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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May 23. 2023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82. 에드워드 호퍼 

  높은 천장에 샹들리에가 눈부셔. 빛이 꽃처럼 떨어진다. 느루야, 엄마 '스승의 날' 행사에 왔어. 사전에 행사안내를 도와 달라는 부탁이 있어 서둘렀구나. 꽃과 명찰을 달아 드리고 자리를 안내하는 가벼운 일이야. 서울 온 김에 행사 끝나면 네 하숙방에 들렀다 가려고 해. 



  3년 만인가? 코로나로 인해 행사가 취소되거나 줌으로 만나거나 했는데, 직접 얼굴을 보니 기미나 검버섯은 찾을 수 없구나. 주름이나 흰머리도 보이지 않아. 모두 유약을 바른 도자기처럼 윤나고 매끄럽네. 이 호텔 밖은 오후 5시지만 이곳은 정오 12시야. 햇빛이 자신의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투명하고 밝은 시간, 우린 화사한 얼굴로 만났단다.  



  1부 식순은 학과 교수님들과 동문들이 주거니 받거니 인사도 하고 감사 글도 낭독하고 퀴즈도 맞추고 작은 선물도 주고받았어. 참으로 좋구나. 박수 소리가 밀물과 썰물 사이를 오가네. 사회를 보고 있는 선배는 얼마 전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로 승진했다지. 엄마도 랩 단톡방에 오른 소식을 보고 축하 문자를 올렸으니까. 모임 간격이 멀었던 탓인지 제법 변화가 많더라. 테이블에 앉아 소식을 주고받다 보니 타 대학 강사가 된 분도 있고, 공교육기관 팀장이 된 분도 있었어.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곧바로 진학했던 젊은 동기들의 취직 소리도 들리고, 엄마 또래의 선배님들은 교장·교감·장학사가 되었더라. 서로 명함을 교환했고, 얇고 네모난 명함만큼의 영향력이 건너왔고 건너갔어. 자연스러웠지.



  안내석에서 단상을 바라보니, 아, 유난히 평가가 매섭고 분석이 까다로웠던 교수님도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 계시네. 저 교수님은 수업 시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셨지. 또 과제물 발표 후 교수님의 평가를 듣고 나면 동기들 앞에서 무참히 깨진 자존심은 둘째 치고,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초라해 보여 이 실력으로 계속 학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을 정도야. 엄마에게도 "자네 영어 실력이 부족해 분석이 충분하지 못한 걸 왜 우리가 이해해야 하나?" 하고 나무라실 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라. 개나 소나 다 석·박사라는 요즘, 그만큼 평가절하 되긴 했지만 그래도 '면학(勉學)'이란 쉽지 않은 것!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공감대가 있어서인지 서로를 바라보는 너그러운 눈과 제강·연주·압연을 견딘 단단한 쇠로서 사회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넘쳐. 느루야, 이곳은 고아(高雅)하구나.

 

  

  당근 오렌지 수프도 먹고, 스테이크도 자르고, 와인도 한 잔 곁들이는 틈틈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호감 어린 형용사들이 공간을 빼곡히 채웠어. 드디어 충만한 저녁이 왔고,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엄마를 포함해 몇 명이 뒷정리를 마치고 남보다 조금 늦게 엘리베이터를 내렸어. 엥? 


  "오랜만이니 술 한 잔 해요. 몇 분이 근처 음식점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호텔 로비에서 엄말 기다리고 있는 선배가 있었어. 나이는 엄마보다 오 년 정도 어렸지만 장학사이면서 박사과정을 마친 선배야. 나와는 취향이 비슷했고 뜻이 잘 통했어. 한마디로 죽이 맞았지. 또 영어 때문에 고생하고 있던 엄말 흔쾌히 도와준 고마운 선배였어. 우린 호텔 옆 야외 테이블이 놓인 음식점에 들어갔어. 코스웍 시기, 가까이 지내던 네 명의 벗들이 오붓하게 기다리고 있더라. 역쉬 교수님이 안 계시니 바로 천국이 임하는군. 스승의 날 행사 끝나자마자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에드워드 호퍼 <푸른 저녁, 1914>


