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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Apr 28. 2023

저...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80. 마우리치오 카텔란

  눈 둘 곳이 없어서 엄만 운동화 꽃무늬만 셌어. 여덟 개 밖에 안되더라. 세고 세고 또 세고 그리고 다시 셌는데 눈을 들면 여전히 남자애 손이 여자애 엉덩이에 있거나 겨드랑이에 있거나 목덜미에 있거나 해서 헛기침이 나왔어. 둘은 자주 뽀뽀도 하고 가슴에 코를 부비기도 했어. 엄마처럼 꽃무늬 운동화를 신지 못한 옆줄 아저씨가 연신 마스크를 올렸다 내렸어. 뒤쪽에서 들릴 둥 말 둥 "요즘에야..." 하는 소리가 건너왔어. 두 분의 아주머니가 아주머니들을 두고 낯선 곳으로 가버린 시대를 한탄하는 소리였어. 남의 시선을 아랑곳 않는 스키니진의 청년과 머리를 깡총 묶은 여자애의 맑은 웃음소리는 "고리타분한 관습에 얽매일 우리가 아니에요. 보수적인 시선으로 우릴 비난하지 마세요. 우린 우리 감정에 솔직해요."라는 말로 들렸어. 아직도 줄은 길고 엄마 머릿속엔 진득진득 땀이 솟지 뭐야.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 연인들과 함께 임시 합판으로 설치된 '미니어처 시스티나 경당'에 들어갔단다. 느루야, 엄마 어제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 보러 갔었어. 2019년 아트 바젤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harlie, 1960~ )의 바나나, <코미디언>이 던진 이슈가 워낙 핫해서인지 예매가 하늘의 별따기더라. 네 번의 도전 끝에 겨우 성공했지 뭐야. 궁금한 마음에 걸음도 급했단다. 너 전시 관람 팁 중 하나가 순서를 거꾸로 보는 거라는 거 아니? 원래 입구가 밀리기 마련이거든. 엄만 노련하게 2층으로 올라갔어. 그리고 그 어린 연인들과 이 작품을 보았구나.


  느루야,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구간은 이 시스티나 경당에 비하면 호텔이야. 베들레헴의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도 다시 오실 재림 장소는 고민하실 것 같아. 하지만 이곳이 아닌 건 분명해. 그건 시설이나 규모 때문이 아니야. 느루야, 마구간은 인간과 더불어 사는 작은 생명들에게도 예수님 탄생이 기쁜 소식이라는 걸 알려주는 상징과 성스러움의 장소였어. 2023년 4월, 카텔란의 '시스티나 경당'은 신의 열쇠를 받아 든 교황의 권위와 아우라를 보여주는 공간의 복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신비를 담아내지 못한 채 까칠하고 조악하더구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시스티나 성당>


  '머릿속 상상을 손안에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미니어처의 매력이라고 하지. 엄마에게 있어 카텔란의 미니어처는 창의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어. 누군가는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는 건 그의 작품이 기존 권위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드러내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 입시학원생 과제물 같은 쭈뼛거리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도 카텔란식 유머라고 주장할 수 있지. 하지만 엄마의 느낌은 권위를 비판하기엔 미욱했고 가치관을 풍자하기엔 남루했구나. 노학자를 조롱하는 10대 소년의 손가락 같았달까? 너도나도 추앙하고 있는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심히 박한가? 어쩌면 너무나도 솔직한 젊은 친구들의 애정 표현에 전염됐는지도 몰라. 어린 그 연인들은 서로 허리를 껴안은 채 심드렁하게 둘러보더니 바로 나가버렸어.


  이 시스티나 경당 출입구 정면에 <아홉 번째 시간, 1999>이 있었어. 아홉 번째 시간이란 해 뜨고 난 뒤 아홉 번째,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오후 3시경을 의미한다고 해.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주여,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셨던 비통한 시간에 교황님은 운석에 맞아 고통받고 계시구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홉 번째 시간, 1999>,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인 시스티나 경당 앞에서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님'


  아마도 이 설정은 작품 전시를 맡은 미술관의 의도였을 거야. 카텔란식 '권위에 대한 희화화(戱畵化)'를 염두에 두었다면 아주 적절한 큐레이팅이었다고 봐.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엄만, 작품보다 오히려 이 설정이 더 풍자적이었어.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집 마당에 떨어진 자본이라는 운석에 눌려 신음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거든. 교황님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아무도 일으켜 세워주지 않을 저 십자가의 무게를 예수님만이 알고 계시겠지.


