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니코 피로스마니 <마르가리타>& 앙리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by 안노라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중략)

나는 불안하였다.
아주 상냥하게 네가 왔다.
마침 꿈속에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오고 은은히 동화에서처럼
밤이 울려 퍼졌다.

밤은 은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한 주먹의 꿈을 뿌린다.
꿈은 속속들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나는 취한다.(중략)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이 어떻게 내게 왔을까요? 은으로 빛나는 옷을 입은 밤이, 한 주먹의 꿈을 갖고 상냥히 걸어왔을까요?



니코 피로스마니 마르가리타 1909.jpg 니코 피로스마니 <여배우 마르가리타, 1909>


그가 트빌리시를 순회공연 차 방문한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사랑한 것인지, 그가 그린 극장 간판의 아리따운 여인을 사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전설과 신화는 달빛에 젖는 법이고, 대부분의 이야기는 바랄 수 없는 희망을 담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그가 마르가리타를 사랑하여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재산과 모든 것을 장미꽃으로 바꿔 그녀가 잠든 호텔 앞 광장과 창문을 가득 메웠다는 사실은 아직도 노래로 남아 우리의 귓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의 분신이 어딘가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순정함이 사라진 시대에, 외롭고 고독했던 소년, 가난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청년의 맑은 영혼을 전해봅니다.



한 소년이 조막만한 주먹을 꼭 그러쥡니다. 손을 펼치면 그 안의 색들이 훨훨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소년이 붙잡고 있는 건 꿈이나 희망이 아닌 희고 창백한 색, 검고 눈물이 많은 색입니다. 아주 조금 가지고 있기에 함부로 낭비하거나 마음껏 쓸 수도 없는 색입니다.


소년은 1870년, 여덟 살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어린 두 누이도 일찍 시집가고 말지요. '시집'이랄 게 있을까요. 끼니조차 잇기 힘든 어린아이들이 단순히 먹고 잘 곳을 마련하기 위해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가는 것이었습니다. 홀로 된 소년은 열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전 고용주였던 아베르디 칼란타로프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그는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 역 근처에 사는 대가족의 가장이자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소년은 집 안의 허드레 일과 집 밖의 잡다한 일을 하며, 읽고 쓰기를 배우고 세상을 익혔습니다. 당시 그루지야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그루지야어와 러시아어를 읽고 쓸 줄 알며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청년,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 1862~1918)로 성장했습니다.



니코 피로스마니 자화상.jpg 니코 피로스마니 <자화상, 1900>


1880년 열여덟 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다른 화가와 함께 트빌리시에 간판을 그리는 그림 작업장을 열었습니다. 잘 되었다면 하급 노동자인 철도 차장으로 일하거나, 낙농장을 열리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1894년 연 낙농장이 그의 삶에서 거의 유일하게 안정적인 수입을 주었고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더 많이 그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1901년 낙농장을 접고 본격적으로 시내 상점이나 극장 간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입을 위해 집 안의 페인트 칠 주문이나 건물에 도료를 칠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니코에게는 그나마 붓과 물감을 잡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작업 후 남은 물감으로 자신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간판에 붉은색이 많았다면 그에겐 붉은 물감이 남았고 집 벽이 푸른색이었다면 그에겐 푸른 물감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몇 안 되는 색을 조합한 이질적 환상의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또 캔버스를 살 형편이 되지 못했기에 기름 먹인 천인 유포, 식탁보나 골판지 등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거의 대부분 작품이 릴케의 시처럼 '은으로 빛나는 밤'이 되었습니다. 어두운 배경에 단순한 구도, 몇 안 되는 색으로 이루어진 그의 그림을, 거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작품'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누구의 입방아에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정식 회화 수업도 받지 못한 '간판장이'에 불과했으니까요.


니코는 그루지야를 그렸습니다. 야채를 사고파는 상인과 아낙네들, 검은 연기를 내뿜고 역에 들어서는 기차, 포도 수확과 와인을 만들기 위한 가공 작업, 식사를 하는 사람, 흰 돼지와 암소, 노란 사자, 달빛의 여우를 그렸습니다. 너무나 신비스러운 세계가 밤을 안고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니코는 그 안에 자신이 사랑하는 마르가리타를 살포시 내려놓았습니다.



고우림의 <백만 송이 장미> 나의 아저씨 중


전 니코가 자신의 세계, 마법의 붓이 만들었던 천상의 여인을 사랑했던 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진심을 다해 그렸던 간판 속 사랑하고픈 여인이 두꺼운 금속 패널을 걸어 나와 이상(理想) 속 모습 그대로 공연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의 장미꽃은 광장은 덮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기엔 부족했던가 봅니다. 그녀는 트빌리시를 떠났고 그의 작품은 당대 예술가들의 무시와 폄하 속에 묻혔습니다. 지하실에서 그림만을 그리던 니코에게 스페인 독감이 찾아왔습니다. 냉대와 알코올 중독으로 쇠약해진 주먹을 펴자 은빛 꿈이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는 마흔여섯의 나이에 고독한 방랑을 마쳤습니다.


그의 사망 후 니코의 작품은 재조명되었고 피카소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사후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마르가리타에게 보낸 백만 송이 장미는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넨스키의 작사에 라트비아 작곡가 레이몽드 파울스가 곡을 붙여 아직도 우리에게 그 아픔을 들려줍니다.


