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노라 Oct 26. 2022

마녀 지망생의 우울 탈출기

이암 <화조구자도> 외

  계절 탓인가? 체질 탓인가? 아님 환경 탓인가? 느루야, 세상 "아이 조아"하고 사는 엄마가 요즘 우울해. 가을이 왔고 소음인(少陰人)이고 뉴스는 어두운 소식뿐이어서일 테지. 발 끝에 매달린 포클레인이 자꾸 굴을 판다. 이러다 두더지보다 땅굴을 더 잘 파는 엄마가 될지도 몰라. 



  우울한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깊이 모자를 눌러쓰고 빵집에 가서 버터 식빵, 단팥빵, 슈크림빵, 빼빼로 초콜릿, 막대사탕, 별사탕 조금, 쿠키, 진저브레드, 도넛 사 왔어. 왠지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로 만든 숲 속 마녀의 집'이 생각났거든. 엄마는 공식 마녀도 아니고 급수도 없어서 "기분 좋아져라, 짠~"하고 마법을 부릴 수 없잖아. 그래서 사 온 빵으로 달콤한 집을 짓고 책 읽으면서 맛나게 뜯어먹을 거야.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양 끝의 식빵 뚜껑으로 지붕을 이고, 나머지는 구멍을 뚫어 벽과 창문을 만들었어. 빼빼로 초콜릿으로 굴뚝도 세웠어. 막대사탕은 문패야. <마녀 지망생의 집>이라고 정했어. 



  이제 책을 골라야지. 음, 이게 좋겠다. <구미호 식당>.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가 음식을 만드나? 청소년 권장도서인 걸 보니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겠다. 우울할 때 무거운 책은 금물이야. 마음이 '언더월드'로 곤두박질친다구.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양 볼이 미어지게 빵을 먹으며 책을 읽는데 주인공 도영이가 할머니와 형한테 심하게 야단맞고 집을 나오는 장면이야. 도영인 갈 곳은 없고 너무 추웠어. 어디 잠잘 곳 없을까? 그 마음을 알았던지 도영이가 지나갈 때마다 사납게 짖던 개가 조용히 개집에서 나왔어. 도영인 개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지. 왠지 뭉클해서 책을 쓰다듬었구나. 느루야, 개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느낄까? 화가들은 개를 어떻게 그렸는지 한번 찾아보자.


  느루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이암 <화조구자도>



  조선 중종 때의 화가 이암(李巖,1499~?)의 작품으로 현재로는 조선시대 최초의 개 그림이라는 <화조구자도 花鳥拘子圖>야. 가득 찬 봄이네. 하이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걸 보니 4월 즈음이겠어. 높이 솟지 않고 풍만한 땅과 어울려 옆으로 옆으로 눕는 배나무에 나비랑 벌이 찾아오고 있어. 나비와 벌이 꽃을 찾아오니 가을에는 달고 서늘한 배가 주렁주렁 영글겠지. 그런데 저걸 봐. 굽은 나무 가지 위의 새 두 마리는 나비와 벌을 쳐다보고 있구나. 엄마가 보기엔 까치 한 쌍인 것 같은데 꽃 향기에 취한 나비와 벌은 어쩌자고 저리 조심성이 없누. 괜찮을까?



  그 아래엔 강아지 세 마리가 있구나. 등이 검은 검둥이는 너울거리는 봄 아지랑이에 깜짝 놀랐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네. 호기심 넘치는 눈이 엄마가 사 온 별사탕을 박은 것 같아. 뒤에 곤히 잠든 누렁이는 이마와 앞발에 내려앉은 봄볕을 이불 삼아 따사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어. 앞에 하얀 흰둥이는 정말 귀엽구나. 어쩌다 연초록 풀잎 같은 방아깨비를 잡았나 봐. 방아깨비가 강아지 눈앞을 통통 튀어 오르다 앞발에 냉큼 걸렸겠지. "이게 뭐지"하는 표정은 천진하기 그지없어. 나도 모르게 동화책 속의 한 페이지처럼 오롯이 빨려 들어간다. 어서 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강아지들을 안아주고 싶구나. 그럼 강아지들이 엄마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무릎 위로 올라와 엄마가 안고 있던 무거운 것들을 향해 짖을 거야. "킁킁, 컹컹." 



