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외
간 밤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이른 아침,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개찰구를 향했어. 10시에 잡혀 있는 강의 장소 근처에서 친구랑 먼저 만나기로 했거든. 그 친구가 강의 장소로 데려다 주기로 하고 말이야. 마중 나온다던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5분 여 밖에 남지 않아 서둘렀지. 계단을 내려가는 데 팔이 빠지는 것 같더라. 루돌프가 싣고 온 산타 선물 보따리도 엄마 오른팔에 걸친 가방만큼 무겁지는 않았을 거야. 두꺼운 미술 책과 강의에 필요한 교재 파일, 텀블러, 필통, 치약, 칫솔, 먹다 남은 샌드위치까지 물건들이 한가득이었거든.
무거운 가방을 한쪽 어깨에 바짝 걸치고, 핸드폰을 들어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를 검색했어. 막 개찰구로 몸을 트는 순간, 엄만 세게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단다. 가방 안에 있던 물건들이 좌르르 쏟아졌어. 홈에 슬라이딩하는 야구선수처럼 교재 파일은 개찰구 밖으로 미끄러지고 텀블러는 뎅굴뎅굴 굴렀어. 어찌나 요란한 소리를 내던지 수면제를 먹고 자던 사람도 발딱 일어났을 거야. 주변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지 뭐야. 엄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 무릎을 쓰다듬으며 그저 "아야, 아야."이랬다니까. 한 눈 판 게 잘못이었지. 누굴 탓하겠니!
엉거주춤 일어서니 짐 실은 유모차를 앞세우고 뻘쭘하게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어. "아이고, 미안해요." 하시네. 뭐라 할 말은 없는데 영 억울한 기분! 지하철에서 나오던 승객들은 지뢰밭을 지나듯 조심조심 디디며 쏟아진 물건을 피해 밖으로 나갔어. 그제야 창피하더라고. 다행히 기다리던 친구가 짐을 챙겨주어 엄만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지하철을 빠져나왔단다.
느루야, 친구랑 나란히 24시 카페에 앉았어. 역시 인성(人性)은 탄수화물에서 나와. 그 법석을 떨고도 따뜻한 곳에서 달달한 치즈케이크를 먹으니 새삼 너그러워지고 세상도 달콤하게 보이네. 카페 창 밖 하늘만 엄마의 멍든 무릎처럼 푸르뎅뎅하고 옅은 주홍빛으로 물들었구나. 약하고 불안정한 인간에게 거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최면! 바로 그런 하늘이 펼쳐졌어. 꼭 이 그림같이.
느루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하늘과 바다는 맞닿아 있어. 푸른 안개가 화면을 전체적으로 감싸며 막 떠오르기 시작한 어린 해를 보여줘. 선홍빛으로 흔들거리는 해는 너울대는 바다의 물결 위에 빛의 파편을 흩어 놓았구나. 빛 사이사이로 짧고 거칠고 굵은 터치를 통해 야생적인 바다의 이(齒)가 보여. 바다가 사나운 이를 드러내어 덥썩 물기라도 한다면 노를 저으며 항해하는 작은 배 두 척은 당장에라도 두동강이가 날거야. 정박해 있는 배들의 윤곽선은 흐릿하고 화면 안의 모든 형태는 미세하게 떨리면서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무너뜨려.
르 아브르의 새벽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가 그렸어. 그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야. 느루야, 빛의 조련사였던 인상주의자들은 완전한 검은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어두운 밤을 그릴 때도 검은색은 쓰지 않았어. 느루야, 자세히 봐. 배 두척은 검은색이 아닌 짙은 청회색으로 표현했어. 미묘한 색감의 차이가 느껴지지?
모네가 1874년 젊은 화가들의 첫 그룹 전에 이 작품을 출품하였을 때, 전시를 관람한 비평가 루 르로이(Louis Leroy)는 "풍경은 없고 인상만 있구먼."이라는 말로 조롱했어. 미술사의 거대한 산맥인 'impressionism art(인상주의)'는 이렇게 모네의 <인상, 해돋이, 1872>라는 제목에서 탄생했구나. 조롱했던 루 르로이가 역설적이게도 인상주의의 산파였던 셈이지.