  2층 전시실에는 카텔란을 세계적 작가라고 설득시킨 <코미디언, 2019>이 한쪽 벽면에 덕트 테이프로 붙어 있었어. 느루야, 현대미술 계주에서 '구상을 추상'으로 받은 피카소의 바통을, 뒤샹이 '개념'으로 받아 변기를 들고 달렸단다. 뒤샹은 기성품이라도 미술가가 선택하면 예술품이 된다는 '누구나 예술가이고, 무엇이든 예술품이고, 일상도 예술행위'가 되는 시대의 출발 신호탄을 쏘았지. 미술사의 기둥을 바꾸는 '사건'이었어. 이후 형태가 사라진 미술은 회화나 조각의 명제를 단번에 갈아치웠고 '개념 예술'은 말 그대로 시각적 예술인 미술을 '보이지 않는 개념'만으로도 예술품이, 예술가가 되는 논리적 기반을 만들었어.


  "아니, 이럴 수가."

  하이힐을 신었던 미술이 운동화로 갈아 신고 대중 속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했어.



마우리치오 카텔란 <코미디언, 2019> / 마르셸 뒤샹 <샘, 1917>



  그런데 현대미술은 하이힐을 신고 아직 더 멀리 달리고 있는 중이었나 봐. 카텔란은 뒤샹의 '변기'가 있던 테이블을 치우고 벽면에 '바나나'를 붙였어. "아니, 이럴 수가!"에서 "아니, 이게 뭐야?"로 바뀌었지. 뒤샹이 미술사의 기둥을 바꾸었다면 카텔란으로 인해 미술사의 현판이 바뀔까? 아직 비계와 가림막도 설치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은 충분하겠지?


  28세까지 한 번도 미술관을 가 본 적이 없다는 그는 헐벗은 유년시절을 보냈대. 보통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에겐 지병이 있다고 해. '게으름!' 그는 가난보다 게을러서 꽃을 배달하거나 짐을 나르거나 환자를 돌보거나 시체를 닦다 조금 힘에 부치면 그만 두곤 했대. 더 편한 일을 찾다 눈에 띈 게 '예술가'라는 직업이었다나. 카텔란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시대를 조망했지. 그는 게으른 대신 통찰력이 있었던 가봐. 작금의 예술가는 스케치 실력보다 '이슈'를 선점해야 한다는 걸 알았고, 데뷔 때부터 기행(奇行)을 일삼았어. 1993년엔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받은 전시공간을 향수 회사의 광고 에이전트에게 임대해 주곤 전시공간 앞에 이렇게 써 붙였어.


  "일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Working is a bad job"


  느루야, 마치 청소부가 막 비질을 끝낸 깨끗한 길거리에 마음 놓고 침을 뱉게 만든 예술 행위이지 않니? 숨 쉴 때마다 기도를 막아 뱉어내고 싶은 현대인들의 가래, 즉 '먹고사는 노동'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을 그는 이토록 통쾌하고 간명하게 표현했어. 그는 전통, 체계, 주류, 고상, 규범, 이런 검색어에 걸리지 않았어. 전통 미술계에서 성장하지 않은 탓에 전방위에 선입견이 없었고 시종일관 용감했어. 또 한 작품 보여줄게.



마우리치오 카텔란 <L.O.V.E, 2011>


  밀라노시에서 의뢰받아 2011년 제작한 <L.O.V.E>라는 작품이야. 언뜻 보면 손가락 욕을 표현한 듯 하지. 완성작을 보고 황당한 밀라노 시(市)가 카텔란에게 작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자 파시스트의 경례하는 손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자른 형태라고 답했대. 사실이든 아니든 밀라노 시는 그 대답을 믿고 싶었을 거야. 이 쥘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작품을 작가의 의도를 핑계 삼아 2차 대전 당시 파시스트 정권의 상징이었던 빨라쪼 메짜노떼(Palazzo Mezzanotte)가 있는 아파리광장(Piazza Affari)에 설치하기로 했지.


  그런데 이 빨라쪼 메짜노떼 건물이 당시 증권거래소로 쓰이고 있었던 거야. 공공연히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같아 증권거래소는 설치를 반대했지만 다수의 시민들은 표현의 자유를 외쳤다는구나. 세계 어디든 경제적 불평등이 날로 심화되고 있잖아.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시민들에게 빈익빈 부익부의 상징이 되는 증권거래소 앞의 카텔란 작품은, 모르긴 몰라도 가슴을 뻥 뚫어주는 활명수였을 거야. 당시 작품의 설치여부를 두고 시의회 표결까지 있었다니 역시 이슈를 몰고 다니는 카텔란다워. 이슈를 만들고, 작품에 촌철살인의 유머를 숨기고, 여유 있게 언론을 다루는 그의 담대함이 그동안의 무수한 기행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술계에게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이유지.


