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 목숨
기진맥진한 윤주가 깜빡 잠이 든 사이에 선옥이 미음을 끓여서 나무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온다. 선옥이 윤주의 배 아래에 손을 넣어서 몸을 옆으로 돌려 모로 눕힌 후 숟가락으로 묽은 흰 쌀 죽을 한 입 떠서 윤주의 입에 흘려 넣어준다. 몇 입 받아먹던 윤주가 고개를 저으며 도로 자리에 엎드린다.
"왜? 맛이 없어? 그래도 마님이 쌀을 내주어서 끓인 건데 좀 더 먹지..."
윤주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저으며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선옥도 그 뜻을 짐작하는 듯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그릇과 숟가락을 쟁반에 내려놓는다.
선옥이 다시 윤주의 상처부위를 살피고 있는데 밖에서 '퍽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연거푸 들린다. 선옥이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동정을 살핀다. 다시 들어와서는
"건너 이 부잣집에 무슨 일이 있나 봐.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네. 얼른 가보고 올게!"
선옥이 문을 잡고 선 채로 윤주에게 말을 하고 도로 나간다.
길 건너 이 부잣집 대문 앞에는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구경꾼들이 사람들 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다.
"무슨 일이래요?"
선옥이 그중에 뒤에 있는 남원댁의 등을 건드리며 물었다. 남원댁은 곁눈으로 선옥을 흘끗 본 후 시선을 집 안 마당으로 다시 돌린 채 대답을 한다.
"응, 도망갔던 돌쇠랑 점례를 추노꾼이 잡아왔데!"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보면 몰라? 지금 멍석말이를 하고 있잖아!"
선옥도 사람들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서 안을 들여다본다.
마당에는 굵직한 물체를 둘둘 말고 있는 커다란 멍석이 두 개 원통형태로 놓여있고 각 멍석 옆에는 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이 부자의 독려를 받으며 타작을 하듯이 멍석 위를 여기저기 내려치고 있다.
몽둥이가 멍석 표면을 후려칠 때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멍석에 진동이 일고 안에서 사람의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명소리는 차츰 신음소리로 바뀌고 나중에는 잘 들리지도 않는 앓는 소리가 났다.
구경군들은 낮은 소리로 혀를 찼다.
"애구 이제 목숨부지는 글렀네. 멍석말이를 저렇게 제대로 한 번 당하면 골병이 들어서 살아날 수가 없어."
"그래도 사람이 죽으면 관에서 가만있나?"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가 없는데 어쩔 것인가? 저러고 풀어놓으면 속으로만 피멍이 들지 겉보기는 깨끗해! 그냥 아파서 앓다가 죽었다고 하면 끝이야!"
"이렇게 본 사람이 많은 데도요?"
"이 사람. 순진한 건가? 바본가? 관에서 진짜 몰라서 문제를 삼지 않는 줄 아는가? 도망간 노비가 잡혀오면 얼굴에 먹을 새기든 죽이든 살리든 아무도 신경을 안 써! 모른 척하는 거지! 그저 주인 맘이야! 근데 이번엔 이 부자가 화가 많이 났나 보네!"
"이번이 두 번째라 아마 작정을 했나 봐요!"
"다른 종들에게 본을 보여 겁을 주려는 것도 있겠지!"
"아이고 그나저나 불쌍해서 어떻게 해! 아직 청춘들인데.."
"팔자가 그런 걸 어떡하나! 종으로 태어난 게 죄지 뭐!"
이제 나무등걸처럼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멍석을 보며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서서 제 갈 길로 간다.
선옥도 얼른 돌아와서 윤주에게 소식을 전한다.
두 사람의 얼굴에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하다. 도망을 가자던 조금 전의 결의는 어디로 다 사라졌다.
"우리 도망가면 어디 숨어 살 곳은 있나?"
선옥이 근심스럽게 묻자
"없어. 누가 타지에서 온 낯선 사람을 함부로 거두어주겠어? 괜히 자기까지 다치려고?"
"그러면?"
"운이 좋으면 산속에서 살 수도 있겠지만 추노꾼도 있고 약초꾼들 눈에 뜨일 수도 있어서 쉽지만은 않을 거야!"
"그럼 우리 어떡해?"
"몰라. 그냥 목숨 걸고 모험을 하는 거지 뭐!"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윤주 역시 자신은 없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참 내 정신 좀 봐. 저녁 할 시간 되었네..."라며 선옥이 밖으로 나간다.
부엌에서는 달그락달그락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와 밥 짓고 반찬 만드는 소리와 냄새가 난다.
윤주는 깊은 우물 속이나 함정에 빠진 짐승이 된 심정이다. 몸은 아프고 고달프며 그렇다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인다.
한참 후 안방과 사랑방에 저녁을 올리고 물리고 나서야 선옥이 윤주의 저녁상을 들고 들어온다. 다시 보리밥에 나물 반찬이다.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수저를 놓자 선옥도 서둘러 상을 내간다.
"왜? 아직 할 일이 있어?"
윤주가 아쉬워서 물어보자
"응, 사랑채에 주안상 올리라고 해서 얼른 가봐야 해!"라고 대답하며 선옥이 나간다.
한 번 나간 선옥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는 기색이 없다.
문을 빼꼼 열고 연신 사랑방의 기색을 살피니 일렁이는 호롱불 빛에 최 참판과 선옥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비친다. 최 참판은 주안상 앞에 앉아서 술과 안주를 먹고 선옥이 옆에서 술 시중을 들고 있다.
사랑채 추녀에 걸려있던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기와 용마루 위로 떠오르고 이제 호롱불도 꺼져서 사랑채에 아무런 기척이 없이 고요한데도 선옥은 돌아오질 않는다.
분기와 설움에 북받친 윤주가 몇 번이고 문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머릿속에서 '퍽 퍽' 울리는 멍석말이 소리에 또 주저앉고 또 주저앉으며 밤을 꼴딱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