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기울면 별을 찾는다. (9)

감각.

by 김영식

감각


감각이 과도하게 열리는 것 같은 날.

사소한 소리도 바람도 햇빛도

온몸의 감각을 저리도록 파고들어 왔지.




오늘은 높고 맑은 하늘 아래 두텁게 쌓인 쌀쌀한 공기층이 하루를 침범했습니다. 이런 날에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쌀쌀함과 함께 그리움이란 배가 떠밀려오고는 했지요.

오늘도 역시 그런 날이었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처럼 그리움이 날 덮치는군요.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대의 미소를 떠올리자 지금 느끼는 그리움이 쓸쓸함이 아닌 애틋함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이리 쌀쌀함이 깃든 하루인데도 시린 그리움이 아닌 그대란 따스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빙하기 같았던 과거의 시간과는 다르게 따스함을 느끼다니요. 혼자 ‘풋’하고 웃음을 지었습니다. 에스키모라도 되는 듯 얼음장 같은 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이제는 당연하다 여기던 시점이었으니까요.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오직 마음이란 일방통행과도 같아서 '나의 화살'이 쏘아지지 않는 이상 누군가를 생각하고 품을 수 있다는 말은 믿지 않았었지요.

몇 번의 인연을 생각해보아도 그랬습니다. 추억 속에 사는 몇몇의 인연들은 나에게 몇 번의 기차를 출발시켰지요. 그 기차들은 내게 오기까지 때로는 며칠 때로는 몇 주, 몇 달이라는 시간을 거쳐 내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순간마다 역에 나가 있지 않거나 역에 나가 있더라도 기차에 섣불리 오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기차를 타지 않고서 그렇게 흘려보냈지요. 지금에 와서 기차들을 떠나보낸 뚜렷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그 기차가 저를 거처 도착할 역들이 제가 가고 싶었던 곳은 아니었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로 제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철옹성 같은 마음들이 알아서 줄지어 벽을 세워놓았으니까요. 오르려는 자들의 능력이라도 시험하듯 높다란 벽이 굳건히 서있었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저도 오르려는 자들도 지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때는 떠나면 그 뿐이겠습니다.


그래요. 모든 일들이 그렇듯, 우연처럼 운명처럼 갑작스럽게 그대와 마주친 날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미 오래전 발길이 끊긴 저의 고성 앞에 서있는 그대가 보였습니다. 그대는 쌉싸름한 제 말에도 좋다 하시고는 기다린다 하시는군요.

감각이 과도하게 열리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 날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으로 들어오지요. 그리고는 마음은 마치 말초신경처럼 일일이 그것들에 반응합니다. 바람 한 점, 풀 한 포기의 모습까지도 말이지요.

그런 감각이 과도하게 열린 날에 저는 역에 서있었습니다. 그대가 보낸 기차가 제 앞으로 오는 모습이 보이는군요. 어느 날처럼 선뜻 마음이 서질 않아 돌아서려는데 바람과 햇살, 하늘이 제 마음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꼭 그런 풍경을 닮은 당신의 말과 미소가 떠올랐고 순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음 역이 될지 그 다음 역이 될지 혹은 종착역까지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그대란 기차에 올라 훌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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