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순응하는 이에게 복이 있으라
그의 삶이 순풍에 돛 단 듯 평온하리라
숙명에 맞서는 이에게 축복이 있으라
그의 나날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듯 고단하나
마침내 새 세상을 보게 되리라
19일 - 노예
‘둥, 둥, 둥, 둥'
북이 울린다.
죽은, 아니 죽인 동물의 살 가죽을 찢어서 만든 저 북은 이제 산 사람들의 피를 말리고 근육과 살을 찢어대고 있다.
'둥, 둥, 둥, 둥'
규칙적으로 울리던 북소리의 템포가 갑자기 빨라진다. 그에 따라 원을 그리듯 유연하게 움직이던 노 꾼들의 팔과 상체가 앞 뒤로 출렁이듯이 빨라지고 금세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가 어둡고 좁은 바닥 선실을 가득 채운다. 윤주의 앞에서 노를 젓고 있는 다른 흑인 노예의 검은 등에서는 땀방울이 송송 솟아나서 이내 물줄기가 되어 허리 쪽으로 흐르고 윤주의 이마에서도 땀이 나와서 눈썹을 적시고 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코 끝에 맺혔다가 윤주의 율동에 따라 방울이 되어 연신 앞으로 뚝뚝 떨어진다.
숨도 가쁘지만 팔과 허리의 근육에 젖산이 쌓이면서 통증도 점점 심해진다. 이제는 북소리가 울릴 때마다 매번 있는 힘을 다해서 노를 끌어당겨야 한다. 노에 가해지는 저항이 갈수록 더 크게 느껴지고 젓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은 단순히 윤주 몸의 피로도가 늘어났기 때문 만은 아니다. 윤주의 오른쪽에서 나란히 앉아 같은 노를 젓고 있는 노예 노꾼이 힘을 덜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부러 꾀를 부리는 것인지 실제로 힘이 빠져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럴 때는 채찍을 든 감독이나 북을 치는 고수보다도 옆에서 힘을 쓰지 않는 동료 노꾼이 더 밉고 원망스럽다.
흘끗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그 노꾼도 기진맥진하여 고개를 아래로 푹 처박고 숨을 헐떡이고 간신히 노를 당기고 있다. 당긴다기보다는 움직이는 노에 손을 얹고 끌려다니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그 손을 올려놓을 힘 마저 떨어져 노를 놓치기라도 하면 그는 바로 끌려나가 바닷물에 던져져서 물고기 밥이 되는 신세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집착은 이렇게도 끈질긴 것일까?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뼈와 가죽만 남은 그의 몸이 매일 이어지는 고된 노동을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자명하고 살아있는 나날도 아무런 즐거움과 희망이 없는 고통의 순간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생명줄인 노를 놓지 않는다.
윤주의 입장에서도 그가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는 것이 좋다. 감독들은 노예 노꾼들이 꾀를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힘을 덜 쓰는 자에게 채찍으로 등을 때리는 것은 물론 노꾼들의 심리까지 이용한다.
쇠사슬에 발이 묶여있는 노꾼들은 전투 중이나 풍랑 속에서 배가 침몰하면 절대로 구조를 하지 않고 가라앉는 배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하기 때문에 노 꾼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배를 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장의 지시대로 배가 움직일 수 있도록 힘을 다해 노를 저어야 한다.
또한 평소에도 2인 1조로 노를 젓고 있다가 한 사람이 쓰러지면 그 빈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지 않고 일정 기간 동안 혼자서 노를 젓도록 방치함으로써 그 사람은 2배의 강도로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싫어도 두 사람은 협조할 수밖에 없다.
'만일 내가 꾀를 부려서 옆 사람이 너무 과도한 노동을 하다가 쓰러지면 결국엔 나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이 악랄하고도 '공평한' 시스템은 어떤 감시나 폭력보다도 더 잘 작동해서 노꾼들은 죽기 직전까지 있는 힘을 다해서 노를 저었고 따라서 번거로운 감독의 노고를 들어주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천재들이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옆의 노꾼이 쓰러지기 전에 북소리가 뚝 멈추었다. 동시에 노꾼들은 노를 가슴으로 얼싸안으며 상체를 앞으로 거의 반으로 꺾고 엎어져 숨을 고른다.
