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스부르크전을 다녀와서(3) -
전 필사를 하는데 어떤 계기로 오래전 필사했던 <제인 에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노트에 필사했던 첫 문장이 "상냥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마라."더군요. 제 기억에 이 구절은 제인 에어의 주관이 뚜렷한 태도와 말투가 못마땅했던 숙모 리드부인이 제인 에어를 나무라며 했던 말인 것 같습니다. 책에선 좋은 의도로 쓰이지 않았는데 이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제게 다가오는 의미가 크네요.
"상냥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딱 저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은근 불만 많고 고집도 세거든요. 올해는 이 말을 새겨 부정적인 말, 시니컬한 태도를 버리고 '상냥'해져야겠습니다. 상냥한 태도로 합스부르크전 (3)을 시작합니다. 제발 이해 쉽게 설명하도록 직관적이고 명확한 단어를 고를 수 있기를...
지난 (2)편 기억하시나요?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가 있었지요. 그 공주와 결혼한 사람이 레오폴트 1세입니다.(인척 간 결혼이 너무 복잡하므로 그간의 내용은 생략)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 1세의 첫 번째 부인이 되었지요. 일찍 사망했습니다. 레오폴트 1세의 세 번째 부인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황후에게서 맏아들 요제프 1세가 태어납니다. 요제프 1세는 후계를 이을 아들 없이 죽습니다. 요제프 1세가 죽자 동생 카를 6세가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를 다스리는 황제가 됩니다.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는 지금의 유럽 중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쪽 펠리페 5세가 왕위를 계승한스페인과 프랑스를 뺀 대부분의 지역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카를 6세는 영토를 분할하지 않는 한, 합스부르크 가에 더 이상의 남자 상속인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 자각합니다. 그는 안전장치로 1713년 국사조칙을 선포하여 게르만의 살리카법(남자만 상속)을 피하려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716년 그가 아들을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합니다. 카를 6세는 자신의 집권기 동안 맏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방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카를 6세의 맏딸이 우리가 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파르마의 왕)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입니다.
하지만 그의 딸은 오스트리아 여대공과 기타 여러 관할 왕국의 왕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후면에서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을 좌지우지했을지는 몰라도 그녀는 결국 남자만이 받을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신성로마, 이탈리아, 독일)라는 타이틀만은 얻지 못했습니다. 그 황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이 물려받습니다. 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라고 부릅니다.
그녀의 왕위계승문제를 빌미로 끊임없이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협했고, 기어이 슐레지엔이라는 영토를 빼앗아 자신의 나라를 키운 영웅이 있습니다.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의 상속녀로서 오스트리아 왕위를 계승할 때, 신성로마제국의 윗부분 - 지금의 북유럽 쪽에서-프로이센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엄정한 세금징수와 내핍 경영으로 군대를 육성하고 나라를 키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중 근대 독일의 모태를 만든 위대한 프로이센의 왕세자가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지요.
프리드리히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관계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둘의 어린 시절엔 서로가 정략결혼의 상대이기도 했습니다. 각자 오스트리아 여왕과 프로이센 왕으로서 너무나 탁월했고 역사에 남을 훌륭한 인물들이었지만 도도한 역사의 물결은 둘의 연대나 화합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당대의 가장 큰 숙적(宿敵)이었고, 창과 방패였으며, 용과 사자였고, 하늘의 두 태양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합스부르크 가를 지키려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장 큰 불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스트리아는 침략해 오는 프로이센에 번번이 패합니다. 국가 수입의 10%에 해당하는 슐레지엔을 빼앗긴 건 두고두고 명치를 때리는 화근이 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집권 시 오스트리아 빈이 유럽 문화의 중심이었듯 프리드리히 2세 집권 시 북부유럽 문화의 강자는 프로이센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 때, 베를린은 철학과 사상이 성숙한 '북방의 아테네'로 불렸습니다. 나중 독일 통일의 주도권도 빼앗기게 되며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기틀은 이때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잠깐, 아직까지도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칭송받는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권위적이고 난폭하고 의심 많고 냉담했던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 인해 처절하고 혹독한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강압적인 아버지를 피해 영국으로 탈출한 그를 다시 프로이센으로 잡아 온 아버지는 그의 눈앞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지요. 그는 감옥에서 2년을 보내고 다시 왕세자의 자리에 복권된 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는 결단성과 책임감이 강했으며 뛰어난 작전 능력과 군사적 지휘력, 또 예술을 부흥하고 학문을 장려하고 애민정신이 있는 통찰력 있는 군주가 됩니다. 하지만 다정하고 섬세하며 수줍게 플루트를 연주했던 맑은 청년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아내와도 관계도 철저히 정략결혼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평생을 내면적인 고독과 싸웠고 사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고 사랑했던 건 오로지 그의 애견 그레이하운드들 뿐이었습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왕궁을 건설하고 싶어 했던 그는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을 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묻혀 있습니다.
