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멸시하면
돈 때문에 무시당할 일이 생기고
과거를 무시하면
미래에 뒤통수를 맞을 날이 온다
20일 - 이상
“우리가 우려할 진짜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습네다. 세대를 거치면서 혁명 1세대가 가졌던 열정은 사라지고 이제 혁명은 형식과 구호만 남았습네다. 만일 우리가 항일 무장 투쟁과 반미 해방 전쟁의 기세를 그대로 유지하고만 있다면 아무리 자본주의 퇴폐풍조가 몰려와도 아무 일이 없을 겁니다.”
선옥이 사람들 앞에 서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말을 마치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지도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당 간부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나머지 군중들도 일제히 박수를 치며 “옳소 옳소”라고 환호를 보낸다.
“선옥동무 지적이 타당하오. 이는 지도자 동지가 올해 신년사에서 강조한 ‘혁명정신 계승’의 지도방침과도 부합되는 훌륭한 견해라고 할 수 있소. “
그러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리장이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오늘 총화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네다. 비록 오늘은 불미스러운 일로 이렇게 공개처벌을 받는 반동분자가 우리 마을에서 나왔지만 모두들 혁명과업에 일떠서서 다음에는 영웅칭호를 받는 동무가 나와주기를 바랍니다. “
그러자 인민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된 공개총살 장면을 지켜본 후의 무겁고 두려운 마음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사람들은 더욱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오늘 처형당한 사람들은 남조선 영상물을 몰래 돌려보다가 적발이 된 아직 새파란 18살짜리 철없는 아이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심한 처분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엔 남쪽 영상을 보고 유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남쪽 말투를 쓰는 것도 엄벌을 하는 추세라 아무도 입 밖으로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리장이 당 간부를 모시고 교문 앞에 주차된 승용차까지 가서 배웅하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일어나서 집으로 향했다.
윤주도 선옥이 강단에서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나란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밥은 먹었어?”
윤주의 물음에 선옥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오늘도 점심을 먹은 것 같지 않다.
“얘들은? 집에 먹을 게 좀 남아있나?”
“…”
“휴.. 배급도 안 주면서 자력갱생을 하라니 우리 같이 밭 때기도 비빌 언덕도 없는 힘없는 인민들은 다 굶어 죽으라는 거야 뭐야? 우선 이걸로 장 마당에 가서 먹을 걸 좀 사서 끼니라도 때웁시다. “
윤주가 주머니에서 달러와 위안화 몇 장을 꺼내서 내민다. 선옥은 받을 생각을 않고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어디서 난 돈이에요?”
“응, 오늘 청진에 물품운반을 하고 오다가 빈차에 장사꾼 짐을 좀 싣고 왔지.”
“아니 당 소유 차량을 그렇게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쓰면 되나요?”
또 당과 원칙을 들먹이는 선옥의 말에 윤주는 벌컥 울화가 치민다.
“그럼 다 같이 얼어 죽고 아파 죽고 굶어 죽자고? 그래 그 잘난 당원께서는 어떤 대책이 있는지 한 번 들어나봅시다.”
윤주의 비꼬는 말투에 선옥도 지지 않고 눈을 치켜뜬다.
“이게 다 미제와 그 앞잡이 남조선 반동들의 경제봉쇄 때문이에요. 이제 강군대국의 위업이 달성되면 아무도 우리를 넘보지 못하고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따뜻하게 살 날이 올 거야요. 그러니 그날이 올 때까지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인민들이 당의 지도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복무해야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혁명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처럼 혼자만 살겠다는 그 태도에 자본주의 독소의 싹이 자란단 말입니다.”
“그래.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하니 그만합시다. 그러니 어떡할 거요? 당장 오늘 저녁은? “
“…”
“난 모르겠소. 고발을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구려. 난 내일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오늘 당장 아이의 굶주린 배는 채워야겠소. 아무튼 먼저 들어가구려. 난 장마당에 들렀다가 갈 테니…“
선옥도 아이를 생각하니 더 이상 항변을 못하고 혼자 집으로 향한다.
선옥과 헤어진 윤주는 동네 입구에 공공연하게 내놓고 펼쳐 놓은 좌판들 중에서 쌀과 옥수수를 파는 곳으로 다가갔다. 단속을 해야 할 안전원들은 자릿세를 조금이라도 더 뜯기 위해서 오히려 안내 호객꾼 노릇을 서슴지 않는다. 화폐개혁이 실패한 이후로는 장마당에서 아무도 인민폐를 돈 취급 하지 않는다. 대신 물물교환을 주로 하고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화는 귀한 몸으로 환영받는다. 예전 수해 때 지원받은 ‘대한적십자사’라는 마크가 버젓이 찍힌 쌀 포대를 앞에 놓고 쪼그려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던 한 중년 아주머니에게 윤주가 다가가서 달러를 내밀자 여인은 반색하면서 쌀 포대를 풀어 젖힌다. 하얀 쌀에서 광채가 나오는 듯하다.