이 전시회에 참가한 까미유 피사로,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레데리크 바지유 등의 몇몇 젊은 청년들은 기존의 아카데믹한 화법을 버리고 그들이 본 새로운 세상에 관람자들을 초대하기 시작했어. 물론 대부분은 코웃음을 치고 초대장을 찢어버렸지만, 예민한 더듬이를 가진 소수의 예술가들은 기차를 타고 새 시대가 달려오는 소리에 흥분했구나.
모네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근처 서북부 항구 도시인 '르 아브르'에서 지냈단다. 유년시절, 바닷가의 하루란 얼마나 변화무쌍했겠니?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과 물빛, 짭조름하면서도 달큰한 공기의 냄새, 구불거리는 해안선, 바람과 폭풍에 깎여 나가는 시간들, 그 시간과 삶의 압력을 버팅기는 활기찬 사내들의 근육과 땀, 이 모든 것들을 그의 눈은 놓치지 않았구나.
느루야, 위의 두 그림 볼래? <큰 시거를 물고 있는 남자의 캐리커처, 1855>엔 우리가 아는 모네는 없어. 오히려 관습적인 장르를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 보다 더 유쾌하고 익살스럽게 그린 전문화가가 있을 뿐이야. 하지만 스무 해가 지난 작품인 왼쪽의 <아르장퇴유의 요트경기, 1875>를 봐. 같은 모네의 그림인데도 확연히 달라. 개성적인 그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지. 빛의 산란으로 물빛에 잘게 부서지는 요트의 그림자를 붓이 바다 위를 달려가듯 그렸어. 모네가 처음 빛의 찰나를 잡아 화폭에 옮겼을 때, 고전적 어법의 그림에 익숙한 사람들은 모네의 그림을 벽지만도 못한, '그리다 만 그림'이라고 맹비난했단다.
그럼 모네는 언제부터 이렇게 달라졌을까? 모네가 처음부터 빛에 관심을 가지고 화사한 수련이나 빛의 팔레뜨인 건초더미를 그렸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야. 그는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끄 루이 다비드의 문하생으로부터 아카데믹한 강의를 듣기도 하고, 위 그림처럼 대중적인 캐리커처를 그려 비싼 값에 팔기도 했거든.
모네가 성장하던 1850년대의 파리는 무지막지한 산업화가 진행 중인 시기였어.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들어섰고, 도시 주변엔 쓰레기와 전염병이 포도주병과 함께 뒹굴었어. 기차는 매 시간마다 보퉁이를 들고 일자리를 구하러 나선 허름한 차림의 앳된 소녀들을 꾸역꾸역 토해냈지. 그는 이런 '시대의 그늘'에 관심을 기울였단다.
느루야, <석탄을 내리는 남자들, 1875>을 보렴. 센강에서 석탄을 지고 운반하는 남자들의 모습이야. 인상파 특유의 짧고 거친 붓질이 느껴지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수평, 수직, 대각선의 균형과 먼 곳이 희미해지는 원근법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는 고전적 형식이 강한 그림이지. 이렇듯 전통을 따르는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화면엔 선명하고 진보적인 어둠이 있어. 모네는 그들을 개인이 아닌 프랑스 근대 혁명이 낳은 시대의 조산아 '군중'처럼 묘사함으로써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양극단으로 벌어진 사회 구조를 보여주었단다.
이런 산업화의 흐름이 근대 파리를 형성하는 몸통이었다면 과학의 발달은 그 몸통이 달릴 수 있게 하는 바퀴였어. 과학의 발달은 시공간을 압축한 도깨비방망이처럼 무엇이든 재현할 수 있는 사진과 휴대용 튜브 물감을 뚝딱 만들어냈지. 눈 밝은 모네는 시대를 재현해 내지 않고 시대의 증인이 되어 이 변화를 어떻게 그릴까 고민했어. 모든 것은 빠르게 변했으므로 고정된 것, 견고한 것, 분명한 것은 오히려 금방 부수어질 것들이었지.
고민하던 그를 고정된 실내에서 변화무쌍한 야외로 내 몬 것은 풍경화가 외젠 부댕(Eugene Boudin)이야. 모네는 부댕을 만나면서 '빛'에 주목하게 됐어. 부댕은 모네를 이끌고 자연을 직접 관찰해 보게 했고, 자상하고 다정하게 예술세계로 인도했단다. 느루야, 인상주의를 다른 표현으로 플랭 에르(plein-air) 즉 '외광파'라고 한 건 빛의 변화를 쫓아 자연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이야.
