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정리.
화분정리
나만이
언젠가 말했지
모두 시들어 버릴 거라고
하지만 걱정은 말라고
계절이 지나면 다시 피어날 거라고
너의 계절은 갔는데
나의 계절은 멈춰있다
여전히 무엇도 피지않는 시간에
너는 가고 나만이 살고 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말이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라.
그 구절은 수많은 곳에 인용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전에 마당 구석에 잡동사니처럼 쳐 박힌 화분들을 정리한 일이 있었다.
처음 말라비틀어져 버린 식물들을 바라봤을 때는 애초에 이 식물이 무엇이었는지 유추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과거에는 꽃과 나무를 제법 좋아했었던 나인지라 적지 않은 화분들을 길렀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타의 취미처럼 화분도 점차 소홀해졌고 말도 못하는 식물들은 끈질김 없는 부족한 이 사람의 취미에 말라죽어 갔을 것이 눈에 훤했다.
여러 종류의 화분들이 더러 얽혀 구석에 박혀있는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나로 인해 값을 잃어버린 화분들을 언젠가 시간을 내서라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고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그렇게 발길을 옮기려던 도중 신발 속 모래알처럼 밟히는 유난히 작고 귀여운 화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오래전 그 화분에는 아름다운 재스민이 자리 잡고 있던 기억이 났다.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뜬구름 같은 발걸음이 멈춘 곳은 집으로 가는 길가의 꽃집.
진열대 위로 하얗고 작은 꽃 화분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꼭 당신을 닮은 것처럼 보였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진열대 위로 아름답게 핀 꽃도 마찬가지였음이다.
결국 나는 그 화분 하나를 충동 구매하고 말았다. 마치 그대가 내 앞에 나타났던 날, 내가 그대에게 나의 마음을 모두 던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몇 번이고 꽃잎에 코를 박고 향기를 음미했었는지 모른다.
재스민 화분은 그렇게 내 품에 애지중지 안긴 뒤로 햇살이 잘 드는 창가와 바람이 잘 부는 마당을 오고 갔다.
차마 부끄러워 내뱉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화분에 당신의 이름을 붙여두었던 까닭이라 되도록 햇살 맑은 곳과 바람이 좋은 장소만을 골라 두었음이다.
그런 수고로움 끝에 햇살만치 하얀 꽃이 고개를 드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일종의 묘한 감동마저 주었다.
그대는 재스민 같은 사람이었다. 재스민 향기처럼 고혹적이었고 작은 꽃잎의 빛깔처럼 희고 고운 사람이었다. 작은 꽃들에게서 그토록 진득한 향기가 났던 것이 꼭 당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여린 모습에도 감출 수 없는 매력을 품은 사람. 재스민의 꽃말처럼 당신은 나의 것, 사랑의 기쁨. 나에게 기쁨을 주는 당신이었다.
돌아서려던 발길을 멈춰 세우고 언제 적에 말라버렸을지 모를 식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하지 않고 이대로 두기에는 미관상 좋지 않았고 다음 번 어떤 씨앗을 뿌릴 수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빈 그릇이 있다면 새로운 음식을 담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깨끗이 씻은 그릇에만 새로운 음식을 담는다. 깨끗한 빈 그릇이 있을 때만 새로운 음식을 담을 수 있다. 전쟁 통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그렇게 화분의 말라버린 줄기와 잎들을 정리하면서 가슴속에 미루어 두었던 당신이란 말라버린 존재가 떠올랐다. 누굴 만나더라도 말라버린 당신의 존재가 자꾸만 떠올랐던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몰랐다.
화분을 깨끗이 정리했다. 다음번 심어질 씨앗을 위해서 말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화분을 정리하는 것처럼 몇 번의 귀찮은 일로 쉽사리 정리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지금껏 미뤄왔던 당신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래야 비록 당신은 져버렸지만 다음 번의 씨앗은 온전히 자랄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