  느루야, 다시 바나나로 가 볼까? 2019년 마이애미에서 개최된 세계적 아트 페어 '아트바젤'에 덕트 테이프로 벽에 붙인 바나나가 선보였어. 무엇이든 벽에 붙이길 좋아하는 카텔란의 이 작품명은 <코미디언>이었지. 덕트 테이프로 몸을 고정한 채 벽에 붙어 있다 기절해 버려 카텔란 기행에 전설을 더해 준 갤러리 대표 에마뉘엘 페로탕은 이 바나나를 '세계무역을 상징하고 이중적 의미를 갖는 유머 장치'라고 말했어. 이건 그저 '사유의 미끼'일뿐이지. 오히려 세계적 아트 페어에 달랑 30센트짜리 바나나를 벽에 붙여 놓고 사진까지 찍은 카텔란의 예술적 쇼맨쉽이 이미 이슈였어.



마우리치오 카텔란 <완벽한 날, 1999> / 앤디 워홀 <벨벳 언더그라운드 앨범 재킷>



게다가 1억 4천만 원에 팔렸다는 이 바나나를 행위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먹어 버렸어. 1억 4천만 원의 바나나는 곧 1억 7천만 원이 되었다는구나. 이슈 선점에 있어선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앤디 워홀도 카텔란 앞에선 KO 패야. 인디 밴드 'The Velvet Underground'의 앨범 재킷에 나왔던 앤디 워홀의 바나나는 대중들에게 멍석말이를 당했거든.  


  이 사건은 일파만파 퍼져 갔어. 세계 주요 국가의 뉴스에서 다루어졌고, 현대 미술에 대해 비난과 우려가 쇄도했어. 아트 바젤이 열렸던 마이애미 노동자들의, 바나나도 1억을 호가하는데 우리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분노에 찬 시위도 있었어. 대중의 관심은 무수한 패러디를 양산했지. 이 바나나는 유명한 연예인부터 글로벌 기업의 홍보에까지 영향을 미쳤지. 제목처럼 한 편의 코미디였어.



<코미디언>의 각종 패러디


  느루는 이렇게 묻고 싶을 거야.


  "도대체 바나나의 값, 1억 7천만 원의 가치는 무엇이에요?"


  글쎄. 게으르긴 하지만 자신의 작품이니 카텔란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요번엔 성의껏 대답을 해 줄지도 몰라. 계단을 오르기 전, 고급스러운 리움미술관 바닥을 뚫고 전시실을 엿보는 카텔란의 모습을 보았거든. 아니나 다를까.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주위를 살피는 그가 있지 않겠니? 엄만 인증샷을 찍고 싶더라. 주위를 둘러보았어. 거의 젊은 연인들이었는데 마침 엄마 옆으로 한 청년이 지나가지 않겠니?   


  "저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청년의 눈이 부드럽게 웃었어. 그러더니 몸을 돌려 어떤 아가씨를 손짓하는 거야.

  "제 여자친구가 사진을 잘 찍어요. 원하시는 방향을 얘기하시면 그렇게 찍어 줄 거예요."


  물수제비를 뜨면 동그랗게 퍼지는 물결 같은 걸음으로 한 아가씨가 다가왔어. 청년은 말없이 아가씨의 핸드백을 받아 들었어. 다정함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어. 엄마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 보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 없이 따뜻했구나. 고개를 내밀고 있던 카텔란도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분명 귀 기울였을 거야.



  


  이렇게 멋진 사진을 찍어 주고서 둘은 손을 잡고 자리를 떴어. 느루야, 전시를 둘러보는 도중, 관람하는 동선이 겹칠 때마다 엄만 살짝살짝 엿보게 되더라. 둘은 가볍게 어깨를 안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따로 떨어져 다른 작품을 보기도 하더구나. 너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웠어. 그 품위 있는 연인들은 엄마의 머릿속에 진득진득 달라붙던 땀을 식히는 서늘한 부채였단다. 바라보던 카텔란도 흐뭇했을 거야.


  엄만 연인 간의 애정표현이 우리 때보단 훨씬 더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 세대는 너무나 남의 시선을 의식했거든. 웃겠지만 결혼한 부부조차도 남편이 조금 앞서가고 아내는 뒤따라 가는 게 예사였단다. 그건 전통이었고 사회적 예의였고 공동체의 규칙이었지. 예의에 벗어나면 "뉘 집 자식이냐?"는 소리가 후렴처럼 따라왔어. 그래서 공공장소에서 손을 잡고 다니거나 키스를 하는 건 상상도 못 했구나. 이런 말 아니? '남사스럽다' 남들 앞에서 애정 표현은 우리에게 남사스러운 일이었어.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했지.