  느루야, 왠지 이 분위기는 엄마가 좋아하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푸른 저녁, 1914>을 떠올리게 하네. 나른하고 느슨하고 데카당스 하지. 화려한 샹들리에 대신 둥근 전등이 그윽이 불을 밝히는 저녁, 카페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군인, 베레모를 쓴 예술가, 분칠을 한 광대 사이를 거닐며 외로운 밤을 함께 나눌 손님을 찾고 있는 두꺼운 화장의 저 여인은 분명 매춘부일 거야. 압생트를 마시며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드는 20세기 초의 이 작품을 미국 뉴욕 나이악 출신이었던 에드워드 호퍼는 <Soir Bleu>라고 명명했어. '푸른 저녁'으로 직역하지. 하지만 비평가들은 에드워드 호퍼가 좋아했던 시인인 폴 베를렌이나 아르튀르 랭보에게 시상(詩想)을 일으켰던 '황혼의 시간'을 의미한다고 해.

 

                    감각


  여름의 파아란 저녁때면 나는 오솔길을 가리라

  보리에 찔리며 잔풀을 짓밟으며

  몽상가 나는 그 시원함을 발에서 느끼리.

  바람에 내 맨머리를 멱 감기리


  나는 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리라

  그러나 무한한 사랑이 내 영혼 속에 솟아오르리라.

  그리고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머얼리, 보헤미안처럼.

  자연 속을, -마치 여자와 함께 가듯 행복히


          - 아르튀르 랭보 <감각> -



  '황혼의 시간'. 아쉽게도 황혼이 지나 어둠에 물든 시간이었지만 우린 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였단다. 명함을 건네던 손으로 악수를 했고, 명랑한 퀴즈를 던졌던 입술로 마음의 근황을 물었지. 그때 아까 날 기다렸던 장학사 선배가 나직이 말했어.  


  "나, 얼마 전 이혼했어요. "


  대화를 위해 구부렸던 어깨도, 술잔을 들었던 팔도, 꼬았던 다리도 순간 움직일 수 없었어. 느루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


  어색한 분위기엔 마침표가 필요하지. 다들 말없이 술잔을 들었어. 살다 보면 허방을 딛기도 하고 예기치 못했던 복병을 만나기도 하니까. 그때 일행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선배가 말했어. 


  "난, 교감 승진 떨어졌어. 근평도 부족하고 연구실적도 안 돼서. 좀 한심하네. 다른 내 동기들은 어렵잖게 되던데."


  음... 대화란, 이해란 무엇일까? 그건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말뿐만이 아니지. 시선, 몸짓, 주위의 배경, 공간에 흐르는 음악, 심지어 마시는 음료까지도 대화하는 것이지. 문장이 없어도 무슨 의미인지 전달하니까. 



에드워드 호퍼 <중국음식점, 1929>


  이 <중국음식점, 1929>처럼 말이야.  느루야, 엄마가 취기가 오르나 보다. 너랑 천천히 읽어보자. 네 명의 인물이 짝을 지어 앉아 있어. 커다란 유리창 밖 간판에 'SUEY(잡채)'란 글자가 반쯤 가려져 있구나. 1920~30년대에 잡채를 파는 곳이란 중국 음식점이 몰려있는 홍등가일 테지. 불그죽죽 색이 바랜 간판은 창 아래에 앉은 여인의 빨간 입술을 더 선명히 부각해. 촌스럽고 약간은 노골적인 유혹이지. 하지만 여인의 짙은 화장은 그녀를 몹시 슬퍼 보이게 해. 시선을 좀 더 뒤로 밀면 여인의 뒤쪽 탁자에 앉은 남자가 보여. 여인과 마주 앉았음에도 그의 그늘은 깊구나. 호퍼는 매정하게도 남자 앞에 앉은 여인의 얼굴을 테세우스의 방패에 갇힌 메두사의 얼굴처럼 부조로 잘라 놓았어. 



