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전을 다녀와서(2)
이번 포스팅은 합스부르크 가(家)가 유럽을 평정한 16~17세기의 작품들과, 우수한 작품들을 수집해 이후 빈 미술사 박물관을 세계 박물관의 모범이 되게 한 당 대 몇 분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족보도 어려운데 하물며 남의 나라 각 가문의 족보는 너무나 헷갈리겠지요? 굳이 알 필요도 없구요. 하지만 알아두면 역사 이해가 쉬운 세계사적 족보가 몇 군데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스페인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예요.
이사벨 여왕(Isabel I, 1451~1504)은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로 태어났지만 이복 오빠 엔리케 4세(Enrique IV, 1425~1474)가 왕이 됩니다. 역사의 속살은 (이사벨 여왕의 어머니도 이름이 이사벨입니다.) 이사벨 왕비가 전 왕비의 아들인 엔리케 4세를 쿠데타를 통해 왕으로 세운 것이었어요. 그런데 엔리케 4세가 왕이 되자 마음이 변해 자신을 왕으로 세운 이사벨 왕비와 그 자녀들(이복동생, 이사벨과 알폰소)을 궁 밖으로 쫓아내 감금하다시피 해 버립니다. 어머니 이사벨은 그 배신감에 미쳐버렸고 이사벨과 알폰소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혹독한 상황에서 자랍니다. 이사벨 여왕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엔 가톨릭 신앙의 힘이 컸기에 나중 레콩키스타(이슬람교도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하는 국토 회복 운동)를 진두지휘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요.
구절양장 같은 역사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나중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포르투갈 늙은 왕에게 시집보내 결혼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명민한 데다 처세에 능하고 인내심이 강한 만큼 결단력이 있었던 이사벨은 이 난관을 타개할 계책을 세웁니다. 이웃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 2세(Fernando de Aragón, 1452~1516)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었지요. 둘은 엔리케 4세의 눈을 피해 비밀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엔리케 4세가 죽자 그의 딸과 내전을 벌여 드디어 1474년 카스티아 여왕으로 등극하지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레콩키스타를 완결한 1492년 콜럼버스에게 자금을 주어 대항해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신대륙을 개척한 분이 이 이사벨 여왕입니다. 그리고 이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 2세의 자녀 중 왕세자인 후안과 결혼한 공주가 지난 시간 설명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언 1세의 딸 마르그리트입니다. 합스부르크 가의 전성시대를 연 막시밀리언 1세는 이뿐 아니라 맏아들 필리프를 이사벨 여왕의 차녀인 후아나와도 결혼시키는 겹사돈을 맺지요.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죽고 후안 왕세자가 후사 없이 사망합니다. 카스티야 왕국은 후아나에게 계승되지요. 그런데 후아나가 정신이상으로 통치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어 남편인 필리프(펠리페 1세)가 카스티야 공동 통치자가 됩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합스부르크가의 확장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합스부르크 가가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니까요.
이제 역사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 엎치락뒤치락합니다. 펠리페 1세가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급서(急逝)합니다. 후아나와 펠리페 1세 사이엔 어린 아들 카를이 있었습니다. 카스티야는 아직 어린 카를 대신 이사벨 여왕의 남편인 페르난도 2세(아라곤의 왕)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페르난도 2세가 끝내 아들을 보지 못하고 1516년 죽자 성장한 카를이 왕위에 오릅니다. 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 왕국과 어머니 카스티야 왕국을 동시에 물려받은 카를은 카를로스 1세로 범 스페인 왕국이 출범합니다. 1519년 친할아버지인 막시밀리언 1세가 죽습니다.
자, 이제 땅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카스티야(어머니 땅)+아라곤(외 할아버지 땅)+부르고뉴(아버지 펠리페 1세의 땅)+오스트리아 대공국(친할아버지 땅)+기타 합스부르크 영지(친할아버지 땅)+신대륙(콜럼버스가 식민지로 삼은 땅)이 모두 카를로스 1세의 땅이 됩니다. 거기에 친할아버지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였으니 독일 땅과 그 황위까지 물려받습니다. 전 세계에 해가 지지 않는 땅의 첫 발자국은 영국이 아니고 스페인이었습니다. 그 카를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입니다.
