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아침 - 선택
‘그날 내가 중부고속도로 대신에 경부고속도로를 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니 10분만 늦게 출발을 했더라면? 아예 출장이 취소되었더라면?..."
침대에 누워서 창 밖을 바라보며 윤주는 그때를 생각한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일이지만 잠시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앙금 같은 순간이다.
2년 전 그날, 윤주는 대전에 출장 갈 일이 생겨서 출근을 하자마자 당면한 업무 체크를 한 다음 바로 차를 몰고 강남대로로 나섰다. 평소처럼 가까운 경부고속도로를 타기 위해서 서초인터체인지 쪽으로 가는데 길이 막혔다. 교통정보를 보니 경부고속도로도 막힌다. 차를 돌려서 88 도로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동대교 부근에서만 잠깐 밀렸고 그 후에는 거의 최고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출장도 갈 만하네.. 날씨도 좋고... 정말 드라이브하는 기분인걸..'
윤주는 운전석 쪽 차창을 끝까지 내리고 왼팔꿈치를 창턱에 올린 후 라디오의 볼륨을 한껏 올렸다. 빠르고 강한 템포의 음악이 차의 스피커를 울려 그 진동이 왼발에 느껴졌다. 오른손으로 핸들을 잡고 왼손을 차창 밖으로 내미니 시원한 바람이 손바닥을 스친다. 바람의 저항이 손을 뒤로 밀어낸다. 비행기 날개처럼 약간의 각도를 주고 손바닥을 수평으로 펴니 바람이 팔을 위로 들어 올린다. 입으로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손바닥의 각도를 조절하니 마치 지휘자의 손처럼 저절로 팔이 아래위로 저어진다.
그 순간 뭔가 검은 물체가 눈앞에 '확' 나타났다.
순식간이었다. 상황 판단을 할 겨를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맞은편 차선의 화물차에 실려있던 타이어였고 느슨한 결박이 풀리며 윤주의 차로 날아든 것이었다.
검은 물체는 윤주 차의 앞 유리창에 정면으로 부딪친 후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고 지붕 너머로 튕겨나갔지만 그 충격에 윤주의 차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왼쪽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다시 오른쪽 차선으로 흐르다가 뒤 따라오던 다른 트럭에 옆구리를 받힌 후 노견 쪽으로 밀려났다.
자동차 사고 중에서 운전자에게 가장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이른바 T-bone 충돌을 당한 것이다. 자동차의 중심 바닥에 종심으로 자리한 프레임과 범퍼, 핸들 에어백, 엔진룸 공간 등은 앞 뒤 충돌이나 추돌로부터는 운전자를 어느 정도 보호하지만 문의 얇은 철판은 이 같은 측면충돌에는 전혀 무방비로 운전자에게 충격을 준다. 어쩌면 그 과부 제조기라는 오토바이가 더 나을 정도다. 오토바이는 헬멧이라도 쓰고 튕겨나가서 충격을 완화할 수도 있지만 이번 사고로 윤주는 차 안에 갇혀서 압착기에 깔린 듯이 그 모든 충격을 그대로 몸으로 고스란히 다 받았다.
윤주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고 출동한 엠뷸런스 구조대원은 윤주의 망가진 몸을 깡통조각처럼 찌그러진 차체에서 꺼낼 수가 없어서 차의 일부를 절단해야 했다. 응급처치와 치료를 받을 시간은 지체되었고 그만큼 윤주의 몸은 더 망가졌다.