이 시절,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모델로 따사롭고 활달한 자연 풍광이 어우러진 아르장퇴유의 걸작들이 쏟아져. 그의 빼어난 기량이 돋보인 <아르장퇴유 근처의 양귀비 들판, 1873>을 소개해 줄게.
50 ×65cm의 자그마한 그림이야. 한데 이 자그마한 그림에서 넓이를 포함해야 제 맛이 나는 '흐드러지다'라는 단어가 연상되지 않니? 무거운 일상을 가볍게 받치는 하늘, 잎이 빽빽한 나무들이 줄 서 있는 언덕 아래에 양귀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어. 누가 더 돋보일 욕심도 없이, 무리 지어 핀 꽃잎은 석양처럼 붉은 빛깔을 토해내. 나풀거리는 붉은 꽃잎은 양산을 어깨에 걸친 여인과 모자 쓴 아이를 뒤쫓고 있구나. 모네의 아내인 까미유와 아들인 장이야.
느루야, 모네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의 그림은 멈춰있지 않아. 하늘도 나무도 꽃도 언덕도 여인도 모두 떨고 있어. 바람이 소슬한 언덕 위, 바람의 속도보다 모네의 붓질이 더 빠르게 양귀비꽃을 흔들어. 양귀비꽃은 미세하게 떨면서 꽃잎의 형태를 무너뜨리지. 형(形)과 공간의 경계 없는 흔들림이 까미유와 장을 언덕 위에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거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대상은 형태를 깨뜨려 빛의 순간과 대상의 본질을 보여주려는 몸부림이거든. 이것이 그의 작품을 인상파의 시작, 또 멀게는 추상화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야.
현대에 와서 인상파를 연 화가로 알려진 모네는 실은 아버지 뜻을 저버리고 화가의 길로 들어섰어. 또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인 까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와 결혼했지. 화가 난 아버지가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끼니를 잇기 어려웠고 여인숙에서 쫓겨나기도 했어. 그는 비관한 나머지 센강에 투신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그리지 않았어. 끊임없이 현재의 찰나를 그렸고, 결국은 불멸의 작품들을 남겨 인상파의 효시가 되었지. 그의 현재는 굉음을 내며 앞으로 질주하는 기차에 빛이 부딪치는 순간이었고, 그 순간을 붓으로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어. 그에게 삶이란,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란 '빛의 순간'이었어.
이제 까미유에 대한 절절한 사랑 고백, <산책, 1875>도 볼까? 느루야, 이 작품 속 모델은 역시 까미유와 아들 쟝이란다. 초록 우산을 들고 공기 중에 둥실 떠 있는 듯한 까미유의 모습은 눈부시구나! 그림을 세세히 살필 사이 없이, 그녀가 우리의 시야에 훅 떠 오는 느낌이지.
빛이 튕겨 나오는 드레스 자락은 손댈 수 없이 가벼워 보여. 그녀는 종이로 접은 하얀 새야. 풀밭에 어린 그녀의 그림자는 현실을 디디고 있는 가녀린 새의 발자국. 바람이 불면 푸르륵 하늘로 날아오르겠지. 그녀가 아들 장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할, 그녀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었을까? 모네의 작품이 나왔던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서 데이비드가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유는 높은 곳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떨어질 때의 충격이 두려워서라고 한 것처럼 모네는 그녀의 부재가 두려워 거친 붓질로 멀리 구름을 날렸던 것일까?
모네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했어. 어려웠던 시절을 견뎌준 그녀에 대한 신뢰는 누구도 깨트릴 수 없었지. 그는 사랑하는 까미유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자신의 작품에 그녀의 모습을 담는 것뿐이라고 까지 말했으니까. 하지만 가녀린 새였던 까미유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새장 문을 열고 멀리 날아갔어.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느루야, 아내를 무척 사랑했던 모네는 친구들과의 우정도 깊었단다. 그중 마네와는 형과 동생 사이처럼 가까웠다고 해. 모네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마네가 그의 동생에게 모네의 작품을 구입하자고 청한 편지가 남아있어. 둘은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모네의 영향을 받은 마네가 1874년 <아르장퇴유>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어. 모네는 아르장퇴유에서 중고 보트를 사 센 강에 띄우고 곧잘 그 안에서 그림을 그렸다는구나. '선상 화실'이라고 해야 하나? 에드와르 마네의 <선상 화실에서 그림 그리는 끌로드 모네, 1874>라는 작품이 남아 있단다.
