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2-5 폴 세잔(2)
꽃비가 쏟아져 머리가 화관을 썼네. 허름한 운동화도 알록달록 꽃신이 되었어. 사방이 꽃천지구나! 눈에 꽃물 들겠다. 봄이 오면 날개 달린 천사들이 저 먼 하늘에서 이 세상으로 소풍 오겠지? 포로롱 내려와선 귀엽고 작은 날개로 하얗고 노랗고 빨간 꽃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겠지? 아기천사들이 친구들과 까불락 거리며 뛰어놀다 잠든 바람을 깨워 봄엔 이리도 잎이 흩날리는 건지 몰라. 계절이 다 가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목마를까, 하나님이 봄비를 내려주시는지 몰라. 그저 작은 도시의 변두리 하천인데 꽃이 피니 세상 어느 곳보다 아름답구나. 하나님이 사진 찍는 천사는 살펴주셔도 나이 든 엄마는 잊으셨을 것 같아 텀블러에 커피와 약간의 비스킷을 주머니에 넣어 왔단다. 벤치에 앉았어.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데 엄마의 발치에 또르르 사과가 굴러왔네. 빨갛고 동그란 사과. 이게 누구 것일까?
마침 지나가는 너 또래의 아가씨가 있구나. "저기, 이 빨갛고 동그란 사과, 아가씨 것인가요?" 아가씨는 사과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아니에요. 이건 백설공주의 사과 아닐까요?" 하며 총총 사라졌어. 아니야. 백설공주의 사과는 한 입 베어 문 자국이 있어야지. 독사과를 먹고 잠들었으니까. 이 사과는 동그란걸.
느루야, 엄마는 사건을 해결하려는 탐정처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단다. 손바닥 위에 놓인 빨갛고 동그란 사과 한 알이 자꾸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거든. 강아지처럼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지. 주인을 찾아보기로 했어. 이 사과도 주인이 있을 거야. 책장 위에 있는 도록을 꺼냈어.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사과를 들고 있는 여인이 있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담과 이브>란다. 이브의 왼쪽 어깨 위로 뱀이 사과를 건네고 있어. 이브의 얼굴은 '신이 금지한 이 열매는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가득해. 죄책감이나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지. 오히려 10등신에 가까운 신체의 비율과 부드러운 곡선,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에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주체적 결단이 보여. 아담도 사과나무 가지를 들고 있어. 아마 이브로부터 전달받은 거겠지. 아담은 이브와는 다르구나. 약간 망설이는 듯한 얼굴이야. '이거 받아도 돼? 에이, 나 무서운데'하는 표정이지. 하지만 이브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인걸. 사랑은 죽음도 뛰어넘으려 하지. 그는 이브의 사과를 거절하지 못할 거야.
성경에서 말한 '선악과'가 언제부터 '사과'로 표현되었는지 아니? 대략 16세기 정도부터 란다. 학자들의 설명으로는 라틴어로 사과나무가 'malus'이고 사과는 'malum'인데 이 malus가 '나쁜, 불행한'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malum도 '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대. 그래서 자연스럽게 선악과를 사과로 표현하게 되었다고 해. 그래서인지 이미 아담과 이브의 발 밑엔 거친 돌이 보이는구나. 맨 발로 돌을 밟으며 노동을 하고, 생명 탄생의 무게만큼 출산의 고통을 느낄 인간의 숙명을 암시하지. 하지만 후대에 선악과를 사과로 합의한 것인 만큼 이 사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열매일 수 있어.
그럼 혹시 뉴턴의 것이 아닐까? 그의 만유인력은 정원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왜 사과는 반드시 아래로 떨어질까?'를 숙고하다 나온 법칙이니까. 옆으로도 위로도 가지 않고 모든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지구에 물질을 당기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유추한 것만으로도 뉴턴은 어마어마한 과학자였던 것 같아. 우린 늘 보면서도 아무 의심도 품지 않았으니 말이야. 하지만 뉴턴의 사과도 아니야. 그 사과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조각이 났거나 최소한 물러졌을 거야. 그런데 엄마 발 밑으로 굴러온 사과는 단단하고 동그랗다고. 엄만 추리력이 뛰어나지. 그럼 다른 그림을 찾아보자. 혹시 애플의 사과일까?
