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79. 요셉 보이스
느루야, 엄마 집에 돌아왔어.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스며드는 익숙한 냄새.
"와아... 내 집이구나!"
여행 짐을 풀지 않고 공부방 한 구석에 가만 놓아두었어. 캐리어 지퍼를 여는 순간, 부슬비가 내리던 뒤셀도르프가, 간신히 가슴만을 가리고 온몸으로 열정적인 춤을 추던 세비야가, 분단의 추위를 느껴 보란 듯 으슬으슬 뼛속까지 추웠던 베를린이 순서 없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거든. 아직 뒤섞인 걸 간추릴 정도의 체력과 정신력은 준비되지 않았어. 지금은 잦은 기침과 쑤시고 저린 어깨의 통증을 다독이느라 병원을 순례하고 있단다. 몸이 두 개면 어쩔 뻔했니. 하나도 이리 손이 많이 가는데.
"튀어나온 연골이 신경을 누를 수 있습니다. 꼼짝 말고 뜨거운 곳에 누워 계세요. 과일 많이 드시고 약 빼먹지 마세요. 물리치료도 꼬박꼬박 받으시고요. 확인합니다."라고 젊은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가운보다 더 하얀 얼굴엔 한 톨의 거짓도 없어 보였어. 엄마 왼쪽 목과 등의 촬영 영상을 짚던 낭창낭창한 손이 진료차트보다 더 정교했거든. 엄만 "네"하고 얌전히 대답했지. 집에 돌아와 약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어. 저리고 쑤시는 팔과 어깨에게 '지금 누워있는 거야'라고 말했어. 알아들었을 거야.
여행 가기 전, 느루와 미처 못다 한 말이 있었지?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고 기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간과 공간의 변화, 그에 따른 사회적, 심리적 변화에 대한 질문이었지. 그리고 그건 질문이었다기보다 '탐색'이었어. 별에게 길을 묻는 여행자의 눈! 이정표를 보며 방향을 잡는 나그네의 발! 지도를 읽으며 목적지를 찾는 모험가의 심장! 아마도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느룬 지금 별을, 이정표를, 지도를 찾고 있는 중인가 봐.
느루에게 엄만 무슨 얘길 해 줄까? 어떤 길이 있다고 알려줘야 할까? 아니면 어느 쪽으로 가라고 말해줘야 하나? 그도 아니면 자기 만의 길이란 결국 광속으로 변하는 트렌드를 읽고 굵고 튼튼한 인맥을 만들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자기계발서를 들이밀어야 될까? 벌써 숨이 찬다. 그 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내가, 아직도 내 딸에게 의사 선생님처럼 명쾌한 말을 해 줄 수 없어 슬프다. 지금 시험을 준비하며 때로 실패하고 때로 작은 성취를 이루고 있는 느루에게 '변화'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성장'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엄만 아직도 머뭇대고 있지만 혹시 여행 중, 엄마가 만났던 이 선생님이라면 뭐라 말해 줄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의 질문을 받고 웃으며 대답해 주던 그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구나.
선생님과 아이들이 있는 이곳은 뮌헨의 현대 미술관(Pinakothek der Moderne)이야. 현대미술이란 말만 들어도 낯설고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느낌인데 이곳 학생들이 미술관에 와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은 참 신선했어. 게다가 엄만 Atr museum이나 Art gallery만 알았지 'Pinakothek 피나코텍'은 몰랐구나. 그런데 '미술관, 회화관'이란 뜻의 독일어라는 걸 독일에 가서야 알았단다. 미술관 방문을 일곱 군데 정도 했는데 다 이 단어가 있지 뭐야. 늦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100세 시대가 되었으니 어학 공부를 조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가 방문했을 때, 미술관은 사람이 없어 한적했구나. 홀로 숲이 우거진 산책로를 걷듯 쓸쓸하고도 광폭했던 현대를 천천히 걸었어. 그 현대를 꼼꼼히 필사한 작가들의 필체를 비교하면서 말이야. 엄만 고르게, 성의껏 눈길을 주었단다. 방을 지키던 가이드 말고는 딱히 말을 건넬 이를 찾지 못해 하품을 하고 있던 작품들이 '누구지?'하고 일제히 엄마에게 관심을 보이지 뭐야.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 거야?
음표가 달린 말소리. 돌덩이가 가득한 방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에게 좀 전 사진으로 보여주었던 선생님이 자료를 들어 설명해 주고 있었어. 엄만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분명 요셉 보이스와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었을 거야. 왜냐하면 이 숫자가 적힌 현무암들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의 작품이거든.