감독이 앞 줄에 있는 한 조 두 노예의 쇠사슬을 풀어주자 그들이 선실 밖으로 나가서 나무 물통을 들고 들어와서 표주박에 물을 떠서 앞에서부터 한 명씩 입에 흘려 넣어준다. 땀을 많이 흘려 거의 탈진한 노예들은 한 모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혀를 내밀지만 무조건 한 사람당 한 바가지의 물만 주고 가차 없이 다음 줄로 이동한다.
뒤를 이어 또 한 노예가 바구니에서 거친 호밀 빵을 꺼내서 하나씩 배급한다. 배가 고픈 노예들은 빵을 손으로 받아 들고 허겁지겁 입으로 뜯어먹고, 24줄 맨 뒷 줄까지 물을 배급한 노예가 다시 앞으로 와서 그동안 빵을 다 먹은 노예들에게 물을 한 바가지씩 더 먹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달콤한 휴식시간...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노예들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원래 노예들 간에 대화는 금지되어 있지만 이때만큼은 서로 속삭이며 가만히 웃기도 하고 감독에게 요청하여 밖으로 나가 대소변을 보기도 한다.
감독이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노예들이 말을 했다는 구실로 호되게 채찍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이 때는 감독도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며 노예들의 작은 즐거움을 못 본 체한다. 어쩌면 자신도 계속 감시하기가 귀찮고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이 출입구 계단에 앉아 하얀 밀빵과 크림수프를 먹으며 고수와 농담을 하느라고 물과 빵 배급을 마친 노예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자신들의 식사를 하는데도 그들에게 쇠사슬 채우기를 깜빡 잊고 있다.
물을 마시며 빵을 먹던 두 노예는 서로 눈짓을 나누더니 갑자기 쇠사슬을 들고일어나 감독과 고수의 뒤로 달려들어 각자 한 사람씩, 두 사람의 목을 사슬로 감아 조르기 시작한다. 감독과 고수가 손과 발을 버둥거리며 저항을 해보지만 가까이에 있는 다른 노예가 감독의 허리에 찬 단도를 빼내어 두 사람의 가슴을 찌르자 비명 소리도 못 내고 둘 다 피를 흘리며 축 늘어진다.
배급담당 노예가 재빨리 감독의 허리춤에 있던 열쇠를 벗겨내서 노꾼들의 쇠사슬을 묶고 있던 자물쇠를 풀어준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노예들은 풀려나자마자 입구 쪽으로 신속히 움직인다. 아마 앞 줄에 있던 노꾼들은 이미 모의를 하고 계획을 세웠던 듯 움직임에 거침이 없다.
이상한 소음에 낌새를 차렸는지 선원 두 명이 바닥 선실로 들어오는 계단을 내려온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노예들이 그들의 입을 막고 단도로 처리한다. 이제 무장한 노예가 3명이고 비무장이지만 풀려난 노예가 95명이다. 칼을 든 노예가 앞장서서 모두가 살금살금 계단을 밟고 밖으로 나가 근처에 있는 선원들부터 죽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상황을 파악한 선장과 선원들이 칼을 빼들고 달려왔지만 이미 상당한 무장을 하고 수적으로 우세한 노예들을 이길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양 쪽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곧 대세는 기울어 선원들이 항복을 하고 노예들은 살아남은 선장과 선원들을 바닥 선실에 감금했다.
다행히 인근의 다른 배들은 돛을 올리고 항구로 돌아가느라고 바빠서 이 배의 소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항해술을 모르는 노예들은 선장과 항해사를 끌어내서 조타실에 밀어 넣었다.
"항구 반대 방향으로 조종해!"