  느루야, 이암은 강아지들을 세필로 섬세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 먹의 농담을 이용해 부드럽게 표현했어. 화가가 대상이 갖는 특징에 알맞은 표현 방법을 찾았다고 할까. 옅은 묵으로 형태를 잡은 뒤 조금 더 진하게 윤곽선을 그렸어. 그리고 윤곽선 안을 먹으로 채색했지. 몰골법과 구륵법이라고 해. 먹의 스밈과 번짐을 이용해 자신이 느끼는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강아지를 그린 거지. 



  그림의 부드러움 못지않게 이암은 '깊이 있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너그러운 왕족이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증손으로 왕실 후손이거든. 자(字)는 '고요하다'라는 뜻의 정중(靜仲)이야. 조선은 선비 정신을 드러낸다는 문인화나 고서(古書)에 연유한 풍경화를 높이 쳤어. 영모화(翎毛畵)는 한참 격이 떨어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왕족이었던 그는 문인화나 풍경화보다 동물과 꽃의 그림인 영모화를 그렸어. 그가 그렸던 <모견도 母犬圖>도 보자.



이암 <모견도, 16세기>


  느루야, 어떠니? 그냥 그림이 자박자박 내게로 걸어오지. 이렇다 할 배경 없이 나무 그늘 아래 어미 개와 어린 강아지 세 마리가 쉬고 있는 것뿐인데도 지친 마음에 대고 누가 "호~" 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분첩으로 두드린 듯 마음까지 뽀애져. 



  선이 둥글둥글해. 모난 곳이 하나도 없구나. 둥글고 순한 어미 개는 따뜻해 보이는 품성 못지않게 고급스러워. 개의 목을 봐. 평민의 개는 아니었는지 붉은 목줄에 방울이 달렸구나. 그런 어미의 등에 올라탄 누렁 강아지는 새근새근 잠들었네. 자고 있는데도 웃고 있어. '웃으며 자는 곤한 잠'은 인간에게는 이제 사치지. 잃어버린 유물이야. 현대인들이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잠꼬대가 심해지는 건 자나 깨나 세상을 상대로 전투 중이기 때문일 거야. 어미 개는 가슴을 파고드는 검둥이든, 젖을 빠는 흰둥이든 긴 앞다리를 벌려 안온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어. 아무리 겪어도 면역이 생기지 않는 세상살이에 지치면 저렇게 엄마의 품 속에 파고들어 일주일쯤 머물다 오고 싶다. 



  그런데 느루야, 조금 전 보았던 <화조구자도>에서도, <모견도>에서도 개와 함께 나무가 나오지. 그건 예로부터 개는 나무와 같이 복이나 안녕을 지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야. 개는 한자로 '개 술(戌)'이라고 쓰지. '지킬 수(戍)'와 비슷한 글자 모양이야. 또 나무는 '나무 수(樹)'라고 하여 '지킬 수(戍)'와 소리가 같아. 뜻이나 소리가 '지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옛 그림 속 개는 건강이나 재산이나 복을 지키는 수문장이었거든. 그래서인지 이암의 영모화는 무사계급이 발달한 일본에서 명성이 높았어. 17세기 일본에서는 이암의 그림을 모방한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단다. 가끔 우리에겐 희미한데 타국(他國)에 뚜렷한 족적이 있거나 진품들이 다수 남아 있는 화가를 대할 땐 안타까워. 귀한 우리의 것을 아끼고 살피지 못했구나 싶어서. 좀 더 화사한 이암의 그림 하나 보련.