“아주바이 많이 드릴께 이리 오시라요.”
“이거 5달러인데 얼마나 주시려오?”
“6킬로 드리겠소. 원래 5킬로가 장마당 시세지만 달러라 내 후하게 쳐 드리는건매.”
주변 다른 상인들은 두 사람의 흥정이 깨지길 잔뜩 기대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윤주도 그 기색을 알고 값을 후려쳐 본다.
“10킬로 주시오. “
상인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되오. 7킬로! 그 이상은 여기 어디서도 아니 되오.”
윤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내밀자 상인은 달러를 하늘에 대고 위조가 아닌지 찬찬히 살핀 후 쌀을 작은 포대에 담아서 저울에 달아보고 한 줌 더했다가 뺐다를 하며 계량을 한다. 저울 추가 조금 기우는 듯했으나 윤주가 채근을 하자 더 덜어내지 않고 기분 좋게 내민다.
귀한 자식 안듯이 소중하게 두 팔로 쌀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윤주의 발걸음은 가볍고 입에서는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집에 오자마자 밥을 지어 아이와 부부는 양껏 배를 채웠다.
세상에 아프고 괴롭고 힘든 일도 많지만 굶주리는 것만큼 사람에게 집요하게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그저 배가 주리고 아픈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참다가도 수시로 몰려오는 먹고 싶은 충동을 누르는 것은 정신적 고문에 가깝다. 그래서 허기를 채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은 미치광이가 된다.
그 고통이 큰 만큼 오랜만에 먹어보는 쌀밥은 된장에 버물린 나물반찬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운 행복이었다.
윤주네 식구가 밥을 다 먹고 막 상을 치우려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격으로 선옥은 얼른 상을 부엌 구석진 곳에 감추고 윤주가
“누가 왔소?”라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응대하며 문 밖으로 나간다.
“나요. 선옥동무 있오?”
대문 앞에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서있다.
“무슨 일로?”
윤주가 꾸벅 인사를 하며 묻는 사이에 그 소리를 듣고 선옥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보위부 호출이오. 따라 나오시오.”
“이 밤에 갑자기 왜?”
“나야 이유를 모르지. 오라면 가야 할 밖에.. “
깡마른 체구에 신경질적인 인상의 위원장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선옥이 나설 차비를 하는 것을 잠시 기다렸다가 앞장서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보위부 분실에 도착한 선옥은 인민복을 입은 낯선 인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서 덜컥 겁이 났다.
“이 분은 안강시 보위부장님이니 묻는 말에 정중히 답 하시오. “
소개를 하는 위원장도 잔뜩 긴장한 표정이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나무 팔걸이의자에 앉은 부장은 선옥에게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고 자기 앞에 서라고 손짓을 한 후 다짜고짜
“오늘 총화 때 동무가 한 발언을 자아비판 해 보시오.”라고 위압적으로 지시한다.
“오늘 총화 때요?”
선옥이 마땅한 오류가 떠오르지 않아서 머뭇거리자
“저 보시오. 자신의 과오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소! 그러고도 당원이라고 할 수 있소?”
선옥은 그래도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서 아무 말을 못 하고 난감하게 부장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자 부장이 곁에 서 있는 인민위원장에게 고개를 돌리고
“오늘 이 동무가 무슨 발언을 했소?”
위원장이 조심스레 대답한다.
“혁명정신이 구호만 남았다고…”
부장이 선옥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옮긴다.
“그래도 모르겠소?”
“그건 초기 혁명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으로…”
선옥의 말을 자르며 부장이 호통을 친다.
“이보시오. 동무. 그건 바로 당이 혁명과업 수행을 제대로 못한다며 지도부를 돌려까고 인민의 불만을 선동하는 것 아니오?”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당 지도원 동지도 타당하다고…”
“그럼 인민들이 보는 앞에서 당원들이 서로 다투며 논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소?”
“…”
부장의 서슬에 선옥이 더 이상 항변을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하릴없이 서 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동무의 당권을 정지하고 즉시 노동교화소에 입소시키겠소. 거기서 본인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상을 개조한 후 심사를 통해서 출당이나 복당을 결정하겠소. 따라 나오라우.”
부장이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선옥도 하는 수 없이 애처롭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눈을 하고 따라나선다.
선옥이 부장의 차 뒷자리에 올라 출발할 무렵, 윤주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이를 재우고 집을 나섰다. 보위부 분실로 오는 길에 차를 탄 선옥과 걸어가던 윤주는 서로 길이 엇갈리며 스쳐 지나갔지만 윤주는 차 안의 사람들을 식별할 수 없었고 선옥만 안타까운 눈길로 차창 너머로 윤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윤주가 보위부 분실에 도착하니 인민위원장이 문을 닫고 나오는 중이다.
