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조각
진심이 무엇인지.
그대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죽도록 아프더라도
그걸 아는 편이 전 나을 것 같아요.
미치도록 울더라도
나는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요. 그대여.
마음으로 다가가기 위하여
나를 버렸다.
빵 부스러기 한 조각 한 조각 버려가는 그레텔처럼
나 역시 마찬가지로.
마음을 버리고 그 자리에 그대를 세운다.
한 조각 떨어져 나간 마음만큼 그대를 채운다.
비가 오는 날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진정한 가을의 시작이자 이제 단풍이 들고 곧 겨울이 찾아올 것임을 의미하겠지요.
오늘도 책상에 앉아 글을 쓰다가 대지를 토닥거리는 빗소리에 이끌려 창가로 눈을 돌렸을 때 오랜만에 외로움이란 녀석이 찾아 왔습니다.
비 오는 풍경을 마주하자마자 사랑하고 싶은 간절함이 비처럼 저의 마음에도 내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어찌 이제와 그것을 느꼈냐?’ 물으신다면 어쩌면 외로움에 물든 자신을 못 본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괴로운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잊은 듯 살다가 저의 마음과 닮은 비 오는 풍경을 보고 나서야 이런 외로움이 떠오른 까닭은 아닐지 짐작해볼 뿐입니다. 그리 생각하고 나니 스스로에 대한 안쓰러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래요. 이런 날이면 문뜩 혼자가 느껴지는 날이면요. 저는 어릴 적과는 다르게 그대를 떠올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는 했습니다.
어릴 시절에는 좀 더 거친 심장을 가졌던 것일까요? 술 한 잔이나 노래 한 구절 또는 농담 비슷한 것들로 쉽사리 그대를 털고 갔었습니다만... 이제는 잊기보다 추억하는 편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말하면 그대는 이해하실까요?
글쎄요. 이런 저를 철없다 말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이가 들수록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 같은 감정으로부터 무뎌지는 길보다 예민해지는 길을 선택한 저로서는 수많은 추억들이 있어야만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 수 있고 오늘의 내가 서있는 땅의 의미들을 만들 수 있음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때로는 그리움이 되어 역류하고 아픔이 되어 내린다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오늘 내리는 빗방울을 한참 바라본 뒤 생각나는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빵조각을 버리고 가는 그레텔의 이야기였지요. 이별에게 잡혀가는 저는 그레텔이었고 누군가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빵조각을 버리고 갔었습니다. 제 자신을 조각내어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뿌리고 다니며 외로움을 끝내줄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도 끝나버린 그대가 찾아올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대가 내게 찾아와 사진처럼 변함없는 미소로 날 반긴다 할지라도 우리의 이야기는 이별로서 마침표를 찍었기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을 것이었겠지요.
그럼에도 마음을 조각을 내어 세상에 뿌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로서 말로서 또는 행동과 수많은 표정과 같은 표현방법으로 스스로를 조각내어 길목마다 뿌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조각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수년 동안 기상학을 연구했을지라도 빗방울을 흠뻑 맞아보지 않았다면 결코 온몸을 흠뻑 적신 뒤 머리를 토닥거리는 비에 대한 감정은 알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게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은 그것들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다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제 조각들을 줍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는 제 앞에 서있으리라 믿었지요.
그 사람이라면, 내 조각을 따라온 사람이라면 날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고 외로움으로부터 영원히 구원해줄 구원투수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허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 무엇도 완전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최선은 헤아려 주는 것뿐이라고 말이지요.
아마도 오늘날의 제 조각들은 그레텔의 빵을 먹어버린 새처럼 시간이라는 녀석들이 다 쪼아 먹은 뒤였겠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듯 오래전에 뿌렸던 조각들은 제가 뿌렸음에도 제 마음이나 생각과는 사뭇 달라진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혹시나 그대, 오래 전의 내 조각들을 본다 할지라도 당황하지 마시고 그저 미소 한 자락으로 마주하시길 바랍니다. 그것들은 자신을 비워야만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는 속 좁은 제가 그대를 추억으로서 담기 위해 버렸던 것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