  하지만 느루야, 개인을 작게 여기고 책임이나 의무의 연좌제같이 관계가 구속적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이 갖는 미덕은 크단다.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는 나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게 했지. 그러니 약자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어. 부(副)의 크기만큼 덕(德)도 지녀야 했지. 내 곳간이 풍성하다고 해서 드러내 놓고 굴뚝 연기를 맘껏 피워 올리지 못했어. 잔치를 벌이면 지나가는 나그네까지 넉넉히 대접하는 문화였지. 정당한 권위를 인정했고 권위가 높은 만큼 큰 희생도 감당했어. 지나침은 손가락질당했고 모자람은 더불어 채웠구나. 날로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고독사가 만연해지는 지금, 전통이 안고 있는 권위와 관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단다.


  두 쌍의 연인들은 모두 공공장소에서 서로를 안거나 가볍게 뽀뽀를 하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자유로운 표현으로 공동체가 오래 유지해 온 '공공장소의 질서'를 흔들었어. 그런데 2층의 연인들은 불쾌했고 아래층 연인들은 우아했어. 그 차이가 뭘까?  


  그런데 웬 연인들 이야기냐고? 이게 카텔란의 바나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엄만 두 연인을 보며 네게 줄 답을 찾은 듯 해. 느루야, 먼저 카텔란의 <우리, 2010>란 작품을 보고 함께 이야기해 보자.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래 <우리, 2010> /  위 <그것, 2023>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어. 얼굴을 보니 카텔란 자신이네. 그는 침대에 누워서도 옷이나 구두를 벗지 못해. 편안한 휴식은 꿈도 꾸지 못하지. 그는 잠을 자지도 못하는구나. 장소만 바뀌었지 그의 밤은 낮의 연속이야.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과 함께 있어. 아니면 침대에서까지 자신을 평가하는 타인과 동침하고 있어. 그가 누구든 둘은 서로 친하지 않아. 좁은 침대에서 마저 손끝하나 닿지 않게 조심하는 모습이잖아. 방 귀퉁이엔 밤을 지키는 검은 고양이의 뒷모습이 보여. 고독하네. 침대에 누워있는 카텔란과 검은 고양이 중 누가 더 외로운 걸까?


  그런데 느루야, 이 모습, 마치 '우리' 같지 않니? 신(神)이나 믿음이나 가치나 이데올로기들이 상징하는 절대적 신념체계가 허물어지고 자본에 의해 무엇이든 유동적으로 변해 버리는 사회, 옳고 그름이 상대적이어서 자신의 판단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된 현재의 우리! 타인과 동침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느루야, 피카소는 이런 말을 했어.

  " 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아마도 카텔란은 길바닥에서 주운 돌을 다이아몬드로 바꾸듯 하찮은 일상을 철학적 질문으로 번역했나 봐. 파파고를 통하지 않고 미술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동물을 박제하거나, 플라스틱 고무로 마네킹을 만들거나, 스테인리스에 실탄자국을 내거나, 경례하는 손가락을 잘라서, 습관적이고 소심하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나 봐.


  "너는 자유롭니?"라고.



마우리치오 카텔란 <동훈과 준호, 2010> 중  / <찰리, 2003>



  미술계의 악동이라고 하지만 카텔란은 미술관 앞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노숙자야. 그는 결코 테러리스트처럼 미술관을 향해 폭탄을 던지지 않아. 문이 열릴 시간을 재촉할 뿐이야. 카텔란은 반짝거리는 현대가 감추어 둔 무의식의 세계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찰리야. 그는 결코 반짝거리는 네온사인을 꺼버리지 않아. 자전거 뒤에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싣고 올뿐이야. 카텔란은 화려한 이슈와 기발한 퍼포먼스, 자칫 속물적으로 보이는 작품 속에 "뭣이 중헌디"의 그 '중'함 잃지 않았던 거야. 명멸하는 다른 화가들과는 다르게 그의 손에 '자신의 철학'을 움켜쥐고 있었어.


  엄마가 2층의 연인을 불쾌하게 느꼈던 건 넘치는 애정표현의 문제보다 상대와 공동체를 존중하는 느낌이 없어서였던 거야. 둘의 몸짓엔 주위를 아랑곳 하지 않는 성(性)적 다급함만이 드러났어. 미술관이라는 곳은 화가의 예술 세계를 만나러 오는 곳이야.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임시적인 공동체지. 아래층 연인들처럼 함께 만난 사람들을 내심 응원하고 서로를 배려해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하고 다른 이가 작품과 나눌 감정적 교류를 방해했어. "뭣이 중헌디"의 그 '중'함이 없었어.   


