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 디스토피아(dystopia)
택시를 불러 타고 윤주가 향한 곳은 여자친구 선옥의 집이었다.
선옥은 윤주의 방문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별로 반기지는 않았다.
"웬일이야?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윤주에게 가볍게 포옹을 하고 뺨에 입을 맞춘 후 냉장고에서 찬 음료수를 꺼내왔다. 소파에 앉아서 두 사람은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윤주가 선옥의 손을 잡으려고 하거나 스킨십을 하려고 하면 선옥은 호응을 하지 않고 은근히 거부하는 기색을 보였다.
"왜 그래? 내가 싫어?"
참다못한 윤주가 노골적으로 물어보았다. 선옥이 인상을 찌푸린다.
"다른 남자 생겼어?"
윤주가 성질이 나서 언성을 높이자 선옥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쏘아붙인다.
"거봐. 이래서 내가 직접 안 만나려는 거야!"
"직접 안 만나? 그럼 어떻게 만나는데?"
"몰라서 물어?"
선옥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창 밖을 응시한다.
"응. 나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진짜? 그럼 보여줘?"
"응."
"좀 창피한데..."
"괜찮아. 나 진짜 궁금해!"
그러자 선옥이 옆 방으로 가서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감각 슈트를 입고 나와서 헬멧을 쓴다. 화면에 윤주의 모습이 나타난다. 윤주를 닮긴 했지만 입은 옷은 더 멋스럽고 목소리는 더 부드러우며 대화는 더 자연스럽다. 급하게 성교를 하려고 하지도 않고 유쾌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눈 후 긴 전희 끝에 마침내 옷을 벗고 삽입을 한다. 몸놀림 역시 자신보다도 선옥을 배려하고 선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보였다. 선옥의 몸은 활처럼 휘고 물결처럼 떨렸다. 입에서는 참을 수 없는 환희의 교성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선옥은 절정을 여러 번 반복해서 느끼고 있었다.
선옥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윤주는 이상하게 흥분이 되지 않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흐르는 것을 느꼈다. 화면에서 선옥을 애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자기가 아닌 딴 사람처럼 느껴졌다. 윤주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선옥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윤주를 바라본다.
"어디 가?"
"응. 나 갈래!"
"그래..."
선옥은 바로 실물 윤주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화면의 윤주를 바라본다. 화면의 윤주가 웃으면서 무슨 말을 선옥에게 부드럽게 속삭이고 선옥은 깔깔대며 웃다가 다시 감각 슈트 안의 몸을 비튼다.
선옥의 집 문을 닫고 나온 윤주는 아무 방향으로든 걸어갔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안내와 경고음이 들려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나요?
목적지 없는 배회는 1시간 이상 허용되지 않습니다.
위반 시에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서 구금이 될 수 있으며 시민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즉시 집으로 귀가하시기를 권고합니다.
택시를 호출해 드릴까요?
시민권이 박탈되면 다시 회복할 수 없으며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와 복지 혜택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시민으로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과 환경에서는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사망 시에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처리되어 즉시 화장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윤주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거부만이 인간으로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윤주는 발걸음을 멈추고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다가 허공에 대고 말을 한다.
"나 집에 데려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