화가들이 으레 야외에서 스케치를 끝내고 화실로 들어와 색을 입혔던 것과는 달리, 빛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던 모네는 아예 보트에 이젤을 세우고 촉촉한 대기와 빛에 반사된 형형한 물빛을 그리곤 했대. 이 작품은 다소곳이 앉아있는 아내 까미유와 함께 모네가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구나. 모네는 참 낭만적이다, 그치? 이 작품을 그린 마네는 프랑스 화가의 전통적 등용문이었던 살롱전 입상을 위해 인상파 전시회엔 그림을 출품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미 그의 그림엔 너울대는 보트의 그림자와 나무의 초록빛, 맑은 하늘이 물에 번져 강물에 여름의 순간들이 반짝이고 있어. 강물에서 캔버스로 건져 올리는 푸른 여름 말이야.
느루야, 현재 우리에게 인상파 화가들의 우정은 의미가 깊어. 그들은 서로의 우정을 통해 당대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던 예술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다수의 훌륭한 작품을 남기게 되었으니까.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지.
느루야, 모네는 새 시대가 저 생 라자르 역의 기차처럼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몰라. 육중한 힘으로 당시의 가치관이나 문화체계를 철로 밖으로 밀어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기차가 내뿜은 연기처럼 희망이란 고정된 형태 없이 광활한 하늘로 퍼져 나가고, 무거운 과거를 두고 온 사람들은 가뿐히 짐을 챙겨 미래를 향해 달리고, 아름다움이란 불변의 것이 아니라 빛처럼 속절없이 스러지는 곳에 있다고 여겼던 것인지도 몰라.
느루야, 카페 창 가득 겨울 해가 뜨는 아침이다. 문득 개찰구 앞에 제멋대로 뒹굴었던 물건들처럼 땀과 눈물을 사방에 흘리며 요란하기만 한 한 해를 보낸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 가방엔 그저 신변 잡동사니뿐인데도 마치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양 움켜쥐다 제 무릎 깨져 절뚝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목표했던 것들은 이루지 못했고, 발전은 더뎠고, 한 해 더 늙었지. 시간이라는 사냥꾼에 쫓기는 참새가 숲에 뛰어들었는데 몸을 숨길 이파리 하나 없이 마른 나뭇가지만 있는 겨울 숲 속에 다다른 것 같아.
창 밖에 모네의 <까치, 1868~1869>가 "깍깍" 엄마를 부르네. 모네가 힘든 무명시절을 보내고 있던 1868년에 그린 그림 속 주인공인가? 일반적으로 '눈'은 빛의 변화나 흐름을 표현하기 어려워 인상주의 화파의 화가들은 잘 다루지 않았어. 그는 빛이 공기와 부딪쳐 진동하는 순간을 옅은 바이올렛, 그윽한 초록 등 색색의 향연으로 바꾸어 놓았지. 아무도 관심 기울이지 않았던 '미세한 빛의 각도와 양과 색깔'을 눈으로 재고, 달고, 표현해 그 근수만큼의 세상을 창조했어. 그리고 그곳에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까치를 불러들였지.
이 겨울, 까치처럼 엄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전령이 오려나. 혹시 엄마와 부딪친 그 할머니가 전령이었을까? 서두르지 말라고, 어깨에 짐을 지고, 손으론 핸드폰을 들고, 우두망찰 개찰구 앞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전해주는 것이었을까? 내 가방 속에 담긴 것은 놓아도 되는 것이니 빈 가방에 새로운 것을 담으라는 조언이었을까? 모네가 색과 형의 본질을 찾아 대상에게 떨림을 부여했듯이 우리의 삶이란 현실의 추위에 떨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니 환상의 꿈보다 처절히 지금을 더 사랑하라는 충고였을까?
어제를 재현하는 오늘이 아니라 모네처럼 순간인 오늘을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