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들을 법정에 세우다

7월 셋째 주 - <호주 퀸즐랜드 주 테미스 동상>

by 안노라

7월 17일은 제헌절입니다. 제헌절(制憲節)은 말 그대로 헌법을 제정한 날이지요. 1392년 7월 17일 건국된 조선왕조를 기리고 역사의 영속성을 잇고자, 1948년 7월 17일에 맞추어 대한민국 <헌법>을 공표했습니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명시하고 우리나라가 자유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자주적 국가임을 선포한 기틀입니다. 또한 국가를 존립하게 하는 근본이 되는 약속이자 가치질서이지요. 모든 국민의 동의와 합의를 바탕으로 한 ‘법’이며 그러기에 나라의 ‘최고 법’입니다.



정의의 여신.jpg 호주 퀸즐랜드주 브리즈번 조지 스트리트에 있는 구 법원 밖에 있는 테미스 동상.


흔히들 ‘법의 정신’을 나타낼 때 ‘정의의 여신 디케’를 호명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무수한 여신들이 손에 꽃을 들고 있다면 디케는 검을 든 여신이지요. 한 손엔 옳고 그름의 무게를 재는 저울과 또 한 손엔 그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 누구라도 심판하는 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습니다. 그녀는 선입견이나 편견에 흔들리지 않는 공정한 판결을 내리라는 의미에서 두 눈을 가리고 있지요. 율법의 여신 테미스와 제우스의 딸로 질서의 여신 에우노미아,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와 더불어 인간의 계절과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는 네 자매 중 하나입니다. 디케의 로마식 표기는 유스티치아(Justitia)이고 정의라는 영어단어인 Justice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럼 재판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문헌으로 나타난 최초의 재판은 신화 속, 그리스 아레오파고스에서 열린 고소 신(告訴神) 포세이돈과 피고 신(被告神) 아레스에 관한 판정입니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할리로티오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샘 근처에서 아레스의 딸 알키페를 겁탈하려고 했다가 아레스에 의해 살해됩니다. 포세이돈은 자신의 아들 할리로티오스를 죽인 아레스를 아테네 법정에 고소합니다. 팽팽한 논리로 맞선 두 신(神)의 송사(訟事)에서 올림포스 12 신은 투표로 아레스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딸의 순결을 보호하려던 아버지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한 거지요.



이 최초의 재판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죄를 지은 신에 대해 신들이 모여 재판했다는 것은 신조차 법에 의해 심판받아야 한다는 엄정한 준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숭배하는 신들을 재판정에 세운 그리스인들은 사회나 국가가 누군가의 선의나 은혜나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평무사한 법률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는 민주정의의 사상적 토대를 구현하려 했던 것은 아닐는지요.



요즘 디케의 한쪽 저울이 기울었다고도 하고 그 기운 쪽에는 금덩이가 들어있다고도 합니다. 제헌절 아침, ‘법 앞에 평등’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꿈꾸며 신들을 법정에 세운 그리스인들을 생각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천사가 떨어뜨린 더 큰 첨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