"

한 화가가 있었네 홀로 살고 있었지

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

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그림과 피마저도 모두 팔았지

그 돈으로 바다를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창가에서 창가에서 창가에서 그대가 보겠지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그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꽃으로 바꾸었다네


그대가 아침에 깨어나 창가에 서면 넋이 빠질지도 몰라

마치 꿈의 연장인 것처럼 광장이 온통 꽃으로 덮여 있을 테니까

정신이 들면 궁금해하겠지 도대체 어떤 부자가 여기다 꽃을 두었을까

창 아래에는 가난한 화가가 숨도 멈춘 채 서 있는데 말이야


만남은 너무 짧았고 밤 기차는 그녀를 멀리 데리고 갔지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 황홀한 장미의 노래가 함께 했다네

화가는 홀로 불행한 삶을 살았지

하지만 그의 삶에도 꽃으로 가득한 광장이 함께 한다네

"



이제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의 작품 한 점을 보여드립니다. 니코와 앙리의 화풍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삶의 궤적에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가난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서인지 자신만의 단순하고 신비한 세계를 그려냈습니다. 무엇보다 작품 속 어디에도 세상에 대해 앓는 소리가 없습니다. 돌을 던지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결핍 안에서 오로지 순정한 꿈만을 피워 냅니다.



앙리 루소 시인과 영감을 주는 뮤즈 1909.jpg 앙리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1909>



공교롭게도 니코 피로스마니가 사랑하는 여인 <마르가리타>를 그린 1909년, 앙리 루소는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1909>를 그렸습니다. 니코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그렸다면, 앙리는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의 사랑을 그렸습니다. 니코의 그림 속 마르가리타가 떠났듯 앙리의 그림 속 마리 로랑생도 기욤을 떠났습니다. 니코가 스페인 독감으로 1918년 사망했듯 기욤 아폴리네르도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습니다. 니코와 기욤, 둘 다 사랑과 생명을 잃고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림 속 펜과 종이를 든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니코처럼 순정한 마음으로 한 여인을 사랑한 비평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너그러워 어디에나 친구가 많았고, 아방가르드를 옹호하는 글로 새로운 예술의 방패가 되었으며, 칼리그램이라는 글과 그림을 통해 현대시의 심장이 된 예술가입니다.


그는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힌 여자'라는 명시를 남긴 프랑스의 여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녀의 첫 전시회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만났지요. 기욤은 총명하고 밝은 그녀에게 끌렸습니다. 그녀도 따스한 성품과 콧수염 속에 독특한 예술세계를 숨긴 그에게 빠졌습니다. 둘은 5년간 서로의 펜과 붓에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로 지냅니다. 많은 대화 중, 둘 다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로서의 공통점이 더 깊은 결속을 유지하게 했을까요?


그들의 사랑은 미라보 다리를 건너 진보적 예술가들이 모였던 '바토 리부아르' 아파트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시대를 이끄는 선구적 예술이 자양분이 되었지요. 하지만 예술이 달려 나갈 때, 사랑은 머뭇거렸나 봅니다. 결혼을 원했던 마리와 미학적 실험에 몰두했던 기욤의 갈등으로 1912년, 항상 손잡고 건너던 미라보 다리를 함께 건너지 못했습니다. 사랑했던 마리 로랑생과 헤어진 후 기욤이 쓴 시가 우리가 학창 시절 불을 밝히며 외웠던 <미라보 다리>입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중략)

흐르는 물결같이 사랑은 지나간다

사랑은 지나간다

삶이 느리듯

희망이 강렬하듯 (중략)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흘러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우리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저렇듯 천천히 흐르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기욤 아폴리네르"



앙리 루소 과거와 현재 또는 철학적 사고 (1899).jpg 앙리 루소 <과거와 현재 또는 철학적 사유, 1899> / 앙리와 그의 아내



누구보다 그림에 진심이었던 앙리 루소는 생기발랄한 캔버스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색을 조합해 보고 구도도 비틀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마무리 붓질이 끝나면 태양이 빛나는 숲은 어둠이 깃든 밀림이 되거나 아름다운 여인은 뱀을 부르는 주술사가 되거나 웃음을 피우는 삐에로는 슬픔을 위로하는 나그네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혹 그의 내면에 삶이 주는 어쩔 수 없는 우수가 스며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는 1844년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도와 거친 일을 해야 했고 아버지의 빚 때문에 이사를 해야 했기에 일정한 주거지 없이 살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법률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하다 돈을 훔친 일(문서를 위조했다고도 함)로 군대를(1863년부터 4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했다고도 함) 가게 되었습니다. 잘못을 면죄해 주는 대가였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계신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올라와 1871년부터 세관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세관원을 하며 주말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사를 하던 앙리 루소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대 화가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습니다. 수군거림과 비아냥이 계속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많은 시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세관원을 그만둡니다. 세월은 갔고... 조롱했던 화가들의 작품은 세느강 아래로 흘러갔습니다.


이제... 아무도 그림을 사 주지 않는, 그 가난한 주머니를 걱정한 기욤이 앙리 루소에게 도움이 되고자 주문했던 그림만이 미술관 한 켠에서 그들의 사랑과 가난한 화가의 열정을 안타깝게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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