반란을 주도했던 배급담당 노예가 선장에게 명령했다.
"그럼 다른 배들이 눈치를 채고 금방 쫓아올 텐데... 그러면 너희들은 다 극형이야."
선장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오히려 호통을 친다.
"시끄러워! 시키는 대로만 해!"
대장 노예가 소리를 치며 들고 있던 긴 칼의 끝을 선장의 목에 대고 위협한다. 선장에게서 빼앗은 칼이다.
"잘 생각해 봐. 도망갈 길이 없어.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없던 일로 해주마!"
선장이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버티자
"그럴 거면 시작하지도 않았어. 우린 이미 죽을 각오를 했으니까 너야말로 살고 싶으면 우리가 시키는 데로 해! 잘 생각해서 결정해. 당장 죽을래? 아니면 우리랑 같이 탈출할래? 성공하면 네 목숨은 보장하마!"
순간 선장의 눈 빛이 흔들린다. 이것을 본 대장 노예가
"자, 조타기 잡아."라고 명령한다.
"혼자로는 안 돼! 항해사랑 돛을 다룰 선원이 더 필요해!"
"몇 명?"
"갑판장과 니콜라이, 세르게이, 마르크..."
"아 그만하면 됐어. 어이 네 사람만 더 데려 와.!"
그러자 곁에 있던 노예가 바닥 선실로 가서 선장이 지명한 선원들을 데리고 나온다.
"일단 내 지시를 따르고 협조를 해라!"
항해사와 다른 네 사람에게 선장이 말을 하자 갑판장이 항변한다.
"선상 반란을 도우면 우리도 같이 처벌을 받을 텐데요?..."
"너희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만 해! 내가 책임은 질 테니까... 당장 죽고 싶지 않거든..."
선장이 단호하게 말을 하자 다른 선원들이 자신의 근무위치로 간다. 다른 일부 노예들도 선원들을 따라가서 그들이 하는 일을 돕고 나머지 노예들은 다시 바닥 선실로 내려가서 갇혀있던 선원들과 함께 노를 잡는다.
선장의 지시에 따라 돛이 올려지고 조타수가 조타기를 힘껏 돌려 배의 방향타를 꺾는다.
동시에 바닥선실에서도 북소리 울린다. 이제는 노예들이 신이 나서 힘껏 노를 젓기 시작한다. 게으름을 부리는 선원들의 등에 채찍이 사정없이 파고든다.
다행히 항구와 반대방향으로 순풍이라 배는 빠른 속도로 항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 눈치를 챈 다른 배들이 방향을 돌려 쫓아오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윤주가 탄 배는 속도를 높여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바다까지 나왔고 추격하는 배와의 거리도 점점 멀어진다.
얼마 후 추격하는 배들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대장 노예는 배를 카르타고 북단 해안을 끼고 서쪽으로 항해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선장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카르타고 서쪽은 바다의 끝이야. 더 못 가!"라고 한다.
"아니, 그 너머에 애틀랜타라고 하는 큰 섬이 있다고 들었어."
"그건 전설일 뿐이야. 아무도 거기에 가 본 사람은 없어."
"그래도 가야 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거야."
그 말에 부근에 있던 다른 노예들도 동요하며 술렁거린다. 그것을 본 선장은 기가 살아서
"그리고 설령 섬이 있다고 해도 너무 멀어. 도저히 못 가! 노꾼들이 지쳐!"라고 하자
노예 대장은 "알고 있어. 일단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데 까지 가!"라고 고함을 쳐서 선장의 기를 꺾으려 한다.
"무슨 계획이 있는 거야?"
선장이 묻자
"물론 있지! 하지만 넌 아직 몰라도 돼!"라고 대장 노예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선장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배의 진행 방향을 살핀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아스라이 육지가 보인다.
"이집트나 카르타고다!"
선장이 손가락으로 수평선을 가리키며 노예 대장에게 말한다.
"가장 가까운 항구에 접안시켜!"
