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호가스 <결혼 계약> 외
느루야, 첫눈에도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재미있지? 만화 캐릭터 같기도 하고 말이야. 오른쪽엔 은빛 가발을 쓰고 위엄 있게 앉아있는 신랑, 신부의 아버지들이네. 맨 끝, 신랑 아버지의 왼쪽 손을 봐. 풀린 두루마기에는 정복왕 윌리엄 1세로부터 이어진 가문의 족보가 나타나 있고 손가락은 은근히 족보를 가리키고 있어. 자신이 귀족 집안임을 내세우고 있는 거지. 오른쪽 다리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준 통풍으로 인해 다리에 붕대를 감은 거란다.
맞은편 신부의 아버지는 안경을 고쳐 쓰며 계약서의 내용을 면밀히 확인하고 있구나. 테이블 위에는 신부 아버지가 지참금으로 내놓은 금화가 자루 채 놓여있어. 이 금화는 가운데 서서 청구서를 내밀고 있는 회계사의 손을 거쳐 신축건물을 완성하는데 쓰일 것 같아. 어떻게 아냐구? 창 밖에 공사가 중단된 신랑 아버지의 커다란 건물이 보이거든. 아마도 돈이 지급되지 않은 게지.
당시 18세기의 영국은 위축되긴 했지만 귀족이라는 신분으로 사회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계층과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강력한 자본을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사회를 이끄는 쌍두마차였단다. 하지만 이 둘의 힘겨루기는 곧바로 공존의 방법을 찾게 되지. 시나브로 몰락해 가던 귀족은 자본의 중심인 부르주아와의 결혼을 통해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또 명예와 권위를 얻고 싶었던 신흥 부르주아는 번쩍거리는 금화로 명예와 권위를 사는 방법을 찾아냈어. 영민한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유행처럼 계약결혼이 번졌구나. 호가스는 시대의 유행이 품고 있는 가치 변화를 놓치지 않았어. 그는 날카로운 통찰력만큼 재치와 유머가 빛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의 작품은 유쾌하면서도 심오하고 신랄한 텍스트로 가득 차게 되지.
호가스의 '유행에 따른 결혼' 연작 시리즈 두 번째 작품 <결혼 직 후, 1743>야. 샹들리에 불이 꺼진 어수선한 실내는 간 밤, 질펀한 파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어. 영수증 다발을 들고 있는 집사는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야. 부유하게만 자란 신부는 재정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식사가 차려진 식탁 앞에서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어. 맞은편 신랑의 모습을 보겠니? 두 다리를 쭉 뻗고 몹시 피로한 얼굴에 전날 차려입은 듯한 모자와 옷차림이야. 밤을 지새우고 이제 막 집에 도착한 모양이지. 눈치 없는 강아지는 신랑의 호주머니에서 레이스가 달린 보닛(여자의 머리에 쓰는 모자의 일종)을 꺼내 놓았구나. 둘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지. 부부간의 따뜻함은 찾아볼 수가 없어. 결혼을 거래한 당시의 아픈 사회상이었지.
호가스는 산업혁명 이후 발전하는 사회의 빛과 그늘을 보았단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우아하고 매끄럽게 표현했던 당대의 화가들과는 달리 급속히 무너지는 전통의 가치와 풍속을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묘사했지. 젊은이들의 혼전 성(性) 관계와 그에 비례하는 고아들의 급증을 다루었고, 성숙하지 못한 자본이 풍기는 사회의 악취를 기록했단다. 그는 과거를 존중했고 미래를 환영했지만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어. 그는 지진계의 바늘처럼 냉정하고 차분했거든.
이 신혼부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이 결혼 연작 시리즈는 6편인데 그중 세 번째 작품은 신랑과 신랑의 어린 애인이 매독에 걸려 돌팔이 의사를 찾아가지만 효과가 없어 난감해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 수은 치료를 해 보지만 매독은 심해져만 가지. 네 번째 작품은 알맹이 없이 귀족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노(老) 백작이 죽고 백작의 칭호를 얻은 부부가 침실에서 손님을 접견하는 허례(虛禮)의 풍경을 담았어.
당시 영국에서는 계급과 자본을 거래하는 중매결혼이 빈번했어. 근대의 '시민'이라는 위대한 이름보다 특권을 버리지 못한 귀족이라는 낡은 명패를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게지. 호가스는 프랑스풍의 드레스로 치장한 귀족들이 흑인 노예의 시중을 받으며 차를 마시고, 악단을 불러 연주하게 하는, 즉 고상한 체하는 모습의 경박함을 풍자했구나. <결혼 계약>에서도 보았던 검은 옷의 변호사는 초대장을 내밀며 은밀히 백작부인을 유혹해. 그녀는 쉽게 무너져 버리지.
사랑 없는 결혼이란 이렇게 허황되고 외로운 거란다. 느루야, 신랑이 어여쁜 아내 대신 어린 매춘부와 향락을 즐기는 것도, 신부가 귀족의 아들인 남편 대신 변호사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모두 외롭기 때문이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않고 돈이나 권력의 매개물로 취급하는 건 존재를 뿌리째 부정하는 것이거든. "너는 수단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참혹한 것이지. 사랑이 없으면 결혼이란 이렇게 헐하고 박한 것이 되는 거란다.