  

(왼) 이암 <나무에 오른 고양이> / (오) 이암 <고양이와 강아지>



  왼쪽 <나무에 오른 고양이>를 봐. 노곤한 봄볕에 마음이 꽃잎처럼 벙긋 열려. 모란꽃 핀 나무 위에 둥치를 꽉 움켜쥐고는 새를 노리는 고양이를 보렴. 화등잔만 한 눈동자가 익살스럽지. 주의 없이 고양이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고는 깜짝 놀라 "짹"하고 지르는 새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 다른 한 마리는 '날개야 날 살려라' 혼비백산했구나. 이 장면을 쳐다보고 있는 나무 밑 누렁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목을 빼고 있어. 그러거나 말거나 눈에 별을 박은 검둥이는 깃털 같은 걸 물고는 어딘가 보고 있네. 잰 늘 꿈꾸는 것 같아. 그런데 느루야, 혹시 이 댕댕이들, 고요한 이암이 기르던 강아지 아니었을까? 그가 그린 강아지들이 모두 비슷한 걸 보면 말이야. <모견도>와 <화조 구자도>에 보이던 바로 그 누렁이와 검둥이들이잖아.  



  오른쪽 그림도 봐. 고양이는 천진난만한 누렁이한테 으름장을 놓고 있어. 등은 위협하듯 동그랗게 활처럼 휘고 발톱은 오므려 땅에 박았지. 꼬리를 한껏 내리고는 '네가 방울을 숨겼지'하고 추궁하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누렁이를 봐. 영락없이 "뭐래~"하는 표정이잖아. 시크한 매력, 무심한 마력! 예로부터 고양이와 개는 앙숙이라지만 체급은 같아도 급수는 개가 한 수 위!



  <나무에 오른 고양이>와 <고양이와 강아지> 그림은 두 폭 병풍처럼 나란히 있다고 해. 평양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약탈당했던 것을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에서 북한에 반환했대. 느루야, 북한 박물관에 있는 우리의 그림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그림들만이라도 남북이 오간다면 얼마나 좋겠니. 엄마가 마녀 지망생이 아니고 진짜 마녀라면 판문점에 딱총나무 지팡이로 "뚝딱" <백두 한라 박물관>을 세울 텐데. 그럼 바빠서 우울할 틈도 없겠다. 우울이 뭐야. 우리의 옛 그림들을 잔뜩 모셔오고, 현재 세계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을 초대해 축하전도 하고, 국난(國難에 잃어버린 그림도 찾고...  



  이제 기운이 번쩍 났어. 그림 때문이 아니고 달달한 빵 때문에. 역시 '빵'은 마법약이야. 기운 나게 하는 마법약. 탄수화물의 힘으로 이암과는 다른 영모화도 찾아볼까? 영조 때의 화가, 김두량의 <긁는 개>야. 



김두량 <긁는 개>



  긴 주둥이와 부리부리하고 날렵한 눈매를 봐. 덩치도 커다랗고 굽실거리며 물결치는 검은 털이 늠름해 보여. 등뼈를 세워 떡 버티고 선다면 포스가 만만찮을 텐데. "이걸 어쩌나! 모냥 빠지게" 등이 가려운가 보구나. 덩치가 커다란 검은 개가 뒷다리로 등을 긁고 있어. 곡예하듯 몸을 비틀었네. 폼생폼사도 가려운 건 못 참아. 눈을 모로 돌려 등을 바라보는 개의 눈동자엔 "거기 거기"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져서 바라보는 내 등이 근질거리지.    

  


  익살이 넘치는 이 그림은 26.3 ×23이니 A4 용지 정도야. 노트 한쪽 크기지. 작은 크기의 그림인데도 얼마나 섬세한 붓질을 했는지 털 하나하나가 바람이 불면 곤두설 것 같이 사실적이지. 개의 머리 쪽 털은 짧고 진하고 매끄러운데 반해 목과 다리 부분은 길고 거친 질감이 느껴져. 등의 털 흐름이나 입체적 표현은 서양 화법을 익혀 적용했다는 걸 알 수 있어. 게다가 배경의 풀들은 수묵의 옅은 몰골법으로 작업한 뒤, 붓의 획을 성기게 나타내 개의 동작을 더 두드러지게 했지. 마치 서양화에서 배경은 스푸마토 기법을 취하고 대상은 극사실 기법을 쓴 것처럼 말이야. 



