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은 계획이 완벽하다고 믿는 그 순간에 싹이 트고
불행은 행복을 찾으려고 뿌리는 노고를 먹고 자라난다.
-Finale-
“윤주야 밥 먹어라!”
엄마가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눈을 뜬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머리맡을 쳐다보니 역시나 빈 옷걸이가 벽에 박힌 못에 대롱대롱 매달려 윤주의 직감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오늘 입으려고 다림질까지 해서 고이 걸어 둔 신상 재킷을 동생 놈이 어느새 몰래 훔쳐 입고 나갔다.
달라진 것이 없다!
방문을 열며 소리를 지른다
“경주! 경주 어디 있어? “
엄마가 싱크대 앞에 서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한다.
“좀 전에 나갔는데.. 와? 밥 무라!” 라며 엄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씰밥을 밥공기에 가득 담아서 식탁에 내려놓는다. 식탁에는 이미 반찬과 국이 차려져 있다. 이 집에서 효도를 하는 방법은 쉽고도 간단하다. 밥만 잘 먹으면 엄마는 행복해하고 밥을 남기면 속이 상해서 짜증을 낸다. 그러나 오늘은 윤주도 심란하고 마음이 급해서 불효자가 되기로 한다.
밥을 한 두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먹고 국물을 들이킨 후 일어서서 동생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을 뒤진다. 입던 옷들이 꾸깃꾸깃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어서 골라 입을 만한 것이 없다. 그래도 그중 괜찮아 보이는 학교 로고가 등에 크게 새겨진 파란색 재킷을 걸쳐 입고
"망할 놈!"이라고 투덜대며 문을 꽝 닫고 나와서 그대로 부리나케 현관 쪽으로 향한다.
"자가 어디가노? 밥도 안 먹고!"
엄마가 돌아보며 잡아먹을 듯이 꾸지람한다.
'안 먹은 거 아닌데... 그냥 좀 남긴 건데...'
마음속으로 항변을 하지만 입 밖으로 내면 더 큰 난리가 날 줄 알기에 차라리 입을 다물고 도망치듯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간다.
달음박질을 하여 아파트 출입구를 나서니 몸매가 늘씬한 아가씨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옆으로 지나치며 곁 눈으로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계속 달려 중랑천변 산책로로 접어든다. 쉬지 않고 달려서 화랑로 다리 아래 벤치에 다다른 윤주는 벤치에 앉아서 숨을 잠시 고른 후 주변을 살펴본다. 좀 이른 아침이라 산책로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아무도 운동을 하다가 쉬고 있는 윤주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윤주는 조심스럽게 벤치의 다리가 바닥에 닿는 곳에 있는 보도블록을 들쳤다. 아무것도 없다.
'어제 분명히 여기에 현금을 숨겨두었는데...
역시 모든 게 하루가 지나면 리셋되는 건가?'
실망감에 풀이 죽은 걸음을 전철역 쪽으로 옮긴다.
석계역 입구 계단 아래 공간을 활용한 작은 복권 판매소에 들어가서 복권을 하나 산다. 어제 본 1등 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팔 소매를 걷어 겨드랑이 안 쪽에 적어 놓았던 1등 번호를 찾아본다. 아무 흔적도 없다. 대충 기억을 더듬어서 생각나는 번호를 표기한 다음 즉석 당첨 확인 기계에 넣고 돌려본다. '꽝!'이다. 그렇다면 토요일 추첨도 희망이 없다.
윤주는 더욱 힘이 빠진다. 그래도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가 전철을 타고 을지로까지 간다. 가는 도중에 휴대전화로 가상화폐 시세를 확인해 본다. 어제 올랐던 '우더라움' 시세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휴...'
윤주는 한숨을 깊게 쉰다.
잠시 후 전철이 을지로 3가에 도착하자 밖으로 나와 '사숭증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증권 거래 통장을 하나 개설하고 농협 예금통장에 있던 돈을 몽땅 이체한 다음 어제 상한가를 치는 걸 봤던 '쿠키와' 주식을 샀다. 밖으로 나와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면서 연신 주식 시세를 인터넷으로 확인한다. 예상과는 달리 '쿠키와' 주식도 사자마자 뚝뚝 떨어진다. 순식간에 -8%를 기록하고 있다. 절망이다!
