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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Apr 19. 2021

머리끈이 묶고 있는 건?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59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2)

  아이구 세상에! 방마다 머리카락 투성이네. 다 큰 딸이 있는 집엔 돌돌 말린 스타킹 아니면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거실을 굴러다닌다더니 이거 다 느루 머리카락이야. 아빠도 오빠도 엄마도 머리카락이 10cm도 안 되는 거 알지? 떨어진 이 긴 머리카락 모으면 엄마 가발도 만들겠다. 한 타래구먼. 내 머리에 붙일 수도 없구...


  그러고 보니 무심했는데 느루 머리가 제법 길었구나. 등에 치렁치렁한 걸. 어릴 땐 숱이 없어 행여 남자아이로 볼까 봐 일부러 고운 머리띠를 해 주었는데 말이야. 윤기 나고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보니 느루가 어느새 숙녀가 되었네. 짧은 커트 머리가 주는 중성적 매력도 적지 않지만 버들가지처럼 나부끼는 아가씨의 풍성한 머리가 유혹적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누르면 가락이 튕겨 나오는 학슬 위의 명주실 마냥 바람만 지나가도 머리카락이 휘파람을 부는 듯하니까.


  엄마가 아가씨일 적, 여인의 뒷모습에 반해서 쫒아오는 남자의 칠팔 할은 여인의 찰랑거리는 머리 때문이었어. 오죽하면 '긴 머리 소녀'라는 노래가 있었겠니. 그만큼 올올이 빛나는 긴 머리카락은 젊음을 상징했지. 물론 그 내면엔 가부장적 전통이 물고 온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미(美)의 개념이 들어있긴 했지만 말이야. 옛 여인들이 "가체"라는 커다란 다리를 얹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지 몰라.  


  아쉽게도 너무나 짧은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문득 이 그림이 생각난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오귀스트 르누아르 <목욕하는 여인들, 1887>


  오귀스트 르누와르(Piere Auguste Renoir, 1841~1919)의 <목욕하는 여인들, 1887>이란 그림이야.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빚듯 물이 자신의 생기로 빚어 바위에 올려놓은 님프들이지. 이 여인들에게 어떤 명품 옷을 입힌다 해도 지금의 누드만큼 아름답진 않을 거야. 손을 대면 우유가 흘러내릴 듯 얇고 보드라운 피부, 휘핑크림 위 체리처럼 얹힌 유두, 물방울들이 또르르 구르다 뭉친 듯 탄력 있는 둔부, 특히나 땋아 내리거나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갖는 풍성한 젊음을 바라보면 아름다움은 언어를 빌리지 않고 우리의 감각 속으로 파고드는구나 싶어.


  수많은 누드 작품이 있지만, 또 그 누드 작품의 모델이 되었을 수많은 아름다움이 있지만 관능미와 생명력이 공존하려면 역시 르누아르의 붓을 빌려야 해. 르누아르가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방식은 '자연'에 본적(本籍)을 두고 있지. 자연이 허락한, 디오니소스적 생(生)의 열망이 분출하는 순수한 에로스야. 그의 붓은 살아있음을 찬미하는 노래요,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는 목소리지. 자연 속에 한가로운 저 여인들의 표정을 봐. 누구의 시선도 의식치 않고 자연과 인간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어. 안정적 구도와 단순한 즐거움을 통한 삶의 해의반박(解衣槃礡)이지.


  게다가 화면 오른쪽 뒤에서 머리를 틀어 올리는 여인의 모습은 르누아르가 얼마나 여인의 아름다움에 섬세했고, 그 아름다움 자체를 존중했는지 알 수 있어.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1903~1983)가 말한 생물학적으로서의 알몸인 나체(Naked)와 예술적 상상력으로 덧입혀진 누드(Nude)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달까? 그야말로 누드의 품격을 보여주지. 근대의 산업화와 현대의 자본주의를 지나오며 '누드(Nude)'라는 이름은 오염됐고 심한 얼룩이 묻었어. 한동안 신화를 빗대어 격조 없이 노골적인 여인의 벗은 몸을 보여주더니 현대는 일회적으로 소비하는 대상으로서의 선정적인 누드로 도배하더구나. 어디에도 삶을, 대상을 존중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


도미니크 앵그르 <그랑 오달리스크, 1814>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만 하나?”


  오죽하면 이런 광고로 여자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했겠니! 이 광고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현대미술관(section) 내 전시된 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5%인데 이 미술관에 전시된 누드화의 모델 85%가 여성인 걸 비판하고 있어. '게릴라 걸스'라는 다수의 익명 여성 예술가들이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 1814>를 패러디해 미술계 안의 남녀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비명이었지. 남성 중심적인 미술사에서 여성은 관음(觀淫)의 대상이 되거나 산업사회에서 그저 소비와 소유의 이미지로 자리매김당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야. 이 이야기는 엄마가 현대 미술을 다룰 때 자세히 말해줄게.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니 엄마도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구나. 느루도 기억하지? 엄마의 긴 머리를. 어릴 적부터 노상 머리를 길러온 엄마는 손을 힘껏 벌려도 손아귀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숱이 많다는 할머니의 푸념을 듣곤 했구나. 할머닌 자주 엄마의 숱 많은 머리를 양갈래로 나눠 머리끈으로 묶어주시곤 했어. 그리곤 "나가 뛰어놀아라." 하셨어.