1976년 초창기의 애플 로고에는 나무 아래에서 생각에 잠겨있는 뉴턴이 있구나. 하지만 곧 바뀌게 돼. 일 년 뒤인 1977년 한 입 베어 문 무지개 사과가 등장하지. 지금 애플 로고의 원형이 된 사과야. 이 사과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한 입 베어 문'이라는 영어 'bite'라는 단어가 정보를 처리할 때의 기본단위인 바이트(byte)와 소리가 비슷해서라는 이유야. 또 하나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앨런 튜링을 기리는 의도라고도 하지. 앨런 튜링은 천재 수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암호 '애니그마'를 해독했어. 현대 컴퓨터의 시조가 된 기계, '크리스토퍼'를 만들기도 했지. 그런데 동성애자였거든.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자는 화학적 거세를 했단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했던 인물이야. 그는 사과 안에 청산가리를 넣고 한 입 베어 먹었지. 자살했단다.
느루야, 어쨌든 애플의 사과는 빨갛고 동그랗지 않아. 그럼 누굴까? 도판을 더 넘겼더니 이런 그림이 있네. 얼마 전, 네게 이 화가의 '사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겠다고 했는데 기억하니?
고집쟁이 화가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바구니가 있는 정물>이야. 야심 찬 감독이 시나리오를 정할 때 이미 주연 배우를 머릿속에 그리듯, 세잔에게 있어 자신의 페르소나는 사과였어. 엄마가 세잔과 에밀의 40년 우정에 대해 말했었지. 에밀이 전학 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을 때 세잔이 도와주었다고. 에밀은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그렇지만 가난했기에 마땅한 선물이 없었지. 그는 세잔에게 사과를 건네준단다. 남 프로방스의 작열하는 태양과 맑은 공기를 한껏 머금은 빨갛고 동그란 사과. 세잔은 어릴 때 에밀이 선물해 준 사과를 자연의 은유로 설정해. 세잔의 사과는 세상을 절개한 단면도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설계도지. 그는 이렇게 말했구나.
"나는 한 알의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는 기존의 정물화와는 완연히 다른, 눈으로 본 적 없고, 혀로 맛본 적 없는 자신의 사과를 세상에 출시했어. 이 사과는 피카소를 일약 현대미술의 거장 반열에 올린 큐비즘(입체파)과 마티스가 시도한 야수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돼. 입체파라는 말도 쓰이지만 큐비즘이 더 적절하니 앞으론 큐비즘이라고 할게. 큐비즘(cubism)이란, 말 그대로 정육면체, 입방체와 같은 의미야. 사물이나 인체를 기하학적 도형으로 단순화하고 각 측면을 분석하지. 대상을 해체하고 분석하여 논리적, 다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야. 말로만 들어선 잘 모르겠지? 세잔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어떤 면이 큐비즘에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자.
왼쪽의 항아리를 확대해 본거야. 항아리는 분명 위에서 사선으로 내려본 시점이지. 둥글고 넓은 주둥이가 보이고 위와 앞면의 몸집이 둥그렇게 보여. 그럼 옆의 주전자를 볼까?
옆에 있는 하얀 주전자는 어떠니? 좀 더 낮은 곳에서 본 시점이지. 주전자 뚜껑과 항아리 주둥이의 타원형의 차이에서 같은 시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주전자 뒤에 있는 커다란 바구니는 약간 아래에서 위를 보는 각도에서 그려진 거지. 그런데 바구니 안에 담긴 과일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이야.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들도 제각각의 방향을 가지고 있어.
게다가 하얀 식탁보는 어색하게 구겨져 있어. 그런데 식탁보 양 옆의 테이블을 봐. 왼쪽과 오른쪽이 평행이 아니라 왼쪽은 좀 더 앞으로, 오른쪽은 뒤로 물러나 그려져 있을 거야. 실제 사물로서의 테이블은 이럴 수가 없는데 왜 이렇게 그렸을까?
세잔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쉽게 예를 들어볼게. 느루가 카페에서 샌드위치랑 커피를 시켰구나. 종업원이 아주 예쁜 머그잔에 담긴 커피와 둥근 접시에 담은 샌드위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어. 갑자기 친구에게 이 우아한 분위기를 전하고 싶겠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해. 이 테이블을 위에서 찍어야 할까? 옆에서 찍어야 할까? 아마 약간 위에서 45도 각도로 찍을 거야. 그래야 원기둥 형태의 머그잔과 둥근 접시와 삼각형의 샌드위치가 최대한 보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위에서 45도로만 찍으면 한 면만 보이잖아. 그러니 어떻게 하지? 맞아, 뜨겁고 진한 커피를 보이기 위해 위에서 한 장, 토마토와 치즈와 샐러드로 층을 이룬 샌드위치를 보이기 위해 옆면도 한 장, 이렇게 찍어서 친구에게 전송을 누르겠지.