전화가 온다. 여자 친구 선옥이다.
"응!"
"어디야?"
"학교 가는 중!"
"수업 있어?"
"응"
"언제 끝나?"
"세 시쯤!"
"그럼 뭐 해?"
"글쎄? 특별히 할 건 없는데... 왜?"
"..."
대답이 없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뭐지? 생일? 아닌 데 아직... 뭐지?"
"우리 헤어져!"
선옥이 차갑게 내뱉는다.
"왜 그래? 갑자기?"
"몰라서 물어?"
"응? 뭔데?"
"몰라도 돼! 헤어지면 돼!"
"미안해! 뭔지 잘 모르겠어!"
"됐어! 전화 끊어!"
전화가 뚝 끊어진다.
윤주가 다급하게 다시 송신을 누른다. 신호가 가지만 받지 않는다. 순간 윤주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다.
'아! 기념일! 오늘이 무슨 날인가 보다!'
윤주는 선옥과 사귀기로 한 날부터 얼마가 지났는지 계산해 본다.
'200일이다!
휴, 그놈의 기념일은 도대체 무슨 기준인 거야? 1주일, 1달, 100일, 200일, 1년, 2년...'
응답 없는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낸다.
'축하해! 200일! 깜짝 파티를 준비했는데 실패했네요! 5시에 로열호텔 로비로 나와 주세요!'
잠시 후 '띵동'하고 답문이 온다.
'알써!'
거짓말인 줄 알지만 속아준다는 뜻이다.
'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버스에서 내려 강의실로 걸어가면서 윤주는 연신 주식 시세를 확인한다. '쿠키와'는 조정도 받지 않고 계속 떨어지는 중이다.
'이러다가 하한가 가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통장의 돈을 다 빼버렸으니 선옥이 데이트 비용은 어떻게 마련하지? 저리 삐졌으니 대충 해서는 화가 안 풀릴 것 같고... 선물도 사야 할 텐데...'
강의실에 몸은 앉아 있었지만 윤주는 수업에는 관심이 없고 머릿속에서는 오늘 난관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만 신경이 온통 쏠려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눈물을 머금고 오전에 샀던 주식을 손절한다. 순식간에 15만 원 손해를 보았다. 하는 수 없이 남은 잔액을 농협 예금통장으로 이체를 시도했다. 돈이 빠져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죄송합니다! 당일 거래 분은 이틀 후에 인출이 가능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뜬다.
'낭패다!'
윤주는 강의실을 나와서 흩어지고 있는 동기들을 쫓아가 사정을 말하고 돈을 빌려 본다. 조금씩 긁어모아서 겨우 12만 원을 손에 쥐었다.
'이걸로 될까? 밥 값도 겨우 하겠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로열호텔로 가는 버스를 탄다. 도중에 꽃집에 들러 장미 한 다발을 사서 호텔 로비로 들어선다. 로비 벽에 기대어 있는 등 높은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니 잠시 후 회전문으로 선옥이 들어선다.
윤주가 일어나서 꽃다발을 내밀자 선옥이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뻗어 꽃다발을 받는다.
그러더니 "고마워!"라면서 윤주의 볼에 가볍게 키스한다.
간질간질하면서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의 감촉에 윤주의 심장이 요동친다.
'달라진 게 있다.'
순간 윤주는 깨달았다.
'오늘 내 존재 자체가 바로 달라진 것이요, 축복이로구나!'
그렇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간이라는 날줄과 관계라는 씨줄로 엮어 짠 옷감의 실 같은 것이어서 서로 얽히고설켜 같이 공존하고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그동안 윤주가 거쳐 온 나날들의 한 고리라도 끊어진다면 오늘의 윤주의 삶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이 소박한 행복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윤주는 이빨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선옥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어디로 가?"
선옥이 묻는다.
"응! 전망대 식당!"
"와! 거기 안 비싸?"
"응, 너보다는 안 비싸!"
'호호호호!' 웃으며 선옥은 윤주에게 붙어서 팔짱을 낀다.
윤주는 흐뭇하게 웃으며 생각한다.
'내일엔 내일의 쓸 돈이 생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