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의도는 없었지만
비싼 물감까지 구매하고 다녔던 미술 학원은 정말 별로였다. 성인이었던 나를 입시 반에 집어넣어 가르치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눈치도 보였다. 뭐 그것보다 억지로 배우는 일이 생각보다 적성에 안 맞았다.사실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을 졸라 미술학원에 다녔다가 3일 만에 그만둔 전적이 있다.
그 이유는 (만화 캐릭터처럼) 눈을 크게 그리고 싶은데, 선생님은 자꾸 작게 그리라고 해서.그 얘가 성인이 됐다고 어디 갈까? 이번에도 딱 두 번 나가고 학원을 그만뒀다. 뭔가 좋아하는 일을 억지로 하게 되면 흥미가 사라지는 게 내 종특인 것 같다. 그나마 좋아하던 취미마저 잃기 전에, 나는 미술용품만 슬쩍 가져온 채 학원을 나왔다. 패기 있게 도전했던 미술학원은 흥미를 금방 잃어서 포기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도전(?)해봤다는 거에 의미를 뒀다. 이젠 정말 학원을 가는 일은 없을 거다.
미술학원보다 열심히 했던 건 대외활동이었다. 영상작업을 할 때, 촬영보단 편집이 좋았고, 편집보단 기획이 좋았다. 영상 콘텐츠 기획도 물론 재밌긴 했지만, 기획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팀도 꾸려야 하고, 촬영도 해야 하고, 편집도 해야 했기에 영상에 애정이 없으면 버틸 수 없었다. 영상이 점점 시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전편에서 지겹도록 했으니 잠시 생략.
그래서 3학년에는 영상을 만드는 수업보다 콘텐츠 기획이나 디자인 수업을 더 많이 찾아들었다. 3학년 전공 수업 중에 '콘텐츠 기획'이 있었다. 어떤 분야든 상관없이 기획서를 만들고 발표를 하는 수업이었다. 친구 두 명에게 봉사 프로그램을 기획하자고 했다.이건 매우 큰 사심이지만 평소에 어르신, 봉사에 관심이 정말 많았다. 1학년 때도 봉사 프로그램을 기획한 경험도 있으니 재밌을 것 같았다.
한 학기 내내 봉사 프로그램 회의를 했다. 매일매일 만나서 엄청 디테일하게 활동을 기획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긴 했지만, 포스터도 만들고, 배너도 만들었다. 회의도 정말 많이 했다. 아침에 만나서 카페 마감까지 할 정도로. 이 짓을 한 달 두 달은 했으니 애들이 지칠 만도 했다. 그때까지는 기획의 요령이나 회의의 적정선을 몰라서, 많이 하면 좋을 줄 알았다.
사실 기획을 하고, 회의하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워서 힘든 줄 몰랐던 것 같다. 같이 회의를 했던 친구 두 명은 점점 지쳐갔다.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게 당연한 거였다.
열심히 준비한 기획서는 수업 발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획서' 수업이었기 때문에 그걸로 끝이었다.애들은 홀가분하다며 만족했지만, 나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가득 찼다. 너무 좋은 기획이라 실행까지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회의나 발표를 할 때도 그저 '과제'로만 생각했던 동기들에게 직접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실행하기까지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봉사 프로젝트 지원 사업이나 공모 사업을 뒤지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지만, 활동이나 공모 지원을 구경하는 게 오래된 취미다) 우연처럼 기업의 모재단의 '봉사 프로젝트 공모사업'이 떡 하니 있는 게 아닌가. 친구들 눈치를 살살 피며 '여기서 돈 다 지원해준대. 내가 지원서랑 회계 싹 맡을게. 같이 할래?'라고 던졌다. 애들도 기획서가 아쉬웠던 걸까? 내 말을 덥석 물었다.
드디어 사심의 기획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기획은 다 되어있으니, 제안 피피티를 만들어서 주변 주간보호센터, 요양원 등에 연락을 보냈다. 그중 몇 곳에서 연락이 왔다. 어떤 곳은 직접 제안서를 들고 찾아가서 미팅까지 했었다. 아쉽게도 그곳에서 결국 할 순 없었다. 센터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아무래도 이 프로젝트 자체가 참여형이다 보니깐 어르신을 모으는 게 어려웠다.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 다행히 팀원의 지인이 일하는 주간 보호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의 첫 프로젝트 이름은 <나의 파도>였다. 이 프로그램은 치매 노인을 위한 문화 활동이었다.간략하게 설명하면, 사진 촬영과 그 사진을 컬러링 그림으로 만들어서 어르신들과 함께 색칠하는 활동이다.어르신들은 사진을 싫어한다. 영정사진을 왜 찍냐며 거부감을 보이신다. 그래서 나는 사진이 꼭 사후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전하고 싶었다. 지금 현재를 추억하기 위해 담는 거라고.
그래서 사진을 촬영할 때 그냥 찍는 게 아니라 다양한 소품을 준비했다. 어르신들이 직접 고르시고 우리가 직접 찍어드렸다. 어르신의 사진을 그림으로 만들었고, 본인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어르신이 색칠하셨다. 마지막 활동 때 컨셉 사진과 컬러링을 액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주름진 손으로 액자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시는 어르신들.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되새기셨다. 우리가 알고 있던 노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총명한 눈빛만 떠오르는 걸 지켜봤다. 이상하게도 그 액자에 노인들의 지나온 삶과 감정이 담긴듯한 느낌이 들었다. 활동이 끝나고, 나는 가슴이 조금 떨렸다. 맨 종이에서 끄적거렸던 기획이 무대 위로 올라갔을 때, 묘한 긴장과 설렘을 느꼈다. 아. 기획을 해야겠다. 그렇게 나는 문화기획자의 첫발을 디디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