광대한 제국을 아우르는 황제 카를 5세는 넓은 대륙의 동시 통치에 어려움을 느껴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공국(주로 중부 유럽) 섭정을 맡기고 본인은 스페인과 신대륙의 식민지 경영, 부르고뉴 땅을 통치합니다. 시간이 흐르자 페르디난트 1세가 섭정하던 땅은 그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자신이 다스리던 땅은 자신의 맏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줍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 칼레해전에서 처녀여왕의 함대에게 패배했던 그 무적함대의 스페인 왕이 이 펠리페 2세입니다. 펠리페 2세는 네 번째 아내 안나에게서 펠리페 3세를 얻었고 정치에 무능했던 펠리페 3세는 농업경제의 토대를 붕괴시키며 맏아들 펠리페 4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여기까지 어렵게 왔습니다. 설명이 길었지요? 16~17세기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독일(신성로마제국) 역사에 빠지지 않는 부분이니 조금 차분히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 합스부르크 전에 초상화로 등장하는 펠리페 4세를 살펴볼까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나오는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아버지지요. 그는 44년 간의 역사 격변기에 힘겹게 스페인을 통치했습니다. 다정한 성품에 예술을 사랑하고 장려한 왕이었고 벨라스케스의 재능과 인품을 아껴 산티아고 기사단에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대에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등 미술사의 굵직한 화가들과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 시인 로페 데 베가 등의 뛰어난 예술가가 성장했습니다.
그의 성품에는 왕이라는 직업보단 아트 딜러나 컬렉터가 더 알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의 초상을 볼까요? 붉은 휘장이 드리워진 배경 앞에 펠리페 4세가 검은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가슴 아래에는 황금양모 기사단 장식이 매달려 있고 소매 끝동은 밝은 색 장식으로 마무리되었네요. 장갑을 낀 왼손은 칼 손잡이에 얹은 채 나머지 장갑 한쪽을 들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종이를 들고 있네요. 초상화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입니다.
게다가 위대한 거장, 벨라스케스의 실력이겠지요? 분명 펠리페 4세는 황금빛 머리칼이 눈부셨을 것입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의 머리색깔 때문이 아니라 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그의 가녀린 속눈썹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벨라스케스는 합스부르크 가의 특징인 주걱턱이 부각되지 않도록 얼굴의 각도를 치밀하게 계산하였고, 고귀한 신분의 증거처럼 섬세하게 손을 묘사했습니다. 펠리페 4세의 손은 품위를 드러냅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엘리자베트 왕비입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렸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마리 데 메디치의 딸입니다. 그래서인지 주걱턱이 없지요. 그녀의 눈동자는 도도하며 입술엔 엄격함이 있습니다. 왼손엔 부채를 들었고 오른손은 의자를 짚고 있습니다. 20세기 이전의 복식사에 이미테이션은 없으니 세 줄짜리 진주와 반지, 각종 장식은 모두 진짜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헛된 허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현명하고 학식이 높고 형식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 내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지 못했고 1644년 이른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탄복을 금할 수 없는데 그중 하나가 색과 질감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플랑드르 지방의 극사실주의와 같은 효과를 내면서도 숨 막히지 않는 넉넉함, 티치아노처럼 색의 중량감이 있으면서도 세밀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합니다. 위대한 화가의 실력 때문인지 품격이 드러나는 그녀의 표정 때문인지 가장 빛나는 것은 그녀의 눈동자입니다.
펠리페 4세는 그녀와의 사이에 여섯 딸과 외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세자를 두었습니다. 초상화를 통해 본 왕세자는 너무나 귀엽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16살에 사망합니다. 다섯 명의 딸은 사망하고 막내 마리아 테레사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루이 14세의 아내가 됩니다.