  느루야, 이 작품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는 마음속에 깊은 우물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돌을 던지면 한참을 지나 '덩' 소리가 날만큼 깊은 우물. 자신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우물에서 그가 두레박에 길어 올린 건 세상의 단어들이 아니야. 마치 빈 소라껍데기 속에 소라가 살았던 원시(原始)의 바다가 들어있는 것처럼, 일상의 무심한 구조물 속에 우리가 읽을 수 있도록 삶의 알맹이를 담아 놓았단다. 



  그는 캔버스 어디에도 '고독'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인물들은 서로 무관심하고 시선은 비껴있어. 그는 자신의 언어로 소라껍데기가 소라를 그리워하듯 우린 서로 그리워할 뿐 해변을 뒹굴며 각자 홀로 있다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결코 홀로 있을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서글퍼하면서, 폭풍에 찢긴 돛을 달고 겨우 포구로 돌아온 배에게 홍등의 불빛을 띄워주는 것일까? 하지만 결국 그는 슬픔과 고독이 타인에게 기댈 수 없도록 창문을 모두 닫아 버렸네.



  닫힌 창문 앞, 중국음식점의 여인들처럼 서로 말은 없었지만 우린 단박에 이해했지. '장학사'라는 앞면만 보았다는 걸. '안정된 직장인'이라는 표면만 보았다는 걸. 누구에게나 며칠 밤 잠 못 드는 만큼의 결핍이 존재한다는 걸. 그 결핍은 전체를 잠식하는 것이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걸.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 1960>



  우린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서로 어깨를 안아주고 등을 쓸어 주었어. 분위기 탓이었을까? 샹들리에가 아닌 전등 탓이었을까? 이번엔 이제 막 취직을 한 네 또래의 젊은 동기가 말했어. 


  "전 원하던 기업에 연거푸 떨어지니 더 버틸 수 없어 학습센터 1년 계약직으로 취직한 거예요. 그나마 청년통장 꾸준히 부으려고요. 제 앞가림도 못하니 무슨 남친이 있겠어요. 선배님들, 원래 인생이 이렇게 힘든 거예요?" 



  유약을 바른 반짝거리는 도자기 안에 아직도 충분히 구워지지 못해 깨지지 쉬운 마음이 들어 있었구나. 그녀의 마지막 "요?" 소리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심하게 떨렸어. 왜 우리의 시간은 홀로 높이뛰기 장대에 매달린 순간이거나, 평균대 위에서 점프하는 순간뿐인지. 왜 남들처럼 넓은 도로를 300km로 질주할 수는 없는 것인지. 



  엄만 태생이 나긋나긋한 사람은 아니었나 봐.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네 기준을 가지라는 어설픈 훈수는 즉시 음식점 기둥에 매달아 목을 날렸어. 평소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엄마 자신의 '비루함'에 대해 '교수형'이라는 즉결처분을 내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리곤 덩달아 술잔에 담긴 눈물을 단숨에 마셔버렸단다. 



  나이 들고 있는 여인과 좀 더 나이 든 여인들은 '처음처럼'을 한 잔 한 잔, '처음처럼' 마셨어. 점호하듯 술잔이 부딪쳤어. 술을 마시니 그간 묵혀서 고린내 풀풀 나는 얘기들이 술술 나왔지. 그건 제 입으로 말하기엔 낯부끄럽지만 위장에서 소화시키지 못한 모래알 같은 것이었어. 자신에게는 단 돈 3만 원짜리 메이드 인 차이나 운동화도 선뜻 못 사 신으면서 한 달에도 몇 번씩 톡으로 날아오는 부조는 10만 원씩하고 있다는 푸념, 친정아버님 치매를 어쩌지 못해 이제는 요양병원에 모셔야겠다는 자조, 부장교사만 10년을 하고 있다는 낙담, 서른이 가깝도록 부모님을 파먹고 사는 것 같다는 자책, 강의를 위해 아직도 이곳저곳 이력서를 내는 초라함, 이 무력한 '나날'을 담기에 술잔이 작았구나. 