팔뼈, 어깨뼈, 갈비뼈가 수없이 복합 골절되었고 목뼈도 부러졌다. 다행히 내부 장기의 손상은 심하지 않았으나 여러 번의 수술과 오랜 재활 치료에도 불구하고 윤주는 목 아래로 전신 마비라는 영구장애를 입었다. 그 우연과 우연이 겹친 불운에 윤주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니 망가졌다. 번개에 맞거나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몇천만 분의 일이라고 해도 어디에선가 당하는 사람은 있고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윤주에게 그래도 생명을 건진 게 어디냐고 입에 발린 위로를 했지만 치료 과정의 고통과 장애가 주는 무기력감에 시달린 윤주는 차라리 현장에서 죽는 것이 더 축복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진 생명은 괴로움과 절망에도 적응을 하고 식물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여 먹고 싸는 것까지 도우미에게 의존해야 하는 비참한 삶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두 달 전에는 재활치료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산다. 그래도 익숙한 집에 돌아오니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공동생활을 해야 했던 병원생활보다는 훨씬 안정감이 있어서 좋았다. 특히 기본 생리까지도 간호조무사나 간병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윤주로서는 집에서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은 가끔씩 들러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고 말 벗도 해주었고 요양보호사가 매일 방문하여 윤주를 먹이고 씻기고 오물을 치우고 청소를 하여 윤주의 삶을 하루하루 연장시키고 있었다.
이제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다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독과의 싸움만이 과제로 남았다. 고마운 것은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처음에는 지루하고 엄청나게 괴로웠지만 차츰 요령이 생기고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원하면 휠체어를 타고 외출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 마비 장애인들과는 달리 상체도 마비된 윤주는 상체를 결박하고 뒤로 눕힐 수 있는 특수 휠체어가 필요했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어서 반드시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어야 했다. 윤주는 그 성가신 절차와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차라리 집 안에서 조용히 지내며 TV를 보거나 밖을 관찰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책을 읽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누군가가 옆에서 책을 들고 책장을 넘겨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었다.
루게릭 병에 걸린 스티븐 호킹은 눈깜박임과 뇌파 인식 등 첨단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기기 동작을 하고 외부세계와의 의사소통도 가능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윤주에게는 공상과학 소설 같은 비현실적인 꿈이라 그저 누워서 보고 듣는 데 만족을 하기로 했다.
'조금만 아래로 척추가 부러져서 휠체어라도 굴리고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통 사람들은 장애인이라고 동정을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페럴림픽에라도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아니야, 그래 어쩌면 이것도 복에 겨워 복주머니 실밥 뜯는 소리인지도 몰라!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잖아!'
불현듯 자신의 신세가 답답하고 슬픈 생각이 들 때면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하루에 재미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윤주의 집은 아파트 7층이고 윤주의 방에 큰 창이 있어서 밖으로 내다보면 맞은편에 12동 집들의 창문과 출입문이 보여서 아파트 거주자들의 일상을 구경할 수 있고 아파트 진입로를 지나가는 보행인과 자동차도 보인다.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등하교를 하는 사람의 익숙한 모습을 보는 것도 반갑고 우체부나 택배 배달부의 정기적인 방문 그리고 유치원과 학원, 요양원 차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매일 같은 일이 일어나지만 매일 나오다가 안 나오는 사람이 있는 등의 사소한 변화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가끔씩 인근 김포공항으로 이착륙을 하려고 고도를 낮추거나 높이는 비행기를 보는 것도 큰 호사다. 매일 보고 있으면 몇 시에 어떤 항공사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지 시간표도 알 수 있다.
오늘도 윤주는 옆 집 아이가 유치원 통학차를 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매일 9시 50분, 이 시간이면 노란 병아리색 유치원 아니 정확히는 어린이집 통학버스가 12동 3번 출입구 앞에 선다. 24인승 자그마한 승합차의 문이 열리면 어린이집 선생님이 폴짝 뛰어내리고 102동의 남자아이가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른다. 그다음에는 윤주가 사는 11동 옆집 솔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나타나서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엄마의 손을 놓고 선생님의 손을 잡고 차에 올라서 차문이 닫히면 창 밖을 내다보면서 엄마에게 손을 흔들고 버스는 출발한다. 솔이 엄마는 버스가 아파트 출구를 벗어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하루 중 윤주에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아쉽고 가장 짧은 순간이다. 오늘은 솔이 엄마가 하얀 바탕에 잔잔한 꽃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었다. 어제는 진한 청색 블라우스에 검정 스커트를 입었었다. 단발보다는 조금 더 긴 머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뒤로 한 가닥으로 모아 고무줄로 질끈 묶어서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보인다. 멀어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으나 귓불이 없는 동그란 귀와 작고 아담한 눈 코 입이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투명할 정도로 맑고 하얀 피부색과 조그마하지만 윤곽이 뚜렷한 얼굴, 짙은 눈썹과 갸름하고 붉은 입술이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사실 사고 이전에는 옆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사고 이후에 매일같이 밖을 내다보다 보니 예전에 모르고 지나치던 것들이 보이고 또 특히 이상한 것은 감각들도 더 예민하게 살아나는 것이었다.
