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첫째 주 -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군인, 목욕>
사람들은 감정을 몸의 여러 부분에 담아 놓습니다. 두려움에 떨면 소변이 마렵습니다. 두려움은 방광이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흥이 나면 심장이 뛰고 분노는 간을 상하게 합니다. 슬픔이 지나치면 폐에 녹이 습니다. 우리의 몸은 외부로부터 충격이 왔을 때, 가장 약한 곳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아픕니다. 시대도 그러합니다. 시대가 전통으로부터 유전적 결함을 이어받았을 때, 그것은 낮고 작은 약자를 먼저 병들게 하고 시나브로 전체를 상하게 합니다. 역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약하고 소외된 지점에서, 예술은 비로소 시대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고름을 짜냅니다. 예술은 '시대의 혀'이고 '시대를 향한 메스'입니다.
20세기 초 유럽은 매일매일 새로운 발명과 발견으로 인해 찬란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철도와 전구가 발명되어 공간과 시간을 정복하였고 식민지라는 거대한 땅이 발견되어 인종에 우열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죽는 날까지 노동을 통해 먹을 것을 구했던 인간들은 과학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이기(利器)가 이 땅에 에덴동산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오만에 빠졌습니다.
경쟁적으로 건방과 탐욕에 몰두해 자기 파멸의 나팔을 분 1914년, 7월을 기억하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의 <군인 목욕, 1915>입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을 연결하는 밧줄, 낭떠러지 위에 걸려있는 밧줄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인간이 목표가 아니라 (초인을 향해 가는) 다리라는 점이다." -니체-
니체는 선과 악으로 분리되어 인간을 질식시키는 기독교적 이원론을 부정했습니다. "인간은 개인으로 판단해야 하며 절대적인 진리와 도덕은 없다."라고 말했지요. 디오니소스적인 열정과 생명력을 중요시했습니다. 키르히너는 그런 니체를 숭배했습니다.
그는 급속한 근대화가 주는 냉소, 무관심, 가식에 저항하며 인간의 순수함과 선한 본성을 찾는 네이처리즘(naturism)에 매료되었습니다. 순수하고 원시적인 예술을 표방하는 독일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Die Brücke)를 설립한 이유이기도 했지요. '다리(Die Brücke)'란 전통과 진보, 과거와 미래, 원시와 문명을 연결하는 '다리(bridge)'에 대한 은유였습니다.
키르히너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군인 목욕>이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다듬지 않고 죽죽 내려 그은 거친 스케치, 기형적으로 긴 팔과 다리, 이상화되지 않은 신체, 단조로운 색과 단순한 배경의 누드화입니다. 제목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군인들입니다. 참호 속에서 쥐와 식량을 다투어야 했던 참혹한 시절에 그들은 모두 벗고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이기심의 먼지와 문명의 오물과 불평등한 죽음을 씻어내려는 것일까요. 저 목욕하는 군인들에게 국적이나 계급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 한 명의 사내로서, 젊은 생명으로서 존재했을 것입니다. 이후 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키르히너는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1915>이라는 작품으로 대답했습니다.
지금 나라 밖, 세계 한 곳은 전쟁 중입니다. 그곳이 2022년 지구의 가장 약하고 아픈 부분이겠지요. 그 고통은 천천히 지구 전체에 퍼질 것입니다. 나라 안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지역마다 세대마다 날카로운 대립과 갈등으로 근거 없는 미움이 가득합니다. 어디에서고 '선택된 자'들만의 에덴동산을 만들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