  알코올을 들이부은 우리의 상처가 소독이 될지 덧이 날지는 모르겠다. 밤이 깊자 저마다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거든. 냇가에 놀다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갑자기 배가 고프고 어둠이 느껴지잖아. 하나 둘 일어났어. 흔들리고 휘청거리는 세상을 짊어진 두 다리로 지하철을 향해 걸었지. 



  느루야, 내일 아침이면 <이층에 내리는 햇빛, 1960> 속 두 여인처럼 숙취 없이 고르게 햇빛을 받을 수 있을까? 저 부신 햇빛에 젊음과 늙음, 자연과 문명, 애증과 욕망이 마주하는 남루한 현실의 습기를 말릴 수 있을까? 


   

  햇빛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는 젊은 여인과 신문을 보고 있는 나이 든 여인은 모두 호퍼의 아내 조세핀 나비슨(Josephine Verstille Nivison, 1883~1968)이란다.  아내 조세핀은 화가를 꿈꾸는 학교 동급생이었어.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 늦깎이 결혼에 성공하지. 호퍼의 나이 마흔둘, 그녀가 마흔 일 때야. 그녀는 1m 52cm의 작은 키에 비눗방울처럼 작고 수다스럽고 반짝이는 요정이었어. 하지만 극단적으로 다른 둘의 성격은 사랑이 말이 아닌 스킨십으로 자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육탄전도 마다않고 싸웠다고 해. 



에드워드 호퍼 <햇빛 속의 여성, 1961>


  미국 나이액에서 태어난 호퍼는 네덜란드 상인의 피를 이어받은, 신앙심이 강한 가정에서 태어났어. 열두 살에 이미 키가 190센티미터가 넘었다는구나. 그러고 보니 느루도 6학년 때 이미 170이 되었지? 긴 다리를 부끄러워하고 머리가 크다고 고민하던 생각난다. 호퍼의 친구들은 마르고 휘청거리는 그를 메뚜기라고 놀렸어. 어린 시절 메뚜기떼처럼 그를 덮친 외로움이 외면보단 내면에 집중하는 내성적 성품을 길렀던 것 같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1900년, 그는 뉴욕상업미술학교에 진학해. 당대 미국에서 인상주의 풍경화로 유명했던 윌리엄 메리 체이스에게서 유화를, 미국 미술의 선구자라는 로버트 헨리에게서 색채와 구도, 다양한 관점을 배우게 되지. 그는 화가로 성공하고 싶었고 삽화 작업을 너무나 싫어했지만 경제적 필요에 의해 1924년까지 주로 광고 예술과 삽화 에칭작업을 했어. 



  드러나지 못했던 그의 예술 세계는 1924년 조세핀과의 결혼 이후 크게 확대돼. 그녀는 작품의 아이디어 창출을 위해 호퍼와 함께 여행을 가거나 전시를 열거나 다른 영역의 예술작품 감상을 권유하며 그를 화가로서 성숙시키지. 그리고 그의 유일한 모델이 되어줘.  



  <햇빛 속의 여성, 1961>을 봐. 조세핀은 햇빛 속을 당당하면서도 유연하게 서 있어. 햇빛은 그녀의 구석구석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애무해. 호퍼는 빛을 그리고 싶어 했어. 그는 "어쩌면 나에겐 인간적 면모가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햇빛을 그리더라도 집의 벽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했어. 그래서인지 <이층에 내리는 햇빛>의 빛이 백색의 마르고 날카로운 형광등이라면 <햇빛 속의 여인>의 빛은 오렌지색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백열등이야. 북극 이누이트족은 눈(雪)을 나타내는 단어가 열 개도 넘는다고 하지. 느루야, 호퍼의 캔버스에 빛나는 햇빛도 무지개색만큼 다양하단다.



  호퍼의 냉정하고 따스하고 거칠고 부드러운 햇빛에 갇힌 인어였던 그녀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지 못해. 빛의 그물이 그녀의 다리비늘을 상하게 했거든. 다시는 붓을 잡지 못하지. 그녀는 평생 호퍼의 예술과 함께 했고, 호퍼가 죽은 뒤 열 달만에 그를 뒤따라가.  