돌에 번호가 쓰여 있지? 번호를 매긴 현무암 44개야. <20세기 종말, 1983>이라고 하지. 요셉 보이스는 채석장에서 가져온 현무암 위쪽을 원뿔 모양으로 잘라 내었어. 잘라낸 조각은 잘 다듬어 펠트와 점토로 따스하게 감싼 후 원래의 자리에 다시 놓아두었단다. 마치 위대한 자연 속에 숨 쉬는 원시 생물같이, 또는 엄마의 자궁 안에 웅크린 아기같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고? 그래, 미친 짓이지. 우리 대부분은, 그 시대의 주류들은 이해하기도 인정하기도 벅찬 일이었단다. '하낫 둘 하낫 둘' 질서에 맞춰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20세기에 그는 중절모를 쓰고 나타나 난데없이 맨발로 춤을 추었으니까. 그는 20세기의 무당이었구나. 무당의 신칼이 액을 막듯 그의 손에 든 현무암은 지구를 살리는 강렬한 무령(巫鈴)이 되었지. 그는 과학과 이성만으로는 숨을 몰아쉬는 지구와 자기만의 방에 숨어버린 인간을 치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나 봐.
느루야, 현무암이 지구 내부에서 끓던 용암이 분출해 굳어진 암석이라는 걸 알지? 요셉 보이스는 굳고 단단한 돌덩이가 오래전 지구의 저 밑바닥에서 화려한 불꽃이었다는 걸 잊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 속에 갇힌 오래된 세상의 불꽃을 20세기 끝에서 다시 피워보려 했구나. 그는 그 불꽃이 따스한 온기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라는 신의 전언(傳言)이라고 믿었지. 20세기의 발달한 과학은 미사일을 우박처럼 떨어 뜨렸고, 신전을 부수고 의회를 세운 시대정신은 인간을 외롭고 고독한 개인들로 만들었거든. 생명이 굳은 사회를 녹이는 불꽃! 어쩌면 그 자신이 고대로부터 활활 타오르고 있던 바로 그 불꽃이었는지 몰라.
바야흐로 운명은 철의 심장이 박동하는 20세기에 불꽃을 피우는 고대의 제관이 되길 명했나 봐, 그에게.
요셉 보이스는 어린 시절, 독일 클레베(Kleve)에서 자랐어. 기록에는 주로 양을 치는 목동 놀이를 하며 책과 자연을 벗 삼아 혼자 놀았고,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드로잉 실력이 뛰어났고, 북유럽 신화와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 그는 소아과 의사를 꿈꾸었대.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구나. 그는 폭격기 부조종사로 복무하다 1943년 러시아 크림반도에서 격추되었어. 그는 자신이 쓴 글에서 비행기에서 추락한 자신을 타타르인이 구조하여 동물의 지방과 펠트천으로 감싸 치료했다고, 아니 살렸다고 말하고 있어. 그가 나중 소아과 의사가 아닌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이 경험은 요셉 보이스 작품의 가장 중요한 뼈대를 이뤄. 이제 그에게 있어서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는 보드라운 피부를 가진 여인이나 향기로운 음악, 비밀스러운 전설이 아니라 누런 지방, 보풀 엉긴 펠트, 죽은 토끼, 단단한 돌덩이 같은 것들이 되지. 미술사가인 벤자민 부흘로는 크리미아에 비상착륙한 요셉 보이스가 폭격기 앞에 서 있는 사진을 제시하며 이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대중들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어. 시대는 그에게서 미사일이 맞아 산산조각 난 생명의 신화를 복원하고 싶어 했지. 대중들은 오히려 지방과 펠트와 타타르인을 통해 그가 말하려고 하는 진실에 귀 기울였어.
느루야, 이 <The Pack, 1969>은 절절한 그의 고해성사란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으로서, 폭격기에서 폭탄을 떨어뜨렸던 군인으로서, 죽음의 항로에서 곤두박질치던 단 하나의 생명으로서, 그가 위대한 사랑과 보이지 않는 절대 존재 앞에 엎드려 통회(通悔)한 진심 어린 고백이자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지.
24개의 썰매가 폭스바겐 밴에서 쏟아졌어. 썰매에는 둥글게 말린 따뜻한 펠트, 에너지를 주는 지방 덩어리, 방향을 살피는 횃불이 묶여 있구나.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영과 육을 살리는 재료들이야. 인간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지. 썰매를 탄 요셉 보이스가 느루에게 묻는구나.
"느루야, 네게도 몸과 마음을 살리는 이런 생존키트가 있니? 너의 몸과 마음을 감싸주고, 필요한 열정과 에너지를 주고, 실패와 위험 속에서 앞을 비춰줄 것들과 함께 썰매를 타고 있니? 그 썰매에 이웃을 태울 수 있니?"
