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흔들리는 것도 좋아 너무 뻣뻣하면 꺾이니까
요즘 나는 흔들리고 있어.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찾아온 번아웃도 아니고, 가끔 찾아오는 슬럼프도 아닌 것 같아. 내 존재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던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흔들리는 거 있지.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흔적들이 다 헛된 짓일까 봐 무서워졌어. 최근에 누군가를 만났는데,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추상적인 가치라서,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아차 싶었거든.
짧은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의 눈빛을 읽었어. 그가 어떤 의도로 말을 했든 간에, 20대의 나는 초라함을 느꼈던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어폰을 꼈어.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데 귀에 하나도 안 들리는 거야.
J야. 너랑 나는 매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나는 전화나 카톡을 수시로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매일 네가 보고 싶은 것도 아니야. 물론 너도 그렇지만.
카톡 메시지가 며칠 동안 읽히지 않아도 전혀 밉지가 않는 거지. 그러다가 문득 네가 생각나는 순간이 있어. 소식을 전하고 싶을 만큼 기쁜 일이 생기거나, 슬퍼지거나, 문득 너의 안부를 묻고 싶어질 때. 그럴 때마다 언제나 너를 찾게 되는 것 같아.
그날도 그랬어. 나는 너에게 밀린 답장을 하고, 잘 살고 있니 하고 늦은 안부를 보냈잖아.
영화 윤희에게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
“뭐든 참기 힘들어질 때가 있어"
그날 밤이 그랬던 것 같아.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작아져서 이 감정을 빨리 해소하고 싶은데
혼자는 도저히 힘들었어. 내가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는 거야. 이상하게 눈물이 계속 나왔어. 난 원래 눈물도 별로 없고 되게 담담한 성격인데. 뭔가 참기가 힘들어져서 너한테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아.
나는 번아웃도, 슬럼프도 아니고
그냥 흔들리는 중인 것 같아.
그렇게 보낸 메시지에 너는 이렇게 답했잖아.
흔들리는 것도 좋아 너무 뻣뻣하면 꺾이니까
J야, 여름 논밭을 자세히 본 적이 있어? 가벼운 바람과 쎄 찬 바람이 뒤엉켜서 엄청난 소리로 논밭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 말이야. 아직 익지 않은 연둣빛 벼들이 바람 따라서 포물선을 그으면서 흔들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어린잎 같은데 꼭 바람을 이겨내는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 모습을 작년 6월쯤에 이곳에서 봤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남해엔 논밭이 흔하거든. 영상으로도 담아놨는데 서울 올라가면 만나서 보여줄게. 네가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때 본 잎들이 내가 된 기분이 들더라고. 흔들려도 괜찮을 것 같은.
침대에서 너랑 카톡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봤어. 왜 눈물이 날만큼 내가 초라해졌을까 하고. 취업을 하고, 다시 퇴사를 하고, 남해에 와서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다시 돌아봤어. 나는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뭔가를 이루고 싶었던 것 같은데..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고, 떠나는 이들을 보면서 불안해졌어.
아무것도 없는 내가 이곳에 남아도 되는 걸까 하고. 이곳 친구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더 크게 그리고 싶은 꿈이 있더라고. 나는 그게 아닌데 왜 혼자를 자처하고 이곳에 있는 걸까.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인생을 사는 게 점점 어렵다고 느껴져. 내 몫을 해내기에는 내 멘탈이 아직은 약한가 봐. 계속 더 잘하고 싶고, 기대치에 못 미치니까 나를 자꾸 망치는 것 같아.
26살의 나는 25살보다 조금 더 잘 해내고 싶은데. 사실 이제 뭘 할지 방황 중이야. 주변 친구들만 해도 다 엇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고. 26살이 되게 애매한 나이 같아. 뭔가 보여주고 싶어도 아무것도 없거든.
우리는 너무 다르면서도 비슷한 면이 있어. 남들한테는 좋은 말을 기꺼이 하면서, 스스로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점.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봐. 네가 그랬잖아. 서로에게만큼은 진실된 사이니까, 보듬고 기대면서 이 벅찬 세상을 살아가자고.
네가 말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랑이 없는 세상은 참 슬플 것 같아.
2022.02.22
남해에서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