에드워드 호퍼 <밤의 창문, 1928>



  호퍼의 작품은 때로 에로틱한 관능으로 가득 차 있어. 하지만 그건 감각의 대상으로서의 말랑말랑한 성(性)이 아닌 마르고 탈색시켜 포르말린에 절인 건조한 욕망이야. <밤의 창문, 1928>처럼 그는 분홍색 슬리브를 훔쳐보고 관찰하지만 결코 만지지는 않아. 그의 성적 감각은 관념으로만 존재해. 눈으로만 쓰다듬고 손으로는 만지지 못하는 거세된 욕망이지. 



  그의 관음성은 아마도... 아마도... 알타 힐스데일 때문이 아니었을까? 호퍼의 다락방에는 오랜 시간 그녀가 숨어 있었어. 자물쇠보다 단단한 먼지를 뒤집어쓰고 100여 년이란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지. 



  느루야, 호퍼가 죽고 조(조세핀)가 죽고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힐스데일이 호퍼에게 보낸 편지가 그의 다락방에서 발견된단다. 1904년부터 1914년까지 10여 년 동안의 편지였고 그 안에는 변명과 비난을 늘어놓으며 마지못해 답장하는 듯한 표현과 가벼운 무시, 유머, 조롱을 포함한 심술궂은 낭만이 들어있었다고 해. 이에 관해 연구한 칼리어리(Colleary)는 "그는 그녀와의 좋은 관계를 노력하고 있으며 계속 좌절하고 있습니다."라고 기록했어. 1914년 그녀의 결혼을 알리는 마지막 편지로 이 얄궂은 관계는 끝나.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어 얼마나 미안한지 말로 다 할 수 없네요."



  미술사학자들은 이 여인이 호퍼의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해.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면 할수록 그는 캔버스 속에 숨어 건너편 창문에 보이는 대상 하나하나를 제거하기 시작했어. 변명과 비난과 무시를 담은 편지를 다락방에 가두듯, 서사(敍事)와 물질과 감정과 시대의 부스러기들 대부분을 가혹하게 삭제했어. 캔버스에 주제를 드러내는 조형적 구조물, 즉  상처받지 않으나 외로운 시간, 품위는 있으나 고독한 공간만이 남았지. 바로 현대인의 벌거벗은 모습말이야.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지하철이 끊겼네. 모두의 생과 죽음의 충동을 싣고 막차가 떠났어. 술 취한 엄만 네 하숙집으로 갈 수 없구나. 

  느루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이곳으로 엄마를 데리러 오겠니?



  엄만 저 불빛이 보이는 초록 어둠 안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을 바라보고 있을게. 너 아니? 바(bar)가 좋은 건 마주 보지 않고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다는 거야. 서로의 얼굴에 드리운 우수나, 손등에 두드러진 푸른 정맥이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거짓 핑계를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가능한 시각적 이해심이 넓은 망명지지. 



  망명객들은 이곳에서 붉은 립스틱을 바르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조난신호처럼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지.


  "이곳에 내가 있다."는 걸 알리는 가늘고 하얀 연기.

  대상의 표면에 미끄러지는 유약한 언어들을 머금은 붉은 입술. 


  느루야, 설혹 우리가 그들의 조난 신호를 보았다 하더라도 우린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거야. 호퍼는 어디에도 출입구를 만들지 않았거든. 우린 그저 밖에서 노랗고 시리게 쏘아대는 불빛이 어둠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것만 볼 수 있단다. 그 초록의 거리에서 심장에 자물쇠를 채우고 자신이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현대인의 밤을 느낄 뿐이야. 호퍼는 화면 왼쪽에 아무리 달려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소실점으로 두었어. 그 끝은 닫힌 유리창과 시커먼 어둠이지.  너와 우리가 있는!