늘어가는 나이와 친구들의 성취와 사회가 주는 압박이라는 변화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던 느루에게 왠 요셉 보이스 이야기냐구?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미술관에서 학생들의 질문에 답했던 선생님처럼 그가 너의 별이 되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느루야,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엄마와 함께 그와 좀 더 동행해 보겠니?
엄만 요셉 보이스의 이 '작품' -<나는 미국을 좋아한다. 미국도 나를 좋아한다, 1974>-를 좋아해. 1974년 뉴욕 르네블록(Rene block) 갤러리에서 행한 퍼포먼스야. 아, 현대에 와서 '미술(Art) 작품'이란 아주 너른 의미가 되었어. 19세기까지만 해도 주로 회화나 조각, 생활공예 정도를 아울러 현대미술(Modern Art)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개념', '행위', '퍼포먼스', '해프닝', '레드 메이드' 등 거의 전방위적인 예술활동을 지칭하게 되었어. 그래서 동시대 미술(Contemporay Art)이라고 하지. 물론 이런 확대가 미술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원성의 빌미가 되고 있긴 하지만 말야. 요셉 보이스의 작품도 쉽진 않단다.
미국에서 썬세이션을 일으킨 그의 퍼포먼스는 당대 사회라는 전봇대를 때린 10억 볼트의 번개였어. 그는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펠트에 싸인 채로 앰뷸런스에 실려 갤러리에 도착했어. 그리고 3일 동안 건초더미를 깐 갤러리 바닥에서 텍사스 산 코요테와 함께 지냈어. 수도사처럼 펠트로 몸을 감싼 후 지팡이만 내놓은 그는 코요테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트라이앵글을 치며 놀기도 했어. 경계를 푼 코요테는 요셉 보이스에게 기대어 잠을 자고, 함께 창 밖을 바라보았지. 둘은 동물과 인간 사이의 낯설고 거친 관계 사이에 깊은 교감을 보여주었단다.
느루야, 코요테는 미국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이자 트릭스터(Trickster:신과 자연의 질서를 깨는 장난꾸러기)로 숭배했던 동물이야. 그런데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온 백인들의 혐오 대상이 되어 무차별 포획당했지. 1970년대, 거대한 골리앗 미국은 베트남 전쟁 개입과 인종 차별의 모순으로 사회 전체가 헐고 진물이 나면서도 겉으론 평화와 인권을 외치며 '으르렁' 허세를 부렸어. 요셉 보이스는 '자연과 존중과 소통'이라는 다윗의 물맷돌 '코요테'를 기만에 찌든 뉴요커들을 향해 던졌지. 쑥대밭이 된 뉴욕을 뒤로하고 그는 몸을 펠트로 감싼 채 앰뷸런스를 타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 버렸단다.
요셉 보이스를 태운 비행기가 독일 공항에 채 착륙하기도 전에 그의 코요테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스트리트 저널'지 위에 오줌을 싸 버렸구나. 트릭스터의 지린내는 향수보다 멀리 미국 사회에 퍼졌어. 물론 미국인들은 재빨리 냄새탈취제를 놓았겠지만 말이야.
느루야, 엄마가 왜 저 작품을 좋아하는지 아니? 엄마에게 저 코요테는 마치 '또 다른 나' 같아.
'내 안에 살고 있는 내가 모르는 나! 변화의 동력을 갖고 싶어 하는 나!'
여행은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을 선물하지. 엄마도 이번 여행 중에 선물을 받았단다. 거울 속 엄만 어깨 통증보다 심한 두려움을 앓고 있더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라는 불안, 욕망은 있으나 재능은 없는 것에 대한 수치심, 지적 호기심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지적 평범함에 대한 열등감이 있더라. 엄마는 엄말 그닥 좋아하지 않더라고. 쓸쓸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저 야생의 코요테가 살고 있지 않나?'라는 의문이 들어. 사실 나와 코요테는 친하지 않아. 서로 다른 고지식한 언어를 가졌지. 우린 단절되어 있고, 그만큼 서로를 불신하고 주의해. 언제고 불쑥 나를 감싼 펠트를 잡아당겨 날 벌거벗길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끼지. 그는 신과 자연의 질서를 깨는 예측불허의 장난꾸러기잖아.
하지만 어느 날, 예를 들면 여행 중 거울을 선물 받은 날 같을 때 말이야. 그런 날이 되면 깨끗하게 닦인 거울 속에 코요테가 보여. 때론 욕망으로, 때론 열등감으로, 때론 허무함으로 홀로 고독한 코요테. 하지만 언제고 내 안과 밖에서 별을, 이정표를, 지도를 물고 다가올 코요테! 느루야, 요셉 보이스처럼 말을 건네고 트라이앵글을 치고 함께 잠을 자면서 내 안의 코요테와 만날 순 없을까? 노을을 품은 크고 위대한 하늘을 함께 바라볼 수는 없을까?
