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막 1장 - 누명

16일 아침 - 수감

by 이윤수

“1385 강윤주 접견."

윤주가 입고 있는 주머니 없는 카키색 남자 미결수 복에는 양쪽 가슴에 큼지막한 하얀 명찰이 꿰매져 있고 검은 아라비아 숫자 1385가 스텐실 기법으로 거칠게 인쇄되어 있다.

심란한 마음에 먹는 둥 마는 둥 반쯤 비운 아침 식판을 배식구로 내놓고 일어서자 교도관이 철창 문을 열고 들어와서 수갑을 채운 후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한다. 윤주가 나가자 자신도 따라 나온 후 철창 문을 잠그고 윤주의 한 발 뒤에 선다. 교도관이 뒤에서 감시하는 가운데 윤주는 다른 미결수들이 수용되어 있는 방들이 늘어서 있는 복도를 따라 걷다가 막다른 곳에서 닫힌 철문 앞에 선다. 교도관이 열쇠로 문을 열고 윤주가 들어가기를 기다린 다음 자신도 들어와서 철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근 후 다시 왼쪽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일반 면회실로 가족이나 방문인을 만나는 곳이고 왼쪽은 변호사나 수사관 접견실로 칸막이가 있는 일반 면회실만큼 경비가 심하지 않다.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에 고정된 밋밋한 철제 책상과 의자가 방 한가운데에 있고 윤주의 변호사 양동근이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선다. 교도관이 철문을 닫고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무심히 전방을 주시한다. 윤주가 양 변호사를 마주 보며 앉자 양 변호사는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낸다.

"오늘 현장검증 있는 거 아시지요?"

말과 행동이 신속한 양 변호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인사나 형식적인 대화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시시껄렁한 잡담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윤주는 그런 양 변호사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

"예."

"어떻게, 결심은 하셨습니까?"

"아직이요."

"아니 오늘이 현장검증인데 아직 결정을 못 하셨으면 곤란합니다. 오늘이 범행 시인을 할 마지막 기회이고 만일에 나중에 번복을 하면 오히려 더 불리해집니다."

"아니, 그렇다고 제가 안 한 짓을 했다고 거짓말로 자백을 하란 말입니까? 변호사님도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믿고 안 믿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떤 것이 윤주 씨에게 더 유리한 지 그 법률적인 조언을 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죄송한데 혹시 제가 더 많은 돈을 들여서 큰 법률 사무소에서 더 많은 변호사를 고용했어도 같은 조언을 받았을까요?"

"그야 모르지요! 하지만 윤주 씨 건은 워낙 증거가 명확해서 어떤 변호사가 와도 다툼의 소지가 많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형량을 좀 더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윤주 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무죄를 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와.. 미치겠네! 나는 결백하단 말이에요! 저는 안 그랬어요!"

윤주가 이마를 책상에 꽝 소리가 나도록 박는다. 교도관이 일어서서 제지를 하려다가 윤주가 고개를 박은채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도로 다시 의자에 주저앉는다.

윤주가 진정하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양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억울하고 답답하시더라도 현명하게 판단을 하셔야 합니다. 계속 부인하시면 더 큰 형량을 받게 됩니다.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 살인이면 최소 20년 실형입니다. 차라리 우발적이었다고 시인을 하고 반성한다고 하면 정상을 참작해서 10년이나 15년으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달 전-


'딩동딩동'

휴일 아침 달콤한 늦잠을 자고 있던 윤주는 느닷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투덜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야? 일요일 아침부터 누구야?"라고 혼잣말을 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8시 20분이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현관문을 열자 가죽점퍼를 입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 윤주가 흠칫 놀라서

"누구시죠?.."라고 더듬대며 묻자 그중 한 남자가 투명한 비닐로 코팅이 된 신분증을 보여주며

"용산서 강력계 추진원 형삽니다. 강윤주 씨 되시죠?"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잠시 들어가서 몇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들어오세요."

윤주가 한 발 물러서자 두 사람이 들어와서 거실을 한 번 쓱 둘러본 후 소파에 나란히 앉는다.

"차라도?.."

윤주가 주방 쪽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자

"아니 괜찮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여쭙겠습니다. 좀 앉으시지요!"

추 형사가 차 접대 제의를 사양하며 수첩과 볼펜을 꺼내고 다른 한 명은 시종일관 아무 말 없이 매서운 시선으로 윤주를 노려보기만 한다. TV를 마주 보고 있는 작은 2인용 소파에 앉을자리가 더 없어서 윤주는 식탁의 의자를 가져다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는다.

"어젯밤 10시와 자정 사이에 어디서 무얼 하셨습니까?"

"아니, 무엇 때문인지 말씀을 하셔야지 형사라고 무작정 막무가내로 이래도 되는 겁니까?"

윤주가 약간 격앙된 어조로 항의를 한다.

"알겠습니다. 아직 참고인이라서 굳이 미란다 고지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지금 서선옥 씨 사망 사건과 관련해서 주변 인물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요? 선옥이가 죽었어요?"

윤주는 놀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어떡하다가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지금 가 볼 수는 없나요?"

"그건 안됩니다. 윤주 씨는 일단 용의자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심문 결과에 따라서 체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실대로 신중하게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진술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거부하거나 거짓 진술을 하시면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됩니다."

"용의자요? 그럼 선옥이 살해당했다는 겁니까?"