그가 했던 말이 아직 전해지지요. "짐은 국가에서 첫 번째 심부름꾼이다."
자, 이제 작품에 대한 배경설명이 끝났으니 전시된 몇 작품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윗 그림 1727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10살이었습니다. 1745년~50년 경에 그려진 아래 그림의 그녀는 28~33살 즈음일 것입니다. 아직은 원숙하지 못할 나이인데도 다문 입술과 벌린 팔에서 군주의 위엄과 유연한 정치력이 보입니다. 오스트리아 여대공이 된 1740년 이후의 5년 가량이 그녀를 빠르게 성장시킨 탓일까요?
1740년 카를 6세가 서거하자 그녀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를 계승합니다. 이 작품의 오른쪽, 그녀의 왼 손 위로 세 개의 왕관이 놓여 있습니다. 가장 앞쪽에 헝가리의 성 슈테판 왕관, 뒤로 보헤미아의 성 바츨라프 왕관, 그 뒤로 오스트리아의 대공관입니다. 그녀는 오른손을 쭉 뻗어 왕홀을 드러내 보임으로 당당히 자신의 위치를 역사에 각인시킵니다.
이 작품은 원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남편 프란츠 1세의 초상과 함께 부부 초상으로 그려졌을 거라고 합니다. 판화 복제본에 프란츠 1세가 황제의 관이 놓인 탁자 옆에 서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하지요.
그녀는 16명의 자녀를 출산했고 그중 10명이 살아남았습니다. 맏아들인 요제프 2세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의 영토인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그는 냉소적이고 거만하고 형제자매를 모욕하는 독선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시대의 흐름을 빨리 읽고 계몽군주로서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강한 고집으로 인해 마리아 테레지아와 잦은 불화가 있었다고 하지요.
초상화는 서 있는 장소와 주위의 사물들이 그 인물이 지향하는 바를 나타내 주는 도구로 쓰입니다. 요제프 2세는 전통적 초상화의 배경으로 쓰이는 황실의 붉은 휘장 없이 초록 기마병 제복을 입고 책상 앞에 서 있습니다. 그가 오른손을 짚고 있는 금색 테이블 위엔 왕관이나 왕홀이 아닌 펼쳐진 지도와 지구본, 필기구들이 놓여 있습니다. 아마도 요제프 2세의 집무실인 게지요. 그가 왕실의 홀이 아닌 검소하고 담백한 형태의 집무실에 서 있는 자세를 취했다는 건 일하는 모습,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가는 계몽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궁정화가였던 요제프 히켈은 냉소적이었다는 그의 얼굴에 붉은 화색이 돌게 했습니다. 그 터치만으로 요제프 2세는 몹시 사려 깊고 이지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포토 샵을 한 것이지요. 화가의 역량이란 이토록 시대를 뛰어 넘습니다.
마지막 인물 초상화를 볼까요? 많이 익숙한 작품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자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거듭되는 전쟁 속에서 무수한 피의 대가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오랜 적대 관계에 있던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막내딸을 프랑스 루이 16세에게 보냅니다.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프랑스 국민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 공주인 것 자체부터 흔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국민으로부터 사치와 허영에 거만하기까지 한 오스트리아 여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녀는 1770년 결혼했습니다. 이 작품은 1778년이니 결혼 후 8년 째이네요. 그녀는 은빛이 도는 실크에 풍성한 주름으로 실루엣을 살리고 화사한 리본을 단 프랑스 전통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실크의 광택 때문인지 흰 피부가 더욱 창백하게 보입니다. 그녀의 볼은 손에 든 분홍 꽃으로 살짝 두드린 듯 발그레합니다. 머리엔 깃털이 높이 솟은 모자를 썼군요. 꼿꼿한 자세에서 어릴 적부터 몸에 밴 품위가 엿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드레스 아래 살짝 엿보이는 저 작은 발로 1793년 단두대에 오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초상화 작업을 위해 자세를 취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요?