"어쩌려고?"
"아직 몰라도 된다니까! 일단 배를 대고 나서 어떻게 할지 알려주마!"라고 내뱉듯이 말을 하고 갑판으로 나간다. 그는 조타실 앞에 서서 두 손을 나팔 모양을 만든 후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노꾼들은 전원 집합하시오."
그 말을 듣고 이내 노예들이 모여들자
"이제 이 배는 이집트 항구에 도달할 거요. 거기서 저 선원들을 놓아주고 우리는 서쪽으로 더 갈 예정이오. 동행할 사람은 동행하고 내릴 사람은 내려도 좋소."
노예들이 왁자지껄 하게 질문을 한다. 대장이
"아아. 한 사람씩!'이라며 한 노예를 지목하자
"놓아주다니? 그냥 풀어준다는 거요? 저 놈들을?"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한 노예가 묻는다.
대장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론 아니지. 페르시아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서 우리 탈출 자금을 마련할 거요."
그 말에 노예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다. 또 다른 노예가
"정말 서쪽으로 갈 거요? 바다 끝 낭떠러지로?"라고 묻자
"아니, 저 놈들에게는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북쪽으로 돌아갈 거요. 만일에 있을 추격대에 혼선을 주자는 의도지!"
"북쪽으로 간다고요? 다시 잡히면 어쩌려고?"
"그래도 가서 가족을 찾거나 복수를 하거나 이제 다들 자유니까 하고 싶은데로 하면 되는 거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기는 어디든 다 마찬가지요. 도망친 노예를 반겨줄 곳은 없으니까 그래도 고향으로 가면 비빌 언덕이라도 있을 것이 아니겠소?"
그 말에 노예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의 분위기다.
"우리끼리 북쪽으로 항해를 할 수 있겠나요?"
"여기 선원 출신 노예도 있고 오면서 좀 눈대중으로 익힌 것도 있으니 가능할 거요. 다행히 파도가 잔잔하고 날씨도 좋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자 거의 항구에 다 왔소! 어떻소? 마침내 성공했소!"
그러자 노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한다.
돛을 내려 배를 항구 가까운 곳에 멈추고 닻을 내려 고정을 시킨 후 노예 대장은 다른 노예 몇 명을 대동한 채 작은 구명보트를 저어 항구로 떠난다.
한참 지난 후 그는 페르시아 상인 2명을 대동하고 배로 돌아왔다.
상인들은 선원들의 머리 수와 상태를 본 후 흥정을 한다.
"이집트 금화 60개!"
"무슨 소리, 선장과 몇몇 부자 선원들은 노예로 팔지 않고 인질로 잡고 몸값을 받을 수도 있소. 100개 주시오."
"90개"
"95개."
"좋소."
흥정이 끝나자 상인들이 선원들을 결박하여 보트에 태운다. 선장이 노예 대장에게 항의한다.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소?"
그러자 대장 노예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언제 풀어준다고 했나? 목숨은 살려준다고 했지! 그동안 우리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그 말에 선장과 선원들은 대꾸도 못하고 끌려간다.
그러자 윤주가 나서서
"잠깐! 나도 가겠소."라고 하자
노예 대장이
"여기에서 하선을 하겠다는 거요? 여긴 비잔틴 제국과 교류가 많아서 잡혀갈 위험이 큰데?"
"아니, 나도 노예로 팔아달라는 거요!"
"뭐라고? 그 노예 살이를 다시 하겠다고? 이렇게 힘들게 탈출을 하고선?"
"그렇소. 설명을 하자면 말이 길어질 것 같으니 나를 그냥 내려주시오."
"고향의 처 자식에게 가고 싶지 않소?"
"이미 다 죽었소. 고향도 다 파괴되어서 갈 곳도 없소."
대장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알겠소. 원하는 데로 하시오. 당신 자유니까. 단, 당신 몸값은 받지 않겠소. 그러면 팔려가도 고생은 좀 덜 할 거요!"
