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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ul 05. 2021

작은 새는 기차를 타고 떠나지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이른 새벽, 이슬이 나뭇잎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일까? 아니야, 비가 유리창에 그림 그리는 소리구나. 느루야, 엄만 맥주 한 캔을 들고 베란다로 나왔구나. 왠지 잠이 오지 않아. 아마 빗소리 때문이겠지. 방문을 두드려 널 깨워도 될까? 눈 비비고 일어나 엄마와 딸이 아닌, 오래된 친구처럼 엄마 수다를 들어주겠니? 여기 땅콩 한 접시도 놓아두었어.


  엄마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복을 입었단다. 짙은 남색 치마에 흰 웃옷과 빳빳하게 풀 먹인 칼라를 했지. 목을 두른 칼라에선 베일 듯 서늘한 푸른빛이 돌았어. 털털했던 엄마완 달리 엄마 짝꿍은 유달리 고아(高雅)했구나. 깔끔하게 교복을 입은 학생이 그녀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녀는 그중 가장 단정히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어. 교복을 수녀복처럼 입은 그녀와 교복을 운동복처럼 입었던 엄마는 시낭송 동아리에 들어갔어. "아, 야, 어, 여"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둥글게 입을 벌려 시를 낭송하면 공기 중에 퍼져나가는 소리의 날갯짓. 춤추는 자모음은 칙칙한 교실에 노을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별을 쏟아지게도 했어. 학교라는 거대한 콘크리트조차 물레 바늘에 찔려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사는 환상의 성(城)이 되기도 했으니까.  


  당시 엄마는 방과 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나 <캔디>를 읽곤 했단다. 만화책을 읽다 보면 곧잘 첫 고속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내리는 상상을 하곤 했구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 교실 창문 커튼을 내리고 마리안느 훼이스풀의 곡 <This little bird>도 자주 들었지. 들어보련?



 오십 중반인 지금, 그때 들었던 그 음악을 베란다에 앉아 다시 듣고 있어. 애절한 음악과 낭만적 사랑이 떠오른다.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이 음악을 들으면 시간과 압력에 의해 화석이 되어버린 첫사랑이 다투어 소환되겠지? 누구나 그렇듯이 아직 깊이 자는 느루에게도 첫사랑이 있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첫사랑'하면 떠오르는 남자가 있네. 오늘은 가슴속 깊이 예술과 사랑이라는 뇌관을 품고 짧은 순간을 살아간 고독했던 남자의 이름을 불러볼까?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1818~19>


  피카소나 반 고흐의 작품만큼이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이야. 만일 느루가 실제로 이 그림을 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금방 눈물을 쏟고 말 거야.

 

  무한한 애수가 깃든 목과 어깨, 우아하고 상념이 담긴 긴 손가락, 점점 말을 잃어가는 입술, 고고하게 살짝 기울어진 코, 무언가를 바라보지만 초점을 알 수 없는 푸른 눈, 이 모든 이미지를 상냥하게 감싸는 크고 넓은 모자, 갈색과 초록이 밀거나 당기지 않고 스며들 듯 어울린 배경까지 절제된 우수와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지. 눈동자가 없는 그녀의 푸른 눈은 아직 모딜리아니를 추억하고 있을까?


  그녀의 눈동자 없는, 푸른 아몬드 같은 눈에 대한 유명한 대사가 있었지.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될 때, 눈동자를 그리겠소."


  모딜리아니의 작품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특징이 긴 목과 타원형의 얼굴, 무너져 앉은 어깨 그리고 눈동

자가 없는 눈이야. 긴 목과 타원형의 얼굴은 아프리카 원시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 아프리카 원시 조각과 비교해 보면 검은 눈에서 우수를 발견할 수 있어. 별처럼 신비롭지. 그에게 잔 에뷔테른은 신비하게 빛나는 별이었을 거야.


   또 이 그림 속 여인의 얼굴과 목, 어깨는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의 모델인 시모네타의 영향이라는 말도 있단다. 어떠니? 보티첼리의 영원한 짝사랑이었던 피렌체 최고의 미인 시모네타에 대한 오마주라는 생각이 드니? 일어나면 화첩을 뒤져보자.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중 부분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어. 몹시 가난했고 어릴 때부터 허약했지만 그림에 재능이 있었구나. 14세에 병으로 학교를 중단했고 17세엔 결핵으로 요양하게 돼. 안타까웠던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잦은 여행과 요양으로 모딜리아니의 몸을 돌보아주고 그가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 주었단다. 그가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그리고 22살에 파리로 가기까지 어머니의 후원은 큰 힘이 되었어.


  그 때나 지금이나 언덕 위의 집은 임대료가 쌌나 봐. 1906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아틀리에를 빌려 조각을 시작했구나 이때 그는 아프리카 원시 토속 예술과 만나게 되지. 하지만 돌가루가 날리는 조각은 몸이 약했던 모딜리아니의 폐를 상하게 했어.


   그는 조각가에서 화가로 작업형태를 바꾸고 1912년 파리 가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단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초상화 한 점 당 10프랑 밖에 받지 못하는 가난한 예술가의 삶이 시작되었지. 그는 작업할 때,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고 해.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고 수정하는 법도 없었다는구나. 동물적인 본능으로 대상의 본질을 잡아냈고, 캔버스 위에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수성이 숨쉬었지. 하지만 내성적이었던 그는 슬픔과 좌절을 다룰 때 술과 마약을 이용했어. 유머 감각이 있었지만 캔버스에는 드러나지 못했구나. 게다가 원래 허약한 몸에 방탕한 생활은 급속하게 건강을 악화시켰지. 그는 현실을 살기엔 너무나 낭만적이었고 세상에 무신경했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여자의 머리, 1910~11>


 느루야, 오늘은 사랑 얘기를 하려고 했으니 보헤미안 같은 모딜리아니의 사랑에 대해 말해줄게. 자유 로우나 위태롭고 술과 마약에 절어 있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모든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했지만 가슴속에 자리 잡은 한 여인의 사랑만을 갈구했던 그는 보헤미안 남자였거든. 그는 34살에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20세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을 만난단다. 부유한 집 딸과 방탕하고 가난했던 모딜리아니의 만남은 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지. 어느 부몬들 애지중지 기른 딸이 술과 마약을 하는 데다 몸도 약한 화가와 사귀는 걸 허락하겠니?