그림은 기록화의 역할을 합니다. 신임평안감사 부임 환영을 그린 김홍도의 <부벽루연회도> 와 같은 것이지요. 이 작품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넷째 딸이자 가장 아꼈다고 하는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1766년 약혼 축하연입니다. 이 욕심 많고 앙팡 졌던 공주가 사랑했던 인물은 작센의 알베르트 공작입니다. 크리스티나 대공의 아버지 프란츠 1세는 이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1765년 갑작스럽게 프란츠 1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오빠인 요제프 2세를 설득해 드디어 결혼하게 됩니다.
이 당시엔 황실의 공식 행사가 있으면 황실 일원은 공개적으로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하는데 이때는 황제의 가족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네요. 아마 일반 평민들이 황제나 황제의 가족들의 먹는 음식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구경거리이자 이벤트였던 모양입니다.
행사장 호프부르크 왕궁의 레오폴트관에는 어마어마한 인원이 서성대고 있습니다. 테이블 앞, 붉은 옷을 입은 근위병들이 더 이상의 접근을 막는 가드레일 역할을 하고 있네요. 화면의 정 중앙에는 요제프 2세와 황후가 앉았고 왼쪽으로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가 앉아 있습니다. 요제프 황제 뒤, 잔치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휘장은 일 년 전 서거한 프란츠 1세의 추모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ㄷ자 테이블에 왕위 계승 서열대로 자리 잡은 황실 일원들의 차분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림 속, 낯설고 놀라운 광경을 본 구경꾼들의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1600년을 시작으로 하는 웅장했던 바로크는 1730년 경에 로코코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로코코가 '조약돌, 조개무늬'를 뜻하는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루이 15세 시대 귀족들의 취향을 일컫는 '로코코'는 고동이나 조가비 등을 이용해 화려한 장식품으로 발전합니다.
이 셔벗용 식탁 장식은 합스부르크가의 부유함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셔벗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일종의 '샤베트'입니다. 과즙에 물, 우유, 설탕, 크림 등을 넣고 아이스크림 모양으로 얼린 빙과이지요. 그걸 담는 그릇인 셈인데 각각의 조가비에 사람 얼굴을 양각한 장신구와 금장식이 둘러져 있습니다. 사람 얼굴은 모두 황실 인원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도 있지요. 셔벗을 먹을 때 부조에 새긴 인물들이 사용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카를 6세의 아내인 황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악" 소리 나는 화려함입니다.
아폴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있는 술잔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을 수 없어 올릴 수가 없네요. 뚜껑에 정교하게 세공된 루비, 에메랄드, 토파즈, 다이아몬드가 있으며 금 도금된 호화로운 잔입니다. 그 잔에 술을 마시면 술이 금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이다스의 손처럼 마이다스의 잔입니다.
끝내려 했는데 '시시'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황후 엘리자베트가 남았네요. 그녀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한 점을 보여 드립니다.
이 '시시'는 뮤지컬로 너무나 유명한 여인이지요. 성격이 활달했던 그녀는 그녀의 언니 헬렌과 약혼하기 위해 온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눈에 띄어 팔자에 없던 황후가 됩니다. 하지만 엄마의 언니였던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와의 사이가 악화되고 황태자였던 루돌프의 자살 이후 극심한 우울증을 겪습니다. 그녀는 황실에 적응하지 못했고 암살자의 손에 죽는 순간까지 해외로 여행을 다녔지요.
엘리자베트 황후 역할을 맡았던 신경숙 씨의 목소리로 <나는 나만의 것> 들려드리며 3회에 걸친 합스부르크 전 후기를 마칩니다. 또 다른 글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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