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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전을 다녀와서 (1)

by 안노라

12월 초에 다녀와서 이제야 합스부르크전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전시에 대한 후기를 올리셨기에 개인적 감상보다 역사와 관련된 몇 작품에 대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너무 자세히 역사를 소개하면 힘들어하시더라고요.ㅎㅎ 그래서 전체의 맥락과 전시된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 두 세 차례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이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부터 할까요?



베른하르트 슈트라겔 원작을 모사 <막시밀리안 1세, 1508년 이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찬란한 시작을 연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입니다. 그(Maximilian I, 1459~1519)는 신성함의 상징인 명예의 천(cloth of honor) 앞에서 오른손엔 황제의 홀을, 왼손엔 검 손잡이를 들고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있군요. 이 기물들은 모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지위를 알리는 상징물들입니다. 또 황제의 목에 건 목걸이는 '황금양모 기사단'의 상징인 양을 매단 장식입니다. '황금양모 기사단'은 가톨릭을 수호하고 기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부르군트 기사단을 의미합니다. 막시밀리안 1세가 부르군트의 상속녀 마리와 결혼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계승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는 150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습니다.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르기까지의 역사를 잠깐 살펴볼까요? 13세기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로마'라는 전통적이고 권위 있는 개념에 기댄 수많은 연방(200~300여 개 추정)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누구의 세력도 더 커지길 원치 않은 7개 령의 제후가 서로 균형을 잡고 있었지요. 이 7명의 제후는 투표를 통해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갖고 있었기에 '선제후'라 불렀습니다. 물론 실세는 선제후들이었고 이 황제는 일명 '얼굴 마담'에 불과했습니다.


1250년,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리드리히 2세가 황위 세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이후 20여 년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를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선제후들이 바짝 긴장할 일이 생깁니다. 보헤미아 왕국이 급속히 커지기 시작해 남쪽의 오스트리아공국을 합병해 버린 것입니다. 어느 쪽의 세력도 커지길 원치 않던 선제후들은 '앗 뜨거라.' 하며 1273년 급작스레 황제를 뽑는 선거를 합니다.


15세기 신성로마제국 지도 - 척 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나라들이 있지요.



선생님들~ 일곱 명의 세력 왕들은 어떤 황제를 뽑고 싶었겠어요. 짐작하시겠지요? 자립할 기세는 택도 없고 내 왕조를 흔들 힘도 없지만 왕조와 왕국의 구색은 갖추어져 '황제'라는 이름표는 붙일 수 있는 곳을 찾게 됩니다. 그곳이 스위스(현재 지명) 아르가우지방의 영세한 백작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였습니다.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 1세는 별안간 사주에 없는 '황제'가 됩니다. 하지만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여의봉 없는 손오공이었다는 것을.


루돌프 1세는 모든 선제후들의 근심거리였던 보헤미아를 눌러 보헤미아가 삼켰던 오스트리아 공국을 토해내게 합니다. 물론 이 땅을 슬그머니 자신의 동생에게 다스리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나중 이 땅은 합스부르크 가의 중심(현 오스트리아)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타이틀은 이렇게 그에게 여의봉이 되어 주었지요.


이후 150여 년간 이웃 왕국과의 권력투쟁 끝에 1485년 프리드리히 3세는 다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릅니다. 그가 위 초상, 막시밀리언 1세의 아버지이며 최초로 결혼을 통해 영토 확대를 꾀한 전략왕입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당시 아버지(용담공 샤를)가 돌아가시고 고립무원이었던 보르고뉴 공국의 외동딸 마리와 자신의 아들 막시밀리언 1세를 결혼시킵니다. 이 결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세습뿐 아니라 부르고뉴 공국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되게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프랑스 땅의 윗부분(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프랑스 일부 지역)이 합스부르크 가의 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막시밀리언 1세를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초상화도 소개합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막시밀리언 1세 초상, 1519>



배경 설명은 이쯤 하고 전시된 작품 중 막시밀리언 1세 시기(1450~1520년가량/ 중기 르네상스 시기)쯤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막시밀리언 1세의 갑옷입니다. 당시 갑옷은 하나의 패션이었고 남자가 소유할 수 있는 사치 중 최고의 고가였습니다. 막시밀리언 1세는 훈련 목적이었던 마상시합을 무예와 경기의 형식을 갖추어 남자의 용맹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만든 군주입니다. 갑옷이 멋지지 않을 수 없겠죠?


이 갑옷은 로렌츠 헬름슈미트(Lorenz Helmschmied, 1450~1515)라는 아우구스부르크 출신의 갑옷 장인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대대로 갑옷을 만드는 가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솜씨는 당대의 기술을 뛰어넘어 혁신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후기 고딕의 우아함을 살린 갑옷 소개합니다. 갑옷 속에 받친 그물 모양의 이너는 <반지의 제왕>에서 본 적이 있지 않나요?