"위원장 동지! 제 아내는 어디에 있습네까?"
"좀 전에 보위부장님이 데리고 갔지!"
"왜요? 어디로요?"
"난 몰라!"
인민위원장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자기 갈 길로 간다.
윤주는 더럭 겁이 나서 얼른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맹위원장을 찾아갔다.
"위원장님! 우리 아이 엄마를 보위부장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윤주가 여맹 위원장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서며 다급하게 물었다.
"벌써 데리고 갔다고요? 이거 일이 커지나 보네요!"
응대하는 여맹 위원장의 표정도 어둡다.
"일이라니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까 낮에 총화 때 선옥동무가 한 발언이 문제가 되나 봐요."
"그게 왜요?"
"뭐, 당에 대한 불만표출이라고는 하는 데 그건 겉으로 내세우는 구실에 불과하고 사실은 평소에 눈에 가시 같은 선옥동무를 이 기회에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이 되네요."
"아니, 아이 엄마가 무얼 잘못했다고... 그 사람처럼 당에 열성적으로 충성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너무 그러니까 오히려 문제이지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고 나무가 너무 뻣뻣하면 바람에 부러지기 쉽다고 하듯이 선옥동무가 너무 원리원칙을 따지니까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지난번 수해복구 노력봉사할 때만 해도 인민 위원장은 자기네 집과 텃밭 주변을 먼저 복구하려고 했는데 선옥 동무가 비판하고 우겨서 마을 입구 하천 제방을 쌓았지 않았더랬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혜택을 봤지만 인민 위원장은 자기 체면도 구기고 손해를 보았으니 선옥이 원수 같을 수밖에요.."
"아니 그렇다고 아무 죄 없는 사람을 그렇게.."
"세상에 죄가 되는 게 따로 있나요? 힘없는 것이 죄고, 가진 사람에게 대든 것이 죄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요?"
"물 건너갔어요. 이제는 아무 방도도 없으니 윤주동무나 몸조심 입조심 하시오. 누군가는 아이를 돌보아야 하지 않겠소?"
여맹 위원장은 더 이상 윤주의 얼굴을 볼 염치가 없는지 슬그머니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난감한 마음에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보며 서 있던 윤주는 힘없이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윤주는 오랜만에 배불리 먹고 단잠을 자고 있는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도련아. 일어나라. 짐 챙겨서 좋은 나라로 가자."
"어디요?"
아이가 눈을 비비며 묻는다.
"응, 저 남쪽 나라! 거기 가면 매일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정말요?"
"그럼. 매일 쌀밥도 먹고 깨끗하고 따뜻한 옷 입고 편안히 잠도 잘 수 있어."
"그런 곳이 있어요? 아이 좋아라."
아이는 신이 나서 일어나 허름한 옷을 챙겨 입고 윤주도 서둘러 봇짐을 꾸렸다. 선옥과 생이별이 될 것이고 과연 탈북에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선옥에게 해가 될까봐 망설였는데 이제 이판사판이니 위험하지만 유일한 희망에 운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정들었던 고향 마을을 벗어날 무렵 언덕 위에서 잠시 쉬며 늘 있던 정전으로 어둠에 묻힌 동네를 바라보았다. 워낙 익숙한 곳이라 희미한 달빛과 별빛 아래에서도 어느 지붕 실루엣이 누구 집인지 알 수 있었다. 정든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나누었던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생각 속에 급류처럼 스쳐 지나갔다.
'선옥이나 나나 여태껏 성실하게 산 죄 밖에 없는데...'
갑자기 설움과 억울함이 사무쳐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행복이나 호사는 고사하고 시대와 장소를 잘못 타고난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며 감시를 받고 눈치만 보면서 존엄과 자유도 없는 삶을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원통했다. 게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도 생이별이라니...
울다가 울다가 보니 눈물은 더 나올 것이 없는지 말라버렸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올라와서 목구멍을 타고 열린 입으로 헛구역질처럼 꺼이꺼이 치밀어 나오는 서러움은 끝이 없었다.
"아바지! 왜 울어? 왜 그래?"
아무것도 모르고 신이 났던 도련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묻는다.
"아니야. 괜찮아.
그래 가자. 가다가 죽더라도 가자.
이 몹쓸 세상, 저주받은 운명을 너에게까지 물려줄 수야 없지!
가자. 남쪽 나라로!"
윤주가 도련이를 둘러업고 일어선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는지 칭얼거리던 아이는 윤주가 업은 손으로 엉덩이를 토닥이며 달래주자 곧 새근새근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