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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un 14. 2021

봉우리는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카스파르다비드 프리드리히

  느루야, 일어나 보니 네가 없네. 산에 간 거지? 오늘 등산 가야겠다고 하더니 일찍 출발한 모양이구나. 엄만 자고 또 자고, 배고프면 먹고 나서 다시 자고를 연 이틀하고 나니 이제야 눈 앞이 맑구나. 몹시 피곤했는지 눈이 침침하고 두통이 나고 등이 아팠거든. 이제야 몸이 가볍고 살 것 같아. 그나저나 창 밖이 보글보글 끓는데 땀 뻘뻘 흘리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너무 고되게 오르지는 마. 


  '봉우리'라는 노랫말에 나오잖아.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던, 우뚝 선 그 봉우리를 향해 애써 올랐노라고. 그 봉우리에 올라 내려다보니 낮은 데로 흘러가는 바다와 연기를 뿜으며 가는 작은 배가 보이고, 그리고 내 전부였던 그 봉우리가 그저 다른 봉우리로 이어지는 고갯마루였을 뿐이라고 말이야. 


  높고 먼 곳에 시선을 두면 발 밑 허방을 딛기 쉽지. 그러니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정표를 살피며 조심스럽고 차분히 걸어. 또 가능한 그늘로, 나무 밑으로 다니고 가끔씩 아래를 내려다보렴. 높이 솟은 산 아래엔 그 높이를 지탱하는 깊은 계곡이 있을 테니까. 산이 높은만큼 골도 깊단다. 느루가 산을 오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이 그림이 떠오르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1717~18>


  독일 낭만주의를 열었던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1717~18>야.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지. 그는 거칠고 어두운 바위 위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어. 우리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어. 그저 삶의 간난(艱難)을 지고 있는 어깨와 육중한 바위를 딛고 있는 다리에서 광활한 자연 앞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단독자의 외롭고 고독한 풍경을 읽을 수 있을 뿐이지. 


  그의 뒷모습은 자연스럽게 그가 향한 공간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유도해. 마치 내가 서 있는 듯, 그는 순간을 잡아당겨 무한히 확장된 신비롭고 숭고한 풍광을 보여주지. 저 멀리 아득한 곳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고 시공간이 뒤섞인 압도적이고 신성한 자연이 펼쳐 있어. 그 앞에는 너울이 이는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출렁거리는구나. 느루야, 장엄한 자연 앞에서 이 고독한 남자는 무엇에 귀 기울이고 있는 걸까? 


  역설적이게도 열린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은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내면의 울혈을 보여주지.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부르센샤프트(Burshenschaft) 단복이야. 부르센샤프트는 1815년 독일 예나 대학에 다니던 열혈 애국 청년들이 명예, 자유, 조국이라는 자유주의 이상을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야. 


  19세기 초 유럽은 나폴레옹이 뿌린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억누르느라 바빴단다. 나폴레옹 몰락 후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프로이센과 연합한 빈 체제를 통해 독일 및 이탈리아의 통일에 무력적으로 간섭했고 철저히 감시했어. 현재의 독일은 962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년을 이리저리 찢겨 있었어. 당시 유럽 열강들은 독일 민족이 프로이센이든 오스트리아든 한 나라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은 유럽 내 힘의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국민이 주인인 근대국가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젊은 청년들은 빈 체제의 탄압에 강력하게 맞섰고 무력투쟁도 불사했지. 그 단체가 부르센샤프트야.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모임



  프리드리히는 진보적인 사유와 지성이 억압받던 시대 한복판에서 굴레에 저항하며 자유와 이상을 향해 먼 미래를 내다보는 고독한 단독자를 그렸어. 독립을 향한 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 운동은 1819년 금지됐고 조국 청년들의 신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일환으로 근대 기계체조를 창시했던 얀((F.L.Jahn)은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지. 이로써 프로이센과 독일 연방국가들에는 기계체조가 금지되기도 했단다.  