PS : 에드워드 호퍼 전시를 다녀오긴 했는데 이 글은 전시 후기처럼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시된 대표 작품 중 다루지 못한 것도 있어요. 게다가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바다로 면한 방, 1951>도 소개하지 못했어요. 아쉬워요. 어쨌든 제 글은 참고만 하시고 가슴으로 느끼고 오시길요. 전시관에 그에 관한 영상을 상영하는데 귀한 자료이니 꼭 보시고 오세요. 그리고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49편-책 읽는 시간> 에서 호퍼의 작품 하나를 다룬 적 있어 그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이 곳에 붙여 놓을게요.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49편  <책 읽는 시간> 중에서



  요즘 지하철 타면 책 읽는 사람은 문화재감이야. 거의 다들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거든. 게다가 이어폰까지 끼고 있으니 물리적 공간마저도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아. 각자 자신의 세계에 있는 거겠지. 군집하되 소통하지 않는 현대의 단면을 보는 기분이야. 어쩌다 핸드폰 게임에 몰두해 있는 승객을 보면 인간이 발전시킨 최고 기술이 여가시간, 심심풀이로 쓰인다는 게 안타깝더구나. 엄마가 나이 든 세대여서 인터넷 문화를 낯설어하기 때문일까?


  하긴 모임에서도 이런 대답을 들은 적 있구나. 리더가 "책 읽는 마을과 술 익는 마을 중 어느 곳으로 이사 가고 싶으세요?" 했어. 책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엄마는 잠시 망설였지. 그런데 30대 젊은 친구가 그러는 거야. 둘 다 싫다고. '책 읽는'것도 좋고, '술 익는'것도 좋은데 '마을'이 싫다고 하더라. 이게 무슨 뜻인가 의아했는데, 그 친구는 '책 읽는 인터넷', '술 익는 인터넷'이 좋대. 익명의 온라인에서는 자유로운데 오프라인에서는 눈치를 봐야 한대. 느루, 너도 그러니?


  오프라인에서 우정을 키우고 지식을 쌓았던 엄만 아직도 학교 도서관 유리창을 물들이던 노을과, 그 창 아래에서 누렇게 바랜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 나던 묵고 오래된 것들의 냄새를 기억해. 사춘기가 활활 타오르다 재로 사그라진 눅눅한 냄새였지. 그때의 엄만 비밀스러운 검댕이가 손 끝에 묻어 어떤 문을 열더라도 잡은 문고리엔 사춘기의 위험하고 외로운 상처가 묻어났어. 마치 이 그림처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에드워드 호퍼 <칸막이 객실 C 293 차량, 1938>



  도시에 X선을 투과시켜 고독의 뼈를 들여다본 에드워드 호퍼의 <칸막이 객실 C 293 차량, 1938> 이야. 살짝 열린 창문으로 석양은 토마토처럼 뭉그러지네. 다리 너머 숲은 기차가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어. 숲은 본디 내성적이라 예고 없는 손님을 반기지 않거든.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며 기차가 다가왔을 때, 숲은 "쉿, 조용해. 위험할지도 몰라."하고 제 안에 깃든 짐승들을 침착하게 다독였을 거야.


  객실의 초록빛은 숲을 닮았네. 어둡고 비밀스럽지. 여자는 이 위험한 공간에 혼자야. 그녀의 짙은 옷, 모자에 가린 눈, 꼬아 앉은 다리, 그리고 읽고 있는 책은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 지 보여줘. 고립되어 있지만 흰 깃발을 내걸고 고독에 투항하기엔 자존심이 세지. 그녀는 웅크리며 누구의 관심에도 닿지 않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누군가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고 "이 책, 잠깐 봐도 될까요?"하고 말하길 기다릴 거야.


  느루야, 누구든 젊음을 지날 땐, 숲처럼 내성적이고 기차처럼 위험하고, 이 여인처럼 외롭단다. 우리의 젊은 날엔 오로지 펼친 책만이 각자의 습지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가려 주었구나. 너희들도 지나온 우리처럼 외롭겠지? 너희들은 인터넷이 연결하는 세상,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나 카톡으로 '내면과 외면의 거리'에서 생기는 습기를 가리고 있는 거니? (이후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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