  누구나 그렇듯 여자아이는 으레 머리끈을 갖게 되지. 아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앳된 엄마들을 봐. 손목에 붉거나 노란 머리끈이 팔찌처럼 감겨 있어. 엄마들은 이른 아침,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가지런히 양갈래로 머리를 땋아주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주었을 거야. 자신의 품을 떠나 세상과 마주하게 될 아이가 세상과 대화하는 데 방해받지 않도록, 어떠한 선입견 없이 남자든 여자든 손 위든 또래든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도록. 그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타인에게 가는 첫걸음이지. 르누아르가 리모주의 정통 도안사에서 인상주의 화가가 되는 첫 붓 자국을 캔버스에 남긴 것처럼.


오귀스트 르누아르 <햇빛 속의 누드 여인, 1875~76>


  <햇빛 속의 누드 여인, 1875~76>이야. 느루야, 어떠니? 긴 머리를 풀고 나무 아래 있는 모습인 듯한데 <목욕하는 여인들>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지? 뭐랄까... 누드임에도 불구하고 보드랍고 관능적인 느낌보다 거칠고 실험적인 이미지가 강하지. 심지어 그는 "여인의 몸을 그릴 때는 껴안고 싶은, 풍경을 그릴 때는 그 안에서 산책하고 싶어 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고 말한 유미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의 날 것이 여인의 피부를 초록, 노랑, 분홍, 흰색으로 물들이고 있어. 동그란 어깨와 더 동그란 가슴, 그리고 두툼한 아랫배까지 드러난 그녀의 몸은 빛의 캔버스지. 빛은 그녀의 구석구석을 핥듯 쓰다듬고 애무해. 르누아르 앞에 선 모델은 그녀 '안나'가 아니라 빛, 그리고 현란한 빛의 율동.


  하지만 당시의 비평가들은 무대 위 조명을 받고 있는 배우에게만 관심이 있었단다. 그 배우를 비추는 조명의 기울기, 명도, 색조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어. 조명에 의해 배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극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하지 않았어. 당시 그들의 감각은 살롱전으로 대표되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게으른 미학으로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단다. 르누아르가 새로운 화풍인 인상주의를 실험한 이 작품에 대해 '부패한 상태의 시체처럼 변질된 살덩어리' 또는 '매 맞아 멍든'이라는 조롱과 악평으로 자신들의 둔감을 감추려고 했어. 그들의 나쁜 시력으로는 "그림이 던지는 시대성"을 볼 수 없었지.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인 르누아르는 아방가르드적 정신을 가지고 다양한 진로를 모색했단다. 그의 실험을 통해 우미(優美)한 여인들이 태어났지. 시간은 앞으로 앞으로 갔고 그의 손이 닿은 모든 여인들은 더욱더 상냥하고 당당해졌어. 이제 팸플릿처럼 빛의 목차를 보여준 햇빛 속 안나의 머리카락을 느루와 내가 단정하게 묶어줄까? 나가서 그 누구와도 뛰어 놀 수 있도록. 그래서 그녀가 낡은 도덕에 갇히지 않고 과학이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 타 보통 선거권이 주어지는 새 시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시선의 질주를 응시해 볼까?


오귀스트 르느와르 <우산, 1885>

 

  오래간만에 내리는 비인가 봐. <우산, 1885>에서 짜증 난 얼굴은 찾을 수 없구나. 파리는 비가 잦은 도시가 아닌데 다들 우산을 준비한 걸 보니 미리 일기예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제 막 부슬비가 내리는지 중앙에 있는 여인이 우산을 펴려고 하네. 어린 두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펼친 우산은 무척 가볍고 상쾌해 보여. 이 시기쯤 무거운 강철이 아닌 가벼운 재질의 우산이 발명됐다고 하지. 청회색이 달리듯 연이은 우산, 전경의 여인이 팔에 낀 바구니, 어린 소녀가 들고 있는 동그란 후프들이 화면에 동글동글한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어. 부슬비가 내리는 날, 명랑하고 촉촉한 도시의 모습이야.


  우산도 쓰지 않고 우릴 바라보고 있는 전경(前景)의 소녀를 들여다보자. 봉긋 솟아오른 가슴과 코르셋으로 조였을 잘록한 허리가 19세기에 묶여있다면 총명하고 그윽하게 관자(觀者)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은 미래에서 왔구나. 침착하고 호기심 어린 그녀 얼굴 옆으로 가지런히 땋아 내린 머리카락은 아마도 조금 전 느루랑 내가 안나의 머리를 땋아주면서 사용했던 바로 그 머리끈으로 묶었을 거야.


  느루야, 동그란 머리끈은 머리를 묶는 데 사용되지만 실제로 머리끈이 묶고 있는 건 '낡은 인습'인지도 몰라. 아무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비 내리는 도시 한복판을 걷고 싶은 여자에게 르누아르가 준 선물은 1g짜리 머리끈이었는지 모르지. 시대가 준 책무와 제약을 묶고, 봉긋 솟아오른 가슴만큼이나 터질 듯 탐스럽고 찰랑거리는 욕망을 향해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말이야. 누군가의 아내, 엄마, 딸만이 아니라 '안나'로서 '빛'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도 아름답다고 말이야.


  느루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했지? '독립적인 시간'에 놀랐지? 아마 스물여섯이 되도록 아무 목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적이 거의 없을 거야. 입학과 졸업을 반복하고 시험과 평가를 습관처럼 치러 냈을 거야. 오늘은 머리를 묶고 청소기로 거실을 밀어볼래?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세상으로 나가서 누구와도 함께 뛰어 놀을래?


 청소기에 밀려 봄이 가고 있단다. 새 머리카락이 자라듯 또 다른 계절이 오고 있단다.



*르누아르의 <뱃놀이에서의 점심>이 나오는 영화 <아멜리아>입니다. 쉬실 때 감상해 보세요. 유튜브 헤더의 터닝페이지를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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