만약 느루가 테이블 위에 있는 머그잔은 45도 사선에서, 샌드위치는 평행에서, 접시는 위에서 찍어 이 사물들을 한 장에 넣어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사물 하나하나가 온전히 드러나지만 몹시 어수선해 보일 거야. 그리고 테이블은 들쭉날쭉해지겠지. 이것이 세잔이 캔버스에 실험한 방법이란다. 세잔은 들쭉날쭉한 테이블을 감추려고 식탁보를 사용했어. 가운데 있는 식탁보는 테이블의 위치가 다른 걸 감추는 장치지. 세잔은 각 사물이 지닌 형태를 저마다 온전히 드러내려고 원근과 형태를 왜곡시켰어. 화면을 잘게 나눠서 우리가 대상을 지각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지. 그건 상식에 어긋나는 화면이었어. 사람들 머릿속 테이블은 평행한 사각형으로 있어야 했고, 한 화면에는 하나의 고정된 시점만 존재했거든. 르네상스 이후 500여 년 동안 변하지 않은 법칙이었단다. 세잔의 붓은 500년 미술사를 흔드는 지진이었어.
세잔이 인체를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단순화했다고도 말했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알려줄게. 세잔과 피카소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기하학적인 면의 분할에서 발전한 큐비즘의 특징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거야. 아래 그림을 살펴보자. 오랜 무명의 세잔에게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준 다정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이야. 두 거장이 같은 사람을 그렸지. 게다가 이 초상화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단다. 붓질 한 번 해 놓고 하루 종일 다음 붓질을 고민했던 세잔은 볼라르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약간 움직이자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이런, 제발 사과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요. 사과가 움직이는 것 봤어요?"
(왼) 폴 세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1899> / (오) 피카소 <볼라르의 초상, 1910>
그간의 초상화는 실제 인물과 똑같이 그리거나 인물의 분위기와 아우라를 표현하는데 집중했어. 그런데 세잔의 초상화는 인물의 구체적인 묘사도 없고 감정도 느낄 수 없어. 모델의 특징을 알 수 있는 부분을 모두 생략했거든. 세잔의 초상화는 세잔이 그린 사과와 같아. 하나의 사물처럼 딱딱하지. 세잔은 미술의 본질은 형태에 있고 그 형태는 구(球), 원뿔, 원기둥이라는 본질적 도형으로 단순화된다고 여겼지. 그럼 왜 단순화시키려 했을까?
세잔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찰나의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라고 여겼어. 사라지고 소멸하는 운명을 거부하고 싶었지. 지워지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은 무엇일까? 대상의 본질적인 면은 무엇일까 고민했어. 그는 모든 사물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공통의 특징을 파악하려 했단다. 열 명이 사과를 먹으면 열 개의 다른 맛을 느끼지만 사과가 동그랗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 공통되고 변하지 않는 특징이 구, 원뿔, 원기둥이었던 거야.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기는 것처럼 세기말의 상상력은 다른 형식을 요구했어.
이제 피카소가 그린 <볼라르의 초상>을 보자. 아니, 이게 뭐람? 인물을 그린 건 어렴풋 알 수 있지만 나머지 형태는 깨진 유리로 사물을 본 듯 모두 조각 나 있네. 형태가 분명하지 않지? 세잔이 그러했듯이 피카소는 면과 면을 절단해 한 화면에 공평하게 배치했거든. 흔히 전시회를 가보고 무얼 그렸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의 시작이지. 관람객을 한껏 초라하게 만드는 현대미술의 시작이기도 해. 피카소는 추상미술이라는 낯선 영역으로 발을 내디뎠어. 피카소가 한 발 한 발 내 디딜 때마다, 세잔이라는 육중하고 신선한 이름의 발자국이 앞에 있었단다.