  엄마 생각에 우리 모두가 궁금한, 이해할 수 없는 바나나의 값, 1억 4천만 원의 가치도 이런 연관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유의 미끼'


  카텔란의 바나나는 진정 중요하지만 사회에서 말하지 않는 것, 즉 '예술과 나에 대한 사유'를 잃지 않도록 하는 하나의 미끼였다고 생각해. 카텔란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는 이슈와 자본의 협력을 체험한 화가니까 바나나를 붙여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슈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현대미술의 특징이 '작가가 담는 의미'는 거절하지만 '사회에서 형성된 담론'은 환영하지. 그 담론이 형성되도록 무의미하고 형태가 사라질 '오브제'를 출품했고 이의 파장은 놀라웠어.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과 사회는 어떻게 관계하는가?', '사라지는 것과 영속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다양한 논제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가 만든 사건으로 인해 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미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하게 된 거야. 이는 '또 다른 미술'의 출현이지.


  곰브리치 선생님의 말씀을 옮긴다면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가 있을 뿐이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무제, 2023>



  느루야, 편지가 너무 길어졌지. 이 편지가 공부에 지친 네게 서늘한 바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지루한 논문이 되어 버렸을까 걱정이야. 하지만 마무리로 이 작품을 꼭 소개하고 싶구나.


  엄마가 바라보기에 카텔란은 너무나 도발적인 부분이 있어. <시스티나 경당>처럼 충분히 숙성되지 않아 거칠고 둔탁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던가, <아홉 번째 시간> 또는 히틀러를 소재로 했던 <그, 2001>처럼 예민한 주제로 관중을 선동하는 듯한 제스처, 루치아노 폰타나의 작품을 본뜬 <무제(조로),1992>나 반 고흐의 '신발'이 연상되는 <네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2023>처럼 위대한 자의 적수로 나서서 부족한 인지도를 확장하려는 정치 신인 같은 불순한 의도가 엿보이는 작품들 말이야. 그런데 그걸 상쇄시킬 만큼 뭉클함이 있는 게 이 화가의 매력이랄까?


  위 그림을 보렴. 돌아가신 엄마를 기린 작품이라고 해. 보기만 해도 우리의 깊은 곳을 건드리지. 아마도 카텔란의 어머니는 평생 가정을 돌보며 무지막지한 노동을 감내하셨을 거야. 냉장고에 갇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그런데 엄마를 더 아리게 했던 건 냉장고 안의 먹거리들 때문이었어. 콜라, 오렌지주스, 케첩, 달걀, 맥주, 잼, 피클... 영양소를 담기엔 너무나도 얄팍한 음식들.


  느루가 이번 주말에 오면 네가 좋아하는 토마토 파스타를 사 줄게. 모스카토 다스티의 달달한 와인도 곁들일게. 그리고 나면 아직 보지 못한 카텔란의 작품을 엄마랑 함께 보자. 평단은 그에게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고 사회적 금기를 깼다고 해. 그 말은 마땅하지 않아. 그가 전통과 권위를 무시한 게 아니라 어쩌면 일부분 그것을 뛰어넘었을지도 몰라. 짐짓 가벼움 안에 통렬함을 숨기고 복제 안에 개성을 심고는 미술의 주변에 있던 우리를 미술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는지 몰라.



PS : 오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자꾸 말 길어지면 제가 더 면구스러우니 그저 이해 부탁 드립니다. 당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현재 활동 중인 작가입니다. 그러니 견해는 있어도 미술사의 평가는 아직 이릅니다. 위 글은 제 견해를 담은 것입니다. 어떤 부분은 부족하고 어떤 부분은 넘치는 것을 제 평가와 제 감정으로 담았습니다. 혹 오해 없으시기 바라며 작품에 대한 각자의 느낌 또한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현대 미술을 조금 다뤄드리고 싶어서 올렸습니다.


  또 하나는 전 안산에 삽니다. 안산은 다문화 도시예요. 시민들이 모여 다문화의 작은 목소리를 담으려 <단원 FM>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제게 인터뷰 요청이 와 인터뷰한 내용을 올립니다. 첫째는 제가 나오니 꼭 들어 주시고(ㅎㅎ) 두번째는 시민 방송을 응원한다는 마음으로 관심 가져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제 구독자 중에는 안산 분이 계시지 않겠어요? ^^* (링크 복사가 안되 이렇게 올립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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