"고맙소. 다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오."
인사를 마치자 윤주는 상인들을 따라 보트에 오른다.
상인들도 윤주가 이해가 안 가는지 보트를 타고 항구로 가면서 윤주에게 묻는다.
"아니, 애써 탈출을 해 놓고 다시 노예선을 타겠다는 이유가 뭐요?"
"난 이제 지쳤소. 그동안 너무나 끔찍한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았소. 저들은 십중팔구 다시 잡혀서 반란과 도주죄로 고문과 극형을 받게 될 거요. 나는 싫소. 어차피 돌아갈 가족이나 고향도 없고 객지에서 헤매다가 굶어 죽기도 싫소. 차라리 그냥 노예로 살다가 죽는 것이 더 좋소!"
상인들은 대꾸할 말이 없어 침묵을 지키고 말을 마친 윤주는 뱃전에서 갈라지는 물결과 파도를 보며 지난 2년간의 고초를 회상한다.
2년 전 그때 운명의 그날에 성 안 성당에서 '땡땡땡땡" 급하게 종이 울리고 있었다. 주일도 아닌 낮 시간에 빠르게 치는 종은 화재나 외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가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들판에서 자루가 긴 낫을 좌우로 낮게 휘둘러 밀을 수확하고 있던 윤주는 일손을 놓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의 중앙에 위치한 성당 앞 광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고 성주의 대리인이 단 위에서 큰 소리로 포고를 외치고 있었다.
"야만인들이 동쪽에서 쳐들어 오고 있다는 소식이오. 모든 주민들은 즉시 성 안으로 대피하고 18세 이상 남자들은 무장을 하고 성문 앞에서 영주의 명령에 대기하시오."
어떤 사람들은 황망하게 피난 준비를 하러 달려가고 어떤 사람들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질문한다.
"동쪽 야만인이라면 소문에 듣던 그 지옥의 군대 말인가요?"
"지옥의 군대는 아니라도 작년에 다뉴브 강 동쪽 키르크 공국의 성들을 유린하고 주민들을 몰살시킨 그 야만족인 것만은 분명하오. 지금 빠른 속도로 강을 건너서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소."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군대라고 하던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여인들이 벌써 울상이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기마 기사단과 튼튼한 성이 있으니 걱정 말고 지시에 따르라는 성주의 명령이니 동요하지 마시오."
대리인이 소리를 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로 수군거린다.
"세상에 종말이 온 거야! 묵시록에 나오는 그 지옥의 군대가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오는 거야!"
"그럼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건가? 그렇다면 맞서지 말고 회계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소문도 못 들었어? 대항하면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버린다잖아?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가리지 않고!"
"그렇다면 항복을 하면?..."
"겨우 목숨만 건지고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남자들은 노예로 끌려가겠지! 지옥의 군대는 무슨 지옥의 군대야! 그냥 무자비한 야만족이야. 맞서서 싸워야 해!"
"그래 그래 얼른 처 자식들 대피시키고 싸우러 가세!"
사람들이 각자 집으로 가서 간단한 가재도구를 챙긴 다음 성 안으로 대피하고 성인 남자들은 낫이나 곡괭이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고 성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잠시 후 성주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위풍당당하게 등장한다. 뒤에는 역시 갑옷을 입은 50여 명의 기사단이 두 줄로 따라 나온다. 그 듬직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무기를 치켜들며 환호성을 지른다. 잠시 뜸을 두었다가 성주가 대중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한다.
"친애하는 신민들이여.
저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나 주님의 가호를 받는 우리 기사단 앞에서는 한낱 무지 광폭한 야만의 무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성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 인근 성의 기사들과 연합하여 저들을 들판에서 선제 공격할 것이다. 이는 우리 기사단의 강력한 무장과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전술이니 주민들은 기사단의 뒤를 따라 대오를 지어 전진하라. 절대 대오를 흩트리지 말라. 도망가거나 후퇴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처형당할 것이다.