  하지만 잔은 쇠약해진 모딜리아니의 유일한 뮤즈였고 온전한 사랑이었어. 잔과 함께 한 3년 동안 그는 꺼져가는 불꽃이 마지막 화려하게 피어나듯 예술가로서 폭발적인 열정을 캔버스에 쏟아부었으니까. 엄만 대체적으로 여인의 <나부 裸婦>를 옮기지 않는 편이지.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벗은 여자'로 인해 작품성이 가려지니까. 하지만 오늘은 화사하게 피었다 스러진 모딜리아니의 <나부>를 소개할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나부, 1917~18>,


  그는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이고 평면에 가까운데도 탄력이 느껴지며, 가는 선으로 형태를 강조했는데도 분위기가 몽환적인 여인의 나부를 탄생시켰어. <누워있는 나부, 1917~18>의 풍만하면서도 잔뜩 올라붙은 가슴의 탄력을 보렴. 완만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곡선과 상체와 하체의 틀어진 각도, 와인이 고일 듯한 배꼽, 동그란 엉덩이와 아슬아슬한 다리 사이 검은 음모도 가리지 않았구나. 절대 당뇨에는 걸리지 않을 것 같은 꿀벅지도 보이는구나.


  게다가 양 팔을 올린 자세는 여인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듯이 느껴져.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 "나르시시즘에 도취된 여인"같아. 유혹도 아니고 거절도 아닌, 자신의 육체와 정신 모두를 사랑하는 드문 여인을 그렸다는 게 엄마의 생각이야. 성(性)을 상품화하는 현대의 사진이나 그림은 뇌쇄적인 눈과 섹슈얼한 입술을 강조하거나 자극적인 자세를 도드라지게 하기도 해. 그런데 모딜리아니의 그림엔 친밀함이 있어. 눈을 감은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싶어.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겠어요? 그리고 곁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물론 엄마의 주관적 느낌이지만 창작자의 손을 떠난 작품은 그것을 소비하고 누리는 사람에 의해, 각자의 깊이대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니? 물론 예술적 기준이 있고 미학적 아름다움의 준거가 있지만 작품 감상도 예술을 완성시키는 하나의 요소이니까.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나부, 1917>


  느루야, 아까 엄마의 고교시절 얘기를 해 주었지? 뒷얘기를 해줄게. 엄마가 고 2 때, 그녀와 함께 했던 동아리에서 시낭송의 밤이 있었구나. 이웃에 있던 남학교 문학서클 회원들도 초대되었어. 그녀가 시낭송을 하려고 무대 중앙으로 걸을 때, 객석에서 "와아~"하는 감탄사가 들렸어. 그녀의 걷는 모습이 너무나 단정하고 정갈해 감탄사와 더불어 마음을 빼앗길 정도였구나. 시낭송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는데 엄마 책가방 옆구리에 고이 접은 붉은색 쪽지가 있더라고 했어. 이웃 학교 남학생이 보낸 쪽지였지.


  그때만 해도 우린 소심하고 겁이 많은 데다 남녀 학생의 교제가 철저히 금지되던 때였기에 쪽지에 쓰인 데로 찾아가지도, 아는 척하지도 못했어. 다만 학교 앞에 웬 남학생이 따라오며 "저..., 저..." 하다가 돌아가곤 하던 모습을 볼 수 있었지. 새침했던 그녀는 얼굴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그저 발걸음을 재촉하기가 바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학생은 학교 앞에 보이지 않았어.


  대학을 갔고 아직은 신입생의 풋기가 남아있던 1학년 가을, 세종문화회관 지하에서 민화 전시회가 있었단다. 그림을 좋아했던 엄마와 그녀는 애써 전시장을 찾았어. 민화 속 용맹한 호랑이와 순박한 호랑이 모두 우리 민족의 고졸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기쁘게 보고 나오는데 우리의 발 밑에 장미꽃이 툭 떨어지지 않겠니? 고개를 들어보니 나선형으로 된 계단 1층에 그 남학생이 웃고 있었어. 그녀는 발 밑에 떨어진 장미꽃을 손에 들고 세종문화회관을 나섰어. 그날은 오늘처럼 가는 실비가 내렸구나. 하지만 그녀는 일주일 뒤, 만나기로 약속한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단다. 기차역을 건너다 사고가 났다지 아마...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자화상, 1919>


  모딜리아니는 1920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었어. 모딜리아니가 죽기 전 타원형의 우아한 얼굴을 가진 그녀는 죽음이 가까이 온 그에게 말하지.

  "천국에 가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 드릴게요."

  얼마 뒤, 잔 에뷔테른은 그녀 부모님의 집 5층에서 뛰어내려 그를 뒤따라갔어. 그녀의 몸에 8개월 된 아이가 있었구나.


  아직도 비는 쉬지 않고, 넌 일어나지 않고, 그 시절 유치하지만 순수했던 그녀의 남학생 기억이 희미하구나.   첫새벽, 기차는 쉬지 않고 먼 곳으로 떠날 테고 그는 그 기차에 타고 있겠지? 붉은 쪽지와 더 붉은 장미꽃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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