  느루에게 한 가지 흥미로운 얘기도 해줄까? 영원한 소년, 슈베르트를 그렸던 그림 중에는 저택의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남아 있어. 이는 연주나 공연이 검열받고 자유롭지 못했던 빈 체제 시절, 많은 예술가들이 일종의 동호인 모임을 만들어 각자의 집에서 어울렸기 때문이야. 


  안타깝게도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걸 반대했단다. 그의 거듭된 반대에도 슈베르트가 음악을 포기하지 않자 아버진 경제적 지원을 중단했어. 식사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궁핍과 친구 집을 전전하는 고독한 상태에도 슈베르트는 빼어나고 유려한 곡을 작곡해 우리에게 남겼지. 그런 그를 아꼈던 친구들이 그림 왼쪽에서 볼 수 있는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모임을 만들어 슈베르트를 지원했어. 피아노 앞에서 뒤를 돌아보는 슈베르트의 얼굴이 행복해 보이지? 역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나 봐. 


  슈베르트처럼 프리드리히처럼 자신의 길을 걷는 건 고독하고 힘겨운 일이지. 굳센 근육이 필요하고 말이야. 느루야, 어느 만큼 갔니? 다리 아프지 않니? 머릿속에 번거로운 생각들이 네 다리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동안 꾸준히 운동한 보람이 있을 거야. 네가 오르고 싶은 만큼 힘을 내줄 거야.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 떡갈나무 숲 속의 수도원, 1810>


  느루가 어느 나무 밑에서 땀을 식힌다면, 그 사이 그림을 조금 더 소개해 줄까?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독실한 루터파 신자인 아버지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았어. 아버지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수공업자였고 근면했으며 교리에 따른 절제와 부지런함, 쉬지 않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 아버지가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면 신은 죽음의 형태를 보여 주었구나. 프리드리히가 7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다음 해에는 누이 엘리자베스가 죽었어. 


    신은 그를 한번 더 시험하지. 13세에 스케이트를 타다 얼음이 깨져 프리드리히를 구하려던 동생이 얼음에 빠져 죽게 돼. 그는 평생 그 동생의 얼굴을 지우지 못한단다. 동생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자주 고독했고 내성적이 되었어. 이어 1791년엔 두 번째 누이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났지. 죽음은 그에게 아주 가까웠고 삶은 낯설었어. 


  그래서일까? 이 그림을 봐. 해질 무렵의 황폐한 수도원에서는 쓸쓸한 장례식이 열리고 있어. 마치 죽음에 대한 기록처럼 그는 독일을 상징하는 떡갈나무를 통해 죽음을 보여주고 있구나. 시대의 위협을 피하지 못한 민족의 슬픔을 표현하려고 한 것일까? 독일은 기진해 있었으니까. 한 편의 음유 시를 보듯 그의 작품은 풍경의 껍질이 아닌 속살을 다룸으로 재현이 아닌 은유와 상징이 되었지. 이 아픈 그림은 빌헬름 황태자가 구입했다고 해.


  느루야, 전통적으로 서양미술 장르엔 한우처럼 등급이 있었어. 1등급이 역사화와 성화야. 서유럽 회화 발전의 원인이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성경을 전해 줄 목적 때문이었고 화가들은 왕과 귀족의 하인이었으니까. 이어 인물화, 정물화, 가장 낮은 등급이 풍경화였어. 15~16세기에 등장한 풍경화란 그저 자연을 모방하는 정도로 자리매김되어 있었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 해변의 수도승, 808~10>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달랐어. 그는 나무와 바위에서 신의 얼굴을 탁본했단다. 풍경화를 성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지. 프랑스 조각가인 다비드 당제르(David d'Angers)는 그를 '풍경화의 비극을 발견한 화가'라고 말하기도 했어. 북구 특유의 사색적이고 중세적 아우라가 있는 그의 풍경화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신의 계시 앞에 엎드린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보여주었지.