로렌츠 헬름슈미트 <막시밀리언 1세 갑옷, 1492>



전시된 작품 중 교황 레오 10세가 자신이 총애하던 라파엘로에게 다자인을 주문해 제작한 태피스트리도 있었습니다. 가로 세로 길이가 4미터가 넘으니 벽 한 면을 가득 채우는 태피스트리입니다. "이게 무슨 예술품이야?" 하는 분이 계시겠지만 당시 태피스트리는 제작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정치적 물건이자 장식품이었습니다. 당연히 재력과 권력이 큰 지배계급에서만 구입하고 장식할 수 있었지요. 두 작품이었는데 그 섬세함에 놀랐습니다. 구글에서는 원본을 찾을 길 없어 가서 찍었던 사진 올립니다. 두 분의 뒷모습은 어찌할 길 없네요. 사람이 넘 많아 이 꼴이 났습니다. ㅎ



라파엘로 산치오 디자인 / <기적의 물고기 잡이>,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안드레야 만테냐가 그린 연작 시리즈와 기타 작품, 다수의 공예품 등이 있지만 이곳에선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번 글엔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이 자신이 다스리는 티롤의 암브라스 성에 수집한 작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그의 성(城)을 수집한 회화, 갑옷, 무기, 공예품 등에 알맞게 종류별, 성격별로 나누고 공간을 정리했습니다. 최초의 박물관이라 지칭해도 손색이 없겠지요? 그의 초상화를 볼까요?



<페르디난트 2세 대공, 16세기>


그는 로마식 웅장한 기둥을 뒤로하고 머리엔 월계관을 쓰고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색 리본과 꽃으로 장식된 화환 안에서 당당히 허리에 손을 얹고 있습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군요. 이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이 들고 있는 것이 무언지 아세요? 놀랍게도 헤라클레스 곤봉입니다. 그는 강력한 지도력과 힘을 원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부드러워 보이네요.


신분제 사회에서 거칠 것 없는 왕족이라는 신분과 그에 따른 너른 영토는 충분히 힘을 과시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는 강한 영향력에 걸맞은 관용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독실한 가톨릭이었음에 새로 대두된 개혁신앙(1517 종교개혁)에 너그러웠고 과학과 예술을 장려했습니다. 그의 치세에 인스부르크는 무기와 유리 제조의 중심지가 되었고 다양한 예술이 꽃피웠습니다. 아름답지요?ㅎ


이 초상화에는 처음 소개했던 막스밀리언 1세의 초상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찾으셨나요?

네, 황금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늘어 뜨리고 있습니다.



피에트로 바누치 <성 히에로니무스, 1502>


성화에서 수도자가 사자와 함께 있으면 그는 '성 히에로니무스'입니다. 히에로니무스가 동굴에서 고행할 때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주었던 일화에서 유래합니다. 이 작품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과 그의 고통을 함께 하는 히에로니무스의 모습이 아스라한 배경과 함께 묘사되어 있네요. 오른쪽 붉은 모자는 추기경을 상징하는 모자입니다. 그의 신실함을 기려 성직자로서 존경을 표하는 의미이겠지요.


흔히 전시나 도록을 보고 있노라면 "이 그림은 뭐가 대단해요?"라고 묻는 지인(^^)이 있습니다. 미술 작품의 가치는 미학적, 예술적 이유도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른 관점의 혁신도 있습니다. 예가 적당할지 모르지만 이 작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뒷 배경과 느낌이 닮지 않았습니까? 당시 베네치아 화풍이라고 했던, 즉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성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또 피에트로 바누치는 '페루지노'로 불렸습니다. 그는 라파엘로의 스승이지요.


오타비오 바니니 <우물가의 리브가와 엘리에셀, 1625~26>


지금의 단톡방이 옛 시절 우물가였을까요? 우물은 생명의 물을 긷는 곳이니 우리의 단톡방도 생명을 살리는 말들이 오가야 하겠지요. 가끔 사이버 공간에서의 예의와 공감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늘 그닥 할 말이 없는 저에겐 좀 힘든 공간이기도 해서...


작품 오른쪽엔 물을 길으며 마주 보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비율과 아름다운 선은 이 작품이 고전주의 회화에 가깝다는 인상을 줍니다. 색은 화려하면서도 정돈되어 있네요. 다루는 소재도 성경 창세기의 이야깁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충성스러운 시종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냅니다. 먼 길을 걸어 하란에 도착한 엘리에셀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물을 청할 때, 내 약대(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이를 보내달라고. 그러면 그가 이삭의 신붓감인지를 알겠노라고. 기도가 끝나자마자 리브가라는 여인이 다가와 엘리에셀뿐만이 아니라 약대에게도 물을 줍니다. 그 충만된 순간을 그렸습니다.


오타비오 바니니는 메디치가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결혼을 소재로 한 그림이어서인지 이 작품 주문이 레오폴트 대공과 크라우디아 데 메디치의 결혼식 선물이라는 해설이 있습니다.


암브라스성에서 수집한 작품들 중에 원형 캔버스 양삭으로 된 '성 가족'도 있습니다. 원래 원형 캔버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보이다 이후 르네상스시대에 다시 등장합니다. 톤도(tondo)라고 합니다. 톤도는 이탈리아어로 '둥글다', '돔'을 뜻하는 'rotondo'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마도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인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캔버스가 사각형이라면 그 또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에게 있어 지루했을 테니까요.


(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성 가족> / (오) 안젤로 솔리메나 <성 가족> 전시 작품



합스부르크 전을 입장하려고 늘어선 줄을 보며 우리가 이렇게 그림에 관심이 많았나 저으기 놀랐습니다. 삶의 영역을 깊고 넓게 하려는 노력, 아름다움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적 본능,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으려는 고민들이 줄을 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 그러하니까요.


다음 포스팅은 가장 관심 많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의 명작들,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루벤스의 안젤리카, 베로네세의 아담과 이브를 들고 오겠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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