무기가 없는 자는 창을 지급받도록 하라. 가자 우리의 성과 성당과 처 자식을 목숨을 걸고 지키자!"
사람들이 다시 환호성으로 호응하자
신부가 나와서 축도한다.
"주님!
주님의 선한 종들을 저 야만인들의 칼날로부터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저 불신자들을 무찌를 용기와 힘을 주시옵소서.
아울러 무공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영혼을 거두어 주옵시고 비겁한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불을 주시옵소서.
아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아멘!'을 따라 외친 후 성주와 기사단을 따라 성 문 밖으로 행군했다.
들판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인근 성에서 나온 군대와 합류한다. 갈수록 그 숫자는 불어나고 사람들의 사기도 올라갔다.
그러나 잠시 후 사람들은 길 가에 늘어선 끔찍한 광경을 보고 경악한다. 길 양 쪽에는 나무 말뚝이 끝없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꼬치처럼 꽂혀있었다. 말뚝 끝을 창처럼 뾰쪽하게 만든 다음 사람을 항문에서부터 꿰어 입이나 목까지 관통시켜 놓았다. 로마제국의 십자가 형이나 중세의 마녀 고문법이 잔혹하다고 하나 이 모습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저항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 적군의 사기를 꺾으려고 몽골군이 흔히 사용하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지나치는 마을이나 성의 집들은 모두 불타서 형체도 없고 벌거벗은 여인들과 아이들의 시체도 사방에 흩어져 있다. 까마귀와 개들이 시체를 뜯어먹고 있다가 사람들이 위협을 하자 마지못해 주춤주춤 흩어진다.
"차라리 항복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수군거리며 겁을 먹고 동요하는 사람들도 있고 오히려 분노에 전의를 불태우는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들판 저 멀리에서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개별 형체는 보이지 않는 무리로 숫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빠르게 다가와서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활을 쏘아댔다. 화살이 기사단과 사람들이 있는 곳에 떨어졌지만 튼튼한 갑옷을 뚫지는 못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말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단이 말에 박차를 가하여 추격하기 시작한다. 농민군들도 의외로 약한 야만인들 군대의 모습을 보고 사기백배하여 소리를 지르며 달음박질로 쫓아가기 시작했다. 거의 누가 먼저 무공을 세울지를 경쟁하는 시합이 벌어진 것 같았다.
야만인들은 몸집도 왜소하고 무장도 가벼웠으며 말도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혹독한 겨울을 견딜 만큼 강인했고 무사들의 무장이 가벼운 만큼 지구력과 기동성이 뛰어났다. 그래서 어느 정도 추격전이 이어지자 뒤쫓아가던 말들과 사람들은 점점 지치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몽골인들은 어느 순간에 말머리를 돌려 기사단에게 돌진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활을 쏘지 않고 창으로 공격했는데 그들의 창은 찌르는 것보다는 창 끝에 달린 갈고리로 기사들의 갑옷을 걸어 잡아당겨서 말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두터운 갑옷으로 몸을 가린 기사들이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말 아래로 떨어지면 몽골인들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땅 위에 뒤집어진 거북처럼 버둥대는 기사들을 도끼나 둔한 무기로 갑옷 위를 타격하여 살육했다. 멀리서 구보로 뒤 쫓아오던 농민군들도 거리가 벌어져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기사단을 궤멸시킨 몽골인들은 그대로 말을 몰아 농민군 대열의 전후좌우를 말로 휘저으며 유린했다. 거리가 멀면 활을 쏘고 가까우면 창으로 찌르거나 칼로 베고 아주 근접하면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그 민첩하고 숙련된 전술 앞에서 전투경험과 무장이 없는 농민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윤주에게도 몽골 전사 하나가 달려들었다. 손에 든 창을 치켜들어 겨누었으나 기수에게는 미치지도 못하고 말발굽에 채어 뒤로 벌렁 자빠졌다. 덕분에 전사가 휘두르는 칼날은 윤주의 가슴을 스치고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극도의 흥분과 긴장 때문에 피로와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윤주는 그저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으로 아무런 판단이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중에 앞을 가로막고 걸리는 것은 그것이 풀이든 나무등걸이든 시체든 아군이든 밀치고 헤치고 뿌리치면서 달렸다.
