 있다. 느낌과 생각도 그 사이에 존재한다. 또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이 사라졌다.

완전한 자유다.

대신 홀로 버티고 스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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