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배달이오

1월 셋째 주 - 이방응 <묵매도>

by 안노라

제가 사는 아파트 벽이 흰색입니다. 밤이 달을 띄우면 아파트 내 관상수 그림자가 벽에 비쳐 한 폭의 수묵화가 되곤 합니다. 달빛에 따라 먹의 농담이 달라지는 살아있는 벽화지요. 밤늦은 귀가 길, 남 모르는 운치였습니다. 오늘은 달이 밝네요. 겨울 지나며 살이 빠진 나뭇가지는 근력이 떨어졌는지 달빛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간신히 아파트 벽에 기대어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에게 봄의 전령이자 우정의 전령인 '역사(驛使)의 매화'를 전해 드립니다.



문화가 꽃피우려면 역시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성해야 합니다. 18세기 중국(청나라) 강남지방의 양주(揚州)는 대운하가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중국은 ‘남선북마(南船北馬 남쪽은 배로 다니고 북쪽은 말로 다닌다)’라고 합니다. 이곳은 서기 7세기부터 우리나라 '살수대첩'하면 생각나는 수나라 양제가 남북의 주요 하천 5개를 이어 통신과 쌀 등을 수송하는 운하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무리한 공사로 수나라는 망하고 혜택은 당나라가 받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요.



이후 이 지역은 활발한 상거래를 바탕으로 문화가 꽃피웠습니다. 이 양주에 여덟 명의 개성 강한 화가 ‘양주팔괴(揚州八怪)‘가 탄생합니다. 이들은 청대(淸代) 화단을 지배한 주류의 화풍에 구애받지 않고 저마다의 소재와 감각적 필치로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 방응(李方應 1695~1755)은 ‘양주팔괴’ 중에서도 튀는(?) 사람이었습니다. 강직하고 고집스러웠지요. 아버지 덕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관청에서 구휼미 나눠주는 일로 윗사람과 크게 다퉜습니다. 결국은 파직당하고 시난고난한 시절을 보낸 후, 늙어 허리 구부러진 이후에 양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림을 팔아 끼니를 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업작가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전업작가의 대우가 융숭했던 적은 예전에도 지금도 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남이 알아봐 주지 않아도 홀로 그윽한 향기를 품는다.'라고 하며 난초와 매화를 몹시 사랑하였습니다.



이방응 매화도 1750.jpg 이방응 <묵매도, 1750>



이 매화 그림은 1750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의 분방하고 거칠 것 없는 성격이 드러납니다. 매화가 마치 대나무처럼 완전히 꺾여 있지요. 그는 매화의 구부러지고 처연한 줄기와 꽃대, 꽃잎만을 격자에 넣고 들여다본 것처럼 그렸습니다. 주류의 화풍과는 다른 전통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느껴집니다. 화제(畵題)를 볼까요?



매화누상기왕춘(梅花樓上幾往春)

누각 위에 봄 담은 매화가 몇 번 왔든가


대탑금시구유신(對榻昑詩句有神)

책상에 마주 앉아 시 읊으니 신바람 나네


별후래증봉역사(別後來曾逢驛使)

헤어진 후 돌아와 역사를 만나니


농두개지기하인(隴頭開枝寄何人)

농산 정상에 핀 가지 하나 누구에게 부칠까



이 한시를 천천히 풀어봅니다. 아마도 이방응이 어느 누각에서 매화를 보았겠지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니 주름진 마음에도 미소가 피었나 봅니다. 신바람이 난다고 했으니까요. 매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역마 탄 사자' 즉 '역사(驛使)'를 만납니다.



역사란 지금의 우편배달부입니다. 청나라의 역참 제도는 광대한 영토를 거미줄처럼 엮어준 통치의 인프라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길'과 비견되는 훌륭하고 신속한 도로망이었습니다. 그리운 사람에게 어서 빨리 봄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마침 소식 전해 줄 사람(驛使 역사)을 만나게 된 겁니다. 역사는 공문서나 서신을 전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는 역사 편에 매화 한 가지를 부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 마음을 이리 시로 읊었던 것입니다.



원래 '매화를 부치는 시상(詩想)'은 육개(陸凱)와 범엽(范曄)의 고사에서 나옵니다.


절매봉역사(折梅逢驛使)

매화에 담긴 봄을 꺾었는데 역사를 만나


기여농두인(寄與隴頭人)

농두에 있는 그대에게 부쳐 드리오


강남무소유(江南無所有)

강남땅엔 있는 것이 별로 없기에


료증일지춘(聊贈一枝春)

애오라지 한 줄기의 봄을 드리오



옛 중국의 북쪽 지방은 물류와 정치가 활발하였지만 남쪽, 강남(양자강 이남)은 송나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에 북쪽만 못하였습니다. 대신 날은 훨씬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강남에 사는 육개는 매화 핀 것을 보고 북쪽에 사는 친구가 생각납니다. 봄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마침 우편배달부(역사)를 만나지요. 그 편에 매화 가지를 꺾어 부치며 벗의 안부를 전합니다. 우편배달부 역시, 매화가 시들기 전에 그 마음을 전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매화가 시들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재촉했을 역사의 가뿐 숨소리가 애틋하게 들립니다. 지금은 찾을 수 없는 우정과 낭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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