느루가 말했던 친구와 친구의 남자 친구가 꽤 오랫동안 사귀었다고 했지? 남자 친구의 부모님과 가족들도 서로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그런데도 5년이 넘는 유학 생활을 마친 뒤에나 결혼을 허락한다고 했다니 친구가 몹시 상심했겠구나.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하더라도 일생의 중대사인 결혼은 가족의 축복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말이야. 게다가 남자 친구조차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말로 친구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건 다소 고민해 볼 여지가 있는 태도라고 생각해. 무척 조심스럽긴 하지만 혹시... 가장 중요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애의 '연'자도 모르는 엄마의 생각이긴 하다만... 삶이란 때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때가 있고, 그 방황 속에서 길을 만들기도 하니까, 관계의 변화를 너무 두려워 말라는 말을 해 주고 싶구나. 또 '인연'이란 게 억지로 되거나,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맺는 건 아니라고 말이야.
엄마 직장에 있는 대리님은 마흔이 갓 넘은 노총각이야. 홈페이지가 다운됐다거나, 영상 업로드가 되지 않는다거나,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거나 하는 온갖 복잡한 일에도 맥가이버와 같은 솜씨로 뚝딱뚝딱 해결하지. 누가 불러도 웃는 얼굴에 지적인 유머감각도 탁월해. 너무나 매력적이란다. 엄마가 오십 넘은 아줌마의 오지랖으로 하루는 물어보았구나.
느루야, 놀람이 아니고 비탄이야. 존재의 크기를 겨우 집 한 채로 가늠하다니! 언제부터 이 사회에 마음의 넓이가 거실의 크기에 비례하게 되었을까? 안타깝더구나. 엄만 돈을 가볍게 보지 않아. 오히려 태산처럼 무겁게 대하지. 궁핍했고 평생을 노력한 지금도 부자는 못되었어. 또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불행을 피해 갈 수는 있다는 말에 백번 동감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를 어찌 사물과 비교하겠니! 돈이 목적이 되는 사회는 또 얼마나 쓸쓸하겠니! 돈이 많다면, 사회적 지위가 안정적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우정이나 사랑이 없는 물질로서의 돈과 지위는 삶과 동반자가 될 수 없단다. 왜냐면 자본의 속성이란 확장성에 있고 그 확장성은 결코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야. 벌고 또 벌어도, 누리고 또 누려도 늘 허기지지.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기 쉬워.
호가스도 사랑 없는 결혼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유행에 따른 결혼' 연작 시리즈 5번째 작품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는 아내와 그 상대인 변호사에게 결투를 신청한 신랑의 모습을 그렸단다. 하지만 되레 자신이 칼에 찔리게 돼. 그는 초라하게 쓰러졌구나. 백작이라는 명예도, 남편이라는 자리도, 얼마 남지 않은 재산도 지키지 못했지. 옷도 채 챙겨 입지 못한 변호사는 창문을 열고 줄행랑을 치고 있어. 이제 홀로 남은 그녀는 그저 빌뿐이야.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용서한다 해도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음독자살했구나. 파리한 얼굴과 그녀의 발 밑에 구르고 있는 약병을 보면 알 수 있지. 회한에 찬 짧고 허망한 인생이었어. 애인이었던 변호사는 잡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남편은 결투 끝에 죽고 말았지.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구두쇠인 데다 돈과 명예만을 추구했던 아버지와는 화해하지 못했지. 그녀가 죽는 순간에도 손가락에서 값비싼 반지를 빼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호가스가 얼마나 당대 사회의 비루함에 몸서리쳤는지 알 수 있어. 안타까운 건 마지막 엄마의 숨결에 얼굴을 부비고 있는 어린 딸의 슬픔이야. 매독이 유전되어 얼굴에 검은 반점이 보이는구나.
윌리엄 호가스는 프랑스 로코코 문화의 전성기였던 1740년대, 영국에서 활동했어. 그의 대표작인 '유행에 따른 결혼' 연작은 사랑 없는, 조건으로서의 결혼이 갖는 위험을 경고하는 도덕화야. 화려하고 섬세한 화면에 세태를 풍자하는 현실적인 내용을 스토리텔링처럼 엮었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해. 원래 유화로 제작되었지만 동판화로 대량 찍어내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여러 출판물에도 실리게 되었단다.
편지를 마치며 내 사랑하는 딸 느루의 이름을 불러본다.
느루야, 네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겠지. 엄만 그가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좋겠어.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하면 좋겠어. 지식도 풍부하고 학벌도 남부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업은 필수야. 딸 가진 부모 중 무직자에게 시집보내도 좋다는 이, 나와보라 그래, 아마 없을 거야. 하지만 느루야, 이름 앞에 붙은 수식에 흔들리지 마. 그건 늘 바뀌는 거야. 사랑하는 이가 가슴에 품고 있는 것, 흔들리지 않고 바뀌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을 먼저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렴. 그것이 네게도 소중하다면 그때 또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맞이하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