펠리페 4세의 두 번째 부인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왕비였습니다. 그녀와의 사이에 우리가 익히 아는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와 펠리페 4세의 뒤를 잇는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거듭되는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결함으로 왕손들은 잦은 병치레를 이기지 못했고 사망률은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마르가리타 공주의 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벨라스케스는 개인적으로도 마르카리타 공주를 친 손주처럼 어여뻐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9살이 되던 1660년, 펠리페 4세의 조카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이 약속되었고 12살이 된 1663년 혼인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녀는 1665년 14살이 되자 빈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황손을 낳아야 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까요. 어린 황후는 결혼 6년 동안 여섯 번의 임신을 하였고 일곱 번째 임신 중 사망했습니다. 겨우 21살이었지요. 그녀의 자녀는 오로지 한 명, 마리아 안토니아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그 모든 것이 오로지 합스부르크 왕가를 잇고 영토를 지키는 수단으로써만 유용한 삶이란 행복일까요, 불행일까요. 그저 평범한 인생을 사는 필부인 저로서는 짐작이 어렵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전시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입니다. 벨라스케스가 그렸고 공주의 다섯 살 때 모습이지요. 나머지 세 살 때와 여덟 살 때의 모습까지 올려 봅니다.
벨라스케스가 같은 해에 그린 <시녀들, 1656>에서의 마르가리타 공주 모습도 찾아볼까요.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워낙 많은 분이 다루었고 구글에서 찾으면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그저 공주의 연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만큼 안쓰러울 뿐입니다. 아버지 펠리페 4세가 "나의 기쁨"이라고 하며 보석을 다루듯 하였다는데...
대표적인 초상 중 얀 판 덴 후커의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1642년 경>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초상화를 많이 다루었으므로 이 초상화 보단 빌헬름 대공이 수집한 작품을 몇 개 소개하겠습니다.
전 우리의 노동이 진정 '하나님이 주신 벌일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엔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고된 노동을 통해 먹을 걸 구하도록 하였고 하와에겐 출산의 고통을 주셨으니까요. 이 작품은 인간의 외로움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신에게 추방당한 인간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초록과 갈색으로 이루어진 색채는 화면을 더욱 어둡고 습하게 만듭니다.
숲 한 귀퉁이에서 아담은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고 있습니다. 가족을 책임지는 고단한 가장의 뒷모습입니다. 하와는 아이의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선악을 판별하려는 도전과 총기는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안고 젖을 먹이는 아이는 아마도 둘째인 아벨 같습니다. 땅에 누워있는 아이가 첫째인 가인이겠지요. 어두운 숲의 기운에 눌렸는지 아이조차 웃음이 없습니다. 동물들도 소리 내지 않습니다. 오로지 추방당한 자의 막막한 울음소리만이 들립니다. 베로네세에게 작품을 주문한 성당의 의도가 '인간에게 죄의 결과와 삶의 겸손'을 가르치고 싶었다면 이 작품에서 충분히 만족했을 것입니다.
동양의 군자에게 필요한 것은 문사철 시서화(文史哲 詩書畵)였습니다. 이 인문적 지식은 지식으로 그치지 않고 내면을 닦는 수양의 방법이었지요. 역사와 철학, 시와 그림은 있었지만 군자에게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소설은 수양의 대상은 아니었던 게지요. 하지만 서양은 최초의 문헌이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기원전 8세기 경에 쓰였으니까요.
오비디우스는 기원 후 8세기 경에 서사시 <변신이야기>를 씁니다. 신화와 역사를 다룬 이 유장한 서사시에 주피터(제우스)와 머큐리(헤르메스)가 신분을 속이고 어느 마을에 도착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신(神) 임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모습의 그들은 프리기아 마을에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오갈 데 없고 배고팠던 그들에게 늙은 필레몬과 바우키스 부부만이 초라하지만 정성스러운 음식을 대접하지요.
그림을 보세요. 포도와 무화과 빨간 사과를 담은 광주리가 식탁 위에 있습니다. 잘린 빵이 있고 포도주가 담겨 있네요. 신화에서는 포도주가 담긴 병은 비워지자마자 다시 채워집니다. 이를 보고 두 부부는 깜짝 놀라 방문한 이들이 신임을 알게 되지요. 이야기에 탁월했던 루벤스는 아내 바우키스가 한 마리 남은 거위를 잡아 신들에게 대접하려고 막 거위를 잡는 극적 순간을 표현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꽥"하고 소리를 지르는 듯한 거위의 목을 보세요. 연극적인 요소를 회화에 담을 줄 알았던 루벤스의 재치가 돋보입니다.
주피터는 이를 말리고 두 노부부를 산 위로 데려가 홍수를 피하게 해 줍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홍수에 목숨을 잃었지요. 당시만 해도 신들의 의사결정권이 절대적이었나 봅니다. 인간은 거위처럼 "꽥"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홍수에 떠밀렸을 테니까요.