"어허! 질문은 저희가 합니다. 묻는 말에 답이나 하세요!"

그동안 말이 없던 다른 형사가 엄한 어조로 한 마디 하며 윽박지른다. 그 서슬에 주눅이 든 윤주가 입을 다문다.

"다시 묻겠습니다. 어젯밤 10시에서 자정 사이에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그야, 선옥이랑 같이 있었지요."

"어디에서요?"

"선옥이 집에서요."

"무얼 하셨지요?"

"..."

"대답하세요. 진술 거부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섹스하셨지요?"

"그걸 어떻게?..."

"다 압니다. 여자가 변사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질 검사입니다.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어요. 윤주 씨 DNA 검사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

대답 없이 윤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 없던 형사가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내며 일어서더니

"입 벌리세요."라고 한다.

윤주가 입을 벌리자 봉지 안에서 면봉을 꺼내 윤주의 입 안과 혀 아래쪽을 문지른 후 작은 플라스틱 통에 넣는다.

"정확하게 언제 선옥 씨 집에 들어가서 언제 나왔습니까?"

"글쎄요, 영화 보고 저녁 먹고 들어갔으니까 9시쯤 되었으려나... 그러고 한참 있다가 집에 오니까 자정이 넘었어요."

"중간에 어디 들른 곳은 없고요?"

"예. 집 앞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 사고 바로 집으로 왔어요."

"차를 운전하고 왔나요?"

"예."

"술도 먹었다며?"

"예. 조금.."

윤주가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자

"아아. 그건 됐고.. 그럼 적어도 11시 반까지는 선옥 씨 집에 있었겠네? 거기서 여기까지 차로 30분이 안 걸리니까!"

"예."

"안 되겠네요! 아무래도 서로 좀 가셔야겠어요. 적어도 DNA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어!"

"영장도 없이요?"

윤주가 항변을 하자 추 형사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살짝 흘리며

"임의동행이야. 거부해도 돼. 하지만 그러면 혐의를 시인하는 격이 되니까 떳떳하다면 정식 영장 청구해서 체포하기 전에 협조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알았어요. 옷 좀 입고요."

윤주가 순순히 옷을 걸치고 일어선다. 두 형사가 윤주 좌 우에 서서 따라나선다. 수갑이나 밧줄로 묶지만 않았지 윤주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감시하는 의도와 형국이 완연하다.

윤주가 사는 다세대 원룸 입구에 형사들이 타고 온 검은색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추 형사가 운전석에 오르고 말 없는 형사가 윤주를 뒷좌석에 태우고 자신이 옆에 바짝 다가앉은 후 차 문을 닫는다. 차의 대시보드 위에는 동그란 탈착식 붉은 경광등이 있었지만 켜서 지붕에 달지는 않고 일반 차량처럼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용산경찰서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0층 정도 되는 웅장한 장방형 흰색 타일 건물 앞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세 사람은 3층 강력계로 들어갔다.

출입문을 열고 여러 형사들과 민원인, 범죄자가 뒤섞여 있는 분주한 사무실을 지나 독립된 작은 방인 취조실에 윤주를 데리고 들어간 추 형사는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손에 들고 들어 온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여긴 다 녹화가 되고 있으니까 신중하게 대답하세요!

이름, 생년월일, 주소?"

"강윤주, 1988년 12월 3일, 용산구 동자동 18번지 강변빌라 102호요."

"서선옥 씨와 무슨 관계입니까?"

"여자친구입니다."

"그런데 왜 선옥 씨 생명보험 수익자가 강윤주 씨로 되어 있습니까?"

"그건 서로 합의 하에... 제 생명보험은 선옥으로 선옥이 거는 나로.."

"입증할 수 있나요?"

"예. 당장 보험회사에 알아보면..."

"알겠습니다. 서로 친밀할 사이였나 보네요. 사귄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2년 정도.."

"그래도 가족이 아닌 사이에 생명보험 수혜자로 지정하는 경우가 드문데 혹시 강권을 하지는 않았나요?"

"아닙니다. 서로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

"알겠습니다. 아질산나트륨은 왜 샀나요?"

"뭐요? 아질산.. 뭐요? 그게 뭔대요?"

"아니 이렇게 구매기록이 있는데 모른 척 하나? 그게 범행에 사용되었는데도..."

추 형사는 서류 중 한 장을 들어 윤주의 눈앞에 들이민다. 무슨 영수증이다. 윤주의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택배로 주문한 물품 이름에 Sodium Nitrite(Na NO₂)라고 적혀있다.

"이게 뭔대요?"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이거 안 되겠네!

사실대로 말 안 해?"

"정말 몰라요."

"알았어. 더 이상 좋은 말로 안 되겠다.

범행 동기와 범행도구, 정황증거와 알리바이가 모두 너를 지목하는데도 발뺌을 해?

이제 곧 DNA결과만 나오면 너는 빼도 박도 못하니까 알아서 잘 처신해.

서로 피곤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그래. 이 정도면 임의동행 만료가 되기 전에 구속 영장이 나오는데 아무 문제없을 거니까 그리 알고 미리 변호사나 알아봐. 아마 변호사가 와도 내가 말한 대로 수사에 협조하라고 할 거야. 변호사 비용 없으면 국선 요청해!"

양 형사는 좀 화가 난 듯 서류를 챙겨 들고 문을 꽝 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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