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막 - 어떤 평등

18일 - 다 같이

by 이윤수

아침 산책은 언제나 신선하고 즐겁다.

윤주는 여느 때처럼 팔을 저으며 중랑천변 시민공원 산책로를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없어 보인다. 스쳐 지나가면서 자세히 보니까 사람들의 머리 스타일과 옷, 신발이 모두 비슷비슷하고 심지어 얼굴 모양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잘 안 되며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이 안 된다.

머리칼은 모두 짙은 갈색이고 여자의 단발보다는 짧으며 남자의 상고머리보다는 길다. 옆과 뒤는 귀와 목덜미를 살짝 덮고 윗 머리는 이마를 반쯤 가려서 눈썹에 미치지 않는다. 옷은 대부분 연회색의 매끄러운 무채색 민무늬 폴리에스터 원단으로 만든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다. 하나같이 팔목과 발목을 덮는 길이로 활동에 편안하도록 너무 꼭 끼이지도 않고 너무 헐렁하지도 않게 적당히 몸에 맞는다. 겉감의 안으로 접혀 들어가서 조금 벌어진 입구만 살짝 겉으로 보이는 주머니가 상 하의 좌우에 하나씩 있고 다른 장식이나 무늬는 없다.

가장 이상한 것은 사람들의 이목구비와 표정이 가면을 쓴 것처럼 천편일률적이고 변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실제로 누구나 반 투명한 가면을 쓰고 있다!

"뭘 봐!"

윤주의 시선을 느꼈는지 조깅을 하며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던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이 안 되는 중성적인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윤주가 움찔하여 시선을 돌리고 앞을 주시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그 사람이 '카아악'하고 목에서 가래를 끌어올린 후 '팻' 소리가 나도록 침을 바닥에 뱉으며

"씨발, 아침부터 재수 없게..."라고 윤주가 다 들리도록 중얼거린다.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막히고 기분이 나빠진 윤주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그 자도 뛰어가기를 멈추고 돌아서며

"뭐야? 한 번 해보자는 거야?"라고 도전적인 어조로 외친다.

맞상대를 했다가는 아무래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윤주는 참기로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하지만 분이 안 풀려서

"에이, 똥 밟은 셈 치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자는

"뭐? 똥? 이게... 지가 아침부터 사람을 기분 나쁘게 째려봐 놓고 사과는커녕.. 뭐? 또옹?"이라고 씩씩거리며 윤주를 쫓아온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자의 반응이 지나치기는 했지만 윤주가 처음에 잘못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미안합니다!"라고 사과를 하고 도망치듯이 잰걸음으로 그 자로부터 멀어졌다. 그러자 그 사람은 쫓아오기를 멈추고 잠시 윤주의 뒷모습을 꼬나보다가 다시 제 가던 방향으로 달려간다.

한숨을 돌린 윤주는 산책로 옆의 벤치에 앉아 자신의 옷과 신발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무채색 옷에 흰 운동화 차림이다. 얼굴과 머리를 만져 보니 역시 비슷한 스타일에 얇은 실리콘 가면을 쓰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윤주는 벤치에서 일어나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길로 올라갔다. 소량의 물이 흐르는 시냇물을 가운데 두고 천변을 복토하고 포장하여 산책로를 만들었지만 홍수 방지를 위해 양안에 쌓아놓은 제방의 높이 차이 때문에 차와 보행자가 다니는 도로로 나가려면 경사가 있는 진입로를 올라가야 했다.

교량 옆에 조성된 진출입로를 올라가니 바로 스타박스 커피숍이 보인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비슷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서빙을 하고 있다.

객장에서도 보이도록 개방되어 있는 작은 주방의 칸막이에 TV가 걸려있고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정부는 오늘 화장품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불법 제조와 밀거래 사범은 물론 지하 암시장에서 구매하는 소비자 역시 엄중하게 단속 처벌하기로 했습니다. "

비슷한 복장과 용모를 한 아나운서가 역시 비슷한 중성 톤의 목소리로 속보를 전하고 있다.

"다음 뉴스입니다. 어제 국회에서는 아바타 개성표현 금지법 제정을 놓고 여야의 논쟁이 벌어져 법안 통과 여부가 불투명해졌습니다. 집권 진보 여당 의원 30명이 공동발의한 이 법안의 대표 발의자인 김시리 의원의 기조연설을 들어보겠습니다.