르네상스 이후 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기법은 뛰어난 화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정복되었어. 사실의 재현에 있어서는 천국도 이 땅에 건설할 수 있을 만큼 정교했지. 더 이상 화가가 개척해야 할 미지의 영역은 없는 듯했어. 회화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그 너머'가 있다고 말한 게 세잔이야. 세잔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주었단다. 왜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하는지 이제 알겠지? 피카소는 세잔의 그림을 보고 난 후 이렇게 말했어.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세잔의 업적은 절절한 고독에서 비롯되었는지 몰라.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은 미래에서 가져온 것이었어. 동시대와는 불화했지. 20여 회에 걸쳐 살롱전에 그의 작품을 출품했지만 모두 떨어졌어. 그는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비평가들의 비난을 힘들어했어. 한동안 자신이 제대로 그리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았지. 그의 붓과 그의 삶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절뚝거렸어. 술이 과해졌고 신경은 예민해졌어. 사과를 비롯한 정물화를 집중적으로 그리던 1890년대에 세잔은 특히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 40년 벗인 에밀 졸라와 결별한 상태였거든. 마네가 세잔을 '흙손'이라고 비하할 때도 친구인 에밀은 침묵했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외면은 깊은 상처가 됐지. 또 당뇨병에 걸려 밤잠을 이루지 못했단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핥으며 하루하루 날카로워졌어. 심지어 아버지처럼 따르던 피사로와도 다투었으니까. 그는 점점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갔어.
그는 홀로 작은 돌집에서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사과를 그렸지. 돌집 이층, 북쪽 창에 희미한 빛이 들면 누구든 작업실 캔버스 위의 빨갛고 동그란 사과를 볼 수 있었을 거야.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사과는 퉁명스러운 그의 모델이 되어 주었지.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정갈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그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주었던 거야. 세잔의 사과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그가 본 기하학적이며 결단코 변하지 않을 구(球)와 원뿔과 원기둥의 세계를 증명하는 증거물이지. 또한 세잔이 홀로 세상과 마주할 때, 사과는 세잔에게 말을 건넨 유일한 친구였어.
그랬구나. 공원 벤치에서 만난 빨갛고 동그란 사과는 세잔의 사과였나 봐. 아마 책장에 세워둔 도록에서 톡 떨어져 내 운동화 뒤축을 따라 설레발레 뛰어 왔겠지. 그리곤 내가 꽃길에 취해 앉아있는 틈에 내게 말을 걸은 거야. 집에선 느루, 네 눈치도 봐야 하고 엄마도 빨래하랴, 청소하랴, 설거지하랴, 얘기 들을 여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빨갛고 동그란 사과는 엄마에게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것일까?
아, 엄마가 느루에게 말하지 않았구나! 부끄러워서 그랬어. 실은 지난겨울, 엄마가 문학상에 투고했어. 아무도 몰래, 한밤 중 일어나서 동화를 썼지. 어제의 한 줄 밑에 오늘 한 줄을 쓰며, 내일 한 줄을 위해 단어를 골랐지. 동화작가를 꿈꾸는 건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어. 발표일이 다가오자 한시도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어. 마땅한 일도 없으면서 아파트 1층을 오르내리며 시나브로 우편함을 기웃거렸지. 행여 내가 전화번호나 주소를 잘못 썼나 하고 응모했던 메일을 뒤져보기도 하고 말이야. 다 제대로, 얌전히 쓰여 있더구나. 떨어졌단다. 내색은 못 했지만 한동안 상심했구나. 능력은 없는데 꿈만 꾸고 있나 하는 자괴감에 몹시 초라했어. '이렇게 늦은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밤이 점점 길어졌단다.
그런데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되었구나. 세상은 찬란하게 빛났어. 영원은 매 순간 다시 태어나는 거라더니 세상이 새로웠구나. 지난겨울과는 다른 봄이 왔단다. 터널을 빠져나온 듯했지. 마치 링 위에 선 권투선수가 상대의 펀치에 그로기(groggy) 되기 직전, 종이 울렸다고 할까? 쉬는 시간처럼 벤치에 앉았어. 마우스피스를 빼고 손수건을 던질까, 아니면 주저앉은 코에 붕대를 감고 잽을 고를까. 찢어진 눈두덩이에는 피가 흐르고 무릎은 풀리고 있어. 게다가 내 주먹은 너무나 하찮고 보잘것없지. 이 사각의 링 위엔 뛰어난 신체와 현란한 기술을 가진 이가 무수히 많을 테니까. 하지만 벚꽃과 목련과 진달래와 개나리를 보며 왠지 힘이 솟았어. 아직 봄이 남아 있는걸.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재능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혹시 세잔 곁에서 그의 벗이 되었던 빨갛고 둥근 사과가 낙담한 엄마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