신의 선택을 받은 자에 대한 작품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코르넬리스 데 포스가 그린 <기름 부음을 받는 솔로몬, 1630년 경>입니다.
루벤스의 제자였던 코르넬리스 데 포스는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루벤스의 공방에서 펠리페 4세가 주문한 작업을 함께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데 포스는 솔로몬이 빛나는 대야에 몸을 숙이고 성직자 또는 다윗 왕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기름 부음'이란 왕위 계승식이니 지금 일종의 대관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얼굴을 숙이고 있는 소년 옆 두 시종이 한쪽은 왕관을, 한쪽은 왕 홀(芴)을 성스런 보자기 위에 담아 식의 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두 시종으로 인해 기름 부음을 받는 대상이 왕인 걸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소년이 솔로몬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요?
뒷 배경에 나선형으로 구부러지며 꽃문양이 새겨진 기둥이 있지요. 그 모양은 솔로몬을 뜻하는 솔로몬 기둥입니다. 4세기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나선형 기둥을 솔로몬 성전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이에 유래해 꽃문양이 있는 나선형 기둥은 솔로몬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영감을 받은 바로크 시대의 건축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성당 내 베드로 무덤 위를 꾸미는 거대한 캐노피를 웅대한 청동주물로 작업한 솔로몬 기둥으로 떠 받치게 했습니다.
1517년 종교 개혁을 계기로 화가들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합니다. 전통적 가톨릭 신앙에서는 글을 모르고 나약한 인간에게 글을 대신해 성스런 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성경을 알려주는 것이 회화와 조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교는 그것을 부정하며 우상화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화가들의 밥줄(^^)이었던 성당의 주문이 끊어집니다. 화가들은 각자 도생해야 하는 거센 시대의 조류 앞에 섰습니다.
이때 플랑드르 지방에서 새로운 화풍과 주제가 움트기 시작합니다. 그 화풍은 삶에 밀접한 풍속화와 정물화였습니다. 이 합스부르크 전시에 당대 풍속화가로 명성을 날린 얀 스테인(Jan Steen, 1626~1679)의 풍속화가 있습니다.
개개인의 도덕과 신앙을 강조하는 신교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당시 플랑드르 지방의 풍속화에는 교훈과 사회적 약속을 다루는 우의적 작품이 많습니다. 얀 스테인의 <바람 난 신부를 둔 신랑, 1670년 경>에는 우스꽝스러운 결혼식 피로연을 소재로 정절과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는 화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화면이 어수선합니다. 등장인물들은 결혼을 축하하러 온 것보다 왠지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것 같은 얼굴들입니다. 다들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하지요. 결혼식 피로연임에도 불구하고 음식 접시는 비어있고 그 흔한 꽃다발 하나 없습니다. 오히려 바닥엔 꽃병을 나온(?) 이파리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습니다. 천정에도 약간의 나뭇잎이 있는데 그 사이로 사슴뿔이 삐어져 나와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뿔을 자랑하다 나뭇가지에 걸려 사냥꾼에게 잡힌 어리석은 사슴을 빗댄 것인가요?
오른쪽엔 우스꽝스러운 결혼식용 왕관을 쓴 신부와 지푸라기가 꽂힌 모자를 쓴 신랑이 함께 위층의 침실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두 신혼부부 앞에는 늙은 하녀가 촛불을 들고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네요. 어서 올라가자는 소리 같지요. 이미 임신한 상태인지 불룩한 배를 감싸며 신부를 다독이는 신랑 뒤로 어떤 사내가 손을 입술에 대고 있습니다. 마치 "조용히 해. 비밀이야." 하듯 말입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 서로 섞이게 되지요. 혹시 다 읽고 나서 펠리페 4세와 막시밀리언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우왕좌왕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짧게 쓰지 못해 이 지경이 되었네요. 밤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잘 시간이야."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립니다. 머릿속의 그림을 손가락이 옮기질 못하고 꾸벅꾸벅 조네요.
"이만 잘 시간이야. 다음 이야긴 내일 또 들려줄게.^^"
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기에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나선형 기둥이 솔로몬 성전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4세기에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나선형 기둥이 솔로몬 성전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져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