  느루야, 너무나 실감 나는 그림을 그린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은 조선 후기 영조 때의 도화서 화원이었어. 이암보다 200년 뒤의 화가이지. 이암이 동화적이고 소박한 낭만적인 개를 그렸다면 김두량은 동물이 갖고 있는 특징을 정밀하게 묘사한 사실적인 개를 그렸어. 그렇다고 형태만을 치밀하게 묘사한 건 아니야. <긁는 개>에서 보듯 마치 내가 가려운 것처럼 공감과 차원 높은 해학을 담았어. 초상화를 그릴 때, 참됨을 베낀다는 '사진(寫眞)'의 정신을 영모화에서도 발휘한 거야. 그의 작품엔 <삽살개>도 있어. 



김두량 <삽살개, 1753>

'


  가을바람에 억새가 흔들리는 것 같지. 약간 경사진 길로 내리닫는 삽살개의 털이 물결치는 억새처럼 율동감을 줘. 한 올 한 올 털의 세밀한 묘사가 머리와 등이 검은 삽살개에게 생동감과 명암을 불어넣고 있어. 내딛는 앞 발과 웅크린 뒷다리의 동세도 민첩함을 더해주지. 컹컹 짖는 소리는 북처럼 화면을 울려서 삽살개 머리 위, 반듯한 화제(畵題)가 우수수 떨어질 것 같아. 



  '柴門夜直(사문야직) 是爾之任(시이지임) 如何途上(여하도상) 晝亦若此(주역약차)  癸亥(계해) 六月(유월) 初吉(초길) 翌日(익일) 金斗樑圖(김두량도)'라는 글자야. '밤에 사립문을 지키는 것이 너의 임무인데 어찌 낮에 길 위에서 짖고 있느냐'는 뜻으로 영조가 직접 제발(題跋) 했다고 하니 일개 화원인 김두량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지. 김두량의 호 남리(南里)도 영조가 하사했어. 떨어진 티치아노의 붓을 직접 주어주었다는 독일 황제 카를 5세 못지않아. 



  예로부터 삽살개는 '액을 막고 귀신을 쫓는 개'라고 해. 그래서 궁중에서도 삽살개를 길렀다고 하지. 환한 대낮에도 개는 밤을 향해 짖어.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밤. '밤'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지.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끊임없는 암살 위험에 시달렸어. 그런 임금에게 궁정 화원 김두량은 액을 막는 삽살개의 충직하고 활달한 모습을 그려 바쳤어. 그림을 받아 본 영조의 심정이 어땠겠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또한 김두량의 충정을 사랑하며 이 발제를 썼다고 하지. 인간을 숙주로 기생하는 '우울'이라는 병도 액을 막는 삽살개의 기운이 막아낼 수 있을까?



  느루야, 그림을 보다 보니 개란 전통적으로 '안녕(安寧)을 지키는 수문장'이어서 <구미호 식당>이라는 책 속에서도 그날 밤 추위에서 도영을 지켜주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아님 외롭고 서글픈 인간의 마음을 그 개가 이해해서 갈 곳 없는 도영에게 초라하지만 위로의 집을 비워 주웠는지도 모르지. 광대역 와이파이가 개통돼 산간벽지에 살아도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고, 시속 200km의 고속철도가 놓여 하루면 닿지 못할 곳이 없는데도 우리들이 자꾸 외로워지는 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어. 갈수록 인간이 서로에게 인색해지고 언어가 오염되어서 아직은 인간의 화법(話法)을 모르는 개에게서 애정과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인지... 



  해가 이우네. 책도 다 읽었어. 빵도 다 먹었지. 저녁을 하러 일어서려는데 몸이 몹시 무거운걸. 느루야, 엄마가 머릿속에 너무 많은 걸 넣었나? 에구머니. 혹시나 싶어 체중계에 올라가 봤어. 


  Oh, my god!!!  삽살개가 내 살까지 지켰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텅 빈 여백, 꽉 찬 독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