때로는 신체 일부가 절단된 사람들이 겪는 환상통증이나 유령감각이 나타나기도 하고 2006년 '런던 택시운전사 실험'으로 유명해진 뇌 가소성의 결과로 윤주의 무감각해진 신체를 제어하던 뇌의 영역 일부가 현재 작용하는 신경망을 담당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감각을 느끼기도 했다.
어떨 때는 소리에 무지갯빛 색깔이 덧입혀져서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춤을 추듯이 파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분명히 마비된 사지의 일부분이 시리거나 가렵거나 아프기도 한다. 그저 예민한 것이라면 큰 문제가 없고 어쩌면 더 좋을 때도 있겠지만 힘들고 환장할 노릇은 그것을 전혀 통제하거나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윤주가 옆집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솔이네에서 나는 소리가 윤주에게는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고 또렷하게 들리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안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엄마가 '솔아 솔아'라고 부르고 아이가 대답을 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지 실제로 성이 무언지도 모르고 솔이도 본명이 외자인지 아니면 그냥 줄여서 부르는 이름인지 알 수는 없었다. 심지어 솔이 부모가 성관계를 할 때 나는 소리도 그대로 들려서 윤주는 그 소리를 들으며 성적 흥분을 느끼고 심지어 발기와 사정을 하는 환각적 경험을 실제처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옆 집에 각별한 친근감을 가지고 나중에는 솔이 엄마가 자신의 아내인 것 같고 솔이가 딸인 것 같은 착각을 하고 환상 속에서 같이 사는 것을 즐기고 또 솔이 엄마를 좋아하게 되었다. 솔이 아버지는 목소리만 들었을 뿐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구체적인 인상이 떠오르지 않아 현실감이 적었다. 그는 그냥 이웃사람이었다.
드디어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솔이 엄마가 거실로 들어와서 실내화를 신는다. 베란다의 유리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와서 장롱 문을 열고 원피스를 벗어서 옷걸이에 건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파자마로 갈아입지 않고 속옷 차림에 그대로 침대에 벌렁 드러눕는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아이 옷 입히고 하는 아침일과에 지쳤는지 조금 쉬려나 보다.
잠시 후 한 손을 팬티 안으로 넣더니 부드럽게 외음부를 문지르다가 다른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진다. 앙다문 입술과 가지런한 이빨 사이로 가벼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어젯밤 남편이 일방적으로 덤벼들었다가 금방 사정을 하고 잠을 자버린 탓에 만족하진 요정을 이제야 느끼고 있나 보다. 갑자기 윤주도 음경이 발기되는 느낌을 받았다. 격렬하지는 않지만 몽롱한 쾌락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절정의 순간이 왔다. 짧고 깊은 콧소리가 울려 퍼진다. 윤주도 황홀경에 함께 빠졌다.
얼마 후 솔이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한다. 비누칠은 하지 않고 샤워 꼭지에서 쏟아지는 미지근한 물에 가볍게 몸을 행군 후 수건으로 몸을 닦고 서랍에서 새 속옷을 입은 후 얇고 느슨한 평상복을 걸친다. 화장대 앞에 다가가 가볍게 수분크림을 바른다. 손바닥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고 로션을 손바닥에 짠 다음 얼굴에 문지른다. 윤주는 화장품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이제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서 돌리고 청소를 시작한다. 윙윙거리는 진공청소기가 너무 크고 신경에 거슬린다. 먼지통을 털어내고 봉걸레를 바닥에 대고 밀면서 안방과 거실과 주방을 돌아다닌다. 걸레를 대에서 벗겨서 욕실 대야에 넣고 물을 받아서 빨아 널고 욕실 바닥과 베란다에 물을 뿌려서 솔질을 하고 다시 물을 끼얹어 씻어낸다. 부지런하고 깔끔한 주부다.