다른 살아남은 기사와 보병들도 적에게 맞서기보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성으로 도망가기 바빴고 몽골인들은 사냥감을 쫓듯이 끝까지 추격하여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성 안까지 무사히 도망을 친 사람은 윤주를 포함해서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들어오고 성문을 닫아걸자 몽골인들은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다. 초원의 기동전술에 익숙한 몽골군은 공성전에는 취약했다. 대신에 봉쇄전에 돌입했다. 성 주변을 에워싸고 출입을 봉쇄하는 한편 성 안의 사람들이 보란 듯이 바로 앞에서 포로로 잡힌 주민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살해했다.
산채로 불에 태우거나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고 물속에 넣어 익사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말 꼬리에 묶고 거친 땅바닥에 끌고 다니기도 하고
사지를 각각 밧줄로 묶은 후 다른 끝을 말안장에 묶어 끌고 사방으로 달려 몸이 네 조각으로 찢어지게 하고
기둥에 매단 다음 배를 가르고 내장을 조금씩 빼내거나 태아를 꺼내기도 하고
신체를 목 위로만 남겨놓고 땅 속에 묻어두거나 생매장을 하고
머리에 말벌 떼가 가득 찬 망태를 뒤집어 씌워 무수히 벌에 쏘이게 하고
눈 코 귀 혀 손 발가락 마디마디 등 신체를 하나씩 천천히 절단하기도 했다.
어느 죽음 하나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끔찍하고 긴 고통을 수반했다.
성 안의 사람들은 치를 떨며 그 광경을 보고 그 비명을 밤낮으로 쉼 없이 들어야 했다.
고문 끝에 죽은 시체는 조각조각을 돌처럼 공성기에 달아서 성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들을 왜 지옥에서 온 군대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투석기에서 날아드는 돌은 성벽을 허물고 찢어진 시체 조각은 사람들의 저항의지를 무너뜨렸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겁에 질린 사람들의 여론은 항복하자는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성주 역시 더 싸울 용기도 힘도 군사력도 없었다.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자 몽골인들은 성벽과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여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은 노예로 팔고 몸 값을 받을 수 없는 노약자나 유아는 거리낌 없이 살해했다.
팔기 전에 기술이나 전투력 등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은 자신들의 군대나 병참에 편입시키고 젊은 여자들은 강간하고 남자들은 노동에 동원했으며 옷감이나 귀금속 등 가치가 나가는 것들은 전리품으로 나누어 가졌다.
나름 군율이 엄격하여 개인적 약탈은 거의 없었고 전투가 끝난 후 전체를 수거한 다음에 공평하게 분배했다. 군율을 어긴 자들은 죽이거나 결사대에 편성하여 위험한 임무를 맡겼기 때문에 전투 전이나 후에도 위계질서가 분명했고 상급자라고 해서 예외가 없었고 항상 전장에서 병사들과 동고동락했다.
이러한 것들이 심리전을 포함한 유연한 병법과 더불어 몽골군이 세계를 정복한 비결이었다.
그리하여 윤주는 광산에서 한동안 노예노동을 하다가 얼마 후 흑해에 항구를 둔 노예선의 노꾼이 되었던 것이다.
이집트 항구에 도착한 페르시아 상인들은 선장과 몇몇 부유한 선원들은 몸 값을 받기 위해서 감금해 두고 나머지 선원들을 노예시장에 팔아넘겼다. 다행히 윤주는 자유노예로 몸 값이나 쇠사슬 없는 노꾼이 되었다. 즐거울 것도 희망도 없이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에 윤주는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세속에서의 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한 신은 결국 그의 영혼마저도 구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