  1808~10년에 그린 <해변의 수도승>이야. 엄마가 너무나 사랑하는 작품이기도 하지. 하늘은 채찍에 맞아 시퍼렇게 멍들어 있어. 바다는 시간의 풍화를 견디며 한없이 뻗어나가지. 길고 울퉁불퉁한 모래사장에 광활한 바다를 홀로 마주하고 선 수도사가 있구나. 그림에 등장하는 카푸친회 수도사가 입는 옷의 허리띠는 복종과 청빈, 정숙을 상징하는 3개의 매듭이 있어. 그것은 예수를 묶은 끈과 채찍을 암시한단다. 절대적인 신 앞에 마치 한 점 티끌처럼, 한 점 얼룩처럼 왜소한 그에게서 인간 존재는 영겁의 시간과 무한한 공간 사이에 그저 티끌이라는 말이 들려. 


  이 작품 앞에 서면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압도적인 우주의 무한함, 시공간에 펼쳐진 영원성,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경건함이 해일처럼 덮쳐오지. 중년의 남루한 마태의 손을 잡아 성서를 기록하게 한 천사는 죽음과 가까웠던 프리드리히의 손을 빌려 신의 위대함을 기록한 풍경화 한 점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어.

  "공기와 물, 바위, 나무 등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은 나의 목표가 아니다. 그런 대상들 속에 있는 영혼과 감정을 재현해 내는 것이 나의 목표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달을 응시하는 두 사람, 1825~30>


  그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배경을 곧잘 사용했는데 늦가을 숲 속을 산책하다 저무는 달을 바라보는 <달을 응시하는 두 사람, 1825~30>이라는 그윽한 작품도 남겼단다. 슈베르트 <마왕>의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말을 달리는 밤이 이러했을까? 프리드리히의 달은 우리를 판타지로 이끄는 마법의 달이야. 시와 철학, 음악에서 표현하는 매혹적인 달을 떼어다 침실에 걸어놓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그의 풍경화는 북구의 시(詩), 존재가 부르는 숭고한 노래지.


  그의 그림이 가지는 북구의 우스와 독일적 감성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나치의 보호 하에 주목받게 돼. 히틀러는 북유럽 신화를 오페라에 도입했던 바그너를 좋아했고 독일 민족주의의 성격을 가졌던 그를 옹호했거든. '문명의 세척제'라고 불렸던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는 의식적으로 묻혔어. 줄자든 저울이든 과거의 무게와 길이를 재는 것들은 모두 지하에 묻어 버렸단다. 한동안 인간들은 방향감각을 잃고 좌충우돌했어.


  1970년대에 들어 사람들은 평정심이라는 나침반을 손에 들고 지하실의 두꺼운 나무판자를 열었어. 그리고 그의 풍경화가 아직 바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지. 숭고한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먼지를 털어내고 그의 그림을 다시 벽에 걸었단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창가의 여인, 1822>

  


    느루야, 연구를 지속하지도 않고, 취직도 하지 않고 집에 있으려니 여러 생각이 들지. 친구들의 시험 합격 소식도, 유학을 떠난다는 소문도, 학위를 취득했다는 연락도 모두 작은 파문일 거야. 내가 내 길을 잘 걷고 있는지 의심이 들 거야. 하지만 지금 느루는 땀을 식히고 다시 걷고 있겠지? 지금의 네게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해서 말이야. 숨이 차고 근육이 떨리고 입에 단내가 나겠지. 그러면서 그만 내려갈까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넌 끝까지 완주할 거야. 


  봉우리에 오르려고 산을 찾은 것이 아니라 느루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갔을 테니까.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갖고 망망대해 앞에 홀로 선 수도사처럼 지신의 내면을 고요하게 하려 갔을 테니까. 


  느루가 내려오면 엄마가 <창가의 여인, 1822>이라는 이 작품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게.


  느루야, 엄마가 '봉우리'란 노래의 노랫말을 들려주었지? 그 마지막 가사는 이거란다.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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