윤주는 턱 아래 작은 받침대에 꽂혀 있는 작은 못 모양의 터치펜을 입으로 물고 고개를 돌려 얼굴 앞 쪽에 비스듬히 거치되어 있는 전화기의 단축 다이얼 2번을 누른다. 전화기 옆에는 TV 리모컨과 도우미 호출 벨이 나란히 설치되어 달려있다. 단축 다이얼 1번은 어머니이고 2번은...
"여보세요?"
벽 너머에서 그리고 전화기에서 솔이 엄마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안녕하세요?"
"아, 윤주 씨! 웬일이세요? 아직 상담 시간이 아닌데..."
"예,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전화드렸어요."
"호호호, 정말 날씨가 좋네요. 오늘 같은 날 햇살을 많이 쬐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잠도 잘 오고 기분도 좋아진데요!"
"아, 그래서 날이 좋으면 기분도 좋아지는군요?"
"예, 오늘은 컨디션이 좀 어떠셔요? 산책이라도 나가보시는데 어때요?"
"예. 괜찮아요. 선옥 쌤과 같이라면 얼마든지 나가겠는데 혼자는 좀..."
"어머,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규정상 상담자랑 만나는 것은 안 돼서..."
"예, 알고 있어요. 그저 아쉬워서 하는 말이지요 뭐. 그나저나 오늘은 뭐 하세요?"
"뭐 특별한 건 없어요. 평소처럼 집안 일 하고.. 이제 차 한 잔 마시려던 참인데 마침 전화가 왔네요."
"오, 그럼 차 드세요. 바쁘신데 귀찮게 했을까 봐 주저했는데..."
"아휴, 무슨... 그런 말을... 심심하던 차에 전화 잘하셨어요. 그럼 잠시 만이요. 커피 내리고요..."
선옥이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주방으로 가서 커피머신에 물을 붓는다.
"기다리는 동안에 제가 이행시를 지었으니 한 번 들어보실래요?"
"이행시요? 아, 재미있겠다. 운은 뭐예요?"
"선옥이요."
"제 이름이요? 아이 영광이어라. 그럼 한 번 해보세요. 선!"
"선선한 바람이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부니.."
"오.. 멋있다. 다음 옥!"
"옥 구슬이 은 쟁반 위에 도르르 굴러가네!"
"에이 뭐야? 시작은 좋았는데 후반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요?"
"크크크 표절인가? 그럼 이번에는 진짜로 진지하게!"
"그래요. 나도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제대로 감상을 할 준비를 할게요."
선옥이 커피를 컵에 따라 들고 소파에 앉는다.
"제목 달밤!"
"예."
"기다리다가...
그대 오시기 기다리다가 지쳐
오늘은 기어코 그대를 찾아 나섰습니다
달 빛 휘영청 밝은 밤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강가를 한 바퀴 돌고
산 언덕을 또 한 번 오르고
사슴들이 다니는 갈대숲을 지나
눈물 젖은 잠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혹시나 그새 그대가 오셨을까
심장이 콩닥콩닥 가만히 문을 여니
하얀 달빛만 창을 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하루 밤이 무너져 내립니다"
선옥이 박수를 짝짝짝 친다.
"와우, 대단해요! 윤주 씨 알고 보니 시인이시네요. 윤주 씨가 너무 감수성이 좋아서 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때로는 우울하고 힘이 드시나 봐요!"
"그럴까요?"
"그럼요. 제가 상담 경험은 없지만 윤주 씨랑 이렇게 상담을 하면서 제가 오히려 상담을 받고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첫 상담자로 윤주 씨를 만난 게 제 행운이었던 거 같아요!"
선옥은 행운이라고 좋아하지만 사실은 운이 좋았던 게 아니다. 의도적 기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