1982년 3월 독일 카셀의 공립 박물관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 잔디밭에 7000개의 현무암이 뒤엉켰단다. 국제 예술 박람회 '도큐멘타 7(Doumenta 7)'에 출품한 요셉 보이스의 작품이었지. 그는 약 1.2미터 현무암 7,000개를 쏟아낸 뒤, 이 돌덩이와 짝을 이뤄 나무 한 그루씩을 심자고 했어. 그러지 않으면 박물관 앞 잔디밭은 흉물스런 채석장이 될 거라고 엄포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어. 뉴욕 전봇대를 때린 10억 볼트짜리 번개가 그만 카셀에 떨어진 거지.
자연 회복과 인간을 살리는 문명으로의 전환을 설득하고 싶었던 그는 '7,000개의 현무암 옆에 7,000그루 나무 심기' 운동을 시작했단다. 어떤 이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비판했지만 현무암은 하나씩 도시로 옮겨졌어. 현무암 옆 도로청소부가 심어놓은 참나무에 어린 학생들이 흙을 다독였고,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물을 뿌렸구나. 유모차에 묘목과 삽을 싣는 어머니들이 줄을 잇자 시민들이 너도나도 힘을 보탰어. 표에 민감한 정치인들은 그를 지원하는 연설을 했지.
이제 현무암은 신령스런 무당이 점상(占床)에다 털어 낸 성스런 쌀알이 되었구나. 쌀알의 숫자와 형태가 미래를 보여주는 조각이듯 요셉 보이스는 7,000개의 현무암에 '사회적 조각'이라는 폭발력 강한 단어를 장전했지. 그는 이 한 마디로 방아쇠를 당겼어.
"모든 사람이 예술가다."
창작자와 관람자가 따로 없이 나무를 심는 모두의 행동과 삶이 다 예술이었지. 1986년 그가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자 이듬해에 1987년, '도큐멘타 8' 개봉 당시 그의 아들 벤젤(Wenael)이 마지막 7,000번째 나무를 심어 5년 만에 이 위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했단다. 마침내 도시 카셀은 숲이 되었고 모든 시민들은 예술가가 되었지.
위 사진 보이니? 느루야, 강하고 단단한 현무암은 변하지 않았지만 참나무는 쑥쑥 자랐단다. 처음 참나무는 여리고 너무나 쪼꼬맸어.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그리고 30년이 지났어. 참나무는 비와 바람을 거절하지 않았고 더위와 추위도 고스란히 안았어. 그런 참나무에게 낮과 밤엔 해와 달이 찾아왔어. 평일과 휴일엔 갈 곳 없는 노인과 이제 막 글을 배우는 어린 꼬마들이 그늘 아래에서 놀았지. 생명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어. 참나무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고 성장하는 나무들은 쏟아져 나온 장기(臟器)를 간신히 추슬러 얼기설기 꿰매놓은 현대를 자신들의 나이테 안에 필사했어. 그리고 이제 막 글을 배웠던 꼬마들이 자라 참나무의 언어를 시대의 역사로 기록했구나.
이 변화는 요셉 보이스가 1.2미터짜리 현무암 옆에 작은 참나무 한 그루를 심기 시작하면서 비롯된 거야.
느루야, 너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보고 오히려 엄마가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아직 돌도 되지 않은 네가 내 손을 붙잡고 걸음마를 했을 때 너만 걸었던 것이 아니란다. 엄마도 걷고 있었지. 내 이름표 옆에 '느루 엄마'라는 이름표를 하나 더 붙이고, 네가 나를 의지한 만큼 나도 너를 의지했구나. 너는 몰랐겠지만 엄마도 그렇게 걸음마를 떼고 조금씩 더 성장했고 더 행복했단다. 너로 인해.
엄마를 자라게 한 느루야, 네게 다가오는 모든 변화를 성장판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늘어가는 나이나 친구의 성취에 비례한 조급함이나 사회가 주는 압박을, 더 많이 성장하기 위해 세포증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말이야. 연골이 딱딱해질 때 성장판은 닫혀. 변하지 않고 단단한 것들은 그저 부서질 뿐이야. 그것들은 아름다움을 잉태하지 못한단다. 느루는 부드럽고 유연하게 성장하는 거야. 어느 길에서든 참나무를 심으며, 나무가 자라 삶이 울창해지길 기다리는 거야.
엄마는 얼마만큼 컸을까? 너와 키를 재면 비슷할까? 아니야. 아마도 내 생각엔 네가 더 쑥쑥 자라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엄마는 아직도 더 자라고 싶다. 요셉 보이스의 참나무처럼 인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현무암 옆에 삶에 대한 도전과 자신에 대한 신뢰의 참나무를 심고 싶다. 그래서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에는 엄마의 삶도 울창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