'1년 전 우리 젠더당이 주도하여 제정하고 정부가 적극 추진한 완전평등법이 국민 여러분의 지지와 협조 덕분에 이제 우리 사회 전반에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 국민이 표준화된 외양을 가지게 됨으로써 예전처럼 겉모습에 신경을 쓰지 않고 편안하고 평등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인류의 고질적 문제이자 숙원과제였던 각종 차별 즉 성별, 인종별, 지역별, 연령별, 학벌, 신분에 따른 고용, 임금, 직군, 처우 등에 있어서의 불평등을 해소한 역사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를 정의롭고 공정한 신세계로 만들 기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양성평등과 외모차별 근절은 자리를 잡았으나 사이버 상에서는 여전히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고 피부색이나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구태가 만연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인기가 있는 캐릭터를 선호하여 특혜를 주거나 따돌림을 받는 현상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별개의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은연중에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평등법의 영구적인 정착을 위해서 사이버 아바타에도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일률적인 외모 도입을 의무화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보수 야당에서는 가상세계에서마저 개성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면 개인의 자유가 지나치게 제한되고 국민의 저항과 불만이 표출될 수 있으므로 사이버 공간에서만이라도 숨통을 터 주어야 한다며 법 제정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럼 관련 전문가를 모시고 사이버 상 개성 표현이 과연 학습효과로 현실에 불평등을 전파하는지 아니면 욕구에 대한 완충작용으로 현실을 안정시키는지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뉴스의 내용이 생소하여 윤주는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아니, 화장품 사용이 불법인가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퉁명스럽게

"그럼 예쁘게 보이게 꾸며서 무얼 하려고요?"

"예쁘고 멋있어 보이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의 본능이 아닌가요?"

"본능? 이 사람이 아직도 남성 우월주의 사상을 다 벗지 못했나 보네! 그건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거야. 오래전부터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여자들을 노리갯감 정도로 가지고 놀려고 세뇌를 시키고 그렇게 사회제도를 만든 거야!"

"왜, 여자들도 젊고 잘 생긴 남자를 좋아하지 않나요?"

"그건..."

그때 주방 쪽에서 '쨍그랑'하고 유리가 바닥에 떨어져서 깨지는 소리가 난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한 손님이 커피 잔을 집어던지면서 종업원에게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다.

"뭐야, 커피가 내 옷에 튀었잖아! 이거 어떡할 거야? 당장 사장 나오라 그래!"

"손님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아, 필요 없어. 이거 세탁비와 위자료 당장 변상하고... 또 무엇보다도 너 같이 자격 없고 못 되어먹은 직원은 짤라버려야 해!"라며 펄펄 뛰는 손님을 매니저가 나와서 진정시킨다.

"아.. 손님, 진정하시고.."

소동이 잠시 가라앉자 윤주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저기 보세요. 사람들이 가면 뒤에 숨어 있으니까 너무 쉽게 감정 표현을 하고 있지 않나요? 마치 얌전한 사람도 운전대를 잡으면 거칠어지고 사적으로 만나면 예의를 지키다가도 인터넷에서는 그 익명성 때문에 근거 없이 상대방을 비방하며 거칠고 저속한 댓글을 거침없이 다는 것처럼요!

결국 개성이 없으면 인격도 없는 게 아닌가요? "

"어? 이 사람 안 되겠네! 당신 여성 차별, 남성 우월주의자네!"

"그게 아니라, 전 사실을..."

윤주가 항변을 하려고 하자 그 사람은 말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구 기둥에 있는 빨간 비상버튼을 누른다. 버턴 밑에는 '범죄신고용 직통전화'라는 안내표지판이 붙어있다.

'뚜뚜뚜'하는 발신음이 나더니

"예 중랑경찰서 상황실입니다."라는 소리가 버튼 아래 동그랗게 뚫린 구멍 안에 있는 스피커에서 울려 나온다.

"여기 평등법 위반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구멍에 대고 대답을 하자

"알겠습니다. 현장을 차단하겠습니다. 인근 순찰차가 3분 이내에 도착할 예정입니다."라는 안내가 나오고 '위이잉'하는 소음을 내면서 출입문의 방범셔터가 순식간에 내려온다. 이제 아무도 커피숍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윤주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잠시 후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관 두 명이 방범셔터를 열고 들어와서 다짜고짜 윤주를 연행한다.

경찰차 뒷좌석에 태워진 윤주는 바로 중랑 경찰서 유치장 철창 안에 갇혔다. 담당 경찰은 심문도 하지 않고 현장 CCTV만 돌려보고 있다.

윤주가 철창 안에서 항의한다.

"여보세요. 여기 모두 꼭 같이 생겼고 목소리도 비슷한데 신분 확인도 하고 전후 사정을 들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담당 경찰이 윤주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가면을 쓰고 있으면 겉으로는 목소리도 용모도 같아 보이지만 CCTV로 여기 시스템으로 돌려보면 신분이 바로 나와. 당신이 그런 것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신, 강윤주, 남자, 28세, 중랑구 면목길 34 202호, 맞지?"

윤주는 입이 딱 벌어진다.

"예."

"어디 보자! 이거 가면을 벗지도 않았고 신분을 노출하지도 않았네.. 동종 전과도 없고...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좀 기다려보세요! 모르긴 해도 훈방이나 기소유예 나올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듣고 윤주는 좀 안심하고 유치장 안 쪽으로 가서 벽 쪽에 쭈그리고 앉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수감자가

"평등법 위반?"이라고 묻는다.

"예."

윤주가 대답을 하자 그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남자?"라고 묻는다.

"예."

윤주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하자

"평등법에 불만이 많은가 보지?"

"불만이라기 보단 좀 자연스럽지가 못해서... 이해도 잘 안 되고..."

"그래? 그럼 한 번 뒤집어 볼 생각은 없나?"

"어떻게요?"

"생각 있어?"

"글쎄요..."

"알았어. 이따가 나가면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어... 그러죠 뭐!"

윤주가 어정쩡하게 대답하자 그 사람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고 앉아서 처분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얼마 후 경찰의 예견대로 윤주는 감찰관으로부터 평등법에 대한 설명과 재범 방지에 대한 주의사항을 듣고 훈방이 되어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데 아까 그 사람이 뒤에서 윤주를 따라붙어서 말을 건다.

"형씨, 내가 좋은 데 한 번 소개해 줄 테니 가 볼 텐가?"

"또 한 번 걸리면 진짜 감빵이라던데..."

"아, 한 번 가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돼."

"거기가 어딘데요?"

"그건 아직 말할 수 없고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곳이라고만 알면 돼! 어때?"

지금의 상황이 너무 답답한 윤주는 가면을 벗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일단 한 번 가보기로 한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요?"

"아, 괜찮대도 그러네! 일단 따라와 봐!"

그 사람은 경찰서 정문 앞에서 지나가던 택시를 잡고 윤주와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

"한강 시민공원 잠실 나루 입구요!"

그 사람이 행선지를 말하자 택시는 바로 강변도로를 타고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그 사람은 근처 자전거 대여소로 윤주를 데리고 들어간다. 공터에 자전거가 줄지어 서 있고 가운데 위치한 대여소 사무실은 철제 컨테이너를 변형한 가설 건물이었다. 안에는 한 사람이 책상 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바라본다.

그 사람이

"남성용 자전거 3258대!"라고 말한다.

그 말이 무슨 암호인지 대여소 사람은 자전거를 빌려 주기는 커녕 출입문을 닫고 두 사람을 소파에 앉게 하고 확인 암호를 다시 묻는다.

"이제 자전거도 성별 구분이 없는 거 아시지요?"

"압니다. 그래도 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사람은 정식 회원인가요? 회원번호가 뭡니까?"

"아직 없습니다. 가입 예정입니다."

"그럼 여기 비밀을 지키고 위반 시 벌을 받는다는 서약서에 서명하세요."라며 인쇄된 종이를 한 장 내민다. 윤주가 서명을 하자 대여소 사람은 작은 메모지를 보여준다.

'22일 21시 강변호텔 지하 은하수 홀. 회비 5만 원 출입 암구호 호두 망치'이라고 적혀있다.

"외우세요."

두 사람이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대여소 사람은 메모지와 서약서를 다시 집어넣고 출입문을 연다.

"찾는 자전거가 지금은 없네요.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한 후 의자에 앉아 장부를 들춘다.

두 사람은 강변을 좀 거닐다가 매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택시를 타고 시간에 맞추어 강변 호텔로 갔다.

은하수 홀 입구에는 두 사람이 출입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유치장 사람이 '호두'라고 하면서 5만 원을 내밀며 윤주의 옆구리를 찌른다. 윤주가 신용카드를 내밀자 출입구를 지키던 사람이 '망치'라고 답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자 유치장 사람이

'나중에 갚아"라고 하면서 자기 주머니에서 5만 원을 더 꺼내서 출입구 기도에게 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약간 어두운 조명 아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거나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과연 모두 가면을 벗고 옷도 다양하게 입고 있다.

동행한 사람이 가면을 벗으며 손을 내민다.

"난 철기라고 합니다. 박철기!"

저음의 남자 목소리에 선이 굵은 미남형이다. 윤주도 가면을 벗었다.

"전 강윤주.."

철기가 오랜 벗이나 동지를 만난 듯이 반갑게 두 손으로 윤주가 내미는 손을 꼭 움켜잡았다.

"와. 여긴 정말 사람 사는 곳 같네요. 사람들이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윤주가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한다.

무표정에 기계같이 움직이며 서로 거리를 두고 경계를 하며 까칠하고 사무적인 대화만 하던 바깥사람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화장을 한 여자들도 있고 근육질의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남자도 있다.

"어때요? 정식 가입을 하실 건가요?"

"이거 발각되면 어떻게 되나요?"

"감옥가지요!"

철기가 약간 들떠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물론 있지요! 저기 보세요. 여기 사람들 모두 행복해하는 저 표정을요! 나는 하루를 살아도 이렇게 살아야지 진짜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밖에서 그렇게 기계처럼 재미없이 사는 게 바로 감옥살이 아닌가요?"

윤주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철기가 윤주의 손을 잡아 안 쪽으로 끈다.

"우리 미팅 한 번 합시다. 저기 예쁜 아가씨들이 웃고 있네요!"

"예. 